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에의 초대 :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고

우리가 살고 있는 샌프란시스코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시입니다. 샌프란시스코 북쪽에 위치한 금문교는 최고의 관광명소이지요. 교회 앞길을 다니는 전차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타임머신을 타고 100년 전으로 돌아온 듯합니다. 샌프란시스코의 고층건물들은 아름다운 스카이라인을 형성합니다. 공항 쪽에서 101번 도로를 타고 올라오면 오른 편에 끝없이 넓은 베이(bay)가 펼쳐집니다. 주말에는 하얀 요트들이 바다에 떠있는데 푸른 하늘과 멋진 조화를 이루는 장관입니다. 샌프란시스코 49er’s 풋볼 구장도 멀리 보입니다. 도심으로 들어오면 아름다운 도시의 전경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참 아름다운 도시라는 탄성이 절로 나옵니다.

그렇게 베이브릿지를 타면, 왼쪽에 커다란 빌딩이 나타납니다. 사무실 같기도 하고 주거용 빌딩처럼 보이는 꽤 높은 건축물입니다. 그것도 고속도로 바로 옆에 있어서 다리를 건널 때마다 마주치게 됩니다. 저는 이 빌딩을 볼 때 마다 왠지 모르게 주변 경관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건물 주변에는 오래된 작은 건물들이 그대로 있습니다. 그래서 이 건물이 더 커 보이고, 심지어 외로워 보이기까지 합니다. 차라리 도심에 있었다면 다른 고층 건물과 어울려서 멋진 스카이라인을 형성했을 텐데 하는 아쉬운 생각도 해봅니다. 앞으로 그 건물을 중심으로 재개발 계획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현재는 뭔가 생경한 느낌의 고층 건물입니다.

기독교를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만 그 가운데 하나가 “관계”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단절되었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웃사람들과 사랑의 관계를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친환경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 이웃, 세상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태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이웃을 향해서는 상대방을 자신보다 낫게 여기고 배려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세상을 향해서는 하나님께서 아름답고 선하게 창조하신 세상을 잘 보존해서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겸허한 삶입니다.

오늘 본문에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면서 따로 서서 기도하는 바리새인입니다. 바리새인에게는 부족할 것이 없었습니다. 자기가 보아도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성전의 한 구석에서 고개도 들지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기도하는 세리입니다. 바리새인은 기도하면서 자기가 행한 일들을 모두 나열하면서 은근히 자랑합니다. 하지만 세리는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회개할 뿐입니다.

바리새인에게서 겸손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는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높다는 우월의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자신을 한없이 낮춥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면서 겸손한 자세로 가슴을 치며 회개합니다. 바리새인은 혼자 우뚝 서 있는 고층건물처럼 보이는 반면에, 세리에게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자신의 자리에서 진실하게 하나님을 찾는 겸손함이 있습니다. 이들을 보고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세상사람들은 홀로 높은 성을 쌓으면서 행복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은 철저하게 낮추고 대신에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이는 겸손과 경외의 삶을 살아갑니다. 거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河-

예수님을 닮으려는 갈망

예수님께서 사셨던 2천 년 전의 이스라엘도 지금 우리네 세상만큼이나 깜깜하고 답답했습니다. 삭개오처럼 민족을 등지고 돈을 벌기위해서 권력과 결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여리고 소경처럼 앞을 보지 못해 사람들이 던져주는 동전소리에 목숨을 걸기도 했습니다. 베드로는 그래도 나았습니다. 배를 갖고 고기를 잡으면서 나름대로 생활을 영위했으니까요. 그중에도 어리석은 부자처럼 자기 배만 채우고 재산을 꼭꼭 잠겨두는 욕심쟁이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줄도 모르고 천년만년 살줄 알았으니 정말 어리석은 인생입니다. 그런 세상에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사람들을 차별 없이 만나주셨습니다. 고쳐주셨고, 살려주셨고, 위로하시면서 저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도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뽕나무 위의 삭개오의 이름을 불러주시고 그의 집에 들어가신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도 찾아오십니다. 우리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삼아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행복을 찾아낸 사람들입니다. 행복은 나누어야 합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지시고 갈보리 언덕을 오르신 예수님의 마음과 발자취를 따라가는 “작은 예수의 삶”을 살 때 가능합니다. 기독교인들이 누리는 행복의 세계, 행복의 언어들, 행복의 몸짓들이 우리 서머나 식구들께 임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16세기에 살았던 십자가의 성 요한이 남긴 기도문을 소개합니다. 다음 한 주간 우리들 각자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河-

오, 예수님.

저를 구원해 주십시오.

사랑받으려는 갈망으로부터, 칭송받으려는 갈망으로부터,

높임 받으려는 갈망으로부터, 선호 받으려는 갈망으로부터,

의논의 대상이 되려는 갈망으로부터, 승인받으려는 갈망으로부터,

인기 얻으려는 갈망으로 부터 구해 주십시오.

오, 예수님!

저를 구원해 주십시오.

모욕당할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부터, 멸시당할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부터,

책망 받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부터, 잊혀질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부터,

잘못될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부터, 비웃음당할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부터,

다른 사람이 저보다 더 사랑을 받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부터,

오 예수님,

은혜를 베푸셔서 이런 갈망을 갖게 하소서.

다른 사람이 저보다 더 존중 받기를 바라는 갈망,

세상의 기준에서 다른 사람이 더 높아지고 저는 더 낮아지기를 바라는 갈망,

다른 사람이 선택받고 저는 제외되기를 바라는 갈망,

다른 사람이 칭송받고 저는 주목받지 않길 바라는 갈망을 주십시오

행복에의 초대 4 – 네 집에 유하겠다

미국의 사회학자 데이빗 리스만은“군중속의 고독(the lonely crowd)”이라는 책에서 사람들의 유형을 세 가지로 나눠서 설명합니다.:

  첫째가 전통적인 유형인데 이러한 사람들은 사회가 요구하는 것에 자신을 맞춰서 살아갑니다. 근대화가 되기 이전의 세상은 전형적인 전통적인 사회였고, 전통을 무시하면 죄인취급을 받았습니다.

  둘째는 자기 지향적인 유형(inner-directed type)입니다. 전통적인 세상에서는 자기 스스로 무엇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개인의 자유가 강조되면서 사람들은 자기의 인생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됩니다.

  셋째로 타인 지향적인 유형입니다. 문명이 발달하고 세상이 산업화되면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자연스레 경쟁이 치열해 졌고 사람들 간에 마음의 벽이 높아졌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면서 끝없는 경쟁을 하다 보니 불안과 초조가 밀려옵니다. 여기서 군중 속의 고독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 속에서 삭개오라는 인물을 만납니다. 삭개오가 살던 시대는 유대교의 전통과 율법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때는 이스라엘이 나라를 잃었고 로마의 식민지였기에 민족의 전통과 종교를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로마를 위해서 일하는 세리가 됩니다. 당시의 세리들은 자기 민족에게 세금을 거둬서 로마정부에 바치는 일을 했기에 동족으로부터 민족의 반역자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삭개오가 세리라는 직업을 스스로 택했고 요즘말로 하면 세무서장까지 되었으니 그는 자기 지향적인 인물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삭개오의 인생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삭개오는 군중속의 고독을 온 몸으로 느끼며 살았습니다. 그가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세리가 되었지만, 사람들 역시 그를 사람취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철저하게 소외된 외로운 인생이었습니다. 지난주에 배운 여리고 소경이 거지라는 천한 신분 때문에 외로웠다면, 삭개오는 나름대로 자기의 꿈을 이루면서 성공했지만 내면의 문제로 인해서 외로웠습니다.

그런 삭개오가 예수님을 찾습니다. 키가 작은 삭개오가 체면을 버리고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뽕나무에 올라갑니다. 여리고 소경은 예수님을 불렀지만, 삭개오는 단지 나무에 올라앉아서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것을 구경합니다. 그것이 삭개오가 한 행동의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고 삭개오를 보시고“속히 내려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밤에 삭개오의 집에 유하시겠답니다. 이 말은 삭개오에게 정말 기쁜 소식(복음)이었습니다. 세무서장까지 되었지만 누구도 그의 친구가 되어주지 않았는데, 예수님께서 그의 친구가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신 것은 곧 그의 마음의 집에 들어가신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삭개오와 그곳에 모인 군중들을 향해서“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로다”라고 선포하십니다.

삭개오를 부르신 예수님께서 우리들도 부르십니다. 삭개오의 집에 들어오신 예수님께서 우리들 마음속에 계십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우리들이 누리는 행복입니다. 세상의 행복은 남의 눈치를 보느라 힘겹고 초조합니다. 설령 세상에서 성공했어도 시시때때로 밀려오는 외로움과 불안감을 해결하기 힘듭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 누리는 행복은 세상의 행복을 뛰어넘습니다. 감사와 기쁨이 넘칩니다. 예수님 안에 있으면 새로운 인생길이 열립니다. 그 길이 곧 행복의 길이요 생명의 길인 줄 믿습니다. -河-

행복에의 초대 3 – 보기를 원하나이다

이번 주와 다음 주는 여리고에 살고 있는 두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서 행복의 세계로 들어온 사건을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갈릴리 사역을 마치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십니다. 예루살렘에서 약 15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여리고라는 동네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에 가까이 오셨을 때 길가에서 구걸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입니다. 당시 소경은 죄인취급을 받았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소경인 사람은 부모가 죄를 지어서 그 죄가 대물림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요9:2). 후천적으로 소경이 된 사람 역시 본인이 죄를 지어서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당시 팔레스타인은 먼지가 많고 건조한 지역이어서 눈병이 흔했고 심하면 앞을 못 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무리들과 함께 여리고를 향해서 가고 계실 때 길가에서 구걸하던 여리고 소경이 무리들에게 무슨 일이냐고 묻습니다. “무슨 일이냐?”- 영적인 호기심입니다. 소경으로 구걸하는 사람이면 모든 것을 체면하고 살 수도 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도 도심에 가면 집이 없는 분들이 거리에 노숙합니다. 그분들의 표정을 보십시오. 그저 동전 몇 푼을 생각할 뿐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체념했거나 버림받았다는 절망감에 세상과 담을 쌓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경은 무슨 일이냐고 무리들에게 묻습니다. 이 소경은 비록 앞을 보지 못하고 구걸하는 처지였지만, 세상에 관심이 많았고 자신의 운명을 어떻게든 개척해 보려는 의지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이‘나사렛 예수’가 지나가신다고 말합니다.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에 대해서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분이 갈릴리에서 많은 소경을 고쳐주셨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나사렛 예수라는 말에 소경은 외치기 시작합니다.:“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군중들이 소경에게 말해 준 나사렛 예수는 나사렛 출신 요셉의 아들 예수입니다. 그런데 소경은“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바꿔서 말을 합니다. 다윗의 자손은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할 메시야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소경은 예수님께서 구세주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소경을 꾸짖습니다. 죄를 지어서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 주제에 감히 예수님을 부르고 소동을 피냐는 것입니다. 여리고 소경은 사람들의 저지를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크게 소리 지릅니다.

예수님께서 그냥 지나치실 분이 아니지요. 멈추십니다. 소경을 데리고 오랍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네가 내게 무엇을 해주기 원하느냐?” 소경이 곧바로 대답합니다.“주여, 보기를 원하니이다.” 예수님 앞에 자신의 기도제목을 구체적으로 분명하게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의 꿈은 이루어졌습니다. 소경이 곧 보게 되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예수님을 쫒았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고 구걸을 하면서 살던 여리고 소경에게 하늘의 행복이 임한 것입니다.

행복은 예수님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행복은 예수님을 향하여 부르짖는 것입니다. 행복은 예수님과 만나서 자신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함 받는 것입니다. 하늘의 행복을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예수님을 따라 삽니다. 할렐루야! -河-

행복에의 초대 2 – 말씀에 의지하여

우리가 믿는 기독교를 두고“만남의 종교”라고 합니다. 기독교는 혼자서 믿거나 혼자서 도를 닦는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물론 이것을 위해서 먼저 교회에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오랫동안 또는 얼마동안 교회생활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부터인지 (이 순간을 구체적으로 강렬하게 체험하는 경우도 있고 슬며시 자연스럽게 믿어지는 경우도 있는데) 하나님께서 마음속에 계신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대화를 시작하는데 이것이 기도입니다.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읽고 순간순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느끼면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시작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과 계속되는 친밀한 교제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매우 행복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베드로는 게네사렛 호수 (갈릴리 호수)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 어부였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실패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호숫가를 찾아가신 그날 베드로는 밤새도록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습니다. 밤새도록 헛수고를 한 베드로 일행이 아침나절 해변에서 그물을 씻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호숫가를 방문하셨고 수많은 무리가 그를 따라와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배에 오르십니다. 그리고 거기에 앉아서 말씀을 전하십니다. 베드로는 계속해서 그물을 닦고 있었겠지요.

말씀을 모두 마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명령하십니다.:“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4절).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잔뼈가 굵은 베드로에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한 낮에 깊은 곳에는 고기가 없습니다. 깊은 곳은 한 밤중에 고기가 모이는 곳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은“선생”인 랍비이고, 예수님의 세상 직업은 목수입니다. 어부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으신 분이 엉뚱한 소리를 하신 겁니다. 그렇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합니다.:“선생이여 우리가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5절)

될성부를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베드로는 뭔가 달랐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니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말씀에 의지하여”- 이것이 신앙입니다.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이것이 순종이요 생활(삶)입니다. 이처럼 말씀에 의지해서 그대로 행하는 것이 곧 신앙생활 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확실히 믿고, 하나님의 말씀(레마)을 붙잡고 살아야합니다.

베드로는 고기가 많이 잡힌 것을 보고 예수님 발 앞에 무릎 꿇었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대낮에 깊은 곳에서 고기가 많이 잡힌 경험을 하면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깨달은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베드로는 고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어부의 행복은 고기를 많이 잡는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에게 그 행복이 임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것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행복을 초월한 진정한 행복이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행복은 세상의 행복을 뛰어넘습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기쁨이 넘치는 행복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과 더불어 누리는 행복의 세계로 들어갑시다. -河-

행복에의 초대 1 – 어리석은 부자

모든 사람들은 행복을 추구합니다. 모두들 행복을 얻기 위해서 불철주야 열심히 살아갑니다. 행복을 취하는 방법도 제각각입니다. 어떤 사람은 재물을 많이 소유하면 행복해 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출세한 자녀들을 보면서 행복감을 느낍니다. 명예나 권력을 손에 쥐려는 것도 결국은 행복한 인생을 살기 위한 몸부림입니다.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사는 지역을 옮겨보기도 합니다. 색다른 취미생활을 시작합니다. 마음에 드는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과 교제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추구하는 행복은 무지개와 비슷합니다. 산봉우리에 무지개가 걸려 있어서 헐레벌떡 산에 올라가보면 무지개는 저기 산 아래 들판에 드리워있습니다. 부지런히 들판으로 뛰어 내려가면 다시 저 앞산에 걸려 있습니다. 이처럼 한 평생을 살면서 행복을 따라가지만 진정한 행복을 취하고 그것을 누리는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또 한 가지 이유는 외부에서 행복을 찾기 때문입니다. 앞에 말했던 재물, 권력, 명예, 자녀 등등은 모두 밖에 있는 것들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아무리 많이 갖고 있어도 더 갖고 싶어집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과 같습니다. 만족감이 없고 자꾸만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게 되면서 도리어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립니다. 행복은 마음속에 임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평안하고,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것이 곧 행복입니다. 인생의 폭풍이 아무리 거세고 험난해도 마음에 평안함이 있다면 행복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어떤 환경 속에서도 감사가 넘치고 기쁨이 솟아난다면 그야말로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어리석은 부자가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물질을 많이 소유하면 행복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본문 속의 부자를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계획성도 있고, 실천력도 있고, 야망도 갖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근면했기에 많은 소출을 냈을 것입니다. 예상보다 풍년이 들자 더 큰 창고를 짓기로 마음에 계획했습니다. 자신이 쌓아둔 물질을 갖고 앞으로 여러해 동안 즐기면서 행복한 인생을 살겠다는 야망도 갖고 있었습니다. 여기까지 보면 이 부자는 결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닙니다.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모아서 훗날 먹고 마시면서 편하게 살겠다는 것이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이 사람을 “어리석은 자”라고 단정하십니다. 물질 속에서 행복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 사람은 자신의 인생을 자기가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재물만 갖고 있으면 천년만년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재물에 마음을 쏟다가 모든 것 특히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부자입니다.

행복은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 속에 들어갔을 때 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장 6-7절에서 매우 귀한 교훈을 하였습니다.:“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나님 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평안이 서머나 식구들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길 기도합니다.-河-

룻기를 마치면서

룻기를 설교하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가뭄을 피해서 모압땅으로 피난갔던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는 이방 땅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모두 잃습니다. 그리고 모압 며느리 룻과 함께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옵니다. 자신들을 마중나온 고향 사람들에게 다시는 자신을 기쁨의 여인 나오미라고 부르지 말고, 고통의 여인 마라라고 부르라고 부탁할 정도로 무너진 인생입니다. 하루는 며느리 룻이 보리이삭을 주우러 갔는데 우연히도 보아스의 밭에 갔습니다. 그때 마침 보아스가 들에 나왔다가 룻을 만납니다. 이렇게 보아스와 룻은 처음 만나게 되고, 나오미의 조언을 들은 룻이 보아스에게 접근함으로 부부가 됩니다.

룻기를 여러 각도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무심코 읽으면 룻기는 보아스와 룻의 사랑이야기입니다. 이루어지기 어려운 사랑이 시어머니 나오미의 기지와 보아스의 지혜로운 처신으로 결실을 맺게 된 것입니다. 또 구약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보면 룻기는 다윗왕의 조상이 누구인지 가르쳐줍니다. 왕이 없던 시절을 묘사하는 사사기와 다윗왕이 주인공인 사무엘서의 중간에 룻기가 위치해 있고, 다윗의 고조할머니가 룻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것을 성경 전체로 확대하면 룻은 영광스럽게도 예수님의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족보에 보아스와 이방 여인 룻의 이름이 나옵니다. 이처럼 룻기는 비록 4장 밖에 되지 않는 짧은 말씀이지만 성경 전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룻기의 중요성은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룻은 모압여인이었습니다. 당시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만이 선택된 민족이라는 우월의식에 젖어 있었습니다. 이방 민족은 사람취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모압여인 룻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다윗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룻기 속에는 빈부귀천, 남녀노소, 민족에 대한 차별 없이 모든 사람들을 받아주시고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저는 룻기를 연속설교하면서 신약성경의 두 구절을 룻기와 연관해서 기억하기를 부탁드렸습니다. 룻기가 펼쳐지는 무대 뒤편에서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일하신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을 로마서 8장 28절과 연결시켰습니다.:“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또한 룻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늘나라에서 내려온 듯한 선한 사람들입니다.

서로를 축복하고 격려해주고 배려해주는 모습과 관련해서 마태복음 5장 16절을 소개했습니다.:“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이 두 구절을 꼭 기억하시고 가능하시면 암송하셔서 마음에 새기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구약성경 룻기에 임한 하나님의 섭리가 서머나 식구들 위에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룻기 속에서 만났던 룻과 나오미 그리고 보아스의 선한 마음을 우리 모두 닮아서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빛 된 삶을 사시길 부탁드립니다.-河-

사랑의 완성 : 기업을 무를 자

보아스가 타작마당에서 잠을 자고 있을 때, 모압 여인 룻이 슬며시 침상에 올라와서 프러포즈를 했습니다. 어쩌면 룻기에서 가장 스릴있고 흥미진진한 장면입니다. 시어머니의 말만 듣고 사전에 약속도 없이 외간남자 그것도 자신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지위를 가진 보아스의 침상에 든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행동이었습니다. 하지만 보아스는 룻을 맞아 줍니다. 룻을 안심시켜 줍니다.:“내가 네 말 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룻의 프러포즈를 받아 준 것입니다.

룻기 4장을 이해하기 위해서 당시의 관습을 알아야 합니다. 룻이 살던 당시는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형제나 친족 가운데 장가를 들지 않은 사람이 있거나 자신을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와 다시 결혼을 했어야 합니다. 한번 시집오면 그 가족의 소유(?)가 된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집안의 가장이 죽고 남자 없이 여자만 남거나 미성년의 자녀들이 있는 경우, 그들의 재산이나 가족을 가장 가까운 친척이 접수하는 관례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런 친척을 두고“기업을 무를 자”라고 한 것입니다.

룻과 보아스가 사랑의 결실을 맺기 위해서 넘어야 할 장애물이 있었는데 그것은 순위에서 보아스보다 앞서 있는 친척이 한명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룻과 그 재산을 접수하겠다고 나오면 보아스와 룻은 결혼을 할 수 없게 됩니다. 보아스는 동네의 모든 원로들을 모아놓고 그 친척을 부릅니다. 그리고 나오미의 기업을 접수하겠냐고 묻습니다. 이 사람은 갑자기 재산이 자신에게 들어오게 되는 것을 알고는“내가 무르리라(I will redeem it)”고 답변합니다.

지혜로운 보아스가 재산과 함께 모압여인 룻도 아내로 맞아야 한다고 덧붙힙니다. 그 친척은 손사래를 치면서“나의 무를 권리를 네가 취하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6절)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권리를 포기합니다. 보아스는 철저한 사람입니다. 증인들 앞에서 이 사실을 확실히 해 놓습니다. 포기한 사람이 자신의 신을 벗어서 이웃들에게 주는 행동을 하게 만든 것이지요. 보아스와 룻의 결혼이 성사되는 순간입니다.

이렇게 보아스가 룻의 남편이 되었지만 그 앞전에 그는 룻과 나오미의“기업을 무를 자”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사용된“고엘”이라는 히브리어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셨습니다. 죄로 인해서 죽을 밖에 없는 우리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살려주셨습니다. 보아스가 룻의 기업을 물러서 그의 아내로 맞았듯이, 예수님께서 값주고 사셔서 우리를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로부터 룻과 나오미의 모든 것이 보아스의 것이 되는 은혜를 누렸듯이, 우리들의 모든 인생도 예수님의 통치와 능력 속에 있게 되었습니다. 보아스가 룻을 받아들인 것은 철저한 그의 호의요 은혜였습니다. 똑같이 예수님께서 죄많고 자격도 없는 우리를 자신의 백성으로 삼아 주신 것은 전적인 은혜입니다. 이처럼 룻기 속에는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신 예수님의 모습이 들어있습니다. 할렐루야! -河-

사랑의 시작 : 룻과 보아스

보아스가 자신의 밭에서 마음대로 보리이삭을 주워갈 것을 허락했기 때문에 룻과 나오미는 양식 걱정을 하지 않고 한 철을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어머니 나오미가 룻울 불러놓고 마음에 있던 얘기를 합니다. 언제까지 여자 둘이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룻도 새로운 시작을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나오미는 룻이 보아스의 밭에 가서 보리 이삭을 주워올 때마다 룻을 보아스에게 시집보내고 싶은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룻을 불러놓고 자신의 의중을 얘기하면서 오늘 밤에 보아스가 타작마당에서 밤을 지새울 때 슬며시 그의 잠자리에 들어갈 것을 부탁합니다.

“목욕을 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3절)라는 나오미의 말은 룻으로 하여금 신부 장단을 하고 보아스에게 가라는 것입니다.“그 발치에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4절)는 것은 룻에게 보아스의 침상에 오르라는 야릿한 뉘앙스를 갖고 있는 히브리식 표현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어떤 사람이 죽으면 형제나 자식 아닌 가까운 친족이 남겨진 재산이나 부인을 취해서 가문의 대를 잇는 관습이 있었습니다(신25:5). 보아스는 돌아가신 시아버지 엘리멜렉의 친족입니다. 그러니까 나오미는 엘리멜렉이 룻에게 있어서 가장 적합한 남편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룻을 보아스에게 시집보내기 위해서 꾀를 쓴 것 같습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의 말에 그대로 순종합니다. 마침 보아스는 보리 추수를 모두 끝내고 “먹고 마시고 마음이 즐거워서”보리 낟가리 옆에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당시는 수확한 것을 집에 가져가기 전까지 주인은 낟가리를 지키면서 그곳에서 잠을 잤습니다. 룻은 밤중에 슬며시 보아스의 침상에 오릅니다. 보아스가 한밤중에 깜짝 놀라서 잠을 깹니다. 룻이 자기 발밑에 있는 것입니다. 웬만한 사람 같았으면 모압여인 룻을 저주하고 날이 밝았을 때 마을 사람들 앞에서 아주 큰 창피를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보아스는 도리어 룻을 축복합니다. 게다가 보아스는 룻의 마음속에서“인애(헤세드)”즉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다고 칭찬합니다(10절).모압 사람이지만 그녀의 부지런함과 시어머니를 모시는 효심으로 인해서 룻은 이미 마을에서 “현숙한 여인”(11절)이라는 평판을 얻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보아스도 아름다운 여인 룻을 마음에 두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룻은 보아스의 말대로 그 밤을 함께 머뭅니다. 그리고 동이 트기 전에 보리 여섯 되를 주고 룻을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돌려보냅니다. 시어머니 나오미는 매우 현명한 여인입니다. 룻에게 자초지종을 듣고는 잠잠히 보아스의 처분을 기다리자고 제안합니다. 룻기의 사랑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지만 나오미의 지혜, 룻의 순종, 보아스의 배려로 룻과 보아스의 사랑이 움트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랑이 열매를 맺으면 보아스가 나오미와 룻을 책임지고 이들에게는 새로운 인생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바로 보아스는 룻과 나오미에게 구세주(redeemer)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빈손으로 고향에 돌아온 나오미에게 이런 충만한 축복을 예비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헤세드 –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축복입니다.河-

룻이 보아스를 만나다

가뭄을 피해서 모압으로 피난 갔던 나오미가 남편과 두 아들을 모두 잃고 모압 며느리 룻과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장면을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습니다. 금의환향해도 모자랄 판에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어서 돌아왔으니 나오미의 마음이 오죽했을까요? 동네사람들이 구경나온 자리에서 나오미는 자신의 현재 모습을 있는 그대로 고백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더 이상 기쁨 또는 즐거움이란 뜻의 나오미라고 부르지 말고 고통스럽다는 뜻의 마라라고 불러달라고 당부합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나오미는 자신에게 닥친 재난이 하나님께서 벌주신 것이라고 사람들 앞에서 담담하게 밝힙니다. 그렇게 나오미의 베들레헴 귀환은 빈털터리 초라한 모습으로 시작했습니다.

나오미가 베들레헴에 돌아오던 시기는 풍년이 들어서 보리를 추수하던 때였습니다. 하지만 나오미와 룻은 양식걱정을 해야 하는 처지입니다. 그때 선하고 부지런한 며느리 룻이 이삭을 주우러 들에 나가기로 결심합니다. 모압 여인이 이스라엘 들판에 나가는 것 자체가 비난을 무릅쓴 행위입니다. 그녀가 들에 나가면 또 다시 동네에 빅뉴스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룻은 시어머니를 위해서 생활전선으로 뛰어든 것입니다.

그때 베들레헴에는 보아스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보아스는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척입니다. 그리고 보아스라는 이름이“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듯이 그는 베들레헴의 유력 인사였습니다. 룻이 들로 나가서 보리이삭을 주운 곳이 바로 보아스의 밭이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우연히”라고 기록했습니다(2:3). 물론 우연히 벌어진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에게 우연은 없습니다. 운이 좋다는 말도 통하지 않습니다.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뜻이 깃들어 있는데 이것을“하나님의 섭리”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룻기에 대한 설교를 들으면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보아스는 부족할 것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마음이 비단결처럼 곱고 말 그대로 신사였습니다. 그는 들에서 일하는 일꾼들과도 서로 하나님의 축복을 비는 인사를 했습니다. 모압여인 룻이 자신의 밭에서 이삭을 줍는 것을 보고 부정 탄다고 좇아낼 만도 한데 룻을 살뜰하게 챙겨줍니다. 아니 그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이방 여인에게 하나님의 복을 빌어줍니다. 이처럼 보아스는 하나님께 사로잡힌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마음을 소유한 인물이었습니다. 여기서부터 룻기의 말씀은 칠흑 같이 어두운 분위기에서 동이 터오는 새벽하늘 분위기로 서서히 전환됩니다.

룻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선합니다. 당시 사사시대는 도덕적으로 신앙적으로 매우 혼란스럽고 시끄럽던 때였는데 이상하리만큼 룻기에 나오는 인물들은 착하고 말 그대로 “평화의 사람들”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권(복도 내리시지만 벌도 내리신다는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앙)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이들이 하나님을 확실히 만났고, 혼탁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발버둥 치며 노력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처럼 살았던 인물들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들처럼 선하고 구별된 하나님의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소원합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