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그 이후 (2)

의심 많은 도마

 

조심해야 할 신앙의 유형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믿고 복을 받으려는 기복 주의입니다. 물론 신앙의 길을 가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복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는 것은 놀부 심보입니다.

 

둘째는 모든 것을 영적으로 해석하고 자신이 하나님과 직접 연결된 듯이 믿는 신비주의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특별한 방식으로 말씀하실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성경과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는 상식적인 방식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셋째는 지나친 개인주의입니다. 각자의 고백과 결단으로 하나님을 믿지만, 우리 모두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길 원하십니다. 신앙이나 축복을 자기 혼자 독점하려고 하거나, 기독교인 아닌 경우를 배타적으로 밀어내는 것도 조심할 신앙 유형입니다.

 

넷째는 겉과 속이 다른 형식주의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싫어하신 것이 겉과 속이 다른 위선이었습니다. 신앙은 겉치레가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내면적이고 실제적인 삶입니다.

 

마지막으로 맹목적인 신앙도 조심해야 합니다. 분별력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입니다. 무엇을 믿고 왜 믿는지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믿습니다. 신앙이 좋아 보여도 뿌리가 없고, 여러 가지 것들이 혼합된 추한 신앙일 가능성이 큽니다. 깊이 고민하고, 질문하며, 때로는 확고한 신앙에 이르기 위해서 회의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쉽게 믿지 않았습니다. 다른 제자들의 말만 듣고 부활을 믿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봐야 믿겠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을 처음 찾아오시고 팔 일이 지났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제자들이 있는 곳에 오셨습니다. 도마도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있었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를 찾아가신 예수님께서 도마도 찾아가십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20:27). 부활을 확인한 도마가 예수님을 향해서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의심 많은 도마는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되었습니다. 도마가 부활을 의심했다고 예수님께서 그를 무시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과 신앙에 관해서 진실로 의심하고 회의하는 사람에게 임하는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더 귀한 말씀을 하십니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도마 이후에 우리를 포함한 모든 사람을 향한 예수님의 축복 선언입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쉼 없이 믿음의 길을 가기 원합니다.-河-

 

부활 그 이후 (1)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우리는 앞으로 교회력에 따라서 부활절 후 일곱 주간을 지내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시고 복음을 전할 사도로 제자들을 준비시키셨습니다. 교회력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오순절 성령이 임하기까지 50일 동안 부활의 기쁨, 은혜, 승리, 능력을 묵상하면서 부활의 생명으로 살아갑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서 교회에 모이지 못합니다. 가정에 머무는 삶이 단조롭고 때로는 힘겹습니다. 앞으로의 상황도 잔뜩 흐림입니다. 그렇기에 부활의 은혜와 능력이 더욱 요청됩니다. 사망의 쏘는 것을 이기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믿습니다.

 

앞으로 6주에 걸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신앙의 핵심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그동안 살펴본 십자가 은혜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하고 의로운 하나님 백성이 되었다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서 능력과 생명을 얻습니다. 이번 말씀을 통해서 우리 교회와 참빛 식구들 모두에게 부활의 은혜와 능력이 임하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두 명의 제자가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가장 큰 이야깃거리였습니다. 이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고 말로만 접했기에 반신반의했습니다. 부활이야말로 상상을 초월한 사건이었으니 쉽게 믿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들 옆에 임하셔서 함께 길을 걸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신비로운 몸을 입으셔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실 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물으십니다. 자신의 부활을 의심하는 이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의 글을 갖고 예수님 자신이 왜 메시아인지 자세히 설명해 주십니다. 흥미로운 장면입니다. 마을에 가까이 가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함께 머무시길 요청하고 음식을 대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떡을 떼어 축사하시고 그것을 제자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서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은 비로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찾아오셨음을 깨달았습니다. 알고 보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자신의 마음이 뜨거워진 것도 생각났습니다. 이들은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가서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합니다.

 

제자들을 찾아오신 예수님께서 우리도 찾아오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을 믿는 신앙을 깨우쳐 주시고 눈을 열어 주님을 보게 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 예수님을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한 주간 각자의 자리에 찾아오실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마음이 뜨거워지는 참빛 식구들 되시길 바랍니다. -河-

십자가 십자가 (4)

승리의 십자가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부활의 능력과 기쁨 속에 들어가는 날입니다. 함께 모여서 예배할 수 없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부활절을 보내는 것도 색다른 경험입니다.

 

우리는 지난 3주 동안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를 우리도 지고 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 자신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세상을 향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우리 각자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불만과 불평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은 점점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감사와 기쁨으로 주어진 십자가를 거뜬히 지고 가기 원합니다.

 

가로목과 세로목으로 된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했습니다. 세로목은 중심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세로목만 굳게 세워진다면 십자가가 아닙니다. 세로목에 가로목이 올려질 때 비로소 십자가가 되는데, 가로목은 이웃사랑을 가리킬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로목과 세로목이 만나는 곳에 달리셔서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까지 풀어내시고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십자가에 깃든 화목의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죄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죄인의 자리에 내려오셔서 우리 대신 죄가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가 “의”가 되었습니다.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구약의 모든 제사를 폐하고 단번에 영원한 효력을 성취하신 대속의 은혜였습니다.

 

고난 주간을 맞아서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기 원했습니다. 가로목과 세로목이 만나는 그곳에 우리 자신을 올려놓고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기로 작정했습니다. 코로나19로 고통받는 세상도 십자가 위에 올려놓고 주님의 긍휼을 구했습니다. 우리가 치러야 할 값을 대신 치르신 예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우리도 기쁜 마음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기로 결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류를 괴롭히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15:55). 사망이 쏘는 죄도, 죄가 가져오는 죽음도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극복하셨습니다. 스웨덴의 신학자 구스타브 아울렌의 말대로 십자가는 악한 세력을 물리친 승리의 상징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세상이 생각하던 저주 또는 죽음이 아니라 부활과 생명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시작입니다. 죽음은 사라지고 영원한 생명이 임했다는 승리의 선포입니다. 부활을 맞는 참빛 식구들께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승리가 실제로 임하길 간절히 바랍니다.-河-

십자가 십자가 (3)

–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오늘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억하는 종려 주일입니다. 예루살렘 백성들은 종려나무를 흔들면서 “호산나(이제 구원하소서)”를 외치며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맞이했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대로 (슥9:9)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예수님은 하나님을 떠난 예루살렘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의 장사꾼들을 내쫓고 성전의 본 모습을 회복하셨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제자들과 예루살렘 백성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물론 로마 정권을 뒤엎고 다윗 왕권을 회복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가지시고, 겟세마네 산에서 기도하신 후에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잡히십니다. 밤새도록 심문을 받으시고 결국 로마 총독 빌라도의 판결로 십자가형에 처해 지십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면서부터 예루살렘의 민심은 돌변했습니다. 종려나무를 흔들면서 예수님을 왕으로 맞이하던 예루살렘 사람들은 못된 죄인 바라바를 살려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칩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자신의 잇속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예고하신 것을 들었던 제자들 마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를 비롯해서 갈릴리에서 올라온 막달라 마리아와 몇몇 여성들만 끝까지 예수님 곁을 지켰습니다. 제 6시(정오)가 되니 온 땅에 어둠이 임했습니다. 그렇게 세 시간이 흐르자 예수님께서 크게 소리 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34절).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려지는 아픔을 경험하셨습니다. 겟세마네에서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기도하신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이 그 정도로 힘겨웠습니다. 우리 죄를 대신 지고 가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처절한 모습입니다. 우리가 겪어야 할 고난을 대신 겪으신 예수님의 구속(redemption) 사역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바로 그 순간에도 “나의 하나님”이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시편 22편 말씀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절대로 놓치 않으셨습니다. 힘든 길을 가시지만, 그 길이 모든 사람을 살리는 길이고 부활로 이어지는 길임을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우리도 힘든 시기를 살고 있습니다. 탄식이 나옵니다. 그래도 하나님을 꼭 붙들고 가기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가신 길이니 우리도 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꿋꿋하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참빛 식구들 되시기 바랍니다.-河-

십자가 십자가 (2)

화목하게 된 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 가운데 으뜸을 뽑으라면 하나님과의 화목 또는 화해(reconciliation)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했는지 세 가지 경우로 설명합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세 가지 표현이 점점 심각해 지더니 나중에는 “원수”라는 강력한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그 정도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심각했습니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하나 뿐인 아들을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내려 보내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같은 예수님이셨는데 자기를 통째로 비어서 종의 형체, 즉 죄의 종이 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죄에게 종이 되었고 성경에서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했으니 죽음에 이를 수 밖에 없는 인간을 구하기 위해서 우리와 똑같은 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지불해야 할 죄의 값을 예수님께서 대신 지불하셨습니다. 그 결과 죄로 인해서 막혀 있던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이것을 “화목” 또는 “화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에 참여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나를) 위해서 죽으셨음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이 객관적인 사건이라면, 믿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참여하는 주체적인 결단입니다.

 

화목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탈라게>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와서 변화를 도모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 하나님과의 화목은 우리가 행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행하신 사역입니다. 따라서 은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십자가는 가로목과 세로목이 만나는 지점을 꼭 붙들어 매거나 그곳에 못을 쳐서 고정시킵니다. 십자가의 한 중심에 하나됨, 화목이 위치한 것입니다. 길이가 길고 땅에 고정시키는 세로목이 하나님과의 관계라면, 길이가 짧고 세로목에 매달려있는 가로목은 이웃과의 관계를 뜻할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 그리고 십자가 한 중심에서 하나님 뿐만 아니라 이웃과의 화목도 이룰 수 있습니다.

 

요즘처럼 힘들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위로를 얻습니다. 불안과 두려움으로 부숴진 우리 마음도 십자가를 통해서 회복하고 다시금 힘을 얻습니다. 사회적 거리 두기의 외롭고 지루한 시간도 홀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보면서 견딥니다. 우리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힘들기에 모든 사람이 힘을 합쳐서 이 위기를 이길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화목케 하고 결국 생명으로 회복하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믿습니다. 할렐루야!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