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4)

믿음의 역사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항상 기억하면서 기도했습니다. 데살로니가의 모든 교인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는 것 자체가 바울에게 감사한 일입니다. 그만큼 바울에게 데살로니가 교회는 특별했습니다. 폭력배까지 동원한 유대인들의 핍박으로 밤중에 데살로니가를 떠났건만, 그곳에 뿌려진 복음의 씨가 멋지게 열매를 맺고 있다는 소식에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살전3:8)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바울이 감사하는 두 번째 이유는 데살로니가 교회가 신앙 안에서 올바로 자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믿음, 사랑, 소망의 세 가지 덕을 온전히 간직했습니다. 개인은 물론 교회가 올바른 토대 위에 신앙을 세워갔습니다. 믿음, 사랑, 소망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각각의 요소들이 나타내는 결과(열매)가 더 소중합니다. 믿음에 역사가 따릅니다. 사랑에 수고, 소망에 인내가 있었습니다.

 

우선 믿음의 역사입니다. 여기서 믿음은 우리가 매주 함께 고백하는 사도신경에 잘 나타납니다. 전능하시고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의 삶은 물론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심을 믿습니다. 지금도 살아서 일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원래 하나님과 같은 분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의 죄와 허물이 용서받고,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부활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께 나갑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우리와 하나님을 가로막던 죄와 허물이 사라졌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우리를 돕고 인도할 보혜사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이제는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십니다. 이처럼 우리의 믿음은 삼위 하나님에 대한 확신입니다.

 

믿음의 역사에서 “역사”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믿음에 반드시 합당한 행위가 따라야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행위는 내면적인 믿음이 겉으로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또한, 믿음의 역사는 믿음이 갖고 있는 능력입니다. 믿음이 개인의 삶과 세상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표출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역사는 믿음을 통해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통로가 바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다음 한 주간 우리 삶과 세상에서 믿음의 역사를 보고 경험하기 원합니다. -河-

데살로니가전서 (3)

바울의 감사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생각하면 감사가 먼저 나왔습니다. 3주동안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자신을 초대했던 야손은 물론 그리스의 고위층 귀부인들까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약 성경에서 예언한 메시아임을 증명해 보이고, 자세히 풀어서 설명하고, 때로는 논쟁하고 선포했는데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복음의 능력이 데살로니가에 임한 것입니다.

 

하지만, 폭력배까지 동원한 유대인들의 핍박으로 밤중에 도시를 빠져 나와야 했습니다. 마무리를 못한 것 같아서 디모데를 보냈고, 디모데를 통해서 데살로니가 교회의 소식을 들으니 감사가 절로 나왔습니다. 무엇보다, 교회를 세우시는 하나님께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바울이 뿌린 복음의 씨를 정성껏 가꾼 데살로니가 교인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감사했습니다.

 
바울의 감사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한 기도로 표현되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를 위해서 항상 기도했습니다.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보낸 편지에 어울리는 바울의 고백입니다. 바울의 기도에서 제외된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자나깨나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와 그곳에 남겨둔 성도들 생각입니다. 바울이 그들을 기억했습니다.
바울이 성도들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항상 기도한 이유가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바울이 전한 복음을 열심히 실천하고 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은 신앙의 세 가지 기둥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그들의 신앙을 믿음, 소망, 사랑 위에 세우고 있습니다.

 
바울이 감사하는 또 한 가지 이유는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 교회와 교인들을 택하셨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신앙과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택하심이 증명된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살전 1:2-4)은 감사한다는 주동사를 중심으로 기도 속에서 교회를 기억하고, 교회의 믿음을 기억하고, 선택하심을 확인해 주는 세 가지 현재 분사 구문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앞으로 3주 동안 데살로니가 교회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요청되는 세가지 신앙의 덕목들(믿음, 사랑, 소망)을 차례로 살펴봅니다. 첫째로 믿음의 역사입니다. 믿음에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역사는 행함이라는 뜻입니다. 행함이 없다면 죽은 믿음입니다. 내면의 믿음도 중요하지만, 믿음이 외적으로 표현되는 행동과 삶도 똑같이 귀합니다. 신앙과 삶의 일치입니다.

 
믿음의 역사는 믿음을 통해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가리킵니다. 개인적으로, 공동체적으로, 세상 속에서 믿음이 일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믿음이 아니면 불가능한 것들이 실제로 나타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한 주간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믿음을 보기 원합니다. 믿음과 행동이 하나가 되어서 예수님을 닮은 그리스도인이 되길 바랍니다.-河-

데살로니가전서 (2)

데살로니가전서는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중에 세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첫 번째 편지입니다. 빌립보에 이어서 마게도냐 지방의 수도인 데살로니가에  바울이 개척한 데살로니가 교회가 멋지게 자라고 있었습니다. 고린도에 머물면서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신약성경 가운데 매우 이른 주후 51-52년경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시기와 핍박으로 서둘러 데살로니가를 떠나야 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전한 복음의 씨가 데살로니가에 뿌리를 내리고 싹이 나서 귀한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경건한 사람들과 헬라의 귀부인들, 핍박을 무릅쓰고 바울을 맞이했던 야손과 같은 성도들의 섬김과 희생으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멋지게 자랐습니다. 그들이 갖고 있는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에 대한 소문이 인근 지역까지 퍼질 정도였습니다. 바울은 이들의 믿음에 대해서 감사하고 칭찬합니다. 더욱더 하나님 백성답게 거룩한 삶을 살 것을 부탁합니다. 또한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질문이 있었기에 이에 대해서도 알려줍니다.

 

5장밖에 되지 않지만, 데살로니가전서에는 교회를 향한 바울의 사랑이 넘칩니다. 제국의 도시 한 가운데서 영적 싸움을 벌이는 데살로니가 교회가 염려되어서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말씀이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에 등장합니다. 책망할 것도 별로 없고, 교회 안에 들어온 이단을 조심하라는 말도 없고, 감사와 기도 그리고 칭찬이 데살로니가전서 말씀의 특징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도 여느 바울서신처럼 일반적인 편지 양식을 따릅니다. 인사말에서는 편지를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 그리고 은혜와 평강으로 문안합니다. 바울과 그의 동역자 실루아노(실라)와 디모데가 편지를 보내는 사람들이고,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들로 구성된 교회가 편지를 받는 수신인입니다. 개인에게 보내는 편지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에 주시는 편지요 말씀입니다. “은혜와 평강”은 바울이 보내는 편지에 단골로 등장하는 인사말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생각하면서 항상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단순한 감사가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감사했습니다. 의례적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기도할 때마다 감사했다는 것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진정성있게 하나님의 교회로 자라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기억했습니다. 바울의 마음에 데살로니가 교회와 성도들이 항상 있었습니다. 우리도 교회와 참빛 식구들을 기억하며 기도할 때마다, 감사할 것이 많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河-

데살로니가 전서 (1)

데살로니가 교회

 

마케도니아 지방의 수도였던 데살로니가는 매우 유서 깊은 도시였습니다. 주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의 장군이었던 카샌더(Cassander)가 세웠는데, 카샌더는 자신의 아내이자 알렉산더대왕의 이복동생 이름을 따서 그곳을 데살로니가라고 불렀습니다. 주전 167년에 로마가 데살로니가를 점령하면서 마케도니아 지방의 수도로 발전했습니다. 훗날 아우구스티누스 황제를 지지한 덕분에 “자유도시 (free city)”로 지정되면서 정치 경제는 물론 군사 종교까지 자치적인 지위를 누렸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복음을 전할 당시에 인구가 10만에 육박했고 아테네에 이어서 두 번째로 큰 그리스 도시였습니다.

 

데살로니가는 천혜의 항구도시였습니다.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중심에 위치하였기에 무역과 군사의 요충지로 발달했습니다. 멜레티우스라는 사람은 “자연이 변화되지 않는 한 데살로니가는 부와 행운을 잃지 않을 것이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데살로니가는 자유도시라는 이름에 걸맞게 시민들로 구성된 공회 (citizen assembly)가 있었고, 다섯 명의 최고 집정관으로 구성된 행정관들이 다스렸습니다. 본문에 “읍장”이 나오는데 이 사람이 집정관 가운데 한 명일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종교는 로마제국과 로마 황제를 숭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유대인들을 추방했던 로마와 달리 유대인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회당에서 종교활동을 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중에 세웠습니다. 빌립보에 교회를 세운 바울 일행은(디모데와 실라) 빌립보에서 90마일 떨어져 있는 데살로니가에 도착했고, 유대인 회당에서 안식일마다 세 번 성경을 강론하고 뜻을 풀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은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구약을 근거로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행 17:2-3).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메시아(그리스도)가 곧 예수님이심을 보여준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에 살고 있던 경건한 헬라인들과 귀부인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들은 이미 유대인들로부터 하나님에 대한 말씀을 전해 듣고 유대교로 개종해서 하나님을 섬기던 사람들인데, 바울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다시 한번 기독교로 개종한 것입니다(행 17:4).

 

유대교를 믿던 사람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에 위기의식을 느낀 유대인들이 불량배를 동원해서 바울이 머무르던 야손의 집에 쳐들어옵니다. 다행히도 바울 일행은 그곳에 없었습니다. 야손과 형제들을 읍장에게 끌고 갔습니다. 바울 일행이 로마 황제 숭배가 아닌 예수님을 섬기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읍장도 깜짝 놀랐지만, 바울 일행이 도시를 떠났다고 생각하고 보석금을 받고 야손을 풀어 줍니다. 여느 교회와 마찬가지로 데살로니가 교회도 우여곡절 끝에 세워졌지만, 앞으로 우리가 살펴보게 되듯이 매우 모범적으로 자라갔습니다. 할렐루야 -河-

탕자의 비유 (7)

아버지 하나님

 

탕자의 비유에 대한 마지막 시간입니다. 탕자의 비유는 프리즘을 통과한 빛이 여러 가지 색깔을 띠듯이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고 했습니다. 탕자의 비유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각각 특징이 있었고, 그들의 말과 행동도 특별했습니다.

 

읽는 관점에 따라서 둘째 아들뿐 아니라 첫째도 탕자이기에 “탕자인 두 아들의 비유”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앞에 나온 잃은 양과 잃은 은전의 비유에 맞춰서 “잃은 두 아들의 비유”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를 떠난 둘째 아들만 탕자가 아니라, 집에 있으면서도 아버지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던 큰아들도 탕자라는 사실입니다.

 

지난 두 시간에 걸쳐서 살펴보았듯이 우리에게 큰아들의 모습이 많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팔아서 집을 떠나고 먼 나라에 가서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쓴 둘째 아들은 특별한 경우입니다. 둘째 아들처럼 실제로 망가지지 않지만, 큰 아들이 갖고 있던 시기, 질투, 미움, 불만과 원망이 숨겨져 있습니다. 동생을 향한 경쟁의식과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무시하는 교만과 자기의가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처사에 대한 불만을 가질 수 있습니다. 큰아들처럼 열심히 하나님을 믿고 섬겼는데 자기에게 돌아온 몫이 적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자신보다 망나니 동생을 위해서 잔치를 벌여 주시고 더 잘해 주시는 것 같습니다. 거기서 오는 섭섭함입니다. 큰아들처럼 집밖에서 화를 내지는 않아도 마음속에 갖고 있는 신앙의 회의일 수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둘째 아들과 큰아들을 모두 사랑했습니다. 자신의 재산을 없애고 집에 돌아온 둘째를  뛰어나가서 맞아 주었습니다. 종이 아니라 아들의 지위를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자신에게 불만을 갖고 집밖에서 화를 내는 큰 아들에게도 찾아와서 “아들아”하고 불러 주셨습니다. 큰아들이 아버지와 항상 함께한 것을 알려하셨고, 아버지의 것이 모두 큰아들의 것이라고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자상하고 세심하신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점에서 탕자의 비유는 “사랑 많은 아버지의 비유”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경험하길 원했습니다. 아무리 잘못했어도 집으로 돌아온 아들을 맞아주고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화를 내는 큰아들에게 찾아와서 곁에서 그를 위로해 주시고 새로운 길을 열어 주십니다. 우리가 믿고 오늘 예배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한 걸음 더 나가서 감히 아버지를 닮기 원합니다. 비유 속의 아버지를 온전히 닮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누구든지 맞아 주는 넓은 마음, 자녀들을 인격적으로 대하고 끝까지 믿어주는 진정한 사랑, 먼저 다가가서 위로하고 화해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닮기 원합니다. 탕자의 비유 설교가 오늘로 마무리되지만, 함께 나눴던  말씀이 우리 안에서 계속 메아리치길 원합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