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기도: 겟세마네 기도 (2)

무릎을 꿇고

 

우리도 누가복음 속의 예수님처럼 기도가 습관이 되길 바라면서 한 주간 살았습니다. 습관은 생각하고 의도해야 나오는 행동이 아니라 저절로 몸과 마음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기도가 습관이 되면, 자기도 모르게 기도의 자리로 나옵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 수시로 또는 무심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 하나님 앞에서 부족함을 뉘우치는 회개의 기도, 필요한 것을 구하는 간청, 이웃을 위한 기도를 저절로 실천합니다. 기도가 습관이 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에 가신 예수님께서 늘 가시던 “그곳(the place)”에 도착하자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고 부탁하신 후에, 돌을 던질 만한 곳까지 조금 더 가셔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습니다.

 
“그곳”은 예수님께서 습관처럼 기도하기로 정해 놓으신 특정한 장소, 예수님의 기도처였습니다. 40절의 “유혹”과 마지막 46절의 “시험”이 짝입니다. 우리 성경은 유혹과 시험으로 다르게 번역했지만, 같은 헬라어 <페이라스모스>가 쓰였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모른다고 부인한 것이 곧 유혹에 넘어간 결과였습니다.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이 요구”하고 있다고 하셨듯이(21:31),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갈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부탁하십니다. 끝까지 가능성을 놓지 않으시고, 제자들의 실패를 안쓰럽게 생각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탄의 유혹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올바로 믿는 것을 방해합니다. 믿음을 사방으로 흩어 놓습니다. 그것을 이기는 비결이 기도입니다.

 
마태/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다른 제자들은 한곳에 머물게 하시고, 세 명의 제자(베드로, 야고보, 요한)를 데리고 조금 더 깊이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혼자 더 깊이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복음은 이러한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홀로 가신 것을 강조합니다. “돌 던질 만큼”의 거리는 가까운 거리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기도 소리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잠이 들었다니 유혹의 위력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무릎을 꿇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항복의 표시입니다. 또한 특별하고 다급한 기도를 위해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시는 모습을 눈에 그리는 것만으로도 은혜가 됩니다. -河-

 

2022 기도: 겟세마네 기도 (1)

습관을 따라

 

우리 교회는 매년 기도에 대한 말씀을 한 달여 나누면서, 각자의 신앙을 점검하고 다시 기도의 자리로 돌아오길 다짐합니다.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호흡이라고 말할 정도로 매우 중요한 신앙 덕목입니다. 우리는 생명의 말씀을 읽으며 묵상하고, 기도로 호흡하며 살아가는 하나님 백성임이 틀림없습니다.

 
올해 기도에 대한 연속 설교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본문으로 정했습니다. 겟세마네 기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드리신 기도입니다. 겟세마네 기도에 죽음을 앞두신 고뇌, 그렇지만 결국 하나님 뜻을 따르신 순종이 잘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과 함께 우리가 따라야 할 기도의 모범입니다.

 
겟세마네 기도는 공관복음서로 불리는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모두 등장합니다. 이번에는 누가가 알려주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본문으로 삼고 마태와 마가복음을 참고하면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누가가 다른 두 복음서에서 빠진 부분까지 세심하게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습관대로”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에 가셨음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오실 때마다 제자들과 더불어 감람산에 가신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약 3마일 떨어진 베다니 나사로 집에 가셔서 주무시기도 했지만, 감람산에 가셔서 기도하시고 제자들과 더불어 하나님 말씀을 나누셨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례(ritual)였습니다.

 
“습관대로”에서 습관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에토스>입니다. 여기서 윤리를 가리키는 영어 <ethics>가 나왔습니다. 법이나 규칙에 따라 정해진 관습을 가리킵니다. 개인적으로는 반복되는 훈련을 통해서 습관으로 굳어진 것입니다. 습관에서 한 걸음 더 나가면 성품이 됩니다.

 
신앙에서 습관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습관대로 감람산에 가셨듯이, 어떤 장소나 상황이 신앙에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주일에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 습관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집에 기도처를 만들어 놓고 그곳에 가면 기도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만나는 특별한 장소나 상황이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 있으니, 기도가 습관이 되는 것입니다. 특정한 상황에서 기도하거나 기도가 특별한 이벤트가 되는 것이 아니라, 쉬지 않고 수시로 기도합니다. 어려울 때는 당연히 하나님을 찾고, 좋은 일이 생겨도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매사에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습관이 됩니다.

 
이번 연속 설교를 함께 나누면서 기도가 습관이 되길 기대하겠습니다. -河-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연속설교 사이에 찬송가에 얽힌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찬송가는 2006년 개정된 21세기 찬송가입니다. 그 이전에는 교단별로 선교사들이 편집한 찬송가를 사용하다가 1983년에 통일 찬송가가 나오면서 한국 교회 전체가 같은 찬송가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미국에서는 교단마다 다른 찬송가를 사용하고 있으니 통일 찬송가를 갖게 된 것은 한국 교회의 자랑입니다.

 
우리 찬송가에는 645곡이 실려 있습니다. 그 가운데 109곡이 한국인이 작곡하거나 작사한 찬송입니다. “은혜가 풍성한 하나님”처럼 복음성가로 불리다가 찬송가에 편입된 찬송도 있습니다. 이것을 두고 반대하는 견해도 있었지만, 시대가 바뀌었고 한국 교회가 같은 찬송가를 사용한다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두어야 할 것입니다.

 
새 찬송가에 한국 곡이 추가되었어도, 여전히 외국 찬송가가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것도 1800년대에 미국에서 만들어진 찬송가들이 많습니다. 당시는 미국에서 기독교가 거의 국교에 가까울 정도로 부흥했을 때입니다. 그때 만들어진 찬송가에는 당시의 영성과 신앙이 그대로 깃들어 있기에 지금까지 사랑받고 있을 것입니다. 말 그대로 기독교 음악의 고전(클래식)이 된 것입니다.

 
지난주 <예수 사랑하심을(Jesus loves me)>에 이어서 오늘은 찬송가 288장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Blessed assurance, Jesus is mine)>에 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찬송가의 작사가 패니 크로스비(Fanny Crosby)는 1820년에 태어나서 95세까지 살면서 무려 8천여 곡의 찬송가를 만들었습니다. 미국 대통령들과 교감을 가질 정도로 당대의 유명인이 되었습니다. 작곡가 퓌비 냅(Phoebe Knapp) 역시 500여 곡의 찬송을 작곡한 교회 음악가였습니다.

 
크로스비는 태어나서 6개월 되었을 때 눈에 염증을 앓았습니다. 그때 의사가 그의 눈에 겨자즙을 붙이면서 시력을 잃고 평생을 시각 장애인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크로스비는 신앙으로 자신의 장애를 극복했습니다. 크로스비가 여덟 살 때 처음 지은 찬송시입니다: “앞을 볼 수 없어도 나는 얼마나 행복한 아이인지요. 나는 이 세상에서 감사하며 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찬송가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역시 크로스비의 신앙 고백입니다. 앞을 볼 수 없어도,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를 눈에 그리면서 완전한 기쁨과 하늘의 영광을 찬양했습니다. 크로스비는 신앙으로 앞을 볼 수 없는 장애를 뛰어넘었습니다. 온전하고 참된 신앙을 사모하면서 순수하고 맑은 영혼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신앙의 힘이 매우 큽니다. 할렐루야! -河-

예수 사랑하심은

2022년 우리 교회 표어는 “새롭게 시작합시다”입니다. 밝은 세상이 다시 찾아오길 기대하면서 정한 표어입니다. 하지만, 쉽게 새로운 일상이 찾아올 것 같지 않기에 주님께서 주시는 소망을 기대하며 예레미야 애가 말씀을 함께 나눴습니다.

 
예레미야 애가는 나라가 망하고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의 슬프고 깜깜한 현실 속에서 “오히려/드디어” 하나님의 사랑과 소망을 발견하고 그것을 노래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저 멀리 보이는 빛을 보며 부른 신앙의 고백이었기에 팬데믹을 사는 우리의 현실을 애가 말씀에 대입했습니다.

 
이어서 사도행전 말씀을 나눴습니다. 사도행전은 “성령 행전”이라는 별칭대로 초대 교회에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을 역동적으로 기록했습니다. 사도행전을 읽다 보면 현재 우리 시대와 달라서 거리감이 느껴질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에 임한 성령의 임재와 역사가 너무 큽니다. 베드로나 바울과 같은 초대교회 사도들의 헌신을 따라갈 수 없어서 도리어 기가 죽고 비현실적으로 들립니다. 그래도 같은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를 인도하심을 믿기에 사도행전 말씀을 ‘아멘”으로 받고 말씀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번에 살펴본 바울의 1차 전도 여행을 통해서 이방인에게도 복음이 필요하고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심을 경험했습니다. 그것이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지 않아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예루살렘 교회의 결정으로 이어졌습니다. 아시아에서의 전도가 막힌 것도 유럽과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바울이 도착한 아덴(아테네)은 말 그대로 세속 도시였습니다. 철학의 도시이기도 한 아덴에 복음이 들어갈 공간이 적었지만, 바울은 그들에게 맞는 복음을 전했습니다. 아레오바고 광장의 전도에서 무려 다섯 명이나 예수님을 믿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한 영혼의 귀함을 바울이 보여준 것입니다. 요즘 우리가 사는 세상도 아테네와 다를 바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즐거움과 물질을 쫓습니다. 하나님 없이 선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 그리고 부활이 필요한 이웃들이 꼭 있습니다. 그들을 찾아가기를 원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 사랑의 고백이고 표현입니다. 오늘 나눌 <예수 사랑하심은 성경에 써 있네>라는 찬송가 해설이 예레미야 애가와 사도행전에 깃든 하나님의 사랑을 잘 보여줍니다. 소설 속에서 그려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멋진 찬송가로 거듭 태어나서 많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힘을 주는 찬송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같은 성령 하나님의 역사임을 믿습니다.-河-

사도행전 (11)

아덴: 세상 속에서 (2)

 

 

아덴(아테네)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본 바울이 회당과 시장(아고라). 아레오바고 광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합니다.

 
사람들은 바울의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자기들이 생각하거나 믿는 것과 전혀 다른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생소했습니다. 또한 그리스 철학과 문화가 최고라고 믿었기에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무시했습니다. 바울을 말쟁이, 이방신을 소개하는 잡상인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일종의 교만입니다. 교만은 모든 면에서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덴 사람들이 바울을 붙들어서 아레오바고 광장으로 데려갔습니다. 아레오바고는 원래 법정과 같은 곳이었는데 바울이 아덴에 갔을 때는 자유롭게 의견을 발표하면 아레오바고의 관리들이나 청중이 판단하는 공론의 장이었습니다.

 
아레오바고는 “새로운 가르침” “이상한 것”에 관심이 컸습니다:”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21절). 첨단 학문이나 종교 또는 이론을 청취하는 곳입니다. 자격지심과 교만한 도시 아덴에서 예수님의 복음을 갖고 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 만도 대단한 일입니다.

 
바울은 아레오바고 광장에 서서 아덴 사람에게 맞춘 복음을 전합니다. 자칫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없기에 바울의 연설을 전도라고 생각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면서 십자가의 죽음을 전하였을 것입니다. 바울은 아덴을 돌아보면서 자신이 느낀 것을 말합니다. 아덴에 신전과 신의 형상이 많은 것을 보니 종교심이 큰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심지어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글귀를 보았다고 말합니다.

 
이들이 알지 못한 채 믿고 섬기는 신이 곧 하나님이라고 알려줍니다. 우상은 사람이 만든 것이고 진정한 신은 하나님 한 분 뿐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시고 만물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천하를 심판하실 날이 올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심판 후에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알려주는 표시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을 놓고 아덴 사람들의 의견이 갈립니다. 어떤 사람은 조롱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바울의 이야기를 더 자세히 듣고 싶어했습니다. 바울을 다시 찾아와서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훗날 아테네 교회의 감독이 되었다고 알려진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는 여성과 또 다른 사람들입니다.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면, 결실이 있게 마련입니다. 할렐루야!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