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기도 (5)

속량하리이다

 

하나님 안에서 터닝 포인트를 경험한 시편 기자의 입에서 찬양이 나옵니다. 앞에서 드린 기도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씨름이었다면, 후반부의 찬양은 공동체와 함께 드리는 간증과 고백입니다. 그런 점에서 시편 77편은 탄식과 찬양은 물론 개인과 공동체가 조화를 이룹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면 관심사가 바뀝니다. 크고 높으신 하나님의 시야를 갖게 됩니다. 시편 기자도 주님께서 행하신 옛날 일을 읊조리고 주님의 행사를 낮은 소리로 노래했습니다(11-12절). “작은 소리” “낮은 소리”라는 우리 말 번역처럼 시편 기자가 받은 은혜를 자기 내면에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소리 없이 강한 신앙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을 괴롭히던 문제는 온데간데없고 시인의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하나님께서 하신 일로 가득 찼습니다. 1-10절에는 “나”라는 단어가 주어로 사용되었는데, 후반부로 오니 주어가 “하나님”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전에는 자신을 괴롭히는 것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문제가 자신을 얽매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기도해도 하나님은 온데간데없고 자기에 닥친 문제만 보였습니다. 문제가 하나님과 시인 사이를 가로막고 있어서 나중에는 하나님의 존재,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먹구름이 거치고 파란 하늘이 드러나듯이 하나님이 보입니다. 하나님만큼 위대하신 분이 없습니다. 크게 다가온 문제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하나님의 도(말씀)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로 채웠습니다.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이한 일을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기적입니다. 모든 것에 하나님의 손길이 깃들어 있습니다. 자기 자리에서 하나님을 깊이 만난 시인이 경험하는 기도의 신비(mystery)입니다.

 

주님의 능력을 온 민족 중에 알리길 기도합니다. 요셉과 야곱으로 시작된 주의 백성을 하나님께서 능하신 팔로 속량(redemption)하심을 믿습니다. “속량”은 하나님께서 대신 값을 치르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죗값을 치르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는 구약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하나님의 커다란 계획 속에서 성취된 것입니다. 시편 기자가 자신을 인식(self-awareness)하고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니 하나님께서 베푸신 속량이 눈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감사하며 찬양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 자신은 물론 상황까지 변화시킵니다. 속량(贖良) – 구원의 은혜가 온 세상에 임하길 간절히 바랍니다. 무슨 일이든지 주님께서 함께하신 경이(기적)로 만드는 것도 기도의 힘입니다. 기도의 끝에 찬양이 있습니다. 기도를 넘어서 찬양에 이르는 참빛 식구들 되시기 바랍니다. -河-

2020 기도 (4)

기억하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과거를 기억하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예전에 살던 곳, 만났던 사람들, 그때 일어났던 크고 작은 사건들이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물론 잊고 싶은 기억도 있습니다.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지만, 쉽게 지워지지 않아서 마음고생도 합니다.

 

성경에도 “기억하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주되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근원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의 경우, 400년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했습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도 기억하고 지켜야 했습니다. 이처럼 구약성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과거를 기억하면서 현재와 미래를 구축할 것을 요청합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을 창조주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를 빚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세상에서 살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의 삶을 주관하신다는 성경의 약속을 믿습니다. 이 모든 것을 기억하고 그것을 토대로 현재를 살고 미래를 소망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기억하며” “기억하리이다” “읊조리며” “되뇌이리이다”와 같은 표현들이 등장합니다. 시편 77편의 전반부에서도 시인은 하나님을 기억하고, 지나온 세월을 생각하고, 어려울 때 불렀던 노래를 기억했습니다(3, 6절). 그런데 그 기억의 결과는 불안함과 한숨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질문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시편 기자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지존하신 하나님의 오른손을 경험한 후에 새롭게 변화됩니다(10절).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합니다. 읊조리듯이 그 은혜를 입으로 고백하기를 반복합니다. 앞에서는 과거의 기억이 불안으로 이어졌다면, 오늘 본문의 기억은 찬양으로 발전합니다.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깊이 경험한 전과 후의 차이입니다.

 

우리도 신앙의 전환점을 수시로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되돌아보고 다시 기억하는 순간입니다. 그동안 걸어온 길을 나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길 가운데서 돌아보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인정하고 지나온 옛길을 기억하면 찬양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구체적으로 느껴집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향해서 우리의 소원을 쏘아 올리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차분히 앉아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동안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읊조리는 시간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2020년 기도에 대한 말씀을 나누면서 우리의 기도가 깊어지길 간절히 바랍니다.-河-

2020 기도 (3)

지존자의 오른손

 

기도를 우리 자신의 소원성취를 위한 수단으로 보는 것은 올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기도에 간청이 있지만, 그것이 기도의 전부가 될 수 없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사귐입니다.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과 연결되고 소통하는 신비로운 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을 듣는 시간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고 깊이 경험합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이유는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자라 가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 뜻에 순종해서 골고다 언덕길을 올라가는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물론 그 끝에는 부활의 영광이 있었지요.

 

우리가 살펴보는 시편 77편의 시인도 고난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가 겪고 있는 고난은 칠흑같은 어두운 밤입니다. 그때도 하나님께 나와서 기도했습니다. 사람의 도움과 위로를 물리치고 하나님 안에서 씨름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혹시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셨는지, 은혜를 그치셨는지, 사랑을 주지 않으실 것인지 안타까운 마음으로 묻습니다. 그 힘든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 은혜와 긍휼을 간절히 사모했습니다.

 

누구나 영혼의 어두운 밤을 경험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8-11절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기록했습니다.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받아서 살아갈 소망도 없었습니다. 꼼짝없이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어려움을 이겼습니다. 시편 기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를 쉬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시편 77편 10절은 시인이 터닝 포인트를 경험하는 순간입니다. 10절의 히브리어 본문은 쉽지 않아서 다양한 번역이 존재하는데 저는 “이것이 바로 나의 아픔, 나의 약함입니다. 그런데 지존자의 오른손이 변화시키셨습니다.”로 옮겼습니다. 개역 개정에서 “잘못”이라고 번역했는데 “슬픔, 아픔”이라는 뜻도 있고, “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단어에 “변화”라는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어려움 한가운데서 자신의 약함과 아픔을 깨닫고,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길을 실제로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다시 한번 자신이 경험했던 하나님의 은혜를 돌아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묵상하고 자신의 말로 읊조립니다.

 

시편 기자는 변했지만, 세상은 여전히 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오른손이 그를 변화시키고 보호하셨기에 마음에 빛이 비쳤습니다. 지속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묵상하고 기도합니다. 우리 역시 약함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았을 때,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길이 임하실 것입니다. 참빛 식구들 모두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고 내면의 깊은 신앙으로 나가시길 기도하겠습니다.-河-

2020 기도 (2)

밤에 부르는 노래

 

16세기의 수도사 십자가의 성 요한은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하는 백성에게 영혼의 밤을 허락하십니다. 누구든지 영혼의 어두운 밤을 경험합니다. 그 밤을 통과하면서 감각적인 신앙이 깊은 영성을 갖게 되고, 욕심과 교만을 내려놓고 예수님과 같은 마음으로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을 섬깁니다. 영혼의 깊은 밤을 통해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경험하고 비로소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태어납니다.

 
시편 기자 역시 영혼의 깊은 밤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도 한숨이 나오고 힘이 빠질 지경입니다. 그런데도 다른 사람의 위로를 거절하고 하나님 앞에서 씨름합니다. 밤중에 손을 들고 하나님을 찾습니다. 이것이 그의 신실한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은 말 그대로 “밤에 부르는 노래”입니다. 시편 기자는 그 어려운 상황 속에도 행여나 하나님께서 자신을 잊으시면 어쩌나 염려합니다. 자신에게 닥친 어려움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밤에 잠을 잘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을 두고도 “주께서 내가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시니”(4절)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1-3절에서는 “내가”가 주어였는데, 4절로 넘어 오면서 “주님”이 주어가 되었습니다. 자신에게 닥친 어려움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잠을 이룰 수 없는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지나온 세월을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행여나 자신의 잘못이 있었는지 자신의 과거를 반추했을 것입니다. 고통이 찾아오면 과거를 돌아보기 마련입니다. 과거를 돌아보면서 우울해지고 돌이킬 수 없다는 마음에 실망에 빠져드는 것이 아닙니다. 지나간 세월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고,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연속해서 질문을 던집니다: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않으실까, 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는가, 그의 약속도 영구히 폐하였는가, 하나님이 그가 베푸실 은혜(긍휼)를 잊으셨는가?”(시77:7-9). 그의 질문 속에는 자신이 믿는 하나님의 성품이 모두 들어있습니다: 은혜, 인자하심, 약속을 지키심, 긍휼.

 
어려움이 닥치면 하나님께 불평하고 하나님을 멀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편 기자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면서 자신의 신앙을 확인합니다. 의심이 생겨도 하나님 안에서 회의하고 질문합니다. 하나님 품으로 달려들고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닥친 문제를 풀려는 신앙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과 더불어 어려움을 헤쳐나가기 원합니다. -河-

2020 기도 (1)

내가 내 음성으로 (시편 77: 1-3)

 

지난주에 성령에 대한 말씀을 마무리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계신 성령 하나님을 어머니 마음과 손길처럼 느끼고 성령을 쫓아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시고, 위로와 힘을 주실 줄 믿습니다.

 

어려움을 극복할 위력, 일을 끝까지 해내는 힘, 자신감과 무기력을 떨치고 활동할 수 있는 에너지를 주시는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기로 마음을 모았습니다. 참빛 식구들 모두 성령 충만을 사모하고 성령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사랑과 은혜 그리고 힘이 실제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부터는 시편 77편을 차근차근 연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월터 부르그만이라는 구약 학자가 팬데믹을 보내는 기독교인들에게 주는 메시지에서 시편 77편을 인용했습니다.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는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나와서 기도하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그것을 시편 77편에서는 “밤에 부른 노래”라고 했습니다.

 

기약 없는 팬데믹을 사는 이 시간도 밤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새벽을 기다리지만, 새벽이 언제 올지 알 수 없는 깜깜한 밤입니다. 여름이 되고 기온이 올라가면 바이러스가 없어질 것이라고 했지만, 바이러스의 기세가 꺾이지 않고 있습니다. 캘리포니아의 감염자 숫자가 뉴욕을 넘어섰다는 보도를 보면서 마음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밤을 사는 우리의 심정입니다.

 

시편 77편의 기자가 우리와 마찬가지로 어둠의 기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그때도 하나님을 믿기에 기도를 쉬지 않습니다. 자신이 직접 하나님께 나와서 손을 들고 기도합니다. 오늘 본문인 시편 77편 1-3절에 시편 기자 자신을 가리키는 일인칭 단수 “나”가 열 번 등장합니다. 시편 기자가 처한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그의 기도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시편 기자처럼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하나님 귓전에 우리의 기도가 도달하는 것을 보기 원합니다. 시편 기자는 밤에도 손을 들고 기도했습니다. 어려움이 닥치자 손에 있는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향하여 손을 뻗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한 것입니다. 삶에 드리운 불안과 근심으로 심령이 상했지만, 그 순간에 하나님께 나와서 손을 들고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마땅한 모습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손을 들고 우리 자신의 음성으로 기도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인정하고 신뢰한다는 표시입니다. 인생의 밤이 너무 깊으면 기도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때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탄식하면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시니 성령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과 삶을 내어 맡기면 됩니다. 한 주간 내 목소리로 하나님께 기도합시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