인생을 사는 지혜

한국에서는 수십 년 동안 행복한 인생에 대해서 강연을 하면서 행복전도사라는 별칭까지 얻은 분이 남편과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안타까운 일이 생겼습니다. 그분의 강연을 들은 적은 없어도 그분이 어떤 강연을 했을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강연의 주제는 행복이었고, 어떻게 하면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을지에 대한 방법론을 강연하였을 것입니다. 그런 분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 앞에 불치병의 고통이 얼마나 무서운지, 또한 진정한 행복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시편 90편은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라는 표제어가 붙어 있습니다. 프리드만이라는 구약학자는 본문을 출애굽기 32장과 연결시켰습니다. 출애굽기 32장은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십계명을 받는 동안 지상에서는 모세의 형 아론을 중심으로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그 앞에 절을 하고 흥청망청 즐겼던 사건입니다. 산에서 내려온 모세는 백성들을 위해서 애원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처럼 모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고, 그의 기도는 힘이 있었습니다.

시편 90편은 1-12절과 13-17절의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전반부는 소위 ‘세상살이’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하지 않는 것 같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곧바로 임하지 않았을 때 불평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고 번쩍거리는 금송아지가 근사해보였기에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그 앞에 절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부담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자신들 좋을 대로 먹고 마시면서 춤을 추며 즐겼습니다.

이에 대해서 오늘 본문에서는 인생살이에 대해서 자세히 가르쳐줍니다. 모든 육체는 결국 흙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주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주신 마지막 인생길입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도 아침에 돋는 풀처럼 금방 시들어 버립니다. 시편기자 당시에는 칠십을 살면 수를 다 누린다고 생각했습니다. 팔십을 살면 특별히 장수한 셈입니다. 그렇지만 한평생을 돌아보면 “수고와 슬픔”뿐입니다. 먹구름이 끼여 있던 인생길이 대부분입니다. 게다가 좋았던 시절은 눈 깜짝할 사이에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런데도 금방 지나갈 것, 언젠가는 사라질 것에서 인생의 행복을 찾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시편 90편이 후반부 (13-17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인생길을 걸어가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아침에 돋는 풀처럼 시들어버릴 세상 것들을 추구하기보다 아침마다 임하시는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구하면서 사는 것이 행복입니다. 세상에서 겪는 어려움을 하나님께서 보상해 주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찾는 이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견뎌내는 것입니다.

수고와 슬픔뿐인 세상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즐거움과 기쁨을 평생 동안 누리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영광이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후대에게도 임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우리 손의 행사를 견고케 하소서!”라는 시편 기자의 기도를 따라서 매일매일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고, 하나님께서 견고하게 만들어주시는 인생길을 사는 것이 행복입니다.

그때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은 말이 아니라 삶을 통해서 세상에 진정한 행복을 전할 수 있습니다. 다음 한 주간 믿음의 삶을 통해서 세상에 진정한 행복을 전하는 행복전도사가 되어 봅시다.-河-

고난 중의 부르짖음

늘은 토요일 큐티 말씀인 시편 88편을 설교본문으로 삼았습니다. 구약성경의 시편은 모두 150편의 시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이들은 다시 크게 5권으로 나뉘어 있는데 이것은 구약성경의 첫 번째 다섯 책인모세오경을 따라 구분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시편에는다윗의 시라는 표제어가 붙어 있고, 그 밖의 시편들은 아삽이나 고라와 같은 구약시대에 음악을 담당하던 시인들이 기록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시편 88편은 “전체 시편가운데 가장 슬픈 시(the saddest Psalm in the whole Psalter)”라고 불리곤 합니다. 시편 88편을 개인탄식시라고 불립니다. 개인이 겪는 신앙과 삶의 어려움을 하나님 앞에서 탄식하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에는 이와 같은 개인 탄식시가 꽤 많습니다. 대부분의 탄식시는 후반부에서 기도응답과 희망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런데 시편 88편은 끝까지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확증이 없습니다. 바이저라고 하는 구약학자는 시편 88편에는 한 줄기 위로도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고 주장할 정도입니다.

시편 88편을 기록한 시편기자는 현재 개인적으로 무척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3절에 의하면 “대저 나의 영혼에 곤란이 가득하며 나의 생명은 음부에 가까웠사오니”라고 고백합니다. 그의 모든 삶이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다가 죽음을 당한 사람들과 함께 무덤에 누워있는 듯한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았고, 하나님께서 그의 삶을 돌보지 않으신다는 생각이 들 만큼 힘든 상황입니다. 그러다보니 시편 기자는 자신이 하나님께 벌을 받았다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주의 진노가 자신을 눌러서 현재 힘든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시편 기자의 영혼과 육체에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죽음에 이를 정도로 힘이 빠졌고, 그의 영혼은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생각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의 곁에 있던 친구들도 모두 떠나갑니다. 세상에 시편 기자를 위로하고 격려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극도의 외로움입니다. 사람에게마저 버림받은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이처럼 칠흑과 같은 어둠속에서도 하나님을 잊지 않습니다. 1절에서는 하나님을 향해서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라고 하나님을 부릅니다. 몸도 마음도 그리고 친구들마저 떠난 지금, 시편 기자가 바라볼 수 있는 곳은 하늘뿐입니다. 하나님만이 자신을 구원해 주실 수 있음을 알기에 하나님을 향하여 “내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움

직이면 움직일수록 깊이 빠져드는 수렁에 빠진 그 순간에도 시편기자는 밤낮없이 주님께 부르짖습니다. 자신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확신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여호와여 오직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달하리이다.”

요즘은 형통의 신학(prosperity theology)이 유행입니다. 하나님 믿으면 만사가 형통한다는 현대판 기복주의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의 풍조 속에서 시편 88편은 진실된 신앙이 무엇인지, 신앙의 진수가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줍니다. 깊

은 신앙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주님을 잊지 않고, 주님을 향하여‘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도리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과 깊은 교제로 이끄는 축복으로 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서 끝까지 씨름하면서 주님께 부르짖는 것이 진실된 신앙입니다. 정금과 같은 아름다운 신앙이지요! -河-

새로운 삶의 법칙

주보에 있는 큐티 본문이 골로새서에서 디도서로 넘어갔습니다. 골로새서는 골로새에 있는 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입니다. 바울이 골로새를 방문한 적이 없어서 만나본적이 없는 성도들이지만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이 되었기에 기쁨과 간절함으로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이번 달 말까지 큐티하게 될 디도서는 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했던 신실한 동역자 디도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그레데 섬에서 사역하던 디도가 교회를 섬길 일꾼들을 잘 세우고, 바른 신앙으로 성도들을 이끌 것을 조목조목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디도서를 목회서신이라고 부릅니다. 교회의 임원들께서는 디도서를 깊이 묵상하시길 부탁드립니다.

오늘 설교 본문은 지난 화요일 큐티본문입니다. 사도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이 옛생활을 정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누릴 것을 부탁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다시 태어나는 “거듭남”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과거의 삶을 모두 청산하고, 예수님과 더불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기에 다시 태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전에는 땅엣 것을 추구하면서 세상과 죄의 종이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기에 하늘을 바라보는 새로운 삶이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앞에 보면 예수님을 믿기 전의 상태를 잘 설명해 놓았습니다. 간단히 정리하면,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육체와 욕심을 따라 살았습니다. 육체를 따라 사는 것은 자신의 쾌락을 쫒는 것입니다. 허무한 삶입니다. 욕심을 따라 사는 삶은 자신만을 생각하는 극도의 이기주의입니다. 3장 5절에서“탐심은 우상숭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육체와 욕심으로 살면 분쟁과 훼방에 휘말리게 마련입니다. 서로를 비교합니다. 시기하고 경쟁합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높아져야 하고, 조금이라도 더 가져야합니다. 비교하는 가운데 열등의식과 피해의식에 사로잡힐 수도 있습니다. 삶이 불안하고 늘 무엇엔가 쫓기게 마련입니다.

이에 비해서 예수님 안에서의 새로운 삶은 전혀 다른 세상입니다. 옛사람과 그 행위를 모두 벗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옷을 입었습니다. 그 옷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입게 된 구원의 옷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새롭게 입은 옷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긍휼”“자비”“겸손”“온유”“오래참음”입니다. 이 다섯 가지 옷을 입고 세상을 살면 사는 것이 황홀합니다. 겸손하게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고, 온유한 마음으로 사랑을 베풀고,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끝까지 오래 참는 삶이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은 새로운 삶입니다.

예수님의 옷을 입은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용납하고 용서합니다. 사랑이 넘칩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마음과 삶을 주관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언제나 풍성하게 거합니다. 말씀이 주는 지혜로 서로를 대하고 세상을 살아가니 그 길에 찬양이 넘칩니다. 무엇을 하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하고 그 안에 감사가 넘칩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의 삶입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요즘에는 교회도 많고 기독교인들도 많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을 만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지만 여전히 옛 생활에 젖어 있고, 육체와 탐욕의 옷을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배운 말씀대로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옷을 입고 감사와 찬양이 넘치는 그리스도의 삶을 누리시길 바랍니다.-河-

사도 바울의 기도

지난 설교에서 말씀드린 대로, 앞으로 두 달여 매주 주보에 나오는 큐티 본문(첫 아침을 주님과 함께)가운데 하나를 갖고 주일설교를 하게 될 것입니다. 주중에 큐티를 꼬박꼬박하시면, 주일 설교를 통해서 다시 한 번 은혜를 받고 말씀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기회를 누리시게 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주보에 실린 본문을 갖고 각자 마음에 정하신대로 경건의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말씀에 깊이 뿌리를 내린 신앙은 심지가 견고해서 흔들리지 않고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평강에서 평강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시간이 참 빠르게 흘러갑니다. 어느덧 또 다시 팔월한가위가 되었습니다. 저는 미국에 와서 보름달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공부할 때 밤늦게 도서관에서 집에 올 때면 쟁반같이 둥근 보름달을 보면서 고향생각, 부모님생각, 그리고 달의 모양이 변해갈 때마다 시간이 흘러가고 있음을 감지했습니다. 보름달이 왜 그리 빨리 뜨는지 그때도 달을 보면서 시간의 흐름을 절감했습니다. 혹자는 인생을 강물에 비유합니다. 흘러가는 강물을 막을 수 없듯이 흘러가는 인생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흘러가는 강물위에 자신의 모습이나 업적을 각인시켜 놓고 싶어 합니다. 물론 그것이 얼마나 헛된 일인지 나중에는 깨닫게 되지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강물을 주관하시는 창조주 하나님께 몸을 맡기고, 그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전도서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분복(分福)을 누려야 합니다. 그것이 행복이요 축복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기도 가운데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할 때 깨닫게 되는 하늘의 진리이기에 큐티가 그토록 중요합니다. 올 하반기 우리 모두 말씀과 기도에 진력합시다.

오늘 본문은 골로새 교회를 향한 바울의 기도입니다. 골로새 교회는 바울의 제자인 에바브라가 세운 것으로 추정합니다(골1:7). 바울은 골로새 교회를 방문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골로새 교회와 그곳의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교회는 기도로 세워집니다. 비록 우리 교회를 와보지 않았어도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는 분들이 많이 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또한 우리들 역시 주님의 교회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골로새 교회를 향한 바울의 기도는 요즘 우리 세대의 기도와 차이가 있습니다. 바울의 기도 속에서 세상적이고 물질적인 간구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대신에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의 신앙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믿는 신앙이 모든 삶의 근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들은 우리들의 인생길과 하나님의 사역에 필요한 경우 부가적으로 채워지게 마련입니다. 여기서 기도의 우선순위가“신앙”에 있음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골로새 교회를 향한 바울의 기도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것에 온 힘을 쏟게 하시고, 2) 범사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게 하시고, 3) 빛 가운데서 거룩한 성도로 부르심을 받고 기업을 얻은 것을 감사하게 하옵소서.

사도바울의 기도는 우리들이 따라야 할 중보기도의 모범입니다. 우리들 역시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바울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집중된 기도를 통해서 신앙과 삶이 하나님께 드려지고, 그 안에서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성도의 삶을 누릴 수 있음을 꼭 기억합시다.-河-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 (3)

오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의 표적에 대한 마지막 시간이자, 요한복음의 일곱 가지 표적을 살펴본 연속 설교의 마지막입니다. 요한복음의 일곱 가지 표적들은 단순히 기적(miracle)에 그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교훈이 들어있는 표적들(signs)이라고 했습니다.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된 표적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새로운 시대를 여실 것을 잔치자리에서 보여주셨습니다. 멀리 있는 신하의 아들을 말씀으로 고치신 기적은 예수님은 거리나 시간에 제한을 받지 않으시는 전능하신 분임을 보여주었습니다.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시고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속에 깃든 네 개의 손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우리의 삶이 비록 작고 보잘 것 없는 오병이어에 불과해도 예수님의 손에 올려질 때 많은 사람의 필요를 채울 수 있는 시작점이 된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물위를 걸어오시고, 폭풍을 잠잠케하신 예수님은 자연만물을 다스리는 통치자가 되십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소경이었던 사람이 눈을 떴습니다. 영적인 눈이 떠야 예수님의 말씀과 표적 속에 깃든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제 오늘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마지막 일곱 번째 표적은 예수님께서 삶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분임을 가르쳐 줍니다. 또한 나사로가 살아난 것을 통해서 장차 죽음에서 부활하실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들도 부활할 것임을 보여줍니다. 역시 이 모든 것에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나사로가 죽은 후에 누이들과 동네 사람들은 슬픔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마을에 오셨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무척 아쉬워하면서 예수님의 발 앞에서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도 이들과 함께 우셨습니다. 나사로가 죽은 것이 슬픈 것은 아닙니다. 그는 부활할 것입니다. 하지만 오라비를 잃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슬픈 마음을 예수님께서 보시고 함께 우신 겁니다. 이것이 또한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으로 가십니다. 무덤은 돌로 막혀 있었고 이미 장사한 지 나흘이 지나서 냄새가 날 지경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말씀하십니다.:“돌을 옮겨 놓으라.”믿음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첫 번째 표적에서도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셨습니다. 둘째 표적에서는 아들이 살았으니 가라고 하셨습니다. 38년 된 병자를 향해서도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표적을 행할 때 제자들에게 떡을 나눠주라고 했습니다. 태어나면서 소경이었던 사람에게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모든 예수님의 명령을 실천하기 위해서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예수님의 말씀‘아멘’으로 받아 들일 수도 없고 그것을 실천에 옮길 수도 없습니다. 사람들이나 세상의 상식을 뛰어넘는 말씀이기에 그렇습니다. 요한복음의 표적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예수님의 명령에 믿음으로 순종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합니다.

본문의 마르다와 마리아도 처음에는 주춤거렸지만 결국 돌을 옮겨 놓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서머나 식구들 마음속에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할 수 있는 믿음이 굳건히 자리 잡기를 기도합니다. -河-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 (2)

사랑하는 나사로가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은 이틀을 더 지체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을 모두 읽고 나면, 이틀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틀을 지체하는 동안 나사로가 죽게 되었지만, 그를 다시 살리심으로 예수님께서 생명을 주관하는 분임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사로의 누이들 입장에서 보면, 이틀이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게다가 예수님을 기다리는 동안 나사로가 죽게 됩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하십니다. 그런데 이미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지났습니다. 장례식이 모두 끝났고, 동네 사람들은 하나뿐인 오라비를 잃은 두 자매를 위로하고 있었습니다. 큰 언니 마르다는 예수님을 맞으러 나갑니다. 동생 마리아는 마음이 많이 상했는지 그냥 집에 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아서 나사로가 죽었다고 한탄합니다. 그런데 마르다에게는 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22절) 그때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살아날 것이라는 엄청난 말씀을 하십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모두 이해할 수 없었지만, 부활에 대한 소망은 분명히 갖고 있었습니다.

본문의 21-27절까지 나오는 예수님과 마르다의 대화는 우리들의 신앙에도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네가 이것을 믿느냐?”- 마르다에게 하신 질문은 곧 우리에게 하시는 질문입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주여 그러 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마르다는 아주 완벽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그리고 집안으로 들어가서 동생 마리아에게 예수님께서 찾으신다고 넌지시 말해줍니다. 마르다는 신앙이 좋을 뿐만 아니라 매우 현명한 성품을 가졌습니다.

마리아 역시 주님이 계시지 않아서 동생이 죽었다고 예수님 앞에서 서럽게 웁니다. 그것을 본 온 동네 사람들도 함께 울고 순식간에 그곳이 눈물바다로 변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와서 함께 우는 것을 보니 삼남매는 동네에서도 평판이 좋았나봅니다. 세 남매가 부모 없이 살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집안의 남자인 나사로가 갑자기 죽었으니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때 예수님도 함께 우십니다.:”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33절)“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35절) 예수님께서 아주 비통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조금 있다가 나사로를 살리실 예수님이시지만 마리아와 사람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함께 눈물을 흘리십니다. 그리고 나사로를 살리러 가십니다.

우리들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응답이 지체될 때가 있습니다. 기도하고 금방 이루어지면 좋을 텐데 현실이 그렇지 않습니다. 이틀이 지체하는 동안 나사로가 죽었듯이,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상황이 더욱 악화될 수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기억할 것이 세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때가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우리가 괴롭고 힘들 때 예수님께서 함께 우신다는 사실이고, 셋째는 세상이 일이 아무리 힘들고 절망적이어도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끝까지 의지해야 한다는 굳은 믿음입니다. -河-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 (1)

요한복음에 나오는 일곱 가지 표적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동안 여섯 가지 표적을 모두 살펴보았고, 앞으로 세 시간에 걸쳐서 마지막 일곱 번째 표적을 살펴볼 것입니다. 일곱 번째 표적은 요한복음의 표적들 가운데 가장 큰 의미를 지닌 사건입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기 때문입니다.

나사로는 그의 두 누이인 마리아와 마르다와 함께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약3마일정도 떨어진 베다니에 살고 있었습니다. 부모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 세 오누이만 살았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예수님은 부모님 없이 살아가는 이들을 각별히 사랑하셨습니다. 특별히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는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고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을 만큼 커다란 은혜를 체험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의 하나뿐인 동생 나사로가 병이 들었습니다. 누이들이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서 나사로가 병이 들었다고 알립니다. 예수님께 부탁한 것으로 보아서 매우 다급한 상황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해하기 말씀을 하십니다. 지난 번 소경을 고치시면서, 그가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 보이려고 했다고 말씀하셨듯이, 이번에도 나사로의 병이 죽을병이 아니랍니다. 나사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 자신도 영광을 받게 될 것이랍니다. 이것은 믿음의 눈이 뜨지 않으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나사로는 죽게 되고 예수님께서 그를 살려내십니다. 나사로를 살리러 가시는 길에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25-26절)는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나사로의 죽음과 다시 살아남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도 장차 부활할 것을 가르쳐주시는 겁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생명을 주관하시는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듯이, 우리들도 죽음에서 살리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으신 예수님께도 영광이 될 것입니다. 나사로의 죽음과 살리심 속에는 이런 구원의 진리가 함축적으로 들어있습니다.

나사로가 사는 베다니는 예루살렘 근처의 유다지방에 속해 있었는데 그곳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쳐서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틀을 더 머물러 계시는 것을 보고 위험한 유다지방으로 가지 않으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음을 무릅쓰고 자고 있는 (예수님의 눈에 나사로의 죽음은 잠을 자는 것과 다름없었고)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서 베다니로 가시겠답니다.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서 아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위험을 불사하신 것입니다. 아직 예수님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제자들로서는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여기까지가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나사로와 그의 누이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어려움이 닥친 것은 도리어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드러내는 삶으로 쓰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속의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예수님의 방식은 세상의 방법과 다르고 제자들의 생각을 초월한 하늘나라 방식입니다. 여기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로마서 8장 28절 말씀이 다시 생각납니다.:“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려 선을 이루느니라.” 아멘 -河-

소경이 눈을 뜨다 (2)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날은 공교롭게도 안식일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율법에 의하면 안식일에는 생업과 관련된 일은 물론 아주 위급한 경우가 아니면 병을 고치는 일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도 사람들을 도우셨고 병도 고치셨습니다. 안식일의 주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유대 지도자들과 부딪치셨습니다. 아니 그들이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갖고 시비를 걸었습니다.

지난 번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날도 안식일이었습니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병자가 자리를 들고 걸어갔는데,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은 그것을 가지고 안식일 법을 어겼다고 트집을 잡았습니다. 이번에는 소경이 눈을 뜬 것을 두고 이웃사람들이 그를 바리새인들에게 데리고 갑니다. 소경이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주신 분이 예수님이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소경이 눈을 뜨게 해 주신 것을 갖고 트집을 잡기 시작합니다.

결국에는 소경의 부모까지 데리고 와서 고문하듯이 자초지종을 묻습니다. 소경의 부모는 자신들은 모른다고 발뺌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때는 나라를 잃었고 예루살렘에서는 대제사장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이 백성들 위에서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퍼져나가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회당에서 출교시키는 경우도 있었습니다.:“그 부모가 그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이러라.”(요9:22). 동족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입니다. 나라가 없는 상황에서 동족들에게 마저 버림을 받는다면 그것은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만큼 유대교의 종교 권력이 막강했습니다. 그래서 소경의 부모가 자신들은 모르는 일이니 아들에게 물어보라고 무책임해 보이는 핑계를 댄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소경은 담대합니다. 이웃들을 향해서 예수님이 고쳐주었다고 말합니다. 유대 지도자들을 향해서도 자신의 눈을 뜨게 하신 분은 예수님이라고 분명히 밝힙니다. 그리고 당신들도 예수를 믿기 위해서 그의 제자가 되기 원하느냐고 반문합니다. 유대 지도자들 입장에서 보면 아주 당돌한 언행입니다. 이 사람이 이처럼 담대하게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얘기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주신 것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평생 동안 보지 못했던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인생과 새로운 세상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그러니 누가 뭐라고 해도 그는 담대하게 예수님을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이 눈이 뜨인 사람은 바리새인들에게 쫓겨납니다.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다시 만나십니다. 지난번에도 38년 된 병자에게 그렇게 하셨듯이 이번에도 소경이었던 사람에게 예수님을 믿을 것을 부탁하십니다. 소경이었던 사람은 아주 분명하게 대답합니다.:“내가 믿고자 하나이다.”(요9장36절) 예수님께서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밝히십니다. 그 사람이 대답합니다.:“내가 믿나이다”(38절). 소경이었던 사람은 눈이 뜨였습니다. 그 대가로 그는 이웃들과 유대인들에게 배척받았습니다. 하지만 모든 과정을 통해서 이 사람은 진실로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육신의 눈이 뜨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보는 신앙의 눈이 뜨인 것이 더 큰 축복임을 실로암 소경을 통해서 다시금 깨닫습니다. -河-

소경이 눈을 뜨다 (1)

요한복음 9장 전체가 소경이 눈을 뜨는 표적을 보도하고 표적이후에 일어난 일들을 자세히 기록해 놓았습니다. 앞으로 두 시간에 걸쳐서 요한복음9장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이 구걸하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의 측은지심(惻隱至心)이 발동했습니다. 예수님은 불쌍한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십니다. 무엇보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소외된 백성들, 가난과 질병으로 고생하는 뭇 백성들을 보실 때마다 예수님의 측은지심이 발동했습니다. 이 시간 우리들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마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기된 첫 번째 이슈는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냐는 것입니다. 당시 율법에 의하면 소경으로 태어나는 것은 부모가 죄를 지은 결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는 모든 질병도 심지어 죽음도 죄를 지어서 생겼다는 인과응보의 신앙이 팽배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기에 길에서 구걸하는 소경을 보고“누구의 죄로 인해서 소경으로 태어났느냐?”고 질문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전혀 다른 각도에서 말씀하십니다.:“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요9:3). 예수님은 소경을 바라보시면서 그를 정죄하거나 가족의 죄를 지적하지 않으십니다. 소경을 보시면서 먼저 불쌍한 마음이 드셨고,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이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놀라운 생각을 하셨습니다.

우리들도 종종 자신 또는 남들이 겪는 고난을 죄와 연계시킬 때가 많습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한 걸음 더 나가야 합니다.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드러날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에 진흙을 발라주시면서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도 땅에 침을 뱉어서 진흙팩을 만드셨고 그것을 소경의 눈에 발라주신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예전 고대에 종종 있던 치료법 가운데 하나였고, 마가복음 7:33과 8:23에 의하면 예수님도 침을 뱉어서 말을 하지 못하고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을 고치신 적이 있습니다.

구약의 율법에서“침”은 부정하고 더러운 것으로 여겼는데(레15:8) 예수님께서 침을 사용하셨다는 사실이 조금은 의아합니다. 이것은 안식일에 소경을 고치신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약의 율법을 뛰어넘어서 일하시는 분임을 보여주신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이 길이 되었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올바름입니다. 어떤 어두움의 세력이나 과거의 율법이 예수님을 막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빛이 되시기 때문입니다(요9:5). 그만큼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권세가 있으시고 세상의 모든 것을 초월하신 메시야이십니다.

또한 침을 사용하신 것은 소경으로 하여금 무엇인가 신비로운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동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눈높이를 우리에게 맞추시고 우리를 위해서 일하시는 분임을 본문 속에서 다시금 배웁니다.

진흙을 눈에 바르고 실로암 연못까지 가는 소경의 모습을 눈앞에 그려 보십시오. 우리들이라면 그렇게 했을까요? 생면부지의 사람이 와서 이상한 일을 자기에게 했습니다. 그리고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고 명령한다면 대부분 망설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경은 실로암 연못에 갔습니다. 그곳에서 눈을 씻었고 드디어 보게 되었습니다. 그의 믿음과 행동이 눈을 뜨게 만든 것입니다. -河-

오병이어

오병이어(五餠二魚)의 표적은 우리들에게 매우 친숙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열두 광주리가 남은 놀라운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 건너편에 가셨습니다. 어느덧 예수님께서는 유명인이 되셔서 어디를 가든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병 고침을 받는 것은 물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들의 영적 갈증을 해소하려고 모였습니다.

예수님 당시는 말씀이 갈(渴)하던 시대였습니다. 구약의 말라기 이후로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백성들을 보살피기보다 각기 자기의 길을 가기에 바빴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로마 정권과 결탁해서 자신의 배를 채웠고,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앙만을 지키면서 백성들을 무시했고, 어떤 사람들은 폭력을 통해서 로마 정권을 물리치려고 쿠데타를 도모했습니다. 그때 일반 백성들은 설자리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몸과 마음은 지쳐 있었고, 식민지하에서 하루하루 쪼들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소외되고 가난하고 힘겹게 살아가는 백성들을 찾아가셨습니다. q백성들도 예수님이 계신 곳에 모여들어서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비록 하루하루의 삶이 먹을 양식도 없을 만큼 힘겨웠지만 예수님께서 전해주시는 복음은 이들에게 소망이 되었고 능력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큰 무리”가 예수님과 더불어 산에 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때는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다가오던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무리들을 보니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한 끼라도 그들을 배불리 먹이고 싶으셨습니다. 아니 예수님은 충분히 그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어디서 떡을 사서 이 무리들을 먹일 수 있을까?“라고 물으십니다. 빌립은 베드로와 같은 마을 출신으로 일찍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빌립을 시험(test)하신 것입니다. 빌립은 그 많은 무리를 먹이기 위해서 2백 데나리온이라는 큰돈이 필요하다고 펄쩍 뜁니다. 그동안 예수님께서 표적을 베푸시는 것을 보았다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돈이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을 기대했어야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없었던 빌립은 안타깝게도 세상적으로 예수님의 물음에 대답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말하기를 한 아이가 도시락으로 싸온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가 있답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갖고 축사하시고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어린 아이가 내놓은 작은 음식이 시발점이 되어서 오천 명이 먹는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기적은 작고 순수한 동기에서 시작됩니다. 아무리 작은 것도 하나님께 쓰임 받으면 커다란 표적을 일으키는 시발점이 됩니다. 오병이어의 표적은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의 공급자가 되시고 자신이 스스로 생명의 떡이 되심을 보여줍니다. 오천 명을 먹이시는 표적을 체험한 백성들은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14절)고 고백했습니다.

우리 시대에도 오병이어의 기적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보잘 것 없는 작은 시작이 하나님의 능력을 불러일으키고 오천 명이 배불리 먹는 나눔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임할 수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