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2)

은혜와 평강 (2)

대부분 바울 서신의 서두에 “은혜와 평강”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도 예외가 아닙니다:“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1절). 데살로니가전서와 비슷한 시기에 기록된 갈라디아서도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갈1:3)고 했습니다.

 

은혜와 평강은 바울이나 기독교인들만 사용하던 용어가 아니라 당시 편지를 쓸 때 자주 사용하는 관용표현이었습니다. 대신, 로마나 그리스의 신들이 은혜를 베풀어준다고 생각했고, 평강은 로마의 평화(“팍스 로마나”)에서 알 수 있듯이 로마 황제가 주는 평화였습니다. 로마라는 세상 제국이 주는 은혜와 평강이었던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바울은 은혜와 평강의 근원을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았습니다. 세상이 주는 은혜와 평강과 구분한 것입니다.

 

은혜에 대해서 지난 시간에 배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부족함이 없고 영원한 선물입니다. 자격이나 조건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말 그대로 은혜요 선물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은혜가 우리를 변화시킨다고 했습니다. 은혜에 깃든 힘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은혜에 깃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 가운데 으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입니다.

 

은혜(카리스)가 헬라어 개념에 가깝다면, 오늘 배울 평강(에이레네)은 샬롬이라는 히브리어와 연결되는 구약의 개념입니다. 히브리어 샬롬은 범위가 무척 넓습니다. 개인적인 평안, 형통, 육체와 정신의 건강을 모두 포괄합니다. 동시에 가족은 물론 국가 공동체에 임하는 평화를 가리킵니다. 갈등이나 다툼없이 하나 된 상태입니다. 이처럼 히브리어 샬롬은 모든 상황 개인의 마음과 몸까지 완벽한 상태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최고의 모습이 곧 샬롬입니다.

 

바울이 평안으로 인사할 때는 “관계의 회복”이라는 의미가 강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담을 쌓고 살 때 마음의 갈등과 미움이 가득 찼습니다. 무엇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화목했을 때, 우리 존재 깊은 곳에 자리 잡았던 문제들이 해결되고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로마 시대 당시의 평화는 제국의 힘을 키워서 전쟁에서 이기고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힘을 통한 평화였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평강은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함, 행복함, 자신감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마음과 삶의 모습입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빼앗을 수 없는 평안입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14:27)이라고 하셨듯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리스도의 평안입니다.-河-

데살로니가전서 (1)

은혜와 평강 (1)

 

매년 하반기에는 신약성경 가운데 한 책(冊)이나 장(章)을 선택해서 공부했습니다. 올해는 지난 8월에 아침마다 함께 읽었던 데살로니가전서 1장을 차근차근 공부할 예정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는 사도 바울이 당시 마케도니아 지방의 수도에 세워진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갈라디아서와 함께 신약성경 가운데 초기(주전 50년 무렵)에 쓰였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선교를 마치고 로마 제국이 만든 하이웨이를 따라서 데살로니가에 도착했습니다. 데살로니가는 아름다운 항구 도시로 국제 무역이 성행했습니다. 그곳에는 유대인들의 회당도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에 도착한 바울 일행은 유대인의 회당에서 3주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행 17:1-10).

 

구약 성경에서 예언한 그리스도(메시아)가 바울이 전하는 나사렛 예수임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사야 53장을 비롯한 구약의 예언대로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셨고 사흘 만에 살아나셔서 온 세상의 구주가 되셨다고 전파했습니다. 바울의 전도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니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력한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의 시기가 시작되었고, 바울과 예수님을 믿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폭력배들을 사주해서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바울 일행(데살로니가 전서 서두에 등장하는 실라와 디모데)은 몸을 피했지만, 예수님을 믿게 된 야손과 형제들을 잡아서 데살로니가를 다스리는 총독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당시 데살로니가는 로마 제국에서 일정한 자유를 누리는 자치 도시였습니다. 세상을 뒤흔드는(upside down)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로마 황제 대신에 예수님을 주(主)로 믿는다고 했습니다. 결국 보석금을 내고 풀려났지만, 바울은 밤중에 피신해서 남쪽의 베뢰아로 떠나야 했습니다. 나중에 베뢰아에 바울이 있다는 소식을 들은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베뢰아까지 내려와서 바울을 죽이려 했습니다. 바울은 남쪽 아가야 지방 아테네로 몸을 피합니다.

 

이처럼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어려움 속에서 세운 교회였습니다. 1년 반 동안 머물렀던 고린도나 3년을 머물던 에베소에 비하면 짧은 기간 동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에 복음의 씨앗이 확고하게 심어졌고, 그것이 매우 멋진 교회로 결실을 맺었습니다. 바울은 편지의 서두에서 데살로니가 교회를 극찬합니다. 손색이 없는 교회가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데살로니가전서 1장을 함께 공부하면서,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은혜와 능력을 깊이 생각하기를 원합니다. “든든하게 서게 하소서”라는 올해 우리 교회 표어에 맞춰서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고 자랑스러운 신앙 공동체의 모습을 배우고 우리도 멋진 교회를 세우기를 원합니다. -河-

 

믿음은 (5)

지난 다섯 주에 걸쳐서 우리의 믿음을 다시 돌아봤습니다. “든든히 서게 하소서”라는 올해 표어에 맞춰서 나눈 말씀이었습니다. 믿음이 무엇인지 그리고 믿음을 어떻게 우리 삶에 적용할 수 있을지를 놓고 공부했습니다.

 

우리 교회가 매주 고백하는 사도신경을 따라서 삼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확실하기를 바랍니다. 창조주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 지금도 우리 가운데 계시는 성령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우리 신앙의 뿌리요 터전입니다. 공동체와 하나님 나라에 관한 믿음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는 믿음은 은혜이고 선물임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은 것으로 생각한다면, 믿음이 좋으면 교만해질 수 있고 행여나 믿음이 부족하면 자책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 같아도 결국 돌아보면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믿음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둘째 시간에는 믿음은 신비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을 알고 믿을 수 없습니다. 신비로움이라는 여백(room)을 남기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갖는 겸손한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여백에서 일하실 가능성이 큽니다. 믿음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도 신비로움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또한, 믿음은 힘이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을 통해서 힘과 용기를 얻습니다. 말 그대로 능력과 힘, 장애물을 뛰어넘는 위력, 일을 끝까지 해내는 끈기와 성취력을 경험합니다. 이처럼 믿음이 실제로 우리 삶에 효력이 있음을 배웠습니다.

 

세 번째 시간에는 믿음은 다림줄이라고 했습니다.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파편처럼 흩어진 신앙과 삶을 하나님께서 내리신 다림줄 아래로 모으기로 결심했습니다.

 

네 번째 시간에는 믿음을 흘려보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무엇이든지 독점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는다는 말씀도 기억합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유도 세상에 복이 되길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고인 물이 아니라 365일 흐르는 생수와 같은 믿음을 갖기로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믿음은 하나님과 함께 걷는 동행입니다. 창세기의 에녹은 하나님과 함께 걷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에녹과 함께 하셨고, 에녹도 하나님 편에 서서 걸었습니다. 하나님과 에녹의 마음과 생각이 같았습니다. 좋은 일만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힘들고 외롭고 절망 가운데 있었을 때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때도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에녹의 목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녹을 데려가십니다. 죽음의 관문을 통과하지 않고 하늘로 올라가는 복을 누린 것입니다. 에녹은 그 정도로 하나님과 친밀했습니다. 우리도 에녹처럼 하나님과 더불어 믿음의 길을 걷기 원합니다.

 

믿음 위에 굳게 서서 신앙과 인생의 여정을 힘차게 걸어갑시다.-河-

믿음은 (4)

지금부터 4천년 전, 아브라함은 갈데아 우르라고 불리는 바빌론 땅에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가족을 이끌고 북쪽의 하란이라는 곳으로 이주합니다. 가족의 안전과 먹거리를 생각해서 살던 곳을 떠났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당시는 아브람)을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12:1-2). 아브라함이 갈데라우르에 있을 때 하나님 말씀을 들었다는 말씀도 있습니다(행7:2).

 

아브라함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길을 떠납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땅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떠나는 길입니다. 훗날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리는 절대 순종과 더불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게 만든 사건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축복을 약속하셨고, 아브라함 자신이 복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12:3)고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재차 확인하셨습니다. 나이가 많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아들이 태어날 것을 예고하시면서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한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창18:18)고 질문하듯이 강조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순종해서 아들 이삭을 바친 후에도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라”(창22:18).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을 기억하면서 말씀을 풀어갑니다. 아브라함은 말 그대로 믿음의 조상이었습니다. 그의 행위도 믿음에 걸맞게 훌륭했지만, 고향을 떠난 것과 이삭을 바친 것은 하나님을 신뢰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과 연결됩니다.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자손”이 단수로 쓰였기에 2천 년 후에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가리킨다고 했습니다:“이 약속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3:16).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세상의 복이 되었듯이,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도 믿음 안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고 똑같이 복이 됩니다. 아브라함이 유대인을 넘어서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통해서 복을 받고, 우리는 복을 흘려보내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河-

믿음은 (3)

믿음에 관해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으로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내가 믿는 것 같지만, 믿음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또한 믿음은 복음의 신비로 들어가는 열쇠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때 믿음이 구체화되고 복음의 신비 속으로 들어갑니다. 믿음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합니다. 그 순간 신비에 싸여 있던 복음을 체험하게 됩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힘과 능력을, 믿음을 통해서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믿음이 옳고 그름, 선과 악을 분별하는 능력임을 공부하겠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남유다 출신이지만 북이스라엘에 올라가서 하나님 말씀을 전했습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2세가 통치하고 있었는데 경제적으로 부흥했지만, 빈부격차가 컸습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힘없는 백성들을 학대하고 착취했습니다. 정의가 무너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모스 선지자에게 다림줄(plumbline)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다림줄은 끝에 무거운 추를 매단 줄을 가리킵니다. 다림줄 자체가 납이나 주석을 뜻하는 히브리어 <아나크>인 것과 연결됩니다. 벽을 쌓을 때, 위에서 아래로 내려서 벽의 균형을 맞추는 역할을 합니다.

 

아모스는 다림줄을 드리우고 성벽을 쌓고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다림줄을 손에 들고 서 계시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한 가운데 다림줄을 드리워 놓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보나 마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과 삶은 하나님의 다림줄에 미치지 못하고 삐뚤삐뚤 일 것입니다. 돌이키지 않으면, 심판이 임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예고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모스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불과 20여 년 후에 북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게 멸망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하나님의 다림줄을 내린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우리가 살고 있는 요즘 시대에 다림줄을 내린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요? 아모스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말씀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드리우는 다림줄에 우리의 신앙과 삶을 맞추기 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장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되어서 온전한 사람을 이루기를 부탁합니다. 사람의 속임수, 간사한 유혹, 온갖 그릇된 풍습에 쉽게 넘어가는 어린 신앙을 극복하고 예수님을 닮은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가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옳고 그름을 헤아리는 분별력이 요청됩니다. 믿음이 분별력입니다. 믿음이라는 다림줄을 갖고 우리 자신은 물론 세상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지금도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과 삶의 길을 걷기 원합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