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말씀과삶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1 – 시편 120편
구약 성경 시편 120편부터 134편까지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표제어가 붙어 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개인은 물론 가족 단위로 성전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큰 영광으로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영광 (히브리어 “카보드”)으로 임재하신 성전에 직접 가서 제물을 바치고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의 의무이자 특권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가는 순례길은 벅차 오르는 감동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삶을 살았던 사람들은 양을 잡아서 속제물로 드리고 죄사함의 은혜를 구하기 원했습니다. 양에게 자신의 죄를 전가하는 제사를 드리고 나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갈등이나 다툼으로 인해서 가족이나 이웃과의 관계가 깨진 경우에도, 성전에 가서 화목 제물을 드리고 그 제물을 함께 나누면서 관계를 회복했습니다. 어려움 가운데 있을 때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성전에 올라가면 제사장들이 이들을 맞아 주었습니다. 성전에서 일하던 레위인들의 인도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했습니다. 성전에 올라온 모든 사람이 한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과 소리는 아름답고 웅장했을 것입니다. 개인 또는 가족 단위로 성전에 올라가지만, 성전에 들어오면 모든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가 되었을 것입니다. 성전에 올라와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 누리는 특별한 은혜가 있었을 것입니다.
앞으로 열다섯 편으로 구성된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를 매 주일마다 한 장씩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랫동안 예배에 오다 보면 습관적으로 교회에 올 때도 많이 있고 아주 가끔은 “왜 예배에 가지?”라는 회의가 들 수도 있습니다. 바쁜 세상에 살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예배에 오는 동기를 상실한 경우입니다. 그때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제목의 시편이 우리의 신앙과 생각을 새롭게 만들어줄 것입니다.
주일 아침, 함께 나눈 말씀을 묵상하면서 온 가족이 예배의 자리에 나오는 것입니다. 온 성도님들이 하나가 되어서 주님을 예배합니다. 개신교 예배에서는 설교를 강조하지만,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송영부터 마지막 축도까지 예배의 모든 순서가 중요합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각각의 순서에 참여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것이 참된 예배자의 자세입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를 읽어가면서, 우리 교회 예배와 찬송이 더욱 풍성해 졌으면 좋겠습니다. 찬양대는 물론 모든 성도님들이 화음을 맞춰서 아름다운 하모니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악기로 주님을 찬양할 날도 기대하겠습니다. 주일예배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 자체가 예배입니다. 삶 속에서 찬양이 끊이지않고, 주일에 함께 나눈 말씀을 묵상하면서 삶 속에서 하나님을 예배한다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삶이 노래가 되고, 함께 모이는 공동체 예배에서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기 원합니다. -河-
2016년 10월 1주 주일예배
마가복음 16장 – 부활 하시다
지난 2년 동안 우리 교회는 마가복음을 공부했습니다. 청년부에서 먼저 공부했고, 이어서 속회에서도 마가복음을 공부했습니다.“공부”라는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한 것은 우리가 성경을 공부할 때, 말씀이 더욱 선명하게 우리 안에 아로새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공부해도 시간이 지나면 자세한 내용을 잊어버립니다. 반복 학습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성경은 평생을 읽고 듣고 공부하고 외우고 묵상할 하나님 말씀이지만, 배울 때 집중해서 살펴보면 학습효과가 좋을 것 같아서 두 차례에 걸쳐서 마가복음을 주일에 설교했습니다. 작년 말에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을, 이번 여름에는 예루살렘 사역을 나눠서 살펴보았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정보를 얻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정보라도 파편처럼 널려 있으면 신앙이 허술하게 형성됩니다. 구슬도 꿰어야 보배라고 했듯이, 신앙의 정보들을 잘 꿰어서 나름대로 작품을 만들어 놓으면 보기도 좋고, 신앙을 삶 속에 올바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작은 것에 연연하기보다 큰 그림을 그려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나무에 초점을 맞추는 것에 앞서서 숲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을 듬성듬성 한 장씩 살펴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참빛 식구들의 신앙이 바르게 조직되고, 하나님 앞에서 각자 신앙의 집을 근사하게 지어 가시길 바랍니다. 이런저런 말이나 이벤트, 프로그램에 휩싸이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휘둘리거나 심하게 의존하지 않고 줏대 있는 신앙을 만들어 가시길 기도하겠습니다. 배운 내용은 잊어버려도 그것들이 참빛 식구들의 신앙과 삶에 베어 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마가복음은 신약성경의 사복음서 중에서 분량이 가장 짧고, 진행되는 속도도 빨랐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이나 광야 시험 없이 곧바로 갈릴리 사역을 소개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쉬지 않고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반면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참뜻을 밝히 알지 못하고 늘 동상이몽입니다. 결국 한 명의 제자가 예수님을 팔았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으며, 예수님은 홀로 십자가를 지고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부활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완전히 죽으셨다가 살아나셨음을 로마 군병의 확인과 아리마대 요셉의 장례를 통해서 알려줍니다. 우리가 모여서 예배하는 주일인, 안식 후 첫날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일 먼저 목격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이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부활 소식을 들은 베드로가 제일 먼저 달려갔다고 했지만, 마가복음에서는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과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을 먼저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음식을 먹고 있던 열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믿음이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해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은 것을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온 천하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길 부탁하셨습니다.
이렇게 기독교는 예수님의 부활에 뿌리를 내렸습니다. 바울의 고백대로 부활이 없으면 믿음도 헛되고 기독교 자체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 신앙도 부활에 근거합니다. 부활로 죽음의 세력이 물러가고 새로운 생명과 세계가 임했듯이, 부활을 믿는 우리에게도 생명이 임했기에 날마다 생명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河-
2016년 9월 4주 주일예배
마가복음 15장: 십자가에 죽으시다
세상이 뒤숭숭합니다. 지진과는 상관없어 보이던 한국에 진도 6에 육박하는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2년 전 나파 밸리에서 일어났던 지진과 맞먹습니다. 당시에 우리도 흔들림을 느꼈고, 나파의 건물은 물론 와이너리가 커다란 피해를 당했습니다. 그 정도로 큰 규모의 지진이 한국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큰 피해가 없었다니 감사한데, 여전히 고층 아파트와 원자력 발전소가 염려됩니다.
지난번 마가복음 13장을 공부하면서 마지막 때가 되면 지진을 비롯한 자연 재해가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물론 지진은 구약시대부터 꾸준히 있었던 자연 재해지만 한국에도 지진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으니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게다가 한국에서 격월로 보내주시는 선교 편지에 의하면, 전 세계 미전도 종족이 급격히 줄어서 2020년쯤 되면 모든 종족이 복음을 소개받고 자기 말로 성경을 갖게 된다고 합니다.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해지면 예수님께서 오실 것이라고 했기에 선교지에서 온 소식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온 세상과 아담과 이브, 그리고 그들이 살게 될 낙원 을 창조하셨습니다. 특별히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세상을 다스리며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길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으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망가지고 결국 낙원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이브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면서 망가진 관계를 반드시 회복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아브라함과 그들의 가족,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관계회복을 도모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하나님의 기대대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한 명이었던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팔고, 베드로가 세 번씩 예수님을 부인한 것과 비슷한 현상입니다.
인간을 통해서 구원 계획을 생각하셨던 하나님께서 급기야 하나뿐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자신이 유월절 어린양이 되셔서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구속입니다. 여기서 구속이라고 하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막혔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화목하게 하시고, 세상에 있는 죄와 악한 세력을 무너뜨린 승리의 선포를 가리킵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깃든 은혜이고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죽으심이 우리에게 여전히 효력을 끼칩니다. 세상 국가에서 어떤 법을 제정해서 그것을 선포하면 그 순간부터 법의 효력이 생기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그를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이라는 법을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 독생자의 죽음으로 선포하셨으니 살아있는 법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 법의 효력에 참여했고 생명을 얻었습니다. 뒤숭숭한 세상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 든든히 붙잡고 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河-
2016년 9월 3주 주일예배
마가복음 14장 – 닭이 울더라
어느덧 9월 중순으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러고보니 올해도 네 달이 채 남지 않았습니다. 연초에 참빛 식구들께서 주신 기도제목을 한 장 한 장 넘겨봅니다. 마음의 소원대로 응답된 기도, 여전히 기도가 계속되고 있는 제목들,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겠지만 섭섭하게도 응답되지 않고 지나친 기도까지 연초에 주신 기도제목 만큼이나 참빛 식구들의 삶도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인생 여정에 정답은 없는 것 같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여서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고집을 피울 것도 아닙니다. 수가 많으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인생과 신앙에 유연한 태도를 갖고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것이 지혜입니다. 2016년의 남은 날들을 주님 안에서 알차게 보내셔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들으시는 참빛 식구들 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십자가 죽음을 하루 앞둔 저녁,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가지셨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 한 명이 자신을 팔 것과 베드로 역시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시면서 떡과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나눠 주셨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기 위해서 만찬 자리를 뛰쳐나갔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죽으면 죽었지 부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심문 받으시는 현장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합니다. 예수님 말씀이 그대로 이뤄진 것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이토록 무력하게 잡히실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 사역의 끝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날 것을 미리 알았다면 애초부터 예수님을 따라 나서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수만 명이 모이는 유월절에 말 그대로 메시아로 예루살렘에 우뚝 서실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동상이몽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신앙 가운데서 펼쳐지는 상황이 다를 때, 베드로와 제자들처럼 말하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로마를 무너뜨리고 다윗 왕국을 세우실 것이라고 믿었던 제자들과 예루살렘 백성들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 생각대로 세상이 움직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생각은 전혀 다르십니다. 거기서 신앙의 부조화가 일어나고 때때로 회의가 들기도 합니다. 우리 역시 동상이몽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우리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을 일치시키는 과정입니다. 예수님께서 알려주시고 몸소 가시는 길이 우리의 예상과 달라도 베드로의 처음 고백처럼 죽을 지언정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 길이 십자가의 죽음이 있는 골고다 언덕을 향해도,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실 예수님을 소망 중에 바라보는 것입니다. 거기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힘이 나옵니다. 삶의 모습과 환경이 어떠하든지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기 원합니다.-河-
2016 년 9월 2주 주일설교
마가복음 14장 – 겟세마네 기도
그동안 우리 교회 기도의 어머님이셨던 박재순 권사님께서 지난 주일 홀연히 하나님께 가셨습니다. 지난 주일예배 때 오랜만에 오신 낸시 권사님과 두 분이 나란히 앉으셔서 도란도란 말씀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평소와 똑같이 일찍 오셔서 웃음으로 교인들을 맞아 주시고, 아이들을 예뻐해 주셨는데 오늘 예배에 계시지 않으니 무척 허전합니다. 이렇게 금방 가실 줄 알았으면 손 한 번 더 잡아 드리고, 권사님과 마주하며 얘기도 더 나눌 걸 그랬다는 아쉬움도 큽니다. 저희가 권사님께 해 드린 것보다 권사님께서 베풀어주신 사랑과 기도가 더욱 크기에 권사님이 더욱 그립고 마음 한편이 빈 것 같습니다. 하늘나라에서 권사님을 다시 뵐 수 있다는 소망과 영원한 생명으로 인해서 위로받고, 권사님의 뜻을 따라 더욱 열심히 주님과 교회를 섬기기로 다짐합니다.
박재순 권사님께서는 평소에 소원하신 대로 오래 앓지 않으시고 기도하시는 중에 주님께 가셨습니다. 94년 일생을 권사님처럼 정갈하게 살다 하나님께 가신 분도 드물 것입니다. 날마다 예수님 만날 준비를 하시면서 90평생을 사신 권사님이셨습니다. 젊은이들을 사랑하셨고, 교회에서 아이들이 뛰어노는 것을 무척 기뻐하셨습니다.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으시고 말씀대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이제 하늘나라에 가셔서 우리 교회를 위해서 그리고 이 땅에서 그러셨듯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참 연약합니다. 죽음이라는 불가항력의 힘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젊고 건강할 때는 모든 일을 자기 마음대로 통제할 것 같지만 금방 한계에 부딪힙니다. 그때마다 우리 자신이 흙으로 만들어진 질그릇임을 실감합니다. 하나님께서 숨을 불어 넣어주셔서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을 뿐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그 날과 그때는 하나님만 아신다고 했듯이 우리 인생의 끝을 알 수 없습니다. 순간순간 예수님 맞을 준비 하면서 맡겨주신 달란트를 열심히 관리할 뿐입니다.
지난 한 주간은 죽음 앞에서 속수무책인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하며 지냈습니다. 사망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다면 우리의 인생은 죽음에서 끝이 날 것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음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은 이 정도로 존귀하고 실제적인 사역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유월절 어린양으로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이제 유월절 만찬을 마치신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 가셔서 기도하십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천사가 예수님의 기도를 도왔습니다. 인류의 죄를 한 몸에 지고 가시는 예수님께서 그 순간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고뇌의 기도를 드리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기도는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로 끝납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길을 가십니다. 그로 인해서 우리가 살았습니다. -河-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