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식물들 (3): 백향목

성경에서 자주 등장하는 식물(나무) 가운데 하나가 백향목(cedar tree)입니다. 신구약 성경을 통틀어서 70회 정도 언급됩니다. 백향목은 상록수의 일종으로 130피트(약 40미터)까지 높이 자랍니다. 길게는 3천 년 정도를 살 수 있다니 현재 있는 백향목은 예수님께서 오시기 훨씬 전부터 존재했던 나무들입니다.

 

백향목은 히말라야를 중심으로 지중해 연안 레바논까지 서식합니다. 워낙 높고 곧게 자라기에 건축에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서까래를 비롯한 주요 건축물에 백향목이 제격이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백향목의 높이는 위엄의 상징이어서, 고대 바벨론을 비롯해서 신을 섬기는 신전의 입구나 주요 구조물에 백향목을 사용했습니다. 백향목의 잎사귀나 줄기는 향을 만드는 재료로 쓰였습니다.

 

성경에서도 다윗과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왕궁과 성전을 지을 때 레바논산 백향목을 수입했습니다. 솔로몬은 레바논왕 히람과 계약을 맺고 백향목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았습니다. 하지만 레바논의 백향목은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나라의 교만함을 상징하기도 했습니다. 구약 성경의 예언서에는 교만한 왕이나 세상의 제국을 백향목에 비유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백향목의 위엄이 교만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경고의 말씀에도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솔로몬이 아버지 다윗의 유업을 이어서 성전을 건축하는 장면입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온 지 480년이 지났습니다. 이스라엘은 광야 40년과 사사 시대를 지내면서 하나님을 거의 잊어버렸습니다. 급할 때만 하나님을 찾고 평소에는 바알을 비롯한 가나안 토속신을 섬겼습니다. 왕이 없어서 이웃 국가들과 맞설 수 없다는 백성들의 불평을 듣고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셨는데 사울도 제 갈 길로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베들레헴 이새의 아들 다윗을 왕으로 기름부으셨고, 다윗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다윗 왕국을 세웠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법궤를 모실 성전을 직접 짓고 싶었지만, 손에 피를 많이 묻힌 다윗 자신이 아니라 아들 솔로몬에게 성전 건축을 위임해야 했습니다. 대신 다윗은 성전을 지을 모든 재료를 준비해 놓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버지 다윗의 뜻을 좇아서 솔로몬이 성전을 짓습니다. 화려한 성전입니다. 성전 건축의 마무리로 하나님의 법궤를 모실 지성소를 짓습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입니다. 백향목으로 벽을 가로막아서 지성소를 만들었습니다. 이밖에도 성전의 모든 장식이 백향목입니다. 성경에서 백향목은 성전 건축 뿐만 아니라 죄를 깨끗이 씻는 정결 예식에도 사용되었습니다(레14:6). 의인을 백향목에 비유하는 말씀도 있습니다(시 92:12). 우리도 백향목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귀하게 사용되기 원합니다. -河-

성경의 식물들 (2): 살구나무

지난 시간의 떨기나무에 이어서 오늘은 살구나무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살구나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샤케드>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히브리어 <샤케드>는 살구나무가 아니라 아몬드 나무입니다. 개역 개정에서 살구나무라고 한 것은 잘못된 번역입니다. 도리어 성경에서 살구나무는 사과나무와 관련이 있습니다(아가서 2:3).

 

아몬드 나무는 이스라엘이 위치한 팔레스타인과 중동에서 흔히 볼 수 있고 16피트(약5미터) 정도까지 자라는 큰 나무입니다. 아몬드 나무는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는 1월이나 2월에 흰 꽃을 피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벚꽃이 피면서 봄이 오듯이 이스라엘에서는 아몬드 꽃이 피면서 봄이 찾아왔습니다. 겨울을 잘 지켜냈으니 봄을 맞을 준비가 되었다는 표시였습니다.

 

갑자기 아몬드 나무로 바꾸면 생소하기에 잘못된 번역인 줄 알지만, 개역 성경을 따라서 “살구나무”로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개역 성경에서 살구나무는 여섯 번 등장합니다. 하란의 외삼촌 집에서 지내던 야곱이 품삯으로 양을 받기로 하면서 살구나무를 비롯한 버드나무 등의 껍질을 벗겨서 양들에게 보이니 그들이 얼룩진 양을 낳았습니다(창30:37).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면서 야곱이 가족을 이끌고 아들 요셉이 총리로 있는 이집트로 피난갈 때, 이집트에서 구할 수 없고 가나안 땅의 특산물인 아몬드(개역 성경은 아몬드를 순우리말인 감복숭아 나무라고 번역함)를 가져갔습니다(창 43:11).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성막을 지었는데, 성막에서 사용하는 순금 등잔대 받침에 살구꽃 형상을 새겼습니다. 이것은 살구나무와 같은 발음을 가진 히브리어 동사 <샤카드 (“지키다”)> 때문일 것입니다. 등잔대의 살구꽃 형상은 하나님께 나오는 이스라엘을 지켜주시겠다는 약속을 뜻했습니다 (출37:19).

 

레위인 고라가 성직에서 소외되었다는 이유로 아론과 모세에게 반기를 든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땅이 갈라지면서 고라와 그를 따르던 무리를 삼켰습니다. 그래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하니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명하셔서 지파별로 지팡이를 가져와서 증거궤 앞에 하룻밤을 놓아두도록 했습니다. 다음 날이 되자 아론의 지팡이에서 싹이 나고 살구 열매가 열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론을 제사장으로 세우시고 그를 주목하신다는 뜻이었습니다(민 17:8).

 

마지막으로 살구나무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예언자로 부르실 때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살구나무(샤케드) 환상을 보여주셨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끝까지 지켜보겠다(샤카드)는 뜻이었습니다. 이처럼 성경의 살구나무(아몬드나무)는 하나님의 보살핌과 연결됩니다. 또한 하나님 백성이 주님 앞에서 깨어있어야 함을 일깨워줍니다. 겨울이 지나고 가장 먼저 피는 살구꽃처럼 새달을 맞는 우리의 신앙도 꽃피우길 원합니다. -河-

성경의 식물들 (1): 떨기나무

우리가 사는 캘리포니아와 성경의 주요 무대인 이스라엘 사이에 공통점이 많습니다. 두 지역 모두 지중해성 기후로 분류됩니다. 우선, 비가 오는 우기와 비가 오지 않는 건기의 구분이 뚜렷하고 기간도 같습니다. 성경에서 이른 비는 우리 지역처럼 가을에 오는 비를 뜻하고 늦은 비는 우기가 끝나는 봄에 오는 비를 가리킵니다. 낮보다 밤에 기온이 내려가는 것도 같습니다. 한국에서 보기 드문 종려나무를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스라엘을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에 비유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포도나무, 우리를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에 비유할 정도였습니다. 포도나무는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실수였습니다. 우리 지역에도 포도나무가 많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예수님께서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겉은 번드르르하지만 본질을 상실한 예루살렘 종교의 종말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우리 지역에서는 무화과나무는 물론 무화과 열매도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캘리포니아에 살기 때문에 성경의 독특한 기후와 생태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도 감사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특히 세 번째 날에는 땅과 육지를 나누시고 땅에 식물이 자라게 하셨으니 온 세상이 초록으로 뒤덮였을 것입니다. 이러한 창조의 신비로운 능력과 지혜를 반영하듯이 세상에는 수많은 식물이 존재합니다. 성경에도 당시 팔레스타인의 대표적인 식물들이 100여 종 이상 등장합니다. 씨가 뿌려진 곳에서 평생을 지내다가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 자신의 사명을 다하는 매우 순종적인 생명체들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두 달여 성경에 나오는 식물들과 그와 연관된 성경 본문을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성경 속의 식물들은 큰 관심을 끌지 못합니다. 대신, 인물이나 사건을 설명하는데 보충 재료로 동원될 뿐입니다. 그렇지만 성경 속의 식물 중에는 하나님 말씀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거나, 겨자씨처럼 식물의 특성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번 연속 설교는 그런 식물들과 그와 연관된 본문을 함께 살펴보는 시간입니다.

 

오늘 살펴볼 떨기나무는 팔레스타인 광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시나무 덤불입니다. 강인한 생명력을 보여주는 일종의 사막 식물입니다.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킨 모세는 떨기나무 수풀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떨기나무가 화염에 휩싸였지만 타지 않았습니다. 흔히 볼 수 있는 떨기나무에 하나님께서 불꽃으로 임하신 것입니다. 평범한 떨기나무가 모세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상징이 되었고 이것은 훗날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으로 연결됩니다. 우리의 일상이 하나님께서 임하시는 거룩한 곳이 되기 원합니다. 일상 속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눈으로 뵙고 만나기 원합니다.-河-

돌보는 교회 (6)

<돌보는 교회>라는 올해 표어에 맞춰서 말씀을 나누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첫 번째 두 주는 자신을 돌보는 삶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롬12:1-2).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보는 것은 다시 변화를 받아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삶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 예배가 되는 것이 자신을 돌보는 마지막 목적입니다.

 

세 주에 걸쳐서 공동체를 돌보는 것에 대해서 배웠습니다(롬12:3-16). 믿음의 분량과 은사대로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를 세워갑니다. 이를 위해서 거짓 없는 사랑, 악이 아니라 선에 속하고, 형제를 사랑하며 서로 먼저 존경하고, 성도의 쓸 것을 공급하며 나그네를 환대하고,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며, 즐거워하는 자와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와 함께 울어야 합니다. 서로 마음을 같이해서 낮은 곳에 처하며 지혜롭게 교회를 돌보라는 교훈도 있었습니다. 우리 힘으로 교회를 돌보는 것에 한계가 있으니 기도하면서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오늘은 마지막 시간으로 세상을 돌보는 것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롬12:17-21). 우리의 삶은 궁극적으로 세상을 향해야 합니다. 세상 속에서 선교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을 돌보는 방법에 대해서 바울이 구체적으로 알려줍니다.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고 저주하지 않는 것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박해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어려움을 겪는 것입니다. 신앙에 대한 도전이기에 견디기 어렵고 때로는 수모를 당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그들을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라는 권면입니다. 박해하는 것은 누가 보아도 악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박해하는 자들을 저주하면 똑같이 악으로 갚는 것이니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선을 도모해야 합니다. 선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입니다. 가능하면 모든 사람과 화목하는 것이 선입니다.

 

우리가 나서서 원수를 갚을 것도 아닙니다. 대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자가 되셔서 악에 속한 사람들, 박해하고 원수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을 심판하시고, 하나님 백성의 설움을 갚아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대적하는 자들이 주릴 때 먹이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면서 축복할 뿐입니다. 이것이 원수의 머리 위에 숯불을 쌓아놓는 격이 될 것입니다. 머리에 숯불을 쌓아두는 것은 구약의 전통입니다(잠25:21-22). 비록 원수라도 그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라는 것입니다. 원수를 축복하고 섬길 때 그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고 회개의 자리로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속에서 빛으로 살고, 세상을 돌보는 참빛 식구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河-

돌보는 교회 (5)

돌보는 교회라는 올해 표어를 따라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자신을 돌보고, 교회를 돌보며, 이웃을 돌보는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핏값을 주고 사신 우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제사로 드려야 합니다. 날마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이지 분별하면서 자신을 돌봐야 합니다.

 

가정과 교회를 포함한 공동체를 돌보는 것도 필수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와 믿음의 분량대로 공동체를 섬깁니다. 우리 각자가 예수님의 몸을 이루는 지체라는 마음으로 각자에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합니다. 서로 거짓없이 사랑하고, 악이 아니라 선에 속해야 합니다. 형제를 사랑하고 서로 우애하며 존경하기를 먼저 해야 합니다. 사랑받기를 기다리거나 돌봄을 기대하지 말고 먼저 사랑하고 돌보는 것입니다. 우리 서로 이렇게 돌봄을 실천하면 우리가 속한 공동체가 하나님 나라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힘으로 공동체를 돌보면 쉽게 지칩니다. 그리스도인의 돌봄은 신앙에서 비롯되어야 합니다.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겨야 합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커다란 어려움이 닥쳐도 견뎌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끊임없는 기도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공동체 섬김에 대한 실제적인 교훈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고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입니다. 로마 교회는 비교적 풍부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어려운 성도들이 있었을 텐데 그들을 도우라는 권면입니다. 대도시 로마를 찾는 나그네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들도 대접하라는 부탁입니다. 이것은 바울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씀입니다. 바울이 가는 곳마다 그를 대접하는 손길이 있었기에 전도 여행이 가능했습니다.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는 말씀은 교회 안팎에 모두 해당합니다. 로마 교회 안의 갈등은 서로 시기하고 미워하는 관계로 발전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면 불평하고 미워하며 심한 경우 서로를 박해했을 것입니다. 교회 밖에서의 핍박과 박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처럼 박해하는 자를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라고 부탁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미덕입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와 함께 우는 것은 한마음을 품고 서로를 긍휼히 여기라는 부탁입니다. 말 그대로 공동체임을 마음과 몸으로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앞에서는 물론 빌립보 교회에도 부탁했던 대로 마음을 같이 하라고 말씀합니다. 마음을 같이하고 서로를 겸손한 마음으로 대하는 것은 그리스도 교회에 꼭 필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공동체가 이렇게 세워집니다. 우리가 서로 돌볼 때 이룰 수 있는 꿈의 공동체입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