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 (7)

세 가지 증언

 

사도 요한이 전하는 복음은 믿음과 사랑이 함께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진리가 무엇인지 분별하는 믿음입니다. 어려움이 닥쳐서 분열된 공동체가 다시 하나되는 비결은 사랑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로부터 낳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형제 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매우 아름다운 일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우리 안에 임하신 하나님을 볼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갖고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5:4).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라면 세상을 이길 수 없다고 다시금 선언합니다(요일 5:5). 여기서 세상은 우리가 사는 자연 또는 터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세력이 활동하는 영역 또는 악한 세력이 지배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사탄의 시험을 이기시고 귀신들을 쫓아내신 예수님의 능력을 힘입지 않으면 절대로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세상을 이기는 유일한 힘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셋이 있습니다. 첫째는 진리의 영인 성령이 물과 피로 나신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여기서 물은 예수님의 세례를 가리키고, 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입니다. 그렇다면 물과 피는 예수님 사역의 시작과 끝을 뜻합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전반에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음을 강조했습니다. 교회에 들어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하는 악한 세력들이 예수님의 인간적인 요소를 부정했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성령은 예수님께서 단지 육체로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즉 영적인 존재요 진리이심을 증거합니다. 물과 피가 증거하는 예수님의 성육신과 진리의 영인 성령의 증거가 합쳐지니, 두세 증인이 있어야 증언이 사실이라는 구약의 조건과도 일치합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자신의 아들로 증거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변화산에서,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임을 증거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증거합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믿음과 사랑을 통해서 예수님을 세상에 증거할 수 있습니다.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감으로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물과 피로 임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의 영인 성령의 증거, 하나님의 증거, 그리고 우리의 증거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드러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 안에 생명이 임하고, 그 믿음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河-

요한일서 (6)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마지막 두 장에서 믿음과 사랑을 통합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간다고 믿던 우리에게, 믿음과 더불어 사랑이 필수적임을 알려줍니다. 사도 바울이 말했던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갈5:6)과 같은 맥락입니다.

 
마지막 때에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심판의 날을 맞이 할 수 있는 힘은 바로 사랑입니다. 이것이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다는 말씀이 갖는 의미입니다. 믿음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고백이라면, 사랑은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이웃에게 베푸는 믿음의 실천입니다. 이처럼 믿음과 사랑이 함께 갑니다.

 
오늘 본문(5:1-4)에서 다시 한번 믿음과 사랑의 관계를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메시아)이심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이심을 믿을 때 하늘에 속한 자라는 특별한 지위를 얻을 수 있습니다(요일4:2).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다시 태어난(born again) 성도를 가리킵니다(1절). 하나님께서 우리를 낳으셨다니 놀라운 말씀입니다.

 
요한일서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낳았다는 표현이 반복해서 나타납니다. 1) 의를 행하는 것이 하나님에게서 난 자의 특징입니다(2:29), 2)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는 죄를 짓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씨가 성도들 안에 있기에 죄로부터 멀어집니다 (3:9), 3)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서로 나눕니다. 4)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에 있듯이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의 특징은 죄가 아닌 의로운 길을 가고, 사랑을 실천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믿습니다.

 
사도 요한은 다시 한번 형제 사랑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낳은 자라면, 하나님에게서 다시 태어난 다른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의 외적 표시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추상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무리한 명령도 아닙니다:“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3절).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우리 가운데 가장 작은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마25:40)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임을 기억합시다.

 
예수님께서 죄와 죽음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메시아)로 믿는 것이 첫 단추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이웃(형제)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때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 우리에게 임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사랑과 통합되었을 때 역사하는 믿음의 힘입니다. 할렐루야! -河-

요한일서 (5)

–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사랑장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요한일서 4장은 매우 세심하게 하나님 사랑과 우리의 사랑 그리고 믿음을 연결합니다. 첫 번째 문단(1-6절)에서는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분별하길 부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을 인정하고 믿는 것이 하늘에 속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두 번째 문단(7-10절)은 사도 요한의 교훈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온 듯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을 통해서 어떻게 우리에게 임했는지 증명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뿐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그를 화목 제물로 드려지는 실천이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배운 세 번째 문단(11-16절)은 첫째와 둘째 말씀을 합쳐놓은 것 같았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화목 제물로 드려진 예수 그리스도, 우리를 하나님 안에 거하게 하시는 성령까지 삼위 하나님이 등장한 것도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믿음이 꼭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온전해집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지만,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것처럼 느낄 수 있는 길이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도 완성됩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시인하는 믿음이 꼭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은 요한일서 4장의 결론에 해당합니다. 분별하는 믿음과 실천하는 사랑은 마지막 때까지 효력이 있습니다. 믿음과 사랑이 온전히 이뤄지면, 마지막 심판을 담대하게 맞이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담대함의 반대말이 두려움입니다. 누구나 마지막 심판을 생각하면 두렵게 마련입니다. 심판과 형벌이 따를 것이라는 두려움입니다. 사도 요한은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는다고 선언합니다. 사랑이 마지막 심판의 두려움까지 극복할 수 있다면, 삶의 여정에서 마주치는 두려움 정도는 쉽게 이길 것입니다. 사랑의 힘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뿐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그를 화목 제물로 드리시면서 자신의 사랑을 실제로 실천하셨으니, 우리도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이웃과 나눠야 합니다.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입니다.

 

보이는 형제도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형제도 사랑합니다. 하나님 사랑이 형제 사랑 속에서 완성됩니다.

 

우리 믿음에도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믿음은 헛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으로 서로 연결되고, 세상에서 사랑의 파장을 만들기 원합니다. -河-

요한일서 (4)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4장을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분별하라는 말씀으로 시작했습니다(4:1-6). 교회 안에 들어온 미혹의 영을 분리해 내라는 것입니다. 올바른 믿음이 무엇인지 판단하고 그것을 추구하라는 요청입니다. 신앙에서 머리(교리, doctrine)에 해당합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말씀은 사도 요한의 교훈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왔습니다(4:7-10).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도착했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고 화목 제물로 삼으시면서 우리를 향하신 사랑을 증명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를 갖고 있고 현명해도 거기에 사랑이 빠지면 하나님 백성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어려움을 이겨냅니다.

 

오늘 본문은(4:11-16)은 지난 두 시간 동안 살펴본 말씀의 통합입니다. 우리에게 임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것은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의 삼위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시작합니다. 그 믿음이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11절). 여기서 “마땅하다”는 것을 사랑해야 한다는 율법적 요청, 즉 의무로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은 앞에서 소개한 하나님의 사랑을 잘못 이해한 결과입니다. 하나뿐인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고, 화목 제물로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 사랑을 올바로 이해하고 충분히 느끼면,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씀이 의무가 아니라 특권으로 다가옵니다. 분수가 흘러 넘쳐서 물이 아래로 떨어지듯이 저절로 사랑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 요한 당시에 하나님을 직접 보았다는 신비주의자들도 있었고, 자신들만 하나님을 아는 비법을 갖고 있다는 특권 의식에 사로잡힌 이단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구약시대부터 하나님의 형상도 만들지 않았고, 하나님을 보면 죽음을 맞았습니다. 이처럼 기독교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사도 요한이 이단의 그릇된 가르침에 일침을 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길이 있었는데, 그것은 기독교인들이 서로 사랑할 때입니다:“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12절).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 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랑에 참여하는 길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시인하는 믿음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임합니다. 이처럼 사랑과 믿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갑니다. 믿음 안에서 사랑을 실천하고,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보고 느끼기 원합니다. -河-

요한일서 (3)

서로 사랑하라

 

교회에 들어온 또는 밖에서 교회를 흔드는 그릇된 영을 분별하라는 말씀으로 시작한 요한일서 4장은 7절로 오면서 분위기가 바뀝니다. 적그리스도가 아무리 판을 치고 교회를 흔들어도 하나님께 속한 자를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있는 그 어떤 세력보다 크시기 때문입니다.

 

힘들 때일수록 교회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이 모든 두려움을 쫓아내고 교회 안에 침투한 악한 세력들이 활동하지 못하도록 교회를 하나 되게 만듭니다. 사도 요한이 사랑을 강조하는 커다란 이유입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의 사도”답게 요한일서 전반부에서도 사랑을 강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둠을 밝히는 빛인데, 형제를 사랑하면 빛 가운데 거하는 것이고 형제를 미워하면 어둠에 행하는 것입니다(요일2:9-11). 또한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지 말기를 부탁하면서 세상을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사도 요한은 사랑이라는 주제를 갖고 신앙은 물론 형제와의 관계와 세상의 삶을 풀어나갑니다.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심지어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세상을 사랑하게 마련입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빠지고 맙니다. 그런 점에서 사랑은 어거스틴이 말한 대로 지향성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고 추구하느냐에 따라서 사랑이 결정됩니다.

 

사랑에는 진실함과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진실성이 없는 사랑은 아무 힘이 없고 위선적입니다. 행함이 없는 사랑은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예수님께서 진실한 사랑을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최고의 사랑을 직접 실천하신 것입니다 (요15:13).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을 사랑 그 자체로 정의하고 있습니다(요일4:8). 하나님께서 사랑의 근원이고 시작점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지만, 우리 안에서 생기는 힘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서 나눠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이 전파되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사랑을 모르면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을 통해서 세상에 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먼저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그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랑을 받았으니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 사랑을 깊이 묵상하고 느끼는 한 주간이 되길 바랍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