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신앙

 

 

 

 

좋은 아침입니다.

 

1.

신축년(辛丑年) 새해 첫 달이 지나갑니다.

 

소처럼 느릿느릿

그렇지만 해야 할 일을 꼼꼼하게 챙기면서

걷기로 결심했던 새해입니다.

 

여느 해처럼

빠른 속도로 걷기 힘들 것을 우리는 압니다.

조바심을 낸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닙니다.

혼자서만 앞으로 치고 나갈 수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2020년 거의 한 해를

팬데믹으로 살았기에

새해의 삶이 더 이상 새로운 일상(new normal)도 아닙니다.

 

2.

참빛교회 목사로서 갖고 있는 고민은

언제 우리가 다시 모여서 예배할 수 있을까보다

각자의 자리에서 예배하고 흩어져 지내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우리의 신앙이 식고 행여나 부서지는 것은 아닐까 입니다.

 

신앙은 혼자 가는 길이 절대로 아닙니다.

공동체로 모여 있을 때 유지되고 깊어지고 넓어집니다.

 

연말에 참빛식구들께 선물한

헨리 나우웬의 책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에 이런 글이 나옵니다.

 

상처를 안고 사는 우리가 서로 마음을 나누려는 소원이 가장 아름답게 표현되는 때는

함께 식사를 할 때가 아니겠는가? 식탁, 음식, 음료, 말, 이야기, 이러한 것들이 서로에게

각자의 삶을 내어 주려는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일 뿐 아니라 실제로 그것을 실행하는

가장 친밀한 방법이 아니겠는가? 나는 ‘함께 떡을 뗀다’는 표현을 아주 좋아하네. 그때는

깨어지고 나누어 주는 것이 확실하게 하나가 되기 때문이지. (93쪽)

 

지난 주일 예배 후 <참빛 테이블 토크>에 초대된 권사님께서

주일 예배 후에 함께 떡을 떼며 식사하던 때가 그립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같은 심정입니다.

 

3.

우리는 조금 더 기다려야 합니다.

 

교회보다도

경제와 학교가 먼저 열려야 합니다.

함께 만나서 예배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지만

안전한 세상이 속히 올 수 있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양보하고 더 길게 기다릴 수 있습니다.

 

대신,

우리가 지속해서 힘써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신앙에 깊이를 더하는 일입니다.

 

신앙을 나무에 비유하면,

팬데믹 동안 신앙의 뿌리를 깊이 내리는 것입니다.

 

잎과 줄기도 중요하고, 무엇보다 열매가 꼭 필요하지만

집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고, 신앙을 표현할 기회가 적은 지금은

깊이 있는 신앙을 훈련하기 딱- 좋은 시간입니다.

 

웬만한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신앙을 갖추기 원합니다.

전도를 비롯한 이웃과의 관계는 제한을 받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는 더욱더 깊어지기 원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과 단둘이 만나는 “골방 시간”을 꼭 가지시길 부탁드립니다.

 

아이들이 있어서 하루가 어떻게 지나는지 모르셔도

잠자리에 들기 전, 단 몇 분이라도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 시간을

규칙적으로 갖는 것입니다.

 

보슬비에 옷이 젖듯이

하나님과 단둘이 갖는 골방 시간이 깊이 있는 신앙을 만들어 줄 것입니다.

 

그가 나를 사랑한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이름을 내가 그를 높이리라. (시 91:14)

Because he holds fast to me in love, I will deliver him;

I will protect him, because he knows my name. (Ps 91:14)

 

하나님,

참빛 식구들이 고요한 시간 골방에서

주님을 찾을 때마다, 꼭 만나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1. 1. 28 이-메일 목회 서신)

 

 

인생길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 설교에서

<호모 비아트로 Homo Viator>  라는 말을 소개했습니다.

길을 걷는 존재, 여행자와 같은 인생이라는 뜻입니다.

 

“한 평생”이라는 말은

우리가 걷는 인생길이 ‘한’없이 길다는 의미와

한 번뿐인 인생이라는 뜻이 있을 겁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한평생은

어느 시인의 싯구대로 “소풍”이요

노래 가사 대로 “나그네길”입니다.

 

그 길을 걸으면서

오르막과 내리막과 같은 인생의 굴곡

때로는 험한 길, 때로는 고속도로와 같은 평탄한 인생길을 만납니다.

 

그 길을 가면서

미움, 시기, 질투, 경쟁, 실패

사랑, 화해, 양보, 승리, 기쁨까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경험합니다.

 

그 길을 함께 걸을 “길동무”가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고, 가장 큰 축복입니다.

 

 

2.

지난 월요일 아침

우리 교회의 최 연장자셨던

낸시 바렛 권사님께서 94세로 하나님께 가셨습니다.

 

낸시 권사님의 한평생도

말 그대로 곡절(曲折)의 삶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가셨건만

남편은 권사님과 갓난아이만 남겨놓고

전쟁터로 나가서 행방불명이 되셨습니다.

 

70년대 한국의 경제개발 시기에

주택을 개조해서 사고파는 사업을 하셔서 나름 성공하셨습니다.

 

재혼을 하셔서 일찍이 미국에 오셨습니다.

아들을 미국에서 공부시키고 싶다는 소원을 이루신 것입니다.

권사님 소원대로 버클리 공대를 졸업한

어느덧 70이 넘으신 아들의 효도를 마지막까지 충분히 받고 하나님께 가셨습니다.

 

권사님 집 뒤뜰은 가파른 절벽입니다.

그곳을 모두 일구셔서 산비탈의 정원을 만드셨고

그곳에 갖가지 꽃들과 채소를 심으셨습니다.

 

한시도 가만히 계시지 않던 부지런한 권사님이십니다.

깔끔하시기가 이를 데 없으셨습니다.

 

지난 5-6년은 거의 노환으로 집에 계셨습니다.

코로나 전에 심방 가면, 교회 걱정을 하시고,

따뜻해지면 교회에 꼭 오고 싶다고 저희 손을 꼭 잡으셨습니다.

노련하게 신앙을 표현하지 못하셔도

끝까지 하나님을 놓지 않으셨던 멋쟁이 권사님이셨습니다.

 

연초에 달력과 교회 선물을 갖고

잠깐 권사님을 뵈러 갔더니

기도하는 중에 그렇게 흐느껴 우셔서 마음이 좋지 않았는데

홀연히 하나님께 가셨습니다.

 

평생 편두통으로 타이레놀을 조제해서 드시고

노년에는 허리도 아프셔서 앉아있기 힘드셨는데

이제 고통도 아픔도 없는 하나님 품에서 영원히 안식하실 줄 믿습니다.

 

3.

권사님의 한평생을 회고하면서

우리가 걷는 인생길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끝이 있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 끝은 빈손으로 홀연히 하나님께 가는 길입니다.

 

무엇이 중요하고, 끝까지 남는 것이 무엇일까요?

상투적이지만 다시 스스로 다짐합니다:

“사람들 마음속에 남는 인생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나님 손을 꼭 붙들고 주어진 인생길을 걷기 원합니다.

우리 곁에 있는 길동무, 신앙의 동지들과 기쁨을 나누며

오늘 하루, 한평생 그 길을 가기 원합니다.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시 91:11)

For he will command his angels concerning you

to guard you in all your ways.(Ps 91:1)

 

 

하나님,

참빛 식구들이 가는 모든 길을

천사를 동원해서 꼭 지켜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1. 1. 21 이-메일 목회 서신)

 

 

날개

좋은 아침입니다.

 

1.

제가 국제선 비행기를 처음 탄 것은

1992년 겨울이었습니다.

다니던 직장에서

본점이 있던 호주로 연수를 가던 길이었습니다.

 

그때는 김포공항발 호주행 비행기가

일주일에 한 번 밖에 없었고

그것도 국적기가 아닌 호주 콴타스 항공이었습니다.

 

밤 비행기를 타고 출국했는데

비행기 창문으로 빛이 따라오면서 깜빡이는 겁니다.

게다가 기체의 움직임도 심해서

불안함에 밤을 꼬박 샜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제가 앉은 좌석이 날개 부분이었고

비행기 날개 끝에서 깜빡이는 빛이었습니다.

 

호주 시드니에 도착해서 비행기가 착륙하는데

날개 부분이 덜렁 열리는 것을 보면서

밤새 비상등을 켜더니 무슨 고장이 난 줄 알고

혼자서 마음을 졸였던 우스운 기억이 생각납니다.

 

2.

<Soar, 날아오름> 이라는 책에서

30년 이상을 조종사로 근무했던 저자는

비행기의 안전성에 대해서 조목조목 알려줍니다.

 

비행기 기체의 안전한 설계,

2중 3중의 안전장치,

비행기를 탈 때 가져야 할 마음가짐 등을 설명하면서,

비행기 날개가 비행기의 안전 운항에 필수적임을 알려줍니다.

 

비행기 날개 끝에 살짝 위로 솟아오른 부분은

어릴 적 종이 비행기를 날릴 때 날개 부분을 접어 올리면

곧게 날아가는 원리라고 쉽게 알려주었습니다.

 

악천후나 비상 사태에서도

비행기는 날개와 더불어 평형을 유지하기에

그 무엇보다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3.

지난주일 시편 91편을 나누면서

“날개”라는 표현을 만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날개 깃으로 자신의 백성을 덮어 주십니다.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깃으로 덮어주는 것,

어머니가 아기를 옷깃으로 덮어주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날개 아래 피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날개를 활짝 펴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기에

하나님을 향해서 “나의 피난처”라고 고백했습니다.

 

비행기 날개로 인해서 안전성이 확보되듯이

하나님께서 날개 깃으로 우리를 덮으시니 안전합니다.

불안하고 힘들 때, 하나님 날개 아래로 피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한 걸음 더 나갑니다.

하나님을 바라고 의지하는 자는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가는 것처럼 솟아오른다고 했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사40:31)

 

4.

비행기를 안정적으로 운항하게 하는

날개 바로 옆에 앉아 있으면서도

날개 끝의 안전등을 보고 불안해하던 저의 첫 번째 비행기 탑승 경험처럼

행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날개 깃으로 덮고 계시는데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것은 아닌지요?

 

2021년 한 해를 살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는 하나님을 피난처 삼고

날아올라야 할 때는 독수가 날개 치며 솟아오르듯이 비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자신감, 용기, 그리고 힘일 것입니다.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시편 91편 4절)

He will cover you with his pinions,

and under his wings you will find refuge. (Ps91:4).

 

하나님,

힘들게 시작하는 새해지만

참빛 식구들의 신앙과 삶이 날아오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1. 1. 14 이-메일 목회 서신)

 

 

 

들소의 뿔같이

좋은 아침입니다.

 

1.

팬데믹 기간 동안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품이 마스크입니다.

그 중에서도 N95 마스크가 인기입니다.

 

N95마스크에 사용되는

특수 소재를 발명한 분의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대만 출신의 피터 싸이(Peter Tsai)박사입니다.

 

싸이 박사는

재료공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1981년에 캔자스 대학에 유학 왔습니다.

 

박사과정 시절에는

여섯 개의 박사학위를 가질 정도의 500 학점을 이수했답니다.

자신의 전공은 물론 물리학을 비롯한 연관 학문을 공부한 것입니다.

 

학위를 끝내고 텍사스 대학의 교수가 된 싸이 박사는

1990년에 N95 마스크에 사용되는 특수 소재를 발명했습니다.

 

바이러스를 비롯한 미세 먼지를 막아주는 소재로,

처음에는 가정용 공기정화 필터를 생각했지만,

3M과 협업하면서 공사장이나 먼지가 많은 곳에서 일하는 분들,

의료진들을 위한 N95 마스크로 발전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시작되면서 N95 마스크가 각광을 받게 되자

싸이 박사는 수십 년 전 자신의 발명품이 인류를 구하는데 공헌하는 것에

커다란 보람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2018년에 은퇴했는데, 코로나 이후

연구소와 기업들이 그의 자문을 구하는 바람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삶을 살고 있답니다.

 

2.

신축년(辛丑年) 새해가 밝았습니다.

올해는 소띠 해입니다.

 

팬데믹으로 집에서 맞이하는 새해여서

여러모로 답답한 것도 사실입니다.

백신이 나왔지만, 여전히 코로나는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소처럼 뚜벅뚜벅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싸이 박사가  자기 인생을 살다가 N95 특수 소재를 발명했고,

30여 년 후에 그것이 인류의 안전을 위해서 사용되듯이

우리가 걷는 현재의 인생 여정이

언젠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얼마나 보람되고 감사할까요!

 

2021년을 그런 마음으로 살고 싶습니다.

 

3.

주일에 살펴보는 시편 91편 다음 장에 보면

“들소의 뿔”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주께서 내 뿔을 들소의 뿔같이 높이셨으며 (시92:10).

 

여기서 “뿔”은 권위의 상징입니다. 근사함입니다.

“들소”는 힘의 상징입니다.

히브리어 본문은 “주께서 들소처럼 내 뿔을 높이셨습니다”입니다.

 

주께서 우리의 뿔을 들소처럼 높이실 것을 기대하면서

올 한 해 어떤 상황에서도 기죽지 않고

소처럼 자신의 길을 걷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새해를 시작하는 우리 참빛 식구들께

들소의 강인함과 멋짐을 더해 주시길 기도하겠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뿔을 들소의 뿔같이 높이셨으며

내게 신선한 기름을 부으셨나이다 (시편 92:10)

But you have exalted my horn like that of the wild ox;

you have poured over me fresh oil. (Ps92:10).

 

하나님,

힘든 가운데도 열정을 갖고 새해를 시작하는

참빛 식구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1. 1. 7.이-메일 목회 서신)

지금까지 지내온 것

좋은 아침입니다.

 

1.

2020년 마지막 날입니다.

 

올해 우리 교회 표어는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였습니다.

(내년에도 같은 표어로 살기로 했습니다)

 

2020년이라는 새로운 10년(decade)을 시작하면서

참빛 식구들의 신앙과 삶이 한 단계 도약하길 기대했습니다.

 

무엇보다 2010년대는 기독교가 세상에서

힘을 잃고 반대로 지탄의 대상이 되었던 기간이었기에

2020년대에는 우리 자신은 물론 기독교가

다시 일어나서 빛을 발하길 원했습니다.

 

2.

그런데 웬걸,

2월에 한국이 신천지를 중심으로 코로나 홍역을 치르더니

한 달도 못되어서 미국도 코로나 폭풍에 휩싸였습니다.

뉴욕은 의료체계가 무너져서, 우리가 아는 지인들까지 목숨을 잃었습니다.

 

다행히 우리 지역은

일찍 문을 닫았기에 통제가 가능했지만,

3월 중순부터 교회도 문을 닫아야 했고

지난 9개월 이상을 각자의 자리에 흩어져서 예배하고 있습니다.

 

비즈니스 하시는 분들도 사업장 문을 열지 못하고

아이들도 학교에 갈 수 없습니다.

 

팬데믹이

이렇게 길게 이어질 것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3.

물론, 좋은 일도 있었습니다.

 

온 가족이 함께 지냅니다.

온 가족이 함께 예배를 드립니다.

간혹, 교회에 오지 않는 가족들도 간접적으로 예배에 참석하십니다.

 

사회활동이 줄어들면서

외로울 때도 있지만

내면을 돌아보면서 홀로서기를 시도하게 되었습니다.

 

팬데믹 초기에는 자연이 살아났고

거리에 자동차가 줄면서 오염도 줄었습니다.

 

그래도 힘든 것은 사실입니다.

온 가족이 집에서 지내는 것이나

영상으로 예배하는 것,

무엇보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사라지길 기다리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4.

그리고 오늘,

2020년의 마지막 날을 맞습니다.

 

찬송가 301장 “지금까지 지내 온 것”이 생각납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

자나 깨나 주의 손이/ 항상 지켜 주시고

모든 일을 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

 

한이 없는 주의 사랑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세상이 혼란스럽고, 여전히 깜깜해도

주의 사랑은 변함이 없음을 믿습니다.

 

그 사랑을 붙들고 새해를 맞습니다.

 

한 해 동안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들이 주의 크신 은혜를 기념하여 말하며

주의 의를 노래하리이다 (시편 145:7)

They shall pour forth the fame of your abundant goodness

and shall sing aloud of your righteousness. (Psalms 145:7)

 

하나님,

올 한해 동안 함께 하시고

여기까지 사랑으로 인도하셔서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0. 12. 31이-메일 목회 서신)

평화의 왕

좋은 아침입니다.

 

1.

맑고 환한 밤중에

천사 내려와

손에 비파 들고서

찬송하기를

 

평강의 왕이 오시니

평안하여라

소란하던 세상이 고요하도다 (찬송가 112장)

 

2천 년 전 베들레헴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

아기 예수를 찾아와서 경배한 사람들은

멀리 동쪽에서 예물을 들고 온 동방 박사들과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었습니다.

 

구약에서 그토록 예언했던 메시아가 탄생했건만

거의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탄생을 무시했거나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2.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라”(눅2:14)

 

예수님께서 태어나던 당시도

여느 때와 같이 세상은 소란스러웠습니다.

 

로마 식민지였으니 정치적으로 얽매였고

먹고 사는 것도 힘들 지경이었습니다.

물론, 잘 사는 사람들은 호의호식하고

뭇 백성을 이용해서 자신의 욕심을 채웠습니다.

 

예루살렘에는 로마 군대가 주둔하고

여차하면 잡아들이고

사람들 사이에 신뢰도 많이 망가졌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평화의 왕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어지러운 세상에 평화를 주시고

억눌린 사람을 자유케 하고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의 눈을 뜨게하고

회개의 복음, 하나님 나라 복음을 선포하러 오셨습니다.

 

3.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어두운 세상에 빛이 임했습니다.

평화의 빛, 소망의 빛, 그리고 사랑의 빛입니다.

 

2020년 성탄절을

각자 흩어진 자리에서 맞습니다.

 

몸으로 함께 하지 못해도

우리 안에 동일하게 임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무릎 꿇고 경배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빛으로 오시옵소서.

세상의 어둠, 혼란, 질병을 몰아내는 생명의 빛이 되소서.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라 (눅2:14)

Glory to God in the highest,

and on earth peace among those with whom he is pleased! (Luke 2:14)

 

하나님,

이 땅을 고쳐주시고, 세상에 평화를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0. 12. 24이-메일 목회 서신)

 

 

흩어진 나그네

좋은 아침입니다.

 

1.

아침마다

베드로전서 말씀을 함께 읽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는 사도 베드로가

소아시아에 흩어진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특별히 “흩어진 나그네”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네이버 국어사전은 나그네를

“자기 고장을 떠나 다른 곳에 잠시 머물거나 떠도는 사람” 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베드로가 나그네라는 말을 썼을 때도 같은 의미였을 것입니다.

누구나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수 없기에

한평생 나그네로 살다가 본향으로 돌아갑니다.

 

“흩어진”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디아스포라>입니다.

디아스포라는 씨가 한곳에 모이지 않고

사방으로 흩어진 것을 가리킵니다.

 

“씨”라는 의미가 마음에 듭니다.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흩어질 때는

예수의 생명이 들어 있는 복음의 씨를 갖고 흩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 각자가 디아스포라,

즉 흩어진 생명의 씨앗이었습니다.

 

2.

흩어진 나그네의 삶이 녹록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소수(minority)에 속했습니다.

본질은 하나님 나라 백성이지만,

현실은 로마 제국의 백성이었습니다.

 

베드로전서에서는

당시의 정부나 권력자들이

하나님의 막대기가 되어서 선을 이루도록

그들을 지원하고 기도할 것을 부탁하는데,

약자(마이너리티)의 현실이 그대로 반영된 말씀입니다.

 

물론,

세상에 함몰되거나 세상을 쫓으면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거룩하게 된

하나님 백성답게 세상 속에서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 가치관을 과감히 떨치고 “주의 소유된 백성”답게 사는 것입니다.

 

뭇사람을 존중하고, 열심히 선을 행합니다.

기쁨으로 고난을 대면하고,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으로 주의 공동체를 섬기고

서로 뜨겁게 사랑합니다.

 

제국의 통치 밑에 살지만

제국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 백성답게 빛과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3.

팬데믹을 사는 우리도

각자의 자리에서 흩어진 나그네로 살아갑니다.

 

코로나 상황이 되면서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이 세상이 우리의 목적지가 될 수 없음을 실감합니다.

 

그렇다고 이 세상의 삶에 소홀할 수 없음은

우리를 비방하는 자들까지 우리의 거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흩어진 나그네의 삶을 멋지고 근사하게 사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이 뜻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준비하는 요즘,

나그네 된 하나님 백성의 삶을 멋지게 설계하는

참빛 식구들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힘냅시다.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벧전 3:13)

Now who is there to harm you

if you are zealous for what is good?  (1 Pet 3:13)

 

하나님,

흩어진 나그네로

각자의 삶을 사는 참빛 식구들께 힘을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0. 12. 17이-메일 목회 서신)

 

 

 

마스크

좋은 아침입니다.

 

1.

엊그제 예일대학에서 발표한 것을 보니

2020년 한 해 동안 가장 많이 듣고 사용한 말은

“마스크를 쓰세요 wear a mask”였답니다.

 

팬데믹 전까지

일상생활에서는 마스크를 거의 착용하지 않았습니다.

마스크 하는 것을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는 의도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미국에서 얼굴에 마스크를 쓰는 것은

의료, 건설 현장 등 특별한 직종에 종사하는 분들로 한정되었습니다.

 

실제로,  펜데믹 초기에는

마스크를 착용하라는 질병관리본부(CDC)의 권고를 무시하고

많은 사람이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이들까지

거의 모든 사람이 마스크를 착용합니다.

자신은 물론 이웃을 향한 배려요 보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2.

사실 얼굴을 가리는 마스크는

인류 역사에서 아주 오래된 전통입니다.

 

왕을 비롯한 권력자들이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

얼굴 일부를 가리거나 멋지게 장식했습니다.

전쟁에 나가는 장수들과 군병들도 보호용으로 마스크를 착용했습니다.

 

우리나라 탈춤에서 보듯이

페스티벌이나 얼굴을 가리고 춤을 추곤 했습니다.

자신의 실체를 가리기 위함이고,

종종 하층민이 권력자들을 풍자하기 위해서 마스크를 쓰고 무대에 섰습니다.

 

이처럼 마스크는 오래전부터

얼굴 가리개 이상으로 두루 사용되었습니다.

 

3.

성경에도 천으로 얼굴을 가린 대표적인 인물이 있습니다.

시내산에서 40주야를 머물면서 하나님과 대화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고 내려온 모세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모세의 얼굴이 너무 빛이 나서

그의 형 아론을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쳐다볼 수 없었습니다.

모세의 거룩한 모습에 두려워하는 백성들도 있었습니다.

 

그러자 모세는 천(수건)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습니다.

다시 하나님을 만나러 갈 때 수건을 벗은 것을 보면

모세가 마스크를 착용한 것은 철저히 백성들을 위한 배려였습니다.

 

지금도 미국 일부에서는

마스크 착용을 꺼린다는 보도를 종종 듣습니다.

모세의 예를 알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앞장서서

마스크 착용을 적극적으로 권장해야 할 겁니다.

 

백신이 보편화되기까지

마스크 착용이 최선의 바이러스 전파 방지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4.

마스크가 민 낯을 가려주는 역할을 하니 편할 때도 있습니다.

마스크가 얼굴을 가리니 화장을 할 필요도 없고

모자 정도를 써주면 외모를 치장할 이유도 없습니다.

 

하지만, 마스크를 착용하면서

아름다운 미소도 잃어버렸고,

얼굴 표정으로 전하는 소통도 상실했습니다.

 

팬데믹처럼 특별한 이유가 아니면,

마스크로 자신을 가리는 것도 정상은 아닙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이웃을 대하는 것이 바람직하지요.

 

그런데,

마스크 착용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일상이 될 것 같습니다.

이웃을 위한 배려요 사랑이니 적극 동참해야 합니다.

 

대신, 우리 자신이 마스크 속에 숨어서는 안 됩니다.

비록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살지만,

우리의 내면은 훨씬 더 아름다워지고 깊어지길 원합니다.

 

언젠가 마스크를 벗고 만났을 때

우리의 모습이 모세처럼 밝게 빛나길 기대합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 (출34:33)

And when Moses had finished speaking with them,

he put a veil over his face.(Exo 34:33)

 

하나님,

숨김이 일상이 된 요즘이지만,

우리의 내면은 더욱 빛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0. 12. 10 이-메일 목회 서신)

 

 

 

느슨함

좋은 아침입니다.

 

1.

자고 일어나면

미국의 코로나바이러스 숫자가

눈덩이처럼 늘어납니다.

 

경제활동 제한은 물론

통행 금지를 권할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고 있습니다.

이 지루한 팬데믹이 언제나 지나갈지요!

 

그런데

요즘 동네를 다니다 보면,

사람들의 경계심이 느슨해진 것을 발견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마스크를 착용하지만

가끔은 마스크 없이 거리나 공원을 거니는 사람들을 봅니다.

코스코를 비롯한 시장에 가도

6 ft 거리 두기를 잘 지키지 않습니다.

 

여기서 다시 경제를 닫게 되면

소상공인들은 물론 일용직 노동자들에게

큰 어려움이 닥칠 것이 분명하기에 염려스럽습니다.

 

2.

팬데믹과 같은 전염병이 돌면

자신의 건강도 중요하지만,

이웃의 건강을 위해서도 규칙을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22:39)는

예수님 말씀의 적용입니다.

 

지난번에 나눴던 요한일서 말씀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한데,

그동안 기독교는 이웃 사랑에 큰 관심을 쏟지 않았습니다.

 

개인 구원을 강조하면서

모든 사람이 함께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는 공동체 구원을 무시했습니다.

 

죽어서 가는 하나님 나라를 강조하면서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도 무시했습니다.

 

팬데믹 기간 동안

주일예배로 모이지 못하고

교회가 문을 닫는 초유의 사태를 경험했습니다.

목숨 걸고 예배드리던 예전의 사고방식으로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바뀐 예배 형태를 통해서

세상을 향한 기독교인의 또 다른 사랑의 실천을 배웠습니다.

나보다 남을/이웃을/세상을 먼저 생각하라는

예수님 말씀을 억지스럽게(?) 실천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일찍 깨닫고

세상을 사랑하는 것에 느슨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3.

모든 것이 느슨해지기 쉬운 시간입니다.

 

코로나에 대처하는 방식이나 우리의 마음가짐,

매주 현장 예배로 드리지 못하면서

솔직히 우리 신앙도 느슨해지는 지점이 있을 것입니다.

 

팬데믹이 갖고 온 새로운 일상에

점차 길들여진 느슨함입니다.

 

이제 2020년의 마지막 달력을 살고 있습니다.

올해는 전 세계 사람들이

모든 세대가 특별한 해로 오랫동안 기억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또한 세상을 향해서도

느슨해진 것들을 다시 정돈하면서

한 해를 근사하게 마무리하기 원합니다.

 

p.s. 팬데믹 초반에는 Happy birthday노래를 두 번 부르면서 손을 씻었는데

요즘은 손을 씻는 시간도 조금씩 줄어듭니다. 다시 처음/기본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너희 안에 마음을 품으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5)

Have this mind among yourselves,

which is yours in Christ Jesus (Philippians 2:5)

 

하나님,

팬데믹의 고난이 얼른 지나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0. 12. 3이-메일 목회 서신)

감사절에

Happy Thanksgiving!

 

1.

2020년 추수감사절을 맞았습니다.

팬데믹으로  대부분의 모임이 취소되고

조촐하게 맞는 감사절입니다.

 

그래도 한 해 동안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마음 깊은 곳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샘솟길 원합니다.

 

2.

올해는

1620년 겨울, 메이플라워를 탄 102명의 청교도들이

미국 동부 플리머스에 도착한 지 400년되는 해입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신대륙에 도착한 청교도들은

원래 예정했던 뉴욕 허드슨강 하구가 아닌

보스턴 근처 플리머스에 상륙해서 혹독한 겨울을 보냈습니다.

이듬해 봄이 되었을 때는 절반 이상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때 근처에 살던

원주민(Native American)들이

집을 짓는 법부터, 씨를 뿌리고 농사를 짓는 법과

사냥까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서 살아가는 비법을 알려주었습니다.

 

이들의 도움으로 청교도들이

한 해 농사를 마치고 함께 모여서 잔치를 벌인 것이

추수감사절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3.

그런데 400여 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기득권이라고 할 수 있는 청교도들의 관점이 아닌

원주민의 입장에서 당시의 상황을

새롭게 조망하고 해석하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엊그제 USA Today/Cape Cod Times에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추수감사절에 대한 오해와 진실에 대한 기획 기사가 실렸습니다.

 

청교도들이

자신들에게 생존 비법을 알려준 원주민들을 초대해서 함께 잔치를 벌였다는 것에 대해서,

사실 청교도들은 자신들만의 조촐한 감사절 축제를 했고,

총을 쏘면서 분위기를 한껏 돋우었는데

총소리를 들은 원주민들이 무장하고 찾아오면서

협상과 동시에 원주민들이 사냥한 사슴 등으로 잔치를 벌였다는 것입니다.

 

화기애애한 축제이기보다

어색한 긴장감 속에서 펼쳐진

일종의 외교적인 만남이었다는 것이지요.

 

원주민들 입장에서는 신대륙을 찾아온 청교도들이

자신들을 해칠 수 있다는 불안함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청교도들도 원주민을 무시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서로 신사협정을 맺지만, 청교도들에게 유리한 조문들이었습니다.

 

결국, 원주민들은

총으로 무장한 청교도들에게 제압당하고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깁니다.

 

그러니,

우리가 추수감사절로 지키는 오늘이

이 땅에서 원래 살고 있던 네이티브 어메리칸들 입장에서는

통곡의 날(the day of mourning)이 된 것입니다.

 

4.

청교도들이 신대륙에 도착한 지 400년,

에이브러햄 링컨이 11월 셋째 주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제정한 지 157년,

그동안 우리는 추수감사절을 축제의 날로 흥겹게 지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우리 마음 한쪽에

추수 감사절을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보호구역으로 내어쫓긴 비극이  시작된 날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일에 명암이 있게 마련입니다.

누군가 혜택을 입으면, 누군가 손해를 입고

누군가 행복하면, 누군가는 불행하고

세상일이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고 평화로울 수 없습니다.

 

감사절을 보내면서,

올 한 해 동안, 행여나 나(우리)로 인해서 슬퍼하거나 손해 본 이웃은 없는지

내가 기뻐하고 감사할 때, 같은 상황에서 슬퍼하고 힘들어하는 분들은 없는지

우리의 삶과 세상의 역사를 세심하게 살피고, 매사를 속단하지 말아야겠습니다.

 

가난한 자와 부한 자가 함께 살거니와

모두를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 (잠언 22:2)

The rich and the poor meet together; the LORD is the maker of them all. (Prov 22:2)

 

하나님,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 주님의 마음으로

어그러진 세상을 품고 사랑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0. 11. 26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