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바쁜 일로 쫓기는 삶

좋은 아침입니다.

 

1.

현대인의 특징은 바쁨입니다.

비즈니스(business)라는 말을 패러디해서

영어 비지니스(busyness)라는 말이 생길 정도입니다.

 

바쁘게 살다 보면,

“내가 왜 이렇게 바쁘지?”하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몸과 마음이 바쁜데 뭔가 멍- 해지는 순간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세상에는 시간 관리에 관한 정보가 넘칩니다.

한국에도 소개된 Atomic Habits(아주 작은 습관의 힘)이라는 책은

아마존에서 10만이 넘는 리뷰를 받을 만큼 인기입니다.

 

그런데

시간 관리에 관한 책이나 강연을 들으면, 대개 아는 내용입니다.

몰라서 못 한 것이 아니라 알면서 실천하지 않은 것이지요.

책을 사서 읽다가 중간쯤 덮게 되는 이유입니다.

 

2.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시간(역사) 속에서 일하십니다.

창세기 1장에 6일이라는 시간 단위가 나오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고 했습니다.

 

영원이라는 시간, 순간이라는 시간

세상의 시간, 개인의 시간

지나가는 시간 크로노스, 포착해서 즐기는 카이로스 등등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그러니 하나님 안에서 산다는 것은

주어진 시간을 하나님과 더불어 산다는 뜻입니다.

시간을 구별하는 것도  거룩입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시간을 경험할 수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 나라이고 영원일 것입니다.

이다음 하나님 나라에서 경험할 것을

지금 누리는 최고로 행복한 순간입니다.

 

3.

이것도 알고 있지만,

막상 현실에 적용하고 실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늘 바쁜 일로 쫓기며 살기 때문입니다.

 

시간에 쫓기다 보면

정녕 누려야 할 영원한 시간을 소홀히 합니다.

주일 예배에 와서도 다른 생각을 하거나,

간신히 기도하고 말씀 읽는 시간을 만들었지만,

여유가 없고 조바심이 나서 서둘러 마무리합니다.

 

기도하고 성경만 읽으려고 하면

해야 할 일들이 눈앞에 스쳐서 집중할 수가 없습니다.

영적 전쟁이라는 말이 맞습니다.

 

4.

시간을 떼어놓아야 합니다.

하루에 10분, 30분, 한 시간 이런 식으로 떼어놓기보다는

아침 7:00- 7:30, 저녁 10:00-11:00와 같은 식으로 시계 속의 시간을 떼어 놓고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시간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고 말씀 읽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하루를 시작하거나, 끝날 때

꼭 기도하고 말씀 읽는 습관을 만드는 것도 좋습니다.

 

간혹,

“목사님, 저는 기도하고 말씀 읽는 시간이 습관이 되었는데,

그 시간을 지키지 못하면 죄책감이 듭니다”는 말을 듣습니다.

저는 이런 말을 할 수 있고, 듣는 것 만도 감사하고 기쁩니다.

기도하고 말씀 읽는 것이 습관이 된 분의 고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 이런 고백 또는 고민을 많이 듣고 싶습니다.

 

위에 소개한 <아주 작은 습관>에서 강조하듯이

작은 것이 습관이 되면 신앙의 내공이 저절로 키워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의 달인(達人, master)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하고 말씀 읽는 시간,

하나님 안에서 사는 행복을 절대 놓치지 맙시다.

 

우리는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송축하리로다

할렐루야 (시편115:18)

 

하나님

우리의 시간에 주인이 되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3. 7. 27 이-메일 목회 서신)

야곱의 하나님

좋은 아침입니다.

 

1.

주일 예배에서는

창세기 야곱에 관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성경의 인물 중에서

야곱만큼 복합적이고 세상적인 인물이 있을까 싶습니다.

 

장자가 되어서 아버지의 복을 차지하겠다는 집요함은

수단과 방법을 무시하고 목표를 향해서 달려가는

브레이크 없는 전차처럼 보입니다.

 

아무리 어렵게 얻은 부인이라도

라헬만 편애(favoritism)하는 것은

사랑의 숭고함이 아니라 한 여성을 향한 한 인간의 집착으로 느껴집니다.

 

야곱의 두 부인, 라헬과 레아의 시기와 갈등

아기 낳기 경쟁이 야곱 자신의 편애에서 시작했는데

자기는 쏙- 빠지고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는 약삭빠름은 혀를 내두를 정도입니다.

 

2.

야곱에게는 의외의 면도 있습니다.

 

외삼촌에게 번번이 속지만,

결국에는 얼룩진 양과 염소로 큰 부자가 됩니다.

야곱의 총명함, 지략은

야곱이 외삼촌 머리 위에서 날고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약삭빠르면

생각이나 행동이 가볍고, 충동적이고 의지가 약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외삼촌 집에서 20년을 종/노예로 살면서도

자신의 길을 가는 꿋꿋함과 특유의 성실함도 갖췄습니다.

 

벧엘에서 만난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을 마음에 품고

20년을 버틴 믿음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야곱에 관한 말씀 후반부로 갈수록

야곱은 조금씩 성숙해 갑니다.

그의 신앙과 생각이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어 갑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조상으로 야곱을 택한 이유일 것입니다.

 

3.

훗날 야곱의 이름이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뜻의 이스라엘로 바뀌지요.

그런데도 성경은 곳곳에서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사용합니다.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한 발짝 떨어져서 읽으면

앞에서 말한 야곱의 복합적인 성품이 떠오르면서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그렇지만

야곱의 말씀속으로 들어가서

야곱과 우리 자신을 겹쳐서 읽으면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용어에서 친근함을 느낍니다.

 

얄미워서 멀리하고 싶지만, 가까이할 수밖에 없는

‘야곱’이라는 한 인간을 마냥 비난할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영락없는 야곱의 모습이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 대신 우리 이름을 슬며시 넣어서 읽어도 상관없게 됩니다.

 

그래서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참 좋습니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146:5)

 

 

하나님

우리에게도 야곱의 하나님이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7. 20 이-메일 목회 서신)

다르게 살기

좋은 아침입니다.

 

1.

2주 전에 목요서신 제목이 <거슬러 살기>였습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세상의 흐름에 휩쓸리기보다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용기를 갖자는 제안이었습니다.

 

아침마다 묵상하는

사도행전의 기독교인들이 그랬습니다.

세상을 완전히 뒤집어 놓아서(upside down)

세상을 소동케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긴, 재산을 서로 나눠 쓰고

예루살렘에 핍박이 발생하니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사방으로 흩어져서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심지어 죽음도 불사했으니

달라도 너무 달랐습니다.

 

사도행전의 사건들은

오순절 성령의 임재와 예수님 제자들의 사역으로

기독교 역사상 가장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때였습니다.

강철도 녹이는 용광로와 같은 시대였으니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복음이 처음 전해지는 곳에서는

성령의 역사가 강력하게 일어난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2.

얼마 전, 한국 언론에도 등장한 미국 청년이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알래스카 항공 사내지를 필두로

많은 언론이 보도한 청년입니다.

 

빌(Bill)이라는 청년은

UC 버클리에서 교통 관련 석사 학위 과정에 등록했는데

거처를 버클리로 옮기지 않고 LA집에서 비행기로 통학했습니다.

버클리 지역의 비싼 렌트비를 아끼고

일주일에 수업이 세 번 있었기에 LA집에서 학교에 다니기로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버클리 지역 1년 렌트비 약 25,000불의 20% 정도에 불과한

5,600불을 교통비로 사용하고 올해 5월에 졸업했습니다.

 

수업이 있는 날은 LA 집에서 새벽 3시 30분에 일어나서

비행기로 샌프란 공항에 도착한 후에 바트로 이동해서 10시 수업에 들어갔고

집에 가면 보통 자정이 되었답니다.

 

절대 쉽지 않은 일을 해냈기에

빌이라는 청년이 레딧이라는 소셜 미디어에 올린 글이

세상의 주목을 받은 것입니다.

 

4.

청년이 비행기로 통학한 것이 학업이나 학교생활을 위해서

지혜로운 것인지에 대한 의견이 갈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발상이 특이한 것은 사실입니다.

 

빌이라는 청년을 보면서

다르게 사는 것도 주목받을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창의적으로 사는 것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고

세상을 거슬러 사는 것의 또 다른 버전입니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습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후

스스로 보기에 좋았다고 감탄하신 하나님,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서

걸작품(masterpiece)으로 만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창의적으로 살 수 있지 않을까요?

누구나 사는 일상을 창조적인 카이로스로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하나님 주신 지혜를 갖고

나만의 하루, 창조적인 일을 시도해 봅시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에베소서 2:10)

 

하나님

하나님 지으신 걸작품다운 삶을 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7. 13 이-메일 목회 서신)

레아의 시간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주 함께 나눈 본문은

야곱의 첫째 부인 레아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창세기 본문은 레아와 그의 동생 라헬의 외모를 비교했습니다.

라헬은 외모가 탁월했고,

레아는 시력이 약했다고 우리 성경이 번역했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을 “눈이 부드럽다(Leah’s eyes are tender)”로 옮길 수도 있습니다.

 

레아가 라헬에 비해서 약하고 뒤처지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외모를 갖고 비교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에서와 야곱의 반대입니다.

 

레아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야곱의 첫째 부인이 됩니다.

야곱은 라헬을 원했는데 아버지 라반이

그 지방 풍습대로 맏딸인 레아를 야곱에게 준 것입니다.

 

외삼촌 라반이 조카 야곱을 속였고

레아는 속고 속이는 상황에서

주체적인 의지나 생각을 상실한 객체일 뿐이었습니다.

 

2.

야곱이 14년을 일하고 레아와 라헬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라헬만 사랑합니다.

지독한 편애(favoritism)입니다.

 

야곱은 외삼촌에게 분풀이하듯이

레아를 미워했습니다.

사랑과 미움이라는 감정을 갖고 라헬과 레아를 대한 것입니다.

 

이처럼 레아는

야곱이 새로 꾸민 가정에서 철저히 소외되고

심지어 미움받는 연약한 여성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레아를 챙기셨습니다.

미움받고 소외된 레아를 보셨고 레아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레아의 태를 열어 주셔서 네 명의 아들을 낳게 하셨습니다.

 

제사장 지파의 조상 레위, 다윗과 예수님의 조상 유다가

레아를 통해서 태어났습니다.

레아를 향한 하나님의 실제적인 위로였습니다.

 

3.

우리 모두 인생을 살다 보면

레아의 시간을 살 때가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다른 사람은 사랑받고 사는데 자기는 덩그러니 홀로된 느낌,

주인공이 되지 못하고 주변인으로 사는 시간,

외톨이 또는 왕따를 경험하는 시간,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어떤 상황에 던져진 것 같은 심정 등등…

자존심이 상하고

자기도 모르게 동굴 속으로 점점 깊이 들어가는 순간입니다.

 

누구에게나 레아의 시간은 힘겹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레아를 보시고

레아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말씀이 큰 힘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약한 자, 외로운 자, 무력한 자를 향합니다.

아무도 챙기지 않을 때, 하나님이 챙기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누리는 특권입니다. 얼마나 감사한지요!

 

우리가 해야 할 일도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는 곳을 바라보고

하나님 가시는 곳을 가고

하나님 마음이 있는 곳에 우리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대신해서

세상의 레아들, 레아의 시간을 살고 있는 이웃을 챙기는 것이지요.

 

멋지고 근사한

그리고 하나님 사랑을 듬뿍 경험하고 전하는

하나님 백성의 삶이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 (시 41:1)

 

 

하나님

레아의 시간을 사는

세상 모든 사람의 편이 되어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7. 6 이-메일 목회 서신)

거슬러 살아보기

좋은 아침입니다.

 

1.

한국에 있을 때,

휴전선 임진강 근처 폭포 어장에 가곤 했습니다.

잉어를 키워서 직접 요리해 주는 곳이었습니다.

 

음식점 앞에 있는 어장에서 잉어들에게

먹이를 던져주면 수많이 잉어 떼가 몰려들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그 모습을 보고 신기해하며 너무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먹이에 무관심하고 저 멀리서 유유히 수영을 즐기는

특이하게 행동하는 잉어들이 꼭 있었습니다.

대부분 모든 잉어가 먹이에 집착하고 서로 싸우는데

세상을 초월한 듯이 자기 삶을 즐기는 잉어들입니다.

 

2.

임진강 폭포 어장의 잉어들을 예로 들었지만,

세상을 거슬러 살거나 구별된 삶을 사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자기들만의 삶을 창조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성경 용어로 말하면 “거룩”입니다.

 

수요일 에베소서 성경 공부에서 배웠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하늘의 신령한 복을 주신 이유가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를 “성도(saints)”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성도답게 사는 것이 요청됩니다.

거룩한 길을 가는 것인데

이것을 성화(sanctification)라고 부릅니다.

 

겉으로 거룩하게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자칫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이나

예루살렘 지도자들 같은 위선에 빠질 수 있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구별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됩니다.

 

3.

요즘은 사람들이

지나칠 정도로 한 방향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욕망이 지배하는 시대가 되고

자기만족의 무한 이기주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조그만 손으로

작은 먹이 하나만 던져주어도

떼로 몰려와서 먹이를 갖고 서로 싸우고

허덕대는 잉어 떼의 모습이 연상될 정도입니다.

 

그때 우리는 조금 떨어져서

그리스도인 특유의 여유를 갖고 세상을 헤엄치기 원합니다.

세상을 거슬러 살아보는 것입니다.

남들이 다 가는 길을 거슬러 가는 묘미를 즐기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이 거룩이고,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삶일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그리스도인답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아주 작은 것이라도 예수님을 닮아봅시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엡5:1)

Therefore be imitators of God, as beloved children. (Eph 5:1)

 

 

하나님

세상을 거스를 지혜와 용기를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6. 29 이-메일 목회 서신)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좋은 아침입니다.

 

1.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모든 율법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집약된다고 하셨습니다(막 12:29-32).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완성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도, 기도할 때도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할 때도

곁에 두고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점검할 말씀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이것을 훈련해서 습관이 되고 인격이 된다면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는 자질을 갖춘 셈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보다

더 중요하고 귀한 신앙의 본질은 없습니다.

 

2.

C S 루이스는

<네 가지 사랑>이라는 책에서

“필요의 사랑”과 “선물의 사랑”을 구분합니다.

 

필요의 사랑은

배가 고픈 아기가 엄마 품을 찾듯이

필요에 의해서 성립되는 사랑입니다.

 

선물의 사랑은

선의로 베푸는 호의이고 말 그대로 선물(gift)입니다.

필요의 사랑이 사랑을 받는 사람 중심이라면

선물의 사랑은 베푸는 사람 중심입니다.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이 선물의 사랑에 가깝습니다.

 

C S 루이스는

두 가지 사랑의 경중이나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습니다.

 

필요의 사랑을 이기심의 발로라고 단정하지 말라고 부탁합니다.

어려울 때, 하나님께 나와서 기도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처럼

필요할 때 누군가의 사랑을 요청하는 것도 정상입니다.

우리 역시 필요한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 수 있습니다.

 

선물의 사랑도 실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선물을

이웃에게 공짜로 나눠줄 때

필요의 사랑과 선물의 사랑이 통합되고 완성됩니다.

 

3.

우리 모두에게 두 가지 사랑이 모두 요청됩니다.

 

대부분 사람이 사랑을 받기만 할 뿐

주는데 인색하다면 세상 속에 하나님 나라가 이뤄질 수 없습니다.

 

주는 사랑만 진짜라고 주장한다면

피조물인 우리는 제대로 된 사랑도 못 해보고 지치고 말 것입니다.

기운이 쏙- 빠진 사람들만 세상에 넘치겠지요.

 

필요할 때는

망설임 없이 하나님을 찾고, 이웃을 찾아갑시다.

우리를 필요로하는 이웃이 생길 때는

힘을 다해서 사랑의 선물을 전달합시다.

 

미리 맛보는 천국,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세워질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 11:28)

 

하나님

사랑을 실천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6. 22 이-메일 목회 서신)

유레카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 말씀은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찾아오셨다는 것이 맞을 겁니다.

 

팥죽 한 그릇을 주고 형 에서로부터 장자권을 샀고

아버지 이삭의 축복까지 가로채면서 형의 원한을 샀습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형 에서를 피해서

외삼촌이 있는 하란으로 가는 길입니다.

돌 베개를 베고 잠을 자는데

사닥다리가 땅에서 하늘로 이어지고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고

그 위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시는 꿈을 꿉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에게 주었던

땅에 대한 약속, 후손이 번창할 것이라는 축복,

야곱이 어디를 가든지 함께 하시고

반드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며

이 모든 일이 성취될 때까지 야곱을 떠나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야곱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밤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셨고

야곱에게 꼭 필요한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2.

잠에서 깬 야곱이 탄성을 지릅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창28:16)

히브리어 본문의 의미를 살려서 다음과 같이 읽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확실하게 여기 계셨네요. 그런데 내가 그것을 몰랐습니다”

 

왕관에 섞여 있는 순금의 비율을 알아내라는 왕의 명령을 받고 고민하던

고대 그리스의 아르키메데스가 목욕탕에서 방법을 알아내고는

“유레카(깨달았다”)를 외치면서

알몸으로 욕탕 밖으로 뛰어나갔다는 사건이 생각납니다.

 

야곱에게는 아르키메데스의 유레카 이상의 깨달음이었습니다.

눈이 활짝 열리는 새로운 발견입니다.

그동안 몰랐던 것을 알게 된 자각입니다.

돌베개를 베고 깜깜한 밤을 보내는 야곱에게 임한 선명한 빛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버지를 속이면서 축복을 가로챈 야곱을 여전히 사랑하신다는 표시였습니다.

앞으로도 절대로 야곱을 버리지 않으시겠답니다.

그동안의 막막함, 절망, 경쟁심, 욕심, 힘겨움, 두려움이

두서없이 말끔하게 씻겨 나가는 처음 세례 예식과 같은 사건입니다.

 

3.

야곱은 일어나서 돌베개를 세우고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창 28:17)

 

하나님을 만나는 깨달음에 머물 수 있습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깨달음을 새로운 차원으로 확대시킵니다.

 

야곱이 있는 곳이 하나님의 집이 되었습니다.

집이 없는 야곱인데 그의 믿음과 상상력이 돋보입니다.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하는 사닥다리를 보면서

하늘 문이 열렸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과 야곱 사이에 freeway가 개통되었습니다.

 

꿈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깨어난 야곱이

하나님 안에서 자기 인생을 새롭게 바라보는 또 다른 꿈을 꾸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보고, 들은 말씀을 확장하는 야곱의 상상력이 대단합니다.

꿈처럼 스치듯 지나가는 벧엘의 사건이

외삼촌 집에서의 20년을 버티는 뿌리 경험(root experience)이 됩니다.

 

이번에 함께 나누는 야곱에 관한 말씀이

우리 참빛 식구들 한 분 한 분에게 하나님을 보고

그동안 묵혀 놓았던 고민이 풀어지는 유레카의 순간의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집, 하늘 문으로 승화시키는 깜짝 놀랄 상상력도 발휘되길 기도하겠습니다.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창28:17)

 

 

하나님

꿈을 있는 상상력을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6. 15 이-메일 목회 서신)

에이카

좋은 아침입니다.

 

1.

<생명의 삶> 순서에 따라서

아침에 읽는 성경 본문은 예레이먀 애가입니다.

 

앞에 예레미야라는 별칭이 붙은 것은

구약성경의 헬라어 번역인 칠십인역을 따른 것입니다.

정황상 애가서를 지은 저자를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고 목도한

예레미야 선지자로  보았습니다.

 

반면, 히브리어 본문 성경에서 애가서는

예언서가 아니라 성문서에 속합니다.

메길롯이라는 다섯 두루마리(아가, 룻, 애가, 전도서, 에스더)와 함께

예루살렘 멸망을 기억하는 절기에 불리던 노래입니다.

 

“슬프다”는 뜻의 히브리어 <에이카>로 시작하는 애가서는

시편의 탄식시와 맥을 같이 합니다.

고대 근동에서 사람이 죽었을 때 부르는

조가(弔歌)의 형식도 갖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애가, “슬픈 노래”입니다.

 

2.

애가서의 특징은

1-4장까지 각 구절이

22개의 히브리어 알파벳으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A부터 Z로 각 구절이 시작됩니다.

 

이것을 두고 다음과 같은 입장이 있습니다:

1) 알파벳 철자를 차례로 나열해서 노래하는 것에

귀신이나 악령을 쫓는 마술적인 힘이 있다는 고대 사회의 전통을 수용한 것

2) 교육과 암기용으로 알파벳 순서로 기록했음

3) 예루살렘의 무너진 것을 목도한 저자가

자신의 슬픔을 절제하기 위해서 알파벳 순서대로 차분하게 써 내려갔음

4) 예루살렘의 슬픔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 앞에서 돌아보기 위함.

5) 하나님의 징벌이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임했다는 입장.

 

애가서 외에도 시편 119편을 비롯한 성경에는

알파벳 순서대로 기록된 말씀이 있습니다.

암기나 교육용으로 그렇게 기록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또한,

민족이 당한 고난과 슬픔을 낱낱이 헤아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슬퍼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정리하고 정화하는

카타르시스의 목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애가서의 또 다른 특징은

“키나(3+2)”라고 불리는 히브리 운율입니다.

처음 셋이 긴 운율이라면, 다음 둘은 짧습니다.

이것도 슬픔을 노래하는 전형적인 문학 기법입니다.

 

애가서 1-3장(3)은 탄식으로 시작해서 소망(3장)으로 끝이 납니다.

4-5장(2)은 탄식과 공동체 기도입니다.

각 구절뿐만 아니라, 애가서 5장 전체가 키나 운율입니다.

 

시는 우리의 마음을 정화합니다.

고난은 모든 사람을 시인으로 만든다는 말도 생각납니다.

운율을 갖고 애가서를 써 내려가면서

예언자는 물론 후대에 애가서를 읽는 독자들의 마음도 정리되었을 것입니다.

 

3.

<에이카> 슬프다!

시편의 탄식시와 더불어 애가서가

하나님 말씀인 성경에 포함되어 감사할 뿐입니다.

 

잘못으로 인한 어려움이든지

맥락 없이 닥치는 고난이든지

타인으로 인한 핍박이든지

우리 앞에 닥친 고통스러운 현실을 놓고

하나님 앞에서 마음껏 슬퍼하고 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침마다 애가서를 묵상하면서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응어리가 부서지고

혼란스러운 생각들이 알파벳 순서대로 정리되고

새롭게 시작할 힘을 얻기를 바랍니다.

 

참지 말고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토해내고 애통합시다.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껏 웁시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5:4)

 

 

하나님

애통하며 우는 자들의 편이 되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6. 8 이-메일 목회 서신)

 

속임수

좋은 아침입니다.

 

1.

주일에는

창세기 야곱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야곱 내러티브에서 주목할 것은

속고 속이는 속임수입니다.

 

이스라엘의 조상이요

아브라함과 이삭으로 이어지는 야곱에게

‘속임’은 어울리지 않는 말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아버지를 속이고 형 에서의 축복권을 가로챕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아버지를 속이는 야곱을 방어할 이유도 없습니다.

거짓말은 거짓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경은 솔직합니다.

성경의 인물들 가운데 완벽한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의 민낯을 발견하고

그런데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 섭리(providence)를 구하게 됩니다.

 

2.

엊그제

미국에서는 희대의 사기극을 펼친 이유로

연방 교도소에 수감된 엘리자베스 홈스에 관한 기사가 넘쳤습니다.

 

어릴 때부터 야망이 많았던

엘리자베스 홈스는 스탠퍼드를 다니다가 중퇴하고

실리콘밸리에 <테라노스>라는 바이오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엘리자베스 홈스가 스무 살이던 2004년이었습니다.

 

그로부터 10년 후,

엘리자베스 홈스가 세운 테라노스는

작은 양의 혈액만으로 250여 종의 질병을 진단할 수 있는

“에디슨”이라는 키트를 발견했다며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합니다.

 

테라노스의 설립자 엘리자베스 홈스는

순식간에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습니다.

여성 스티브 잡스라고 불릴 정도였습니다.

 

그로부터 1년 후인 2015년,

월스트리트 저널의 존 케래이루(John Carreyrou)기자가

테라노스의 에디슨 키트가 거짓이라는 추적 기사를 보도합니다.

기사의 내용 그대로 엘리자베스 홈스의 연구는 거짓이었습니다.

투자자와 세상을 상대로 사기를 친 것입니다.

 

작년 11월,

엘리자베스 홈스는11년형을 선고받고

엊그제 5월 30일 텍사스 교도소에 수감되었습니다.

 

만만치 않은 감옥살이가 엘리자베스 홈즈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수용소 부엌에서 접시 닦는 일을 시작한 답니다.

모범수가 되면 9년여 만에 석방될 수 있고 항고도 계획하고 있다지만.

투자자들과 종업원, 세상을 속인 죗값을 톡톡히 받을 것 같습니다.

사필귀정(事必歸正)입니다.

 

세계가 주목하는 자본주의의 첨단

우리 지역에서 발생한 일이기에 더 관심이 갑니다.

욕망의 끝이 어디 인지도 다시 깨닫습니다.

 

3.

아버지를 속인 야곱은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알다시피

야곱도 나름 대가를 지불합니다.

그것이 정상입니다.

 

아무리 유명한 성경의 인물이어도

잘못한 것을 미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잘못했을 때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아무쪼록

우리가 사는 세상이 맑아지고 정직해지길 바랍니다.

 

이웃에게 팔든지 이웃의 손에서 사거든

너희 사람은 그의 형제를 속이지 말라 (레25:14)

And if you make a sale to your neighbor or buy from your neighbor,

you shall not wrong one another. (Lev 25:14)

 

하나님

 

정직한 사람의 편이 되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6. 1이-메일 목회 서신)

조금만 더

좋은 아침입니다.

 

1.

어느덧 올해도

다섯 달이 지났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빠른 지 해마다 실감합니다.

 

빠르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뭔가 부족하고 실망스러운 자신의 모습도 발견합니다.

우리 인생이 생각처럼 펼쳐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때는 조급해집니다.

 

인상주의 화가로 유명한

빈센트 반 고흐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고흐는

동생 테호에게 의존하던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유명해지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뜻대로 되지 않자

자기 귀를 자르고 정신 병원에 입원하는 등

굴곡의 삶을 살다가 37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고흐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작품이 세상에서 좋은 평가를 받게 되고

20년 후에는 동생 테오와의 편지가 책으로 출판되는 등

우리가 알다시피 세계적인 화가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조금만 더 견디면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면

자신의 진가를 알아주는 세상을 볼 수 있었을 텐데

너무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2.

이집트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로 나오면서 물이 부족했습니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흘 길을 갔지만 물이 없었습니다.

마라(쓴물)라는 곳에 도착했지만, 쓴물만 나왔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하고 모세에게 나와서 불평합니다.

그때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나뭇잎을 물에 던지니 쓴물이 단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나서

엘림이라는 곳에 이르렀는데

그곳에는 열두 개의 우물과 일흔 그루의 종려나무가 있는

사막의 오아시스였습니다.

 

조금만 참고 기다렸으면

불평하지 않고 엘림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아쉽습니다.

 

3.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인생길을 걷기에

미래를 생각하면 늘 불안하고 조급해집니다.

급한 대로 임시변통을 하는데 그 행동이

고흐나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보듯이 안타까운 결정일 수 있습니다.

 

그때마다

조금만 더 라는 말이 힘이 되고 격려가 됩니다.

조금만 더 견뎌보는 겁니다.

조금만 더 앞으로 나가보는 겁니다.

조금만 더 노력하는 겁니다.

조금만 더 기도하면서 신앙의 길을 가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인생의 오아시스 엘림이 눈앞에 있음을 믿고 걷는 것이지요.

 

오늘 하루도

올해 우리 교회 표어 그대로

<푯대를 향해서> 한 걸음 더 나가는

‘조금만 더’의 발길이 되길 바랍니다.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곁에 장막을 치니라 (출15:27)

 

 

하나님

중간에 멈추지 않고

조금만 더 나갈 수 있는 힘을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5. 25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