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자리에서

좋은 아침입니다.

 

1.
20여 년 전
아미쉬 마을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비포장도로가 우리를 반겼습니다.
비가 부슬부슬 내려서 주민들이 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빨랫감 같은 것을 등에 지고 가는 여성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집 옆에는 염소 같은 가축우리가 있었습니다.

 

문명의 이기와 담을 쌓고
자기들만의 삶을 고수하는 아미쉬들이
왠지 안ㅆ,러워 보였습니다.

 

무엇보다,
부모의 결정으로 아미쉬가 된
청년들과 아이들이 조금은 불쌍해 보였습니다.

 

세상에서 격리되어 살아가는
아미쉬의 생활 방식이 옳다고 동의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때는 그랬습니다.

 

2.
엊그제 유튜브 첫 화면에
3백만 뷰가 넘은 아미쉬 마을 영상이 등장했습니다.

 

70여 명의 아미쉬 마을 청년들이
힘을 합쳐서 큰 건물을 옮기는 장면이었습니다.
수십명의 청년들이 특별히 고안된 구조물 사이에
자리를 잡고, 지휘자의 지시에 따라서
큰 건물을 옮기는데 왠지 그들이 행복해 보였습니다.

 

머리 모양과 옷차림은 비슷했지만,
머리에 최신식 선글라스를 장착하고
신나게 건물 이동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20-30대 청년 같았습니다.

 

20여 년 전 아미쉬 마을을 방문했을 때는
그곳에 사는 분들이 왠지 안쓰러웠는데
유튜브 영상에서 본 아미쉬 청년들이 행복해 보였습니다.

 

3.
그때만 해도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행복한 삶에 관한 기준이 분명했습니다.
일종의 고정관념입니다.

 

20여 년이 지나고, 팬데믹을 거치면서
개인의 삶이 중요해졌습니다.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것보다
자기만의 개성있는 삶을 추구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아미쉬 마을에서 살아가는 청년들의 모습을
새로운 시각에서 보게 된 것입니다.

 

물론, 아미쉬를 비롯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내부인의 시각과 외부인의 시각,
또는 편집된 유튜브 영상의 시각에 따라 다를 수 있겠습니다.

 

4.
수십 명이 수작업으로 건물을 옮기는
아미쉬 청년들을 보면서 교회 공동체를 생각했습니다.

 

참빛 식구들이 각자의 삶을 살아갑니다.
예전에는 교회 안에서 획일적인 신앙과 삶을 강조했지만,
이제는 각각 지체들의 개성 있는 신앙과 삶을 존중합니다.

 

동시에 아미쉬 마을 청년들이 건물을 옮기는 데 힘을 합치듯이
함께 이뤄 가야 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는 힘을 합칩니다.
개인과 공동체의 조화라고 할까요!

 

빠르게 변화되는 세상을 따라잡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바빌론의 다니엘이 그랬고
이집트의 요셉이 그랬듯이 살아남아야 합니다.

 

오늘도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만의 특별한 삶을 사시는 참빛 식구들을 응원합니다.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빌 2:4)

 

하나님,
각자의 자리에서 멋지게 살고
모이면 힘을 합쳐서 멋진 공동체를 세우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10. 27 이-메일 목회 서신)

착각

좋은 아침입니다.

 

1.
그동안 몸이 편치 않으셔서
예배에 오지 못하시던 권사님 댁을 방문했습니다.

 

저를 보자마자
“목사님, 얼굴이 마르신 것 같다”고 하십니다.

 

체중에 변화가 없는데 아무래도 머리숱이 적어지고
얼굴에 살짝 주름이 생기니 말라 보였던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종종 듣는 인사말이어서
권사님 말씀이 새삼스럽지 않았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젊었을 때의 모습은 조금씩 조금씩 사라지고
육십 대의 모습이 새록새록 나타납니다.

 

사진을 찍으면
상상하던 제 모습이 아니라
젊은(?) 노인이 사진 속에 있습니다.
자연스레 사진 찍히는 것을 피하게 됩니다. ㅎㅎ

 

세월을 거스를 수 없습니다.

 

2.
지난 주일에
교회 식구들과 축구 경기를 했습니다.

 

하루라도 젊었을 때
조금이라도 더 하고 싶은 운동이 축구이기에
교회 정리를 아내에게 맡기고 운동장으로 달려갔습니다.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공 차는 것을 즐깁니다.
공을 찰 수 있는 지금이
제 인생에서 가장 젊은 시간이니까요!

 

어느덧 우리 자녀들이 커서 제법 공을 잘 찹니다.
축구 클럽에서 공차는 법을 배운 아이들은
발 재간까지 좋습니다.

 

팬데믹 전만 해도
아빠를 귀찮게 하던 아이들인데
이제는 아빠와 함께 경기에 몰입합니다.
축구 실력이 이제 곧 아빠들을 추월할 기세입니다.

 

저는 반대입니다.
마음은 펄펄 날고 싶지만, 몸이 따르지 않습니다.
공을 찬 다음 며칠 동안 찾아오는
온몸의 통증을 생각하면 달리다가도 발이 멈춥니다.

 

한 세대가 가면,
또 새로운 세대가 오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늘 젊을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3.
거울을 보기 전까지는
제가 젊은 줄로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날렵하게 움직이면서 공을 차는 모습을 상상하곤 합니다.

 

착각입니다.
운동장에서 뛰어다니는 모습도 기우뚱기우뚱,
그리고 헛발질이 잦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엇박자를 내면 안 됩니다.
젊은이가 노인처럼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도,
노인이 여기저기 참견하며 수선을 떠는 것도
착각이고 엇박자입니다.

 

솔직한 자기 모습,
자기가 처한 환경과 처지를 알아내고
그에게 맞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인생을 사는 지혜일 것입니다.

 

매사에 때가 있다는 전도서 말씀이 생각납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전도서 3:1,11)

 

하나님,
주님께서 보내신 자리에서
최고로 행복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10. 20 이-메일 목회 서신)

설렘

좋은 아침입니다.

 

1.
10월 9일,
지난 주일은
한국식으로 한글날이었습니다.

 

한글은 세종대왕이 창제해서
1446년 9월에 발표한 우리나라 고유의 말입니다.

 

오랫동안 한글은
하류 계층이나 사용하는 언문(諺文)이라고 불리면서
한문에 비해서 크게 대우받지 못했습니다.
연산군은 그의 학정을 고발하는 투서가
한글로 작성된 것을 빌미로 한글 사용을 금지한 적도 있습니다.

 

한글이 우리 겨레의 글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일제강점기입니다.
우리 말 대신에 일본 말을 써야 하는 것에 위기를 느낀
주시경을 비롯한 한글 학자들이 한글 사용을 적극 권장했습니다.

 

무엇보다 성경을 번역했던 존 로스 선교사는
영어를 본떠서 한글 띄어쓰기를 개발했고
선교사들이 한글을 갖고 복음을 전하고 교육하면서
한글 전파에 앞장섰습니다.

 

한글은 매우 우수한 글자요 말입니다.
대부분의 표현을 기록하고 말할 수 있는 소리 언어입니다.
무엇보다 세계에서 우리 민족만 사용하는 우리 언어입니다.

 

2.
지난 주일 예배에서
제가 좋아하는 우리말 한 가지를 소개했습니다.
“설렘”이었습니다.

 

설렘은
“마음이 가라앉지 않고 들떠서 두근거림”이라는 뜻입니다.
너무 좋아서 몸과 마음이 들썩거리는 모습입니다.

 

세종대왕께서 처음 한글을 만들고 얼마나 설레었을까요?
양반들이 쓰는 한문을 몰랐던 천민 계급의 백성들이
한글을 익혀서 글을 쓸 수 있을 때도 꽤 설레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결과가 기대한 대로 나왔을 때,
인생 버킷 리스트를 실천하게 되었을 때
미국에 첫발을 디뎠을 때,
무엇보다,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기도한 제목이 응답되는 신비로운 순간에도
설렘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3.
언어가 다 그렇다고 하지만,
요즘은 한글도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줄임 말이 사용되고,
앞에 상스러워 보이는 표현을 붙여서
매우 좋다고 말하고,
외래어와 섞여서 한글 특유의 맛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우리 고유의 말, 한글이 아름답게 보존되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말과 글이 중요한
“책의 종교”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우리말로 읽을 수 있음도 감사한 일입니다.
올 가을에는 하나님 말씀을 더욱 가까이합시다.

 

아무쪼록
반듯하고 한결같은 ‘또바기’ 신앙을 갖기 원합니다.

 

세상에 금도 있고 진주도 많거니와
지혜로운 입술이 더욱 귀한 보배니라 (잠20:15)

 

하나님,
우리 입술에서 아름다운 말,
살리는 말이 세상으로 퍼져 나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10. 13 이-메일 목회 서신)

일상의 발견

좋은 아침입니다.

 

1.

벌써 두세 달이 지난 것 같습니다.

TV 아침 방송을 틀어 놓고 일하는데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소녀가 말과 함께 화면에 등장했습니다.

 

신기해서 볼륨을 높이고 시청했더니

남가주에 사는 할로(Harlow)라는 소녀로

말에게 주는 먹이(간식)를 만들어서 판매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할로는 집에서 피터 팬이라고 이름을 붙인

조랑말(pony)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학교 과제 가운데 하나로

자기가 키우는 조랑말 피터 팬에게 줄 간식을 개발해서 발표했고

그것을 사업으로 발전시킨 것입니다. 일상의 발견입니다.

 

할로의 웹사이트에 가면,

사람이 먹어도 될 것 같은 조랑말 간식을 진열해 놓고

온라인으로 판매하고 있습니다.

 

조랑말을 위한 간식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예쁘게 만들었습니다.

순수 자연산 재료로 만들었답니다.

 

가격은 저렴하지 않습니다.

 

2.

방송을 보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에

매우 다양한 사람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조랑말을 집에서 키우는 것부터,

조랑말 애호가들이 전국적으로 꽤 많은 것 같고

열 개도 되지 않는 간식 한 상자가 20불이 넘는데도

판매가 가능하다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상품성이 있어도 어린아이의 제품이라면 무시하기 일쑤인데

초등학생이 만드는 조랑말 간식을 구매하고

그것을 애용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신기했습니다.

미국은 겉모습보다 내용을 중시하고,

기업가 정신이 살아 숨 쉬는 땅인 것 같습니다.

 

세상에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훨씬 많다는 말이 실감 납니다.

 

3.

할로는

자기가 키우는 조랑말 피터 팬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숙제를 했을 것입니다.

 

억지로 할 수도 있는 학교 숙제입니다.

학생으로서 해야 하는 지루한 일상인데

할로는 즐겁고 특별한 일로 발전시켰습니다.

 

일상은 소홀히 하거나 지나치기 쉽습니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특별한 일을 찾아내기 힘듭니다.

그러니 학교 숙제를 비즈니스로 만든 할로가 더욱 대단해 보입니다.

 

어느덧 10월이 되었으니 올해도 석 달 남짓 남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상의 삶을 소중히 여기고

그 속에 깃든 특별한 의미를 포착해 내기 원합니다.

무채색처럼 지루할 만한 일상을

다채롭고 특별한 일로 바꾸는 일상의 발견을 기대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믿는 말씀과 기도 역시

일상으로 보이기 쉬운데,

그 안에 숨겨진 은혜를 찾아가면서

남은 석 달을 새록새록 특별한 시간으로 만들어 봅시다.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니라 (전9:10)

 

 

하나님,

무심코 지나칠 일상 속에

숨겨진 보석을 찾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10. 6 이-메일 목회 서신)

그리스도인다움

좋은 아침입니다.

 

1.

9월 초 미국의 퓨 리서치에서

흥미로운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2020년 현재

미국의 기독교 인구는 전체의 64%인데

앞으로 점점 줄어서

50년 후에는 절반 이하로 감소할 것이라는 예측입니다.

 

2007년 통계만 해도

미국의 기독교 인구는 70% 이상이었습니다.

10년 만에 10%가 줄었습니다.

동시에 무신론자, 불가지론자, 무종교 비율이

15%에서 30%로 늘었습니다.

 

기독교 인구가 높은 비율을 차지한 것도

50대 이상에 기독교인이 많아서 그렇지

30대 이하의 젊은 층으로 내려가면 기독교 인구가 급격히 떨어집니다.

 

흥미로운 것은

젊은 층 기독교인들 대부분이

크리스천 가정 출신이라는 사실입니다.

아침에 나누는 말씀 묵상에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전수된 것이 떠오릅니다.

 

2.

올해 한국의 각 교단이 집계한 통계에서

교인 숫자가 수십만까지 감소할 것이라는 예측이 있으니

미국의 추세와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왜 이렇게 기독교인의 숫자가 감소할까요?

 

기독교뿐만 아니라

종교에 대한 무관심이 요즘 세대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종교가 아닌 물질로 대표되는 세속주의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 자체가

요즘 시대를 살아가는 데 당장 도움이 되지 않으니

문명의 이기나 새로운 기술을 쫓아갑니다.

가치보다 실용이 우선입니다.

 

시대 상황 외에도

기독교를 대표하는 교회가 매력을 잃었습니다.

교회는 배타적인 집단,

사랑을 외치는 그리스도인은 겉과 속이 다른

위선적이고 이기적인 사람들로 여겨집니다.

 

3.

그렇다고 여기서 멈춰 있을 수는 없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주신 사랑의 예수님,

지금도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시절 안디옥에서 그리스도인(Christian)이라고 처음 불렸듯이

지금 이 시대에 “다시 그리스도인”으로 불리는

그리스도인다움을 회복하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 독특함을 다시 생각하고

그것을 밀도 있게 간직하고 믿는 것입니다.

3% 정도의 소금기(염도)가 바닷물을 짜게 하듯이

반듯하고 품격 있는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면서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가치 있고, 행복하며, 생명의 길임을 세상에 보여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많이 묵상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장착하고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걷는 <예수 닮기>를 실천해야겠습니다.

 

그리스도인 다운 참빛 식구들의 모습을 눈에 그립니다.

참빛 식구들을 통해서 예수님이 세상에 빛으로 임하시길 기대합니다.

 

우리 함께 “그리스도인다움”의 덕목을 회복합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2:5)

 

 

하나님,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9. 29이-메일 목회 서신)

다양한 시각

좋은 아침입니다.

 

1.
엊그제 엘리자베스 여왕의 장례 행렬이 지날 때
길가를 가득 메운 사람들이 너도나도 셀폰을 꺼내서
사진찍는 모습이 신기했습니다.

 

아빠의 어깨에 올라가서,
양손으로 셀폰을 받치면서 사진찍는 모습이
마지막 가는 엘리자베스 여왕을 향해서
경배를 표하는 모습처럼 보일 정도였습니다.

 

지금은
성경을 누구나 갖고 읽을 수 있습니다.
요즘은 셀폰에 성경 앱을 다운로드 받아서
손쉽게 성경을 읽습니다.

 

예배 시간에는 성경책 대신에
양손에 셀폰을 들고 찬송하고 성경을 읽는 모습이
전혀 낯설지 않습니다.

 

성경이 대중의 손에 들어온 것은
15세기 종교개혁 이후입니다.
그전까지 성경은
가톨릭 사제들만 소장했고 읽고 설교했습니다.

 

인쇄술이 발달하고
마틴 루터와 종교 개혁자들이 성경을
독일어를 비롯한 자국어로 번역하면서
개신교인들이 성경을 직접 읽게 된 것입니다.

 

2.
성경은
각자의 상황에 따라서 다르게 다가옵니다.

 

같은 말씀도
읽는 독자들과 처한 상황에 따라서
각기 다른 의미로 찾아옵니다.

 

어릴 적에 읽을 때와
어른이 되어서 읽을 때 그 의미가 다릅니다.
힘들 때 읽을 때와 편안할 때 읽는 성경이 다릅니다.

 

이처럼 성경은
우리 안에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세상 속에서
그리고 우리 삶의 여러 맥락 속에서 살아 움직입니다.

 

3.
수많은 사람의 셀폰에 담긴
엘리자베스 여왕의 마지막 가는 모습이 어떨지 궁금합니다.

 

전체적인 장례 행렬을 담았는지,
70년 이상 여왕이 갖고 있던 통치의 상징 홀(scepter)
또는 왕관만 찍었을 지,
각자가 위치한 자리와 관심사에 따라서 다를 것입니다.

 

우리는 다양함이 우선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유니폼을 입고 하나 됨을 과시하던 시대는 지났습니다.
주요 신문이 전하는 몇 가지 사진으로 상황을 판단하는 시대도 지났습니다.

 

성경을 보는 시각도 다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신앙도 다양합니다.
팬데믹 이후의 교회는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참빛교회도 다양한 지체들이 모여 있습니다.
가능하면 다양한 참빛 식구들의 재능과 은사,
삶과 성품을 드러내고 그것이 발휘되길 돕고 싶습니다.

 

다양함이 모여서
모자이크처럼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조화를 이루는
멋진 하나님의 공동체를 세워갑시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17:26)

 

하나님,
삼위 하나님의 다양함과 하나 됨이
우리 안에도 그대로 임하게 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9. 22이-메일 목회 서신)

인생길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9월 8일,
영국 국왕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96세로
서거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영국 국왕은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를 비롯한
영연방 16개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자리입니다.

 

엘리자베스 2세는 아버지 조지 6세에 이어서
1952년에 국왕이 되었기에 올해로 70주년을 맞았습니다.
영국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자리를 지킨 국왕입니다.

 

왕위 계승자로 정해진 후에도
2차 세계 대전에 자원입대했었습니다.
보급부대의 운전을 담당했는데, 다른 군인들과 똑같이 생활하였답니다.

 

전쟁이 끝나고 윈스턴 처칠 수상 시절에 정식으로
국왕의 자리에 오른 엘리자베스 여왕은
전후 영국의 회복과 재기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인물의 평가에는 호불호가 있지만,
1999년에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등
영연방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인정한 상징적 인물입니다.

 

2.
13세에 만나서 첫눈에 반했던
필립 공과 스물세 살에 결혼했습니다.
네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자녀들의 결혼생활이 순탄치 않아서
영국 황실에 오점을 남겼다는 대중의 비판을 받았습니다.

 

유치원 선생을 하던 다이애나와 결혼한 찰스 황태자가
다이애나 왕비와 이혼하고, 다이애나가 교통사고로 갑자기 죽으면서
영국 황실의 명예가 흔들렸습니다.

 

영국의 국왕 제도를 없애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엘리자베스 여왕은
흔들림없이 국왕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작년에 평생 동지였던 남편 필립 공이
먼저 세상을 떠나면서 몸과 마음이 약해졌답니다.
올 초에는 코로나에 감염되기도 했습니다.

 

서거하기 하루 전까지
영국 총리의 예방을 받으면서
임무에 충실할 만큼 성실한 인물이었습니다.

 

3.
영연방의 군주는
어느덧 73세가 된 찰스 황태자가 물려받았습니다.
멀지 않아 찰스 황태자와 다이애나 사이에서 태어난
윌리엄 왕자(40세)가 영국 왕이 되겠지요.
그렇게 한 세대가 지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됩니다.

 

저의 소년 시절, 청년시절,
장년 그리고 60대에 접어든 지금도
영국 여왕은 언제나 엘리자베스였습니다.
신기할 정도여서 정말 그분이 맞는지 검색한 적도 있습니다.
그래도 모든 인간이 가는 길을 가셨습니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전도서 기자의 말이 생각납니다.
세상만사가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거기서 거기요,
모든 사람은 각자의 종말을 맞이합니다.

 

한 번뿐인 인생입니다.
되감기를 하거나, 지워버리고 다시 시작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 오늘 하루 곰곰이 생각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을 뜻깊고 세밀하게
신앙 가운데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야겠습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에 다 때가 있나니 (전도서 3:1)

 

하나님,
순간에서 영원으로 이어지는
참빛 식구들의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9. 15 이-메일 목회 서신)

낯섦과 익숙함 사이에서

좋은 아침입니다.

 

1.
24년 전 우리 가족이
뉴욕 존 F. 케네디 공항에 내려서 느꼈던
8월의 미국 공기를 잊을 수 없습니다.
낯설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 미국에서의 삶은
낯선 것과의 끊임없는 만남이었습니다.
사람들, 이웃들, 살아가는 삶의 양식,
일을 처리하는 방식, 사회의 관습과 제도, 언어 등등
반세기를 낯선 것들과 씨름하며 살았습니다.

 

물론, 그동안 낯선 것을 넘어서
익숙해진 것들도 많습니다.

 

처음에는 물건을 살 때마다 달러를 원화로 환산했고
일기 예보를 보면서도 화씨를 섭씨로 바꿨고
체중계 올라가서도 파운드에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파운드는 물론 화씨가 편하고,
물건값도 달러로만 생각합니다.

 

생활 속의 낯섦은
시간이 흐르면서 익숙함으로 자연스레 변하게 마련입니다.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는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네요.

 

2.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낯설 수밖에 없지만,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서로 알아가다 보면
낯섦은 사라지고 친근함의 단계로 접어듭니다.
그때부터는 인간관계가 익숙하고 편해집니다.

 

그런데
낯섦을 극복하기 힘든 인간관계도 있습니다.
경계선 밖에 계시는 분들과의 사귐입니다.

 

레비나스라는 철학자는
우리의 진정한 모습은 타인 속에서 발견된다고 했습니다.
낯선 타인(other)이 우리의 자화상이 되는 셈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정말 위대하십니다.
당시의 보통 사람들이 죄인 취급하고
밖으로 밀어냈던 계층의 사람들과 친구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 주시고
자기 얼굴을 타인의 모습에 각인시키신
진정한 인간미,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3.
성경에 나타난 낯선 사람들
외국 출신 군인들에게 대한 연속 설교를 마쳤지만,
이들의 모습과 삶이 중첩되어 계속 생각납니다.

 

우리 역시 미국 땅에서 낯선 사람들,
나그네로 살아가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경의 외국 군인들처럼
낯선 세상에서 멋지게 살아남아야 합니다.

 

낯선 것을 사랑으로 받아주고
낯선 사람들과의 경계를 허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에서 말하고 예수님께서 몸소 실천하신
이웃 사랑이 우리를 통해서 완성되길 소원합니다.

 

오늘도 낯선 세상에서
낯선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시는
참빛 식구들을 응원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2:5)

 

하나님,
오늘 하루 예수님의 마음을 갖고
낯선 자의 이웃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9. 1이-메일 목회 서신)

드러남

좋은 아침입니다.

 

1.
지구 곳곳에서
기상이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8월 초에는 데스 밸리에 홍수가 나서
관광객 천여 명이 발이 묶였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수도권에 내린 폭우로 많은 이재민이 발생했구요.

 

인간이 자초한 재난이라면
온 인류가 지혜를 모으고 힘을 다해서
어떻게든지 바로 잡는 노력을 기울여야겠습니다.

 

유럽에서는 500년 만에 극심한 가뭄이 찾아오면서
강들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답니다.

 

물에 잠겨 있던
2차 대전 때 사용했던 군함이 흉물스러운 몸체를 드러내고
고인돌이나 수억년 전 공룡 발자욱 같은 고대 유적이 나타나기도 하고
그동안 물에 잠겨서 숨겨져 있던 것들이
물이 빠지니 겉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2.
드러나는 것을 성경에서는 두 가지로 말합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계시(revelation)입니다.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아내는 탐색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것만큼 알고 깨닫는 것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을 드러내는 기록된 계시라면,
인간이 되신 예수님은
역사 속에 드러내신 하나님의 확실한 계시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1:18).

 

다음은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고, 마지막 때가 되면
숨겨진 것 없이 모두 드러날 것입니다.
가뭄으로 강바닥이 마르면서
물 아래 있던 것들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과 같습니다.

 

고대 유물 같은 값진 것이 드러나듯이
우리가 남몰래 하나님 앞에서 행한 귀한 일들이 드러날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 안에 숨겨져 있던 것이
흉물처럼 드러날 수도 있으니 평소에 조심해야겠습니다.

 

3.
하나님의 드러남, 즉 계시는 영광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영광 가운데 임하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우리의 드러남은
칭찬과 수치가 함께 있을 것입니다.
잘한 것과 잘못한 것이 모두 드러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잘못한 것은 겉으로 드러나기 전에 바로잡고,
하나님 앞에서 칭찬받을 것들이
많이 드러나는 감사하고 복된 순간이길 원합니다.

 

사랑하는 종을 고치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았던
이름도 없는 “어떤 백부장”처럼
예수님까지 깜짝 놀라게 할 정도의 놀라운 이야기들이
우리 안에 숨겨져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눅 8:17)

 

하나님,
우리 안에 값지고 선한 것들을
차곡차곡 은밀히 쌓아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8. 25이-메일 목회 서신)

절반의 세상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주에는 미국 상원이
인플레이션 감축법을 통과시켰고
엊그제 화요일에 바이든 대통령이 서명함으로 발효가 되었습니다.

 

노인과 저소득층의 의료비 지원과 더불어
2030년까지 탄소가스를 40% 절감하겠다는
에너지 관련 조항이 포함된 법안입니다.

 

미국 정부는 앞으로 관련 분야에
삼천 칠백억($370billion)불에 이르는
엄청난 재원을 투자하게 될 것입니다.
당장, 내년에 전기차를 사는 경우 7,500불을 지원해 준답니다.

 

미국의 상원은
민주당과 공화당의 의석수가 50대 50입니다.
동점이 나오면 상원 의장인 부통령이 캐스팅 보트를 행사합니다.
실제로 인플레이션 감축 법안도 51:50으로 통과되었습니다.

 

앞으로 이 법안이 올바로 실행되어서
미국의 어려우신 분들의 의료비 지원은 물론
세계에서 에너지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미국이
솔선해서 지구 살리기에 앞장서길 바랍니다.

 

2.
미국 상원만 의석을 반반씩 나눠가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둘로 나뉘어 있습니다.

 

화합보다는 내로남불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사람들의 생각이 갈라졌습니다.

 

상대편 의견에는 무조건 반대하고
자기편 의견은 시시비비를 따지지 않고 무조건 찬성하는
갈라치기가 유행입니다.

 

그러다 보니
모두 내 편 챙기기에 혈안이 되었습니다.
상대편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이렇게 절반의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3.
주일에 살펴보는 이방 군인들은
유대인들 입장에서 이방인, 즉 완전 타자입니다.
결코 유대인이 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헷 사람 우리아를 예수님의 족보에 포함했습니다.
아람 사람 나아만도 나병에서 회복되고 하나님을 믿는 은혜를 누렸습니다.

 

신약 성경의 로마 백부장 고넬료는
하나님의 천사가 그에게 나타날 정도였습니다.
결국 베드로를 초대해서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경계를 허물고,
모든 사람을 하나님 자녀 삼는 사역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상대하지 않았던
죄인들, 세리들의 친구가 되셨고 그들과 함께 먹으셨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와서 자기 잘못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도
타자 또는 반대편에 있는
절반의 이웃을 품고 사랑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시도는 할 수 있습니다.
절반의 세상을 하나 되게 만드는
화평케 하는 자로 살기 원합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9)

 

하나님,
세상 속에서 화평케 하는 자로 살아가는
참빛 식구들과 함께하시고 인도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8. 16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