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

좋은 아침입니다.

 

1.

주일 예배에서

창세기 야곱에 대한 말씀을 시작했습니다.

주일에도 말씀드렸듯이

아브라함과 이삭에 관한 말씀은 일찍이 함께 나눴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고향 땅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땅으로 가는 믿음으로 시작했습니다.

중간에 하나님의 약속이 현실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잠시 곁길로 갔지만,

마지막에는 하나뿐인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의 믿음을 선보였습니다.

 

이삭은 “웃음”이라는 이름 뜻 그대로

웃음 가득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커다란 어려움을 겪지 않았으니, 이삭에 대한 말씀이 짧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에 비하면

야곱의 일생은 말 그대로 파란만장합니다.

탄생부터 어린 시절, 결혼과 자녀들,

이집트 피난살이까지 한평생이 성경에 기록된 어쩌면 유일한 인물입니다.

 

그러다 보니

야곱의 희로애락 한 평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집니다.

 

2.

야곱 속에는 완벽하지 않은 우리의 모습이 있습니다.

 

순종과 실수를 거듭하지만, 믿음의 조상으로 우뚝 선 아브라함이나

큰 어려움 없이 또는 아버지 아브라함의 삶을 따라 사는 이삭과 달리,

야곱은 물질에도 민감하고,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합니다.

 

그의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에 비해서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야곱에게 마음이 갈 수도 있습니다.

 

이곳저곳을 떠돌면서

이민자로 살았기에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는 야곱의 고백도

타향에 와서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을 대변합니다(창49:7).

 

야곱의 삶을 지탱해 준 두 가지 사건이 있었습니다.

 

형 에서를 피해서 외삼촌 집으로 피나가던 길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돌베개를 베고 노숙할 때 하나님께서 야곱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야곱은 그곳을 벧엘(하나님의 집)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어디든지 하나님이 계시면 그곳이 하나님의 집이라는 깨달음입니다.

 

20여 년 외삼촌 집에서 이민 생활을 마무리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목에서

에서가 야곱에게 다가온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야곱은 형이 자기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가족을 얍복강 너머로 건네놓고

한밤중에 야곱 홀로 남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야곱을 찾아오셨습니다.

밤새도록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합니다.

 

깜깜한 어머니 태중에서 형과 싸우던 야곱이

한밤중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씨름한 것입니다.

형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태어난 야곱이

얍복강에서는 하나님을 꼭 붙들고 복을 주시길 간청합니다.

 

그때 야곱의 이름이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의 ‘이스라엘’로 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름입니다.

 

벧엘과 얍복강은

야곱의 한평생을 버티는 두 기둥이었습니다.

 

3.

우리의 삶도 야곱에 버금가게

힘들고 고달픈 순간의 연속입니다.

모든 삶이 힘들고, 지금 이 순간이 늘 어려운 법입니다.

 

그때마다

야곱이 하나님을 만났던 벧엘과 얍복강 사건이

우리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꿈꾸고 하나님과 씨름하면서 걷는

인생과 신앙의 순례길이길 간절히 바랍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내게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창28:15)

 

하나님

참빛 식구들을 지키시고 항상 함께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5. 18이-메일 목회 서신)

아히도벨

좋은 아침입니다.

 

1.
아침에 함께 묵상하는
사무엘하 본문은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쿠데타를 일으키는 장면입니다.

 

다윗의 인생은
밧세바 사건을 전후로 극명하게 나뉩니다.

 

다윗은 예루살렘에 수도를 삼고
대내외적으로 나라를 견고하게 세웠습니다.
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자기 잘못을 덮으려고 충성스러운 장수 우리아까지
전쟁터에서 죽게 하면서 다윗에게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습니다.

 

밧세바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죽고
다윗 가문에 폭력과 죽음이 끊이지 않더니
결국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이어졌습니다.

 

다윗은 죄의 대가를 치루려고 결심한 듯
자신과 가문에 닥친 어려움을 감당합니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지 않았습니다.
비록 밤중에 신하들을 이끌고 피난을 가지만,
차분하게 대처하고 치밀하게 계획을 세웁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도 돋보입니다.

 

2.
다윗이 매우 당황하는 순간도 있었습니다.
다윗이 가장 아끼고 신뢰하는 모사 아히도벨이
압살롬 편으로 갔다는 소식을 들을 때입니다.
다윗이 즉시 하나님을 찾고 기도할 정도로 아히도벨의 배신은 위협적이었습니다.

 

“아히도벨”이라는 이름은
무감각한 형제, 냉철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조언으로 당대 최고의 모사꾼이 되었습니다.
아히도벨의 말은 하나님 말씀으로 생각할 정도의 권위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 아히도벨이 압살롬 편에 섰으니
다윗이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이 자기 친구 후새를 예루살렘에 돌려보냅니다.

 

성경은 아히도벨과 후새의 경쟁을 보도합니다.
아히도벨은 기습공격을,
후세는 시간을 갖고 완벽하게 준비할 것을 제안하는데
압살롬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기하게도 후세의 손을 들어 줍니다.
성경은 다윗의 왕권을 회복하기 위한 하나님의 간섭이라고 알려줍니다.

 

자기 계획이 거절된 것을 안 아히도벨이
고향으로 내려가서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다윗에게 충성을 다하지 않은 사필귀정의 사건이지만,
하나님 버금갈 정도의 훌륭한 책사였음을 고려하면 안타까운 죽음입니다.

 

3.
감정에 휘달리지 않고 냉철하게 상황을 분별하고 판단하던
아히도벨이 압살롬을 따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자기 잇속이 있었거나,
압살롬의 달콤한 제안에 순간적으로 분별력을 잃었을 것입니다.
아히도벨은 자기 능력을 믿은 나머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소홀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끝까지 바른길을 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순간의 선택이 생명을 좌우할 수 있음을
아히도벨을 반면교사 삼고 배웁니다.

 

우리 앞에도 많은 유혹이 있습니다.
분별력을 잃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후회하지 않는 선택,
변치 않는 마음으로 끝까지 하나님의 길을 가기를 원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밤에 주의 이름을 기억하고 주의 법을 지켰나이다 (시119:55)

 

하나님
오늘 하루도
믿음 가운데 깨어 있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5. 11이-메일 목회 서신)

자긍심

좋은 아침입니다.

 

1.
여행 중에
숨은 맛집이라고 소문난 곳을 방문했습니다.
자기 이름을 걸고 예쁜 정원까지 꾸몄습니다.
생각보다 가격도 비싸지 않았습니다.

 

주방 너머로 셰프가 보였고
들어서자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메뉴가 많지 않았기에
우리 일행 네 명은 똑같은 메뉴를 주문했습니다.

 

그랬더니 셰프가 정색을 하면서
“네 분이 사이가 좋지 않으신가요?”
“아니면 개성이 없으신가요?”
“호기심도 없고 창의력도 없으신 것 같습니다” 라며 타박합니다.

 

우리는 서로 매우 친한 사이라고 변명하거나
손님을 마구 대하는 듯한 말투에 화를 낼 여유도 없이
셰프의 기세에 눌려서 각자 다른 메뉴를 주문하고 말았습니다.

 

드디어 음식이 나왔습니다.
셰프가 오더니 반찬부터 메인 메뉴까지
재료, 조리방식, 각 메뉴의 특징까지 상세하게 설명했습니다.

 

고급 식당에서 셰프의 안내를 받는 것에 버금가는 환대였습니다.
마음이 환해지고
우리 앞에 차려진 각각의 요리와
대화를 나누는 듯한 묘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2.
셰프는 자기가 준비한 요리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거칠 것이 없었고 부족한 것 하나도 없이
당당하게 자기 요리를 우리 앞에 내놓은 것입니다.

 

셰프의 설명을 듣고 나니
우리 네 명이 똑같은 음식을 시켰을 때
왜 호기심도 없느냐고 몰아붙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자기 일에 자신감과 자긍심을 갖고 있는 것이 부러웠습니다.

 

모든 일이 쉬운 것은 없습니다.
그래도 이왕 하는 일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일에 자긍심을 갖는 것은 꼭 필요합니다.
그때, 숨어있는 힘까지 발휘되고 호기심을 넘어서 창의력도 생길 것입니다.

 

3.
자신감 넘쳤던 셰프처럼
우리의 자긍심은 퍼져 나갑니다.
더불어 기뻐하게 되고 왠지 모를 힘을 줍니다.

 

오늘 하루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
우리가 하는 일,
가족, 친지, 교회 등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자긍심을 갖고 살아봅시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얼마나 귀한지
예수님께서 우리의 길과 생명과 진리가 되심에
확신과 자부심을 갖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갑시다.

 

우리의 자긍심으로 세상을 밝히고
사람들에게 웃음과 희망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하느니라 (수1:9)

 

하나님,
자긍심을 갖고 그리스도인의 길을 걷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5. 4이-메일 목회 서신)

어떤 지점

좋은 아침입니다.

 

1.
태풍의 눈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태풍의 중심부에 비와 바람이 외벽을 형성하면서
수십 킬로에 이르는 지역에 평온한 상태가 유지되는 현상입니다.

 

과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저 같은 사람에게는 신비로운 자연현상으로 보입니다.
어떻게 태풍 한 가운데에 평온하고 맑은 태풍의 눈이 생긴 단 말입니까?

 

그런데 살다 보면
태풍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네 인생길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안개가 끼인 것처럼 앞길이 뿌옇게 보일 때가 많습니다.
누구나 정답이 없는 인생길을 걷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지점이나 어느 순간에
앞길이 훤히 보이거나, 문제들을 해결한 묘수가 떠오르거나
자신감과 확신이 생깁니다.
어려움 속에 있으면서도
태풍의 눈처럼 평안과 소망을 느낍니다.

 

염려와 불안이 밀려옵니다.
실제로 두려운 일이 닥쳤습니다.
도저히 마음의 평안을 누리기 힘듭니다.
그런데 어떤 순간, 어떤 지점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안이 임합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맛보는 순간입니다.

 

2.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늘 맑은 것은 아닙니다.
365일 24시간 확신 가운데 사는 것도 아닙니다.
평소에 믿고 있던 것들에 의심이 생기고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 때가 있습니다.

 

주기도문에서 배운 것으로 설명하면
시험에 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믿음의 길을 가는 우리에게
시험에 드는 일은 언제나 발생합니다.

 

그런데 어떤 지점 또는 어떤 순간에는
의심의 구름이 걷히고
모든 것이 다 믿어지면서
영적인 눈이 활짝 뜨인 것을 경험합니다. 거침이 없습니다.

 

이처럼 크고 작은 깨달음의 순간을 경험할 때마다
신앙이 한 계단 한 계단 도약합니다.

 

3.
이 모든 순간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지점입니다.
미래에 펼쳐질 일을 앞당겨서 경험하는 신비로움입니다.
어려움 한 가운데서 하늘의 평안을 맛보는 지점입니다.
좀처럼 믿기 어려운 신앙의 장애물이 사라지는 순간입니다.

 

이런 순간을 맛보면서
우리는 다시 일어나 주어진 인생길을 갑니다.
우리 삶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지 깨닫습니다.

 

바로 오늘이
주님 안에서 그 날, 그 순간, 그 지점이길 원합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4:27)

 

하나님,
빼앗지 못할 평안, 확신, 자신감
넘치는 사랑과 소망을 맛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4. 27이-메일 목회 서신)

종결자

좋은 아침입니다.

 

1.
저는 한국의 1호선 경인선 전철에
얽힌 추억이 많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1974년에 경인선이 개통되었는데
고등학교 시절인 1978년부터 이용해서
대학과 직장 모두 20년 동안1호선 전철을 탔으니 말입니다.

 

제가 다니는 구간의 역 이름은 물론
각 역까지 걸리는 시간도 외우고,
혹시나 갈아탈 때 좋은 탑승 위치,
멀리 갈 때는 어디서 자리가 나는지까지 꽤 차고 있었습니다.

 

당시 출퇴근 시간에는 사람들이 정말 많아서
직장에 가면 와이셔츠가 땀으로 젖고 구겨질 때도 많았습니다.
지옥철이라는 말이 그냥 생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2.
한국에 올 때마다
여전히 1호선 전철을 이용합니다.

 

대한민국이 모든 면에서 발전했지만,
전철과 지하철도 눈부시게 발전했습니다.
서울 시내 어디든 땅을 파고들어 가면 지하철이 나올 듯이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리바리,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목적지에 도착하는 이방인이지만
전철이나 지하철을 탈 때마다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정말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특별한 국가인 것 같습니다.

 

3.
<지하철 종결자>라는 앱을 설치했습니다.
출발지와 도착지를 입력하고
출발하고 싶은 시간 또는 도착하는 시간을 알려주면
정확한 정보를 알려주는 앱입니다.
환승할 때 몇 번째 칸에 타야 하는지까지 알려줍니다.

 

“종결자”가 무슨 뜻이냐고
chatGPT에 물으니 다음과 같이 답해주었습니다:
“종결자는 어떤 일을 끝내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어떤 문제를 해결해 주는 사람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종결자 앞에 수식어를 붙이면
특정 분야에서 끝을 본 사람이거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사람이 됩니다.

 

<성경 종결자> 성경을 모두 마스터한 사람
또는 성경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사람.
<사랑 종결자> 사랑에 목숨을 걸고 끝을 본 사람
사랑이라면 어떤 문제도 해결할 줄 알고
사랑을 세상에 펼쳐 보이는 사람.

 

종결자라는 말은
교만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대단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지하철 종결자>라는 앱을 사용해 보니
교만보다는 섬김에 무게가 실립니다.
지하철을 이용하는 승객들에게 최고의 편의를 제공하는
말 그대로 종결자이기 때문입니다.

 

4.
누군가에게 종결자라는 말을 들을 정도의
정보와 섬김,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섬김의 끝, 사랑의 끝, 하고 있는 일의 끝,
신앙의 끝에 이르는 종결자가 되는 것이지요.

 

우리에게는 죽음까지 이기신 최고의 종결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에
우리 역시 그 길을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 (전도서 7장 8절)

 

하나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걷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4. 20 이-메일 목회 서신)

우리

좋은 아침입니다.

 

1.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친근한 용어가 들립니다.

 

“우리 비행기는…”
이라고 시작하는 멘트인데
주기도문 첫 번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서 우리가 생각났습니다.

 

“우리”라는 말은 마음을 안심시켜줍니다.
함께 간다는 뜻입니다.
누구도 배제하거나 따돌리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한국행 비행기 안에는
여러 사람이 타고 있습니다.
기껏해야 옆 사람과 인사를 나눌 정도인데
그것도 혼자 여행할 때나 그렇지
대개는 함께 가는 가족이나 일행과만 소통합니다.

 

그런데도
비행기 승무원은 “우리 비행기”라고 했습니다.
목적지가 같으니 우리입니다.
비행기라는 큰 캡슐에 몸을 맡긴 사람들이니 우리입니다.

 

2.
예수님께서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 (our Father)”라고 부르셨습니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말 그대로 우리를 실천했습니다.
세상에서의 삶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믿었으니 그리스도인들끼리
똘똘 뭉쳐서 우리 공동체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재산까지 공유했고
어려운 교우들을 돕고
예수님 안에서 남녀노소는 물론 신분까지 초월하는
“우리”가 되었습니다.

 

초대교회의 모습이 부러울 때도 있지만,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이 그때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우리”는
유무상통하는 공동체라기보다
한계를 가진 우리 공동체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3.
우리 교회는 다양함을 존중합니다.
다양함 속에서 서로의 공감대를 형성해 가고
우리라는 공동체를 세워가는 것이지요.

 

유니폼을 입듯이 한 가지 색깔을 내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것들, 정말 중요한 것에서
“우리”를 찾고 그것을 기초로 공동체를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닮으려는
목적이 같습니다.
천로역정의 크리스천처럼
하나님 나라라는 목적지도 같습니다.

 

주일마다 같은 공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니
“우리”임에 틀림없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있는 사람들에 비하면
우리 공동체는 서로를 많이 알고 친밀합니다.
그래도 부족한 것이 있기에 혹시라도
외롭거나 배제되는 참빛 식구들이 없도록 서로 챙겨야 합니다.
“우리”라는 말을 쓰는 것이 부끄럽지 않도록…

 

하늘위에서
참빛 식구들을 눈에 그리며 기도하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예수님의 기도가 실감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넘어서 ‘우리’ 하나님이 되신 것이
감사할 뿐입니다.

 

우리 주는 위대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시도다 (시편 147:5)

하나님,
같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
참빛 식구들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4. 13이-메일 목회 서신)

안목

좋은 아침입니다.

 

1.
지금으로부터 560년 전인 1463년
이탈리아 피렌체 대성당은
아고스티노 두치오 라는 조각가에게
성단 바깥쪽 벽을 장식할 다윗상을 만들어 줄 것을 의뢰했습니다.

 

아고스티노는
채석장을 직접 찾아가서 5.5미터 길이에
11톤이 넘는 돌을 선정했습니다.
이 돌을 피렌체까지 옮기는 데 자그마치 2년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돌을 갖고 다윗상을 만들기로 한 아고스티노는
돌의 모양만 이상하게 만들어 놓고 중간에 해고됩니다.

 

11톤이 넘는 큰 돌은 애물단지가 되어서
1501년 스물여섯 살의 청년 조각가 미켈란젤로가 나타나기까지
40년 가까이 성전 뜰에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3년에 걸친 작업 끝에
역사상 가장 유명한 조각상 가운데 하나인
5미터가 넘은 다윗상을 완성합니다.

 

2.
미켈란젤로의 다윗상은
다윗이 골리앗과의 전투에 나가는 모습입니다.
하나님 외에 믿을 것이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벌거벗은 다윗을 조각했을 것입니다.

 

왼손으로 물매를 어깨 뒤로 감추었고,
오른손에 물맷돌이 든 주머니를 꼭 쥐고 있습니다.
다리는 당시의 기법을 살려서
골리앗을 향해서 나가는 모습을 극대화했습니다.
긴장한 다윗의 표정에서 비장함이 느껴집니다.

 

다윗이 준비한 물맷돌만 효력을 발휘한다면
다윗의 승리는 떼놓은 단상이었습니다.
칼을 들고 있는 골리앗이 근접 전투만 가능했다면,
다윗은 거인 골리앗에게 접근하지 않고도 물맷돌을 던져서
커다란 과녁 골리앗을 넘어뜨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기발한 전투 방식에 하나님이 함께하시니
골리앗은 다윗의 적수가 될 수 없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골리앗을 향해서 나가는
다윗의 비장한 모습을 조각했습니다.

 

3.
채석장의 큰 돌이
미켈란젤로에 의해서 다윗상으로 거듭나기까지
수십 년이 필요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산처럼 큰 돌을 보고 지나쳤을까요!
애초에 불가능한 일을 벌였다고 한마디씩 했을 것입니다.

 

그때 이십 대 중반의 조각가 미켈란젤로는
커다란 대리석 속에서 골리앗과 싸우러 나가는
다윗의 모습을 상상했고 그것을 작품으로 완성했습니다.

 

고난주간을 지내면서
부활절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혹시 부활이라는 엄청난 자원이
피렌체의 큰 돌처럼 우리 신앙과 삶에 방치되어 있지는 않은지요?

 

말과 생각으로는 부활을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고
그 꿈을 펼치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될까요?

 

부활 속에 숨겨진 놀라운 생명의 능력을 경험하고
그것을 세상에 드러내기를 원합니다.
부활을 살고 싶습니다.

 

예수님,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행2:32)

 

하나님,
부활을 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4. 6 이-메일 목회 서신)

일용할 양식

좋은 아침입니다.

 

1.
주일예배에서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을 차례로 살피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우리를 향한 첫 번째 기도인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를 공부했습니다.

 

출애굽 할 당시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일 같이
하루분 양식인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매일의 양식을 책임지실 것을 약속하시면서
매일같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훈련을 시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로마 시대 군사들에게 지급된 하루분 식량에 해당하는
일용할 양식은 오늘 꼭 필요한 것입니다.
여유가 없습니다. 내일 어떤 일이 생길지 모릅니다.
하루하루 하나님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내일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한 치 앞을 알지 못하니 ‘오늘’을 살아갈 뿐입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2.
가난하게도 부하게도 마시고
필요한 양식만 공급해 달라는 잠언 말씀도 나눴습니다.
가난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거나
부자가 되어서 하나님을 잊게 될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가난은 ‘상대적’입니다.
그러니 실제로 가난한 것보다 마음이 가난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느끼는 상대적 빈곤이 더 큽니다.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곧 가난이네요.

 

살아가는데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이 딱 맞습니다.
욕심껏 더 가지려다 보니 가난을 느낄 뿐입니다.

 

재물의 많고 적음도 ‘상대적’입니다.
아무리 부자라도 만족하지 못하면 가난을 면치 못했습니다.
재물로 인해서 하나님을 잊어버린다면 큰일입니다.

 

우리에게는 일용할 양식만 필요합니다.
모자라는 것과 남는 것은 예수님의 기도에 맞지 않습니다.
그 기준은 지금 자리에서 “감사”하고 있는지 여부입니다.

 

떡 한 덩어리를 놓고 감사기도를 드리면
그 사람은 부자입니다. 전혀 가난하지 않습니다.
물질이 많아도 감사가 없다면, 어리석고 안타까운 인생입니다.

 

사순절 막바지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감사가 자리 잡고 있는지요!
말씀대로 “범사에” 감사한다면 최고로 행복한 인생입니다.
은혜로 사는 사람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감사하기 원합니다.
한 발짝 더 나가면, 조금이라도 나누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사순절은 금식해서 남은 양식을 갖고
절대적으로 가난한 이웃에게 나눠주는 기간임도 기억합시다.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책임지실
하나님을 꼭 붙들고 믿음으로 살기 원합니다.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잠언 30:8-9)

 

하나님,
오늘 하루 감사하고 또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3. 30 이-메일 목회 서신)

성숙

좋은 아침입니다.

 

1.
저는 한국에서 IMF가 한창이던
1998년에 미국에 왔습니다.
환율이 올라서 7년간 열심히 저축했던
제 통장 잔고가 뚝 떨어졌습니다.

 

미국에 와서 10년이 지났을 때
2008년 금융위기도 경험했습니다.
은행에 저당 잡힌 주택들이 경매로 팔렸습니다.
무차별 해고가 곳곳에서 일어났습니다. 미국 자체가 흔들렸습니다.

 

또 10여 년이 지난 2020년,
코로나로 인한 팬데믹이 발생했습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가 교회까지 문을 닫게 했습니다.

 

코로나가 여전히 우리 곁에 있는데
물가(inflation)와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팬데믹 동안 4조달러에 육박한 돈을 풀었는데
그것이 물가 상승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우리 모두 느끼듯이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습니다.
과열된 경제를 식히려는 과정에서 정부가 돈줄을 쥐니
지난해 말부터는 기업들의 대량 해고가 시작되었습니다.

 

석 달도 지나지 않은 2023년 한 해 동안
테크 회사들의 해고 숫자가
작년 한 해 동안 해고한 16만여 명에 육박하는 14만여 명이랍니다.
다른 분야의 해고까지 합치면 새해에만 수십만 명이 해고를 경험했습니다.

 

2.
옆에서 일하던 동료가
어느 날 갑자기 출근하지 않습니다.
출근하자마자 해고 통지를 받고 경비원이 감시하는 가운데
짐을 싸서 회사를 나와야 합니다. 그 심정이 어떨까요!

 

혹자는 해고되자마자 새로운 직장으로 취업이 되어서,
해고 수당을 고스란히 챙깁니다.
해고를 기회로 만들었다고 자랑하고 곁에서도 부러워합니다.
힘든 분들을 생각해서 조용히 계시면 좋으련만…

 

많은 경우는 해고의 상처를 가슴에 품고
이곳저곳에 이력서를 뿌립니다. 그 시간이 길어지면 더 힘이 들지요.
아무리 해고가 일상인 미국이라도
“레이 오프(lay-off)”라는 단어는 소화시키기 버겁습니다.

 

3.
우리 교회는 가족 같고 작아서
함께 웃고 함께 울어줄 수 있지만,
교회들이 소위 출세한 사람들, 승자의 편에 서곤 합니다.

 

적자생존의 경쟁에서 살아남은 것을
하나님께서 특별히 구별하시고 사랑하신 결과라고 간증하고
교회는 이들의 업적을 찬양합니다.
나만 살면 되고, 하나님이 나만 사랑하시길 기대하는
이기적 신앙도 톡톡히 한몫합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소위 잘나가지 못하면
교회에서도 기가 죽기 십상입니다. 교회에서 설 곳을 잃을 가능성이 큽니다.
매우 잘못된 교회의 모습이겠지요?

 

성숙한 신앙이 무엇일까 생각합니다:
세상과 다른 것, 불편한 것을 기쁨과 감사로 수용하는 것,
잘되었을 때 더욱 겸손하고, 힘들 때 기죽지 않고 신앙으로 견디고
외롭고 힘든 지체들을 찾아가서 손을 꼭 잡아주며 그들의 편이 되어 주는 것,
진리와 생명 가운데 거하고 그것을 자랑하는 것….

 

교회는 어렵고 약하고 외로운 분들 편에 서야 합니다.
우리 각자가 교회요 그리스도께서 계신 성전이라면
앞장서서 어려운 분들을 챙겨야 합니다.
우리 모두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 가기 원합니다.

 

p.s 지난 20여 년 크고 작은 세상의 어려움을 지나오면서
“그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이 구태의연한 클리세이(cliché)가 아님을,
위기 속에서 일하시고 위기 속에서만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심을 봤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2:5)

 

하나님,
삶에 지치고 힘들어하는 이웃들과 함께 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3. 23 이-메일 목회 서신)

뱅크런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3월 10일
산타클라라에 위치한
실리콘밸리은행(SVB)이 파산했습니다.

 

순식간에 주가가 곤두박질쳤고
너도나도 예금을 빼는
뱅크런(bank run, 대량예금인출)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예전 같으면
은행의 유동성 위기를 일반고객들이 알아채기 힘들었습니다.
신용평가회사들이 신용등급을 내리거나
은행이 어렵다는 내부정보가 언론을 통해서 흘러나와야
너도나도 은행으로 달려가는 뱅크런이 가능했습니다.

 

정보를 입수해도
일단 은행으로 달려가서 줄을 길게 서서
ATM이나 창구에서 예금 인출을 요청하는 식이었습니다.
그 사이에 은행도 여러 가지 조처를 취해서 위기를 넘기곤 했습니다.

 

지금은
고객들이 손에 들고 있는 셀폰을 통해서
한꺼번에 예금을 인출하는 사태가 발생하니
은행으로서는 속수무책입니다.

 

이번 사태를 보면서 오늘날의 뱅크런은
갑자기 닥치는 쓰나미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국에서 16위에 해당하는 대형은행에 뱅크런이 발생하니
이틀도 되지 않아서 문을 닫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지난 월요일에도 뉴욕의 한 은행이 파산하고
몇몇 금융기관들이 위험하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미국 정부가 모든 예금을 보장한다고 서둘러 선언했지만,
아직은 안심할 때가 아닙니다.

 

2.
세상이 너무 빨라졌습니다.
빠르게 치고 올라갈 수도 있지만,
조처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무서울 정도입니다.

 

갑자기 말세가 되면
세상이 빨라진다는 다니엘서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다니엘 12:4).

 

성경 말씀 한 구절을
단순하게 종말과 연결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니 종말을 두려워할 것도 아닙니다.
종말은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승리의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에 몰입하고
문명과 과학의 발달을 만병통치약처럼 여기는
인류의 교만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위기가 생겼을 때,
은행으로 달려가서 예금을 인출하는 뱅크런 못지않게
세상이 발달할수록 ‘겸손하게’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달려 나가서 그 뜻을 추구하는 것이 꼭 필요하겠습니다.

 

우리 생각과 마음을 하나님께 깊이 뿌리내리지 않으면,
종잡을 수 없는 세상에 휘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부화뇌동하지 않고, 잠잠히 주님을 바라보면서
무너지지 않을 예수 그리스도, 진리를 꼭 붙들고 오늘 하루 삽시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마태6:9-10)

 

하나님,
흔들림 없는 믿음을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3. 16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