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장 1-7절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룻기 연속 설교에 이어서 이번 주부터는 로마서의 처음 일곱 구절(롬1:1-7)을 살펴보겠습니다. 룻기의 인물들이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추면서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갔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일상을 살았지만, 그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니 다윗과 예수님의 조상이 되는 은혜가 임했습니다.

 

겉으로 눈에 띄게 하나님을 찾거나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삶에 스며들어 있었고 어떤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하든지 하나님 백성 다웠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룻과 보아스 그리고 나오미와 함께 하셨습니다. 신앙이 삶으로 이어졌을 때 온전한 믿음으로 세상의 빛이 됨을 배웠습니다.

 

오늘부터는 로마서의 서론에 해당하는 로마서 1장 1-7절을 통해서 우리가 믿는 예수님,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바른 모습에 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로마서는 로마 교회에 보낸 사도 바울의 편지입니다. 로마 제국 한가운데 세워진 로마 교회에 그리스도의 복음, 신앙과 삶에 대해서 알려주는 하나님 말씀입니다.

 

로마서는 긴 서문을 갖고 있습니다. 보통은 당시의 편지 형식에 따라 편지를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 그리고 간단한 인사로 시작하는데, 로마서는 편지를 보내는 바울과 편지를 받는 로마 교회 중간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소개합니다. 장차 펼쳐질 로마서의 내용을 미리 알려주는 듯합니다.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는 로마 교회에 편지를 보내는 바울의 심정이 서문에 고스란히 묻어납니다.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라고 소개합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예수님의 종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구약에서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면 모세를 비롯한 구약의 위대한 인물을 가리킵니다. 바울이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한 것은 바울의 사역이 자신의 뜻이 아니라 자기를 부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임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누구인지에 이어서 어떤 사명을 갖고 있는지 명확하게 소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사도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따로 구별하셔서(택정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부르심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임의로 생긴 것이 아니라 구약 시대부터 성경을 통해서 미리 약속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아이십니다.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깃든 역사성입니다. 복음의 ‘길이’요 ‘깊이’입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에 대한 확신은 물론 확실한 자기 정체성을 갖고 살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확실함을 추구해야 함을 배웁니다. -河-

룻기 11

나오미의 기쁨

 

룻기 마지막 시간입니다. 룻기(1:1-6)는 베들레헴에 밀어닥친 가뭄을 피해서 모압으로 내려간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가족 이야기로 시작했습니다. 그곳에서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두 아들을 모압 여인과 결혼시켜서 10년을 살았는데 그들마저 죽었습니다. 깜깜했습니다. 빛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셔서 베들레헴에 가뭄이 그쳤다는 소식을 들은 나오미는 모압 며느리 룻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떠날 때는 두 손 가득했는데 돌아올 때는 빈손입니다. 나오미는 동네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오미 (기쁨)가 아니라 마라(쓴디 쓴)로 부르라고 부탁할 정도였습니다.

 

베들레헴에 돌아온 나오미와 룻은 룻이 보리 이삭을 주으러 보아스의 밭에 가면서 빛이 비치기 시작했습니다. 베들레헴의 유력자 보아스는 나오미와 룻을 보살핍니다. 결국 보아스가 룻을 아내로 맞이하면서 룻과 나오미의 삶에 햇살이 비췄습니다. 룻기는 룻과 보아스 사이에서 오벳(섬김)이 태어난 것과 유다의 아들 베레스로부터 시작한 10대의 족보 끝에 오벳의 손자 다윗이 태어난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해피 엔딩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4:13-22)대로 보아스와 룻에게서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룻기의 하나님은 뒤에서 일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베들레헴을 돌보셔서 양식이 생기게 하신 것(1:6)과 보아스와 룻 사이에 아기를 갖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이었습니다. 모두 생산적인 일입니다.

 

룻기의 마지막에 보아스와 룻은 무대에 없고 나오미와 베들레헴 여인들이 본문을 주도합니다. 처음 나오미가 베들레헴에 돌아왔을 때 마중 나왔던 베들레헴 여인들이 이번에는 나오미를 축복하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오미의 대가 끊이지 않게 하셨고, 아기가 이스라엘 중에서 유명해지길 기도합니다. “생명의 회복자” 즉, 나오미가 그동안 겪었던 모든 어려움을 보상해 줄 아기입니다. 회복이란 단어 속에 들어 있는 히브리어 동사 <슈브>는 돌아서다는 뜻입니다. 룻의 슬픔이 기쁨으로 돌아섰습니다. “노년의 봉양자”를 얻었으니 이제 나오미는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나오미가 아기를 품에 안고 그를 기르기로 작정합니다. 룻과 보아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가 곧 다윗의 할아버지 오벳입니다.

 

이처럼 룻기는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면서 쓰디쓴 과거가 새롭게 회복되고 다윗과 멀리 예수님까지 미래를 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을 몸소 실천한 베들레헴 사람들과 뒤에서 일하신 하나님이 이뤄낸 합작품입니다. 룻기를 마무리하면서 우리의 선한 믿음과 삶도 장차 귀한 열매를 맺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河-

 

룻기 10

선한 사람들

 

룻기를 읽으면서 마음에 깊이 다가오는 것은 하나같이 선하고 하나님의 사랑(헤세드)을 실천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입니다. 사사 시대는 하나님을 왕으로 삼지 않고 각자 자기 좋은 대로 행하던 때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없던 깜깜한 암흑과 같은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훗날 다윗과 예수님이 태어날 베들레헴에 살았던 룻과 나오미 그리고 보아스는 한 줄기 빛이었습니다.

 

룻기를 시작하면서, 로마서 8장 28절을 옆에 두고 말씀을 나누길 제안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가뭄을 피해서 모압으로 피난 간 나오미 가정에 상상하기 힘든 재난이 밀어닥쳤습니다. 남편 엘리멜렉과 모압 여인과 결혼한 두 아들이 죽은 것입니다. 베들레헴에 가뭄이 그쳤다는 소식을 듣고 룻과 함께 돌아온 나오미는 완전히 빈손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더 이상 “나오미 (기쁨)”라고 부르지 말고 “마라 (쓰디쓴)”로 부르라고 했을까요! 베들레헴에 돌아온 나오미와 룻은 맨 밑바닥 인생이었습니다. 홀로 된 두 여성이 살아가는 것이 무척 힘들던 시대였기에 두 사람의 삶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룻이 우연히 보아스의 보리밭에 가고, 그때 마침 보아스가 밭에 오면서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룻은 보리 추수가 끝날 때까지 보아스의 밭에서 양식을 조달할 수 있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룻기 3장 말씀대로 룻이 보아스에게 프러포즈 하면서 룻은 물론 나오미 가문이 보아스의 도움으로 다시 일어설 근거가 마련되었습니다. 빛이 비친 것입니다.

 

룻기의 인물들은 각자 자신의 일상을 살았습니다. 큰 그림을 볼 여유도 없었고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일상이 모자이크처럼 맞춰지면서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복 받은 인생이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섭리)이 룻과 나오미 그리고 보아스에게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손으로 뒤에서 이 모든 것을 주관하셨습니다.

 

룻기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선합니다. 서로 복을 빌어주고, 하나님의 사랑 (헤세드)을 실천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선한 사람들이 서로 배려하고 감사하면서 신앙 공동체를 세워갑니다. 예수님 말씀이 생각납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우리도 룻기의 주인공들처럼 우리의 착한 행실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가 있는 곳에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원합니다. -河-

룻기 9

타작 마당에서

 

4장으로 이뤄진 구약성경 룻기는 1장에서 모압으로 피난 간 나오미 가족에 닥친 재난을, 2장은 베들레헴에 돌아온 나오미와 룻이 보아스라는 유력한 자를 만나서 살아남는 장면을 기록했습니다. 룻과 보아스가 처음 만나는 장면부터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보리 이삭을 줍기 위해서 룻이 우연히 간 곳이 보아스의 밭이었고, 그때 마침 보아스가 밭에 나왔습니다. <우연히 – 마침>이라는 공식속에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 즉 하나님의 섭리를 포착할 수 있었습니다.

 
보아스는 룻을 최대한 배려하면서 추수가 끝날 때까지 자기 밭에서 보리 이삭을 줍도록 허락했습니다.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다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모압 여인 룻을 배려하고 차별 없이 공평하게 대하는 보아스의 성품과 행동에서 예수님이 생각날 정도로 특별했습니다. 룻은 보리 추수가 끝날 때까지 보아스 밭에서 보리 이삭을 주우면서 시어머니 나오미와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3장은 룻기의 절정입니다. 시어머니 나오미가 룻을 불러서 안식할 곳을 찾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룻이 홀몸으로 평생을 살 수 없습니다. 지금은 시어머니 나오미가 있지만, 앞으로 이스라엘 태생도 아닌 모압 여인 룻이 혼자서 살아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매우 특별한 이야기를 합니다. 보아스가 밭에서 보리타작을 하고 있을 때, 보아스를 찾아가서 먼저 프러포즈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룻이 보리 이삭을 주워 올 때마다 보아스에 대해서 좋은 인상을 전했고, 그때마다 나오미는 룻을 보아스에게 시집보낼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름대로 확신했기에 위험을 무릎 쓰고 룻을 보아스에게 보내는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가 시킨 것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그대로 실행했습니다. 밤중에 보아스가 보니 자기 발치에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누구냐고 물으니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9절)고 또박또박 이야기합니다. 옷자락을 덮는 것은 보아스가 룻을 처음 만났을 때, 하나님께서 날개깃으로 룻을 덮어주실 것을 바라면서 축복했는데, 룻이 그 일을 지금 보아스에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보아스가 친절하게 룻을 맞이합니다. 행여나 룻에게 피해가 생길까 염려되어서 아침까지 자신과 함께 있고, 보리를 여섯 번 되어 룻에게 줍니다. 보아스도 룻이 마음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의 계획대로 일이 성사되었습니다. 이렇게 룻과 보아스가 인연을 맺게 됩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두 사람 위에 매우 구체적으로 임했습니다. -河-

2021년 부활절에

올해 부활절도 교회에서 모이지 못하고 흩어져서 맞고 있습니다. 작년에 이어서 특별한 부활절이 한 해 더 연장된 셈입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물론, 한 해 동안 흩어져서 예배했기에 영상으로 예배하며 부활절을 맞는 것이 특별하지 않습니다. 일상이 된 느낌입니다. 그래도 함께 모여서 부활절을 맞고, 예배 후에 부활절 만찬을 나누던 때가 그립습니다. 내년을 기약합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대로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도 헛될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기독교가 시작되었습니다. 부활하시기 전까지 제자들은 오합지졸이었고,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이라는 예수님의 예고를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으면 제자들 역시 흩어지고 기독교는 세상에 탄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무덤에 갔던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들에게 제일 먼저 보이시고,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연거푸 나타나셨습니다. 40일 동안 세상에 계시면서 500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습니다. 이들 가운데 대다수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편지를 보낼 당시에 살아 있었습니다. 이처럼 부활장이라고 불리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신앙은 물론 바울 자신의 전도도 헛되다고 말한 것은 단지 이론이 아니라 사도 바울의 경험과 당시 살아있던 부활의 증인들의 증언에 근거한 말씀입니다.

 

기독교가 부활의 종교라는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부활은 죽음 너머에 있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죽음과 우리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악한 세력을 이기셨습니다. 그리고 생명을 주셨습니다. 부활은 생명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부활을 눈으로 본 제자들과 수백 명의 증인이 있었다는 것은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논증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신앙은 진공 속에서 벌어지는 이론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일상과 세상 속에서 부활을 경험하고 고백합니다. 부활은 사실입니다. 역사이며 삶입니다.

 

셋째로, 부활은 초월적인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님의 탄생과 부활에 개입하셔서 생긴 사건입니다. 자연법칙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이 세상 속에 드러난 유일한 사건입니다. 부활은 능력입니다.

 

올해도 흩어져서 부활절을 맞지만, 부활만이 갖고 있는 생명, 사실, 능력이 참빛 식구들 위에 구체적으로 임하길 기도하겠습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