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시라면

좋은 아침입니다.

 

1.
125년 전에 출판되었는데
여전히 기독교 베스트 셀러 상위권에 위치한 책이 있습니다.

 

찰스 셸돈 목사님의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In his steps>입니다.
무려 3천만 부 이상이 팔렸습니다.

 

책의 주인공 맥스웰 목사는
미국 소도시의 대형교회에서 목회하시는 분입니다.

 

인쇄 기계가 발명되면서 해고된
인쇄공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생활이 어려워지고 직장을 구하지 못하면서
아내도 병으로 잃고 아이는 보육원에 맡긴 채
직장을 구하러 다니다가 거의 노숙자 수준이 되었습니다.
삶에 지치고 몸이 허약해진 젊은이 역시
목사님 곁에서 하늘나라로 갑니다.

 

대형 교회에서 편안하게 목회하던 맥스웰 목사님에게
인쇄공 젊은이의 죽음은 충격이었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믿어야 할지 고심 끝에
뜻을 같이한 50여 명의 성도들과 함께
1년 동안이라도 예수님을 따라 살기로 다짐했습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질문을 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운동이었습니다.

 

신문사 사장은
사람들의 인기를 끄는 기사를 접고 건전한 기사만 싣기로 합니다.
오페라 가수로 발탁된 여성도
술집이 있는 곳에서 열리는 전도 집회에 참여합니다.

 

손해를 감수한 결정들인데
1년을 예수님을 따라 살았더니
개인과 교인은 물론 도시 전체가 변했습니다.

 

소문을 들은 시카고와 뉴욕에 있는 교회들도
예수님을 따라 사는 운동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선한 물결의 파장이 넓게 퍼져나간 것입니다.

 

2.
100년도 넘은 옛날에 쓰인 책입니다.
게다가 소설이니 내용도 단순하고 극적입니다.

 

훨씬 복잡한 오늘날 현실과
우리 삶에 적용하는 것이 쉽지 않아 보이지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는
시대를 초월해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꼭 필요한 질문입니다.

 

지난주 설교에서는 이 질문이
복음을 따라 사는 삶의 시작점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중요한 결정 또는 선택의 순간에 예수님을 생각하고,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길인지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대로 따라 사는 것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손해가 생길 수 있고, 우리의 본성을 거스를 수 있어 불편하고,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우리이기에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설령 가지 못해도, 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 좌표를 정해 놓는 것입니다.

 

우리도 한번 시도하면 어떨까요?
1년은 길 테니 일주일만이라도 예수님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생기는지 각자의 자리에서 지켜보는 것입니다.
함께 나누면 더 좋겠지요.

 

하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을 닮으면서
복음으로 살기 원합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벧전 2:21)

 

하나님,
한 가지라도 주님을 닮은 하루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8. 11이-메일 목회 서신)

흔적

좋은 아침입니다.

 

1.
우리 교회는
샌프란에서 비교적 안전하고 한적한 곳에 있는데
팬데믹 전에는 가끔 보았던 노숙자들이
팬데믹을 거치면서 종종 찾아옵니다.

 

우리 동네까지 오는 것을 보면 살기가 어렵고
노숙자의 숫자가 더 많아진 것 같습니다.
(샌프란에는 약 8천명 정도의 노숙자가 지내는 것으로 알려짐)

 

노숙자들이 오면 대개 흔적을 남깁니다.

 

최근에는 정원에 있는 교회 수돗가에서
샴푸나 비누를 사용하니
권사님께서 정성껏 가꾸시는 정원이 망가질까 염려됩니다.

 

이분들이 교회 근처에서 잠을 자고 가면
옷가지며, 음식물 쓰레기 등을 여기저기 남겨 놓고 갑니다.
물론 좋지 않은 냄새가 남겨질 때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노숙자 사역을 하는 단체나 교회들을 자못 존경하게 됩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노숙자들을 돕지는 못해도
교회 앞이나 정원에서 밤을 지내는 것은 막지 않습니다.
수돗물도 정원에 피해만 가지 않으면 사용하게 할 생각입니다.

 

2.
한번은
노숙자 한 분이 와서
교회 옆 정원에 자리를 펴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혔습니다.
슬리핑백을 펼치고 수돗가를 오가면서 한참을 준비합니다.
그러더니 슬리핑백에 들어가서 잠을 잡니다.

 

아침에 다시 카메라를 켜니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아직 취침 중이십니다.
10시쯤 일어나서 침구며 옷가지를 모두 정리해서
백팩에 넣고 자리를 떠났습니다.

 

나중에 교회에 가보니
자신이 머물다 간 자리를 깔끔하게 정리하고 떠나셨습니다.
이 정도만 정리해주면
얼마든지 장소를 제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3.
우리도 어느 곳에 머물거나
어떤 일을 하면 흔적을 남깁니다.
인간관계, 길게는 우리 인생길에도 흔적이 남게 마련입니다.

 

좋지 않은 흔적은
깔끔하게 정리하고 지워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기억, 추억, 또는 결실과 같은 좋은 흔적은
아름답게 남겨놓아야 합니다.

 

노숙자들이 남기고 간 흔적을 보면서
잠시 멈춰서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았습니다:
“내가 남기는 흔적은 어떤 것일까?
어수선한 것들을 어떻게 하면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을까?
길이 남을 좋은 흔적은 무엇이 있을까?”

 

오늘 하루,
우리가 걷는 발걸음, 나눈 대화, 마음, 하는 일 등등에서
좋은 흔적, 좋은 기억, 그리스도의 향기가 남겨지길 기대합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향기]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후2:14)
하나님,
우리가 지나간 인생길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남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8. 4이-메일 목회 서신)

한결같이

좋은 아침입니다.

 

1.
미국의 물가 상승이 잡히지 않고 있습니다.
7월 초에 발표된 물가 상승률이 무려 9.1%였는데
1981년 이래 최고입니다.

 

처음에는 중고 자동차 값이 물가 상승을 주도해서
피부로 느끼지 못했는데, 개스값과 생필품,
외식 값으로 옮겨오면서 물가 상승을 피부로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흥미로운 기사를 보았습니다.
코스코(Costco)에서 판매하는
핫도그 콤보(hotdog combo)에 대한 기사였습니다.

 

코스트 푸드 코트에서는
핫도그와 음료수 합쳐서 단 1불 50센트입니다.
요즘처럼 물가가 치솟는 시절에 더욱 돋보이는 착한 가격입니다.
월스트리트 저널이
코스코 핫도그 콤보가 미국의 물가 상승을 지켜내고 있다는 기사를 쓸 정도입니다.

 

코스코는 1985년에 핫도그 콤보 메뉴를 처음 시판했는데
그로부터 한 번도 판매가를 올리지 않았습니다.

 

코스코 창업자가
핫도그 가격을 올리려는 코스코 사장에게
“만약에 값을 올리면, 당신을 가만 놔두지 않을 거요 I will kill you”라고
호통쳤다는 일화도 유명합니다.

 

얼마 전 코스코 사장은
핫도그 콤보 가격을 올릴 생각이냐는 질문을 받고
망설임 없이 No라고 대답했답니다.

 

1980년대에 엄마 손을 잡고
코스코에 갔던 아이가 마흔이 가까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가격이 똑같습니다.
물론 핫도그와 음료수를 제공하는 메뉴 구성도 같습니다.

 

코스코가 완벽한 기업이 될 수 없어도
핫도그 가격만 놓고 보면,
고객에 대한 회사의 충성도가 매우 큽니다.
40년 동안 값을 올리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2.
우리 주변에는
개인이든지 또는 기업이든지
수십 년 동안 변치 않고 주어진 일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남들의 눈을 의식하고
남들과 경쟁하고 비교했다면
절대로 해낼 수 없는 일인데 묵묵히 그 일을 행하는 경우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일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어김없이 하루 세끼 밥을 먹습니다.
빨래하고, 학교에 가고 직장에 갑니다.
자녀들을 키우고, 같은 길을 오가고
그리고 주일에 예배에 옵니다.

 

변함없이
부모로, 자녀로, 친지로, 교회 식구로 살아갑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변함없으신
우리 하나님을 닮은 모습입니다.

 

3.
성령의 열매 충성을 생각합니다.

 

충성 또는 성실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처음과 끝이 같은 것입니다.
대충 대충하는 것이 아니라 사소하고 작은 것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일상을 사는 데 꼭 필요한 것이 충성입니다.

 

그런데 그 충성이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에 들어 있습니다.
변함없는 충성, 신실함을 장착하기를 원합니다.

 

오늘도
각자의 자리를 묵묵히 지키시는
참빛 식구들을 응원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시편 16:8)

 

하나님,
끝까지 변함없이
주님을 섬기고 믿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7. 28이-메일 목회 서신)

 

일곱 번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 설교의 주인공인 아람 장군 나아만은
엘리사 선지자의 말을 듣고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고 나병에서 깨끗해졌습니다.

 

<깁보르 하일, 용맹스럽고 유능한 사람>로 불렸던
아람 장군 나아만이었습니다.
한 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그의 몸에 있는 나병입니다.
전염될 정도는 아니지만,
나병으로 엉망이 된 자기 몸을 볼 때마다 절망적이었을 것입니다.

 

나아만은
자기 집에 있던 이스라엘 ‘꼬마 여자 종’의 말을 듣고
이스라엘로 내려갔고
선지자 엘리사의 말을 듣고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었습니다.

 

그의 말처럼
요단강에 몸을 씻는 것은 일상적인 일입니다.
절대로 특별한 치유법이 아니었습니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나아만은 결국 엘리사의 말을 쫓았고
몸이 깨끗해 졌고, 하나님까지 만났습니다.

 

무엇보다 일곱 번을 채웠습니다.

 

2.
지난 금요일에는
생전 처음 자이언츠 구장에 가서 야구 경기를 보았습니다.

 

요즘 자이언츠의 성적이 그리 좋지 못해서
큰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경기는 예상대로 싱겁게 끝날 듯했습니다.
2점을 먼저 냈지만, 힘없이 한 회에 5점을 내주면서
8회까지 5대2로 지고 있었으니까요.

 

시간이 밤 10시를 훌쩍 넘었기에
함께 간 집사님 아이에게 그냥 가자고 했더니
‘꼬마 아이’가 끝까지 보겠다고 고개를 저었습니다.
졸려서 눈이 반쯤 감긴 것 같았는데 신기했습니다.

 

많은 관중이 이미 경기장을 빠져나간 상태에서 9회말 마지막을 맞았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첫 타자부터 홈런을 터뜨리더니 그다음에도 싱글 홈런이 나옵니다.
상대 팀이 흔들린 틈을 타서 베이스를 모두 채웠고
다음에 나온 타자가 초구를 쳐서 만루 홈런(끝내기 그랜드 슬램).
9회에만 6점을 내서 8:5로 승리했습니다.

 

처음 찾은 자이언츠 구장에서 인생 경기를 관전한 것입니다.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3.
주일 친교 시간에 야구장에 갔던 이야기를 나누는데 한 집사님이
“목사님 오늘 설교의 일곱 번과 딱 맞는데요”라고 말해주었습니다.

 

나아만이 일곱 번을 채우면서 몸이 깨끗해 졌습니다.
중간에 포기했다면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야구장에 수만 명(?)이 왔지만,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사람들만이
9회 말에 대역전하는 드라마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끝을 보는 것이 늘 중요합니다.
그 끝에서 무엇을 이루면 금상첨화입니다.
행여나 극적인 결과를 얻지 못해도,
어떤 일이나 과정을 끝까지 마무리했다는 것 자체에 의미가 큽니다.

 

나아만 장군의 일곱 번도
완전수 7과 더불어 끝까지 엘리사 말을 따랐다는 뜻이 강합니다.

 

오늘 하루,
진행 중인 일이나,
길을 걷고 있는 우리 인생에서 ‘일곱 번’을 꼭 채우기를 원합니다.
특별한 일이 아닌 요단강에서 생긴 일상의 사건이라는 사실도 기억하고 싶습니다.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왕하 5:14)

 
하나님,
매사에 일곱 번을 채울 수 있는
믿음과 끈기를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7. 21이-메일 목회 서신)

일상의 힘

좋은 아침입니다.

 

1.
우리 교회가
지향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일상을 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많은 경우, 신앙(특히 기도 응답)을 생각하면
특별한 기적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많은 기적이 등장하니
그것을 우리도 경험할 수 있다고 믿는 식입니다.

 

맞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기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 살아서 일하심을 믿습니다.
그런데 기적만 바라보는 신앙은 건강하지 않습니다.

 

특별한 것, 기적을 추구하는 것은
쉽게 눈에 띄고 많은 사람의 관심을 불러일으키지만,
자칫 한쪽으로 치우친 신앙이 되기 쉽습니다.

 

2.
우리는 일상을 삽니다.
하루하루 반복되는 삶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합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수행합니다.

 

특별해 보이지 않기에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합니다.
때로는 일상을 사는 것에 지치고 마음이 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우리 삶 대부분이 일상입니다.
특별한 순간은 구름 속에 잠깐 얼굴을 내밀고 세상을 비추는
해님처럼 금세 지나갑니다.

 

3.
일상을 사는 것은
아주 작고 사소해 보이는 일에 충실한 것입니다.

 

지난 주일 설교에서 소개했던
주일마다 저에게 신문을 전해 주시던
뉴욕의 집사님을 다시 생각합니다.

 

집사님은 교회에서 눈에 띄는 직책을 갖고 계시지 않았고
아이들이 어려서 중고등부를 맡았던 저와 겹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도 한국에서 막 도착한 중고등부 전도사에게
매 주일 신문을 모아서 슬쩍 전해 주셨습니다.
그 사실을 아는 교인들도 거의 없으셨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집사님께서 주시는 신문은
읽지 않으신 새 신문 같았습니다.
저에게 전해주기 위해서
조심스레 신문을 펼치고 읽으셨음이 틀림없습니다.
일상을 사시고, 일상에서 사랑을 실천하신 집사님이셨습니다.

 

그 정성과 마음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신문을 전해 주시던 집사님의 모습도 생각납니다.

 

집사님의 작은 사랑, 작은 배려가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제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일상의 배려와 사랑의 힘입니다.

 

사소하고 지나치기 쉬운 것에 성실하고
일상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진짜 특별한 순간입니다.

 

일상의 배려와 사랑이 모여서
우리 인생을 아름답게 수놓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과 인생이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
일상을 예술로 만들어 봅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전도서 3:11)

 

하나님,
작은 것에 충실하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7. 14이-메일 목회 서신)

악의 평범성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 설교에서는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나오는
“악의 평범함 banality of evil>이라는 용어를 소개했습니다.

 

아이히만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조직적으로 주동한 인물입니다.
체포된 후에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한나 아렌트는 그 과정을 보고서 형식으로 기록했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평범한 사람이었음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성실한 정부 관리였고, 한 가정의 가장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유대인 학살이라는 엄청난 일을 저지르게 된 것은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환경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유대인 학살을
양심의 가책도 없이 실행했습니다.
죄 속에 들어 있을 때 느끼는 감정이요 행동인데
한나 아렌트는 이것을 <악의 평범함>이라고 불렀습니다.

 

2.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함>이라는 용어는
큰 울림을 주는 무서운 표현입니다.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도
죄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환경에 있으면
양심의 가책 없이 악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주일 설교에서
<나 같은 죄인 살리신 Amazing grace>찬송가를 지은
존 뉴턴이 살던 영국 사회가 노예무역을
일반적이고 평범한 것으로 여긴 것이
<악의 평범함>의 한 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기독교인들도 노예무역과 노예를 두고 사는 것에
아무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행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지은 존 뉴턴도
노예 무역상의 선장으로 악의 평범함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고 목사가 되면서
노예무역의 부당함을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윌리엄 윌버포스라는 정치인을 발굴하고 격려하면서
영국의 노예무역과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데 크게 공헌했습니다.
악의 평범함에서 벗어났고 악의 고리를 끊어버린 것입니다.

 

3.
존 뉴턴이나 윌버포스 같은 선각자들에 의해서
세상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그래도 어디선가, 어떤 영역에서는
보통 사람들이 범하는 죄들이 존재할 것입니다.

 

<악의 평범함>
–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서
두고두고 곱씹을 용어입니다.

 

우리도 잘못된 일을 무심코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가 관행으로 받아들이는 일이기에
죄책감이나 문제의식 없이 행할 수 있습니다.

 

타인에 대한 편견, 배척,
관행처럼/습관처럼 내려오는 그릇된 일들,
“다른 사람도 하는데 뭐”라고 생각하면서 범하기 쉬운 오류들
– 평범함 속에 도사리고 있는 그릇된 일들을 찾아내고 시정해서
밝고 맑은 세상을 세워 나가기 원합니다.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 당하는 자를 변호해 주시며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리이다 (시 140:12)

 

하나님,
우리 안에 무심코 행하는 악한 일들이 있으면
깨우쳐 주시고 고칠 용기를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7.7 이-메일 목회 서신)

내려놓기

좋은 아침입니다.

 

1.
2022년 상반기 마지막 날입니다.

 

우리 교회는
팬데믹이 끝나고 새로운 세상이 오길 기대하면서
<새롭게 시작합시다>라는 주제로 새해를 맞았습니다.

 

반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온전한 세상이 되지 못했고
7불에 육박하는 개스비와 높은 물가 상승,
전쟁과 총기 사고 등으로 세상이 뒤숭숭합니다.

 

그래도 각자의 자리를 지키시고
지난 반년을 꿋꿋하게 살아오신 참빛 식구들을
응원하며 큰 박수를 보냅니다.

 

2.
서양에서는 일찍이 누구나 피하고 조심해야 할
7개 죄악(seven deadly sins)의 목록을 만들었습니다:
교만(pride), 시기(envy), 분노(wrath), 게으름(sloth),
욕심(greed), 식탐(gluttony), 색욕(lust).

 

일곱 가지 모두
성경에서 삼가라고 거듭 강조하는 것들입니다.

 

올해의 반년을 보내고 하반기를 맞으면서,
일곱 가지 죄들 가운데 “욕심”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욕심에서 “욕(慾)”의 한자어는
“하고자 할 욕(欲)”자 아래 마음 심(心)이 합쳐진 글자입니다.
무엇을 얻고자 하고, 하고자 하는 마음이 지나친 것이 욕심입니다.

 

말 그대로 탐욕입니다.
과한 것입니다.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갖고 싶은 마음입니다.
혼자서 독점하려는 마음입니다.

 

욕심에 해당하는 영어 greed 역시
물질이나 소유에 대해서
과할 정도로 갖고 싶은 마음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우리 안에는 더 많이 갖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많이 갖는 것을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의 본성을 신앙으로 제어하고,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욕심만 내려놓아도 우리 삶이 한결 가볍고
많은 것에서 자유로울 것입니다.

 

3.
우리 안에 있는 욕심을 제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과한 것은 없습니다.

로마서에서는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어떤 빚도 지지 말고
사랑할 때 모든 율법을 이룬 것이라고 했습니다 (롬13:8).

 

믿음, 사랑, 소망 세 가지 덕목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입니다(고전13:13)

 

우리 가운데 사랑이 있을 때
욕심이 슬며시 사라집니다.
그런 점에서 욕심의 반대말은 사랑입니다.

 

2022년 한반기를 맞으면서
욕심은 내려놓고 사랑을 장착하고 싶습니다.
하루에 한 가지씩만 작은 사랑을 나눌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눅12:15)

 

하나님,
우리 안에 욕심이 사랑이 되게 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6. 30 이-메일 목회 서신)

스윗 스팟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설교에서 잠깐 언급했던
스윗 스팟(sweet spot)은 스포츠 용어에서 유래했습니다.

 

테니스 라켓에서 힘을 많이 쓰지 않고도
강하고 정확하게 공을 보낼 수 있는 지점을 가리킵니다.
테니스는 물론 골프와 야구에도 스윗 스팟이 있답니다.

 

스윗 스팟이라는 용어는
스포츠뿐 아니라 다양하게 확대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가장 잘 관람할 수 있는 자리를
스윗 스팟이라고 부릅니다. 뒤에서 3분의 1지점이랍니다.
상점에서도 상품이 가장 잘 팔리는 곳이 스윗 스팟입니다.

 

거래에서도 사고 파는 사람의 이해관계나 가격대가
정확히 맞았을 때, 그 지점을 스윗 스팟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스윗 스팟은
어떤 일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지점을 가리키는 용어로
두루 사용되고 있습니다.

 

2.
스윗 스팟(sweet spot)의 문자적 의미는
“달콤한 지점”입니다.

 

여러 가지 것들이 한군데로 모여서
달콤하고 기쁘고 경이로운 지점이 형성될 때
그곳이 바로 스윗 스팟입니다.

 

신앙의 스윗 스팟은 어디일까요?
신앙에 대한 지식/교리 (머리, head)
하나님을 경험하는 체험, (가슴, heart)
배우고 느낀 것을 실천하는 삶, (손, hands)
– 세 개의 H가 모이는 곳이 신앙의 스윗 스팟일 것입니다.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
이웃을 향한 사랑
자기 자신을 위한 사랑
– 세 가지 사랑이 모이는 곳이 스윗 스팟입니다.

 

그러고 보니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활동과 관계가
하나님 사역의 스윗 스팟이 될 것 같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주일에 함께 모이는 예배와 친교가
때때로 힘겹고 지루한 일상에
달콤함을 주는 스윗 스팟이길 바랍니다.

 

3.
기도에 대한 말씀을 전하면서
각자에게 맞는 기도 방식과 내용
즉 기도의 스윗스팟을 개발하시길 부탁드렸습니다.

 

억지로 기도하는 것,
일이 잘못된 것을 두고 기도하지 않았거나 덜해서 그렇다고 자책하는 것
기도 응답에만 연연하는 것
남에게 보이려는 기도 등
– 이런 식의 기도가 절대로 스윗 스팟이 될 수 없습니다.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때가 가장 즐겁다”로
시작하는 찬송가 364장의 제목이
“Sweet hour of prayer/달콤한 기도 시간”이듯이
하나님과 만나는 기도가 가장 즐거운 시간이길 바랍니다.

 

기도가 우리 신앙과 삶의 스윗 스팟이 되길 원합니다.
기도가 습관이 되고, 기도가 즐겁고 기쁘며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이어지는 경이로움을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골4:2)

 

하나님,
우리의 기도 시간이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과 경이로 채워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6. 23 이-메일 목회 서신)

그러나 기도

좋은 아침입니다.

 

1.
2022년 기도에 대한 연속 설교는
누가복음의 겟세마네 기도가 본문입니다.

 

십자가 죽음을 앞두신 예수님께서
습관대로 감람산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계획)이라면
앞에 있는 잔을 옮겨주시길 요청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기십니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누가 22:42)

 

2.
저는 주일 설교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를 <그러나 기도>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아버지께 모든 것을 구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듯이
하나님을 향해서 “아바(Abba)”아버지라고 친근하게 부릅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을 솔직하게 구하고 기도합니다.

 

하지만,
마지막은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길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러나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면
최선이라는 믿음에서 “그러나 기도”가 나옵니다.
하나님을 확실히 믿고,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모든 기도를 예수님처럼
“그러나 기도”로 마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최고의 신앙입니다.

 
3.
우리가 기도할 때,
기도의 응답에 초점을 맞출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드린 기도의 응답 여부로
하나님을 판단하고
신앙이 좌에서 우로 크게 움직입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의 기도가 나 중심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내가 드린 기도에 응답하시고,
하나님의 계획도 나의 계획에 맞춰서 조정되길 바라는
이기심이 우리 기도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존재 여부, 신앙의 확신이
하나님이 아닌
내가 드린 기도의 응답에 매이게 됩니다.

 

늘 말씀드리듯이
신앙은 나에서 하나님께 중심축을 옮기는 것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 기도에 대한 연속 설교를 나누면서
기도가 습관이 되고
참빛 식구들께 “그러나 기도”가 온전히 장착되길 바랍니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누가 22:42)

 

하나님,
우리의 기도와 신앙이 하나님을 향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6. 16 이-메일 목회 서신)

감사

좋은 아침입니다.

 

1.
찬송가 288장을 작사한
시각장애인 패니 크로스비에 대한 말씀을 지난번에 나눴더니
아내가 우연히 재미 금융인 신순규씨가 출연한
예능 프로그램을 유튜브에서 보았다고 알려줍니다.

 

신순규는 녹내장과 망막 바리라는 질병으로
아홉 살 때 시력을 완전히 잃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당시에 시각장애인들이 주로 갖는 직업이었던
안마사가 되는 것보다 피아니스트가 되길 바라서 피아노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는 점자책을 손수 만들어서 아들에게 주었고
어머니의 수고에 감사한 아들은 그것을 갖고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열다섯 살에 홀로 미국에 유학와서 피아노 수업을 하다가
일반 학교로 전학해서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때 만난 미국 양부모님의 격려와 도전이 큰 힘이 되었고,
일반 학교 선생님들도 신순규라는 학생을 위한 특별 교재를 만들고
양궁 수업까지 시켜 주었답니다.

 

앞을 못 보지만 활달하고 도전적인 성격 덕분에
학생회장도 하고, 결국 전액 장학금을 받고 하버드에 입학했고
MIT에서 석사과정을 밟다가 월스트리트와 연결되어서
27년째 세계적인 금융회사에서 애널리스트로 일하고 있습니다.

 

2.
이분에 대해서 검색해 보니
이미 한국에서 두 권의 책을 출판했습니다.
그 가운데 2021년 팬데믹 기간에 출판한
<어둠 속에서 빛나는 것들>을 전자책을 구입해서 단숨에 읽었습니다.

 

대단한 분입니다.
헬렌 켈러와 패니 크로스비가 그랬듯이
결코 자기의 장애(disability)를 장애가 아닌 능력(ability)으로 바꿨습니다.
앞에 있는 세 가지 철자 dis를
어떤 어려움도 이겨내겠다는 결심(determination),
장애인이 아닌 우리 사회의 일원이라는 정체성 (identity)
자신만의 기술(skill)로 바꾸면서 가능성의 문을 열었습니다.

 

눈이 두 개를 넘어서 세 개 네 개여야 하고
쏟아지는 정보를 읽고 분석해서 투자를 결정하는 월스트리트에서
장애를 극복하고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인 신순규씨가
여기까지 이를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감사”라고 했습니다.

 

불평하고 절망하면 자기만 손해입니다.
이분은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감사하면서
앞에 놓은 과제와 삶을 마주하고 해결하는 것이 습관이 된 것 같았습니다.

 

3.
신순규씨는 특별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모두 신순규씨가 될 수 없고 그렇게 될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장애와 역경을 이겨내고
자기만의 삶과 직업을 개척한 분을 보면서
인간의 가능성이 무한함을 발견합니다.
은근히 부끄러워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때때로
의기소침하고 주춤거릴 때가 있습니다.
미국에서의 삶이 쉽지 않고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느낌도 듭니다.
그때, 장애를 이기고 자신의 길을 개척한 분들의 삶이 도전됩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와 재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이 무한한 가능성의 문을 열어줍니다.
앞으로 나갑시다. 우리만의 길을 만들어 갑시다.
길이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시편 139:10)

 

하나님,
어려움과 방해물을 만났을 때
그것을 훌쩍 뛰어넘을 힘을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6. 9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