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은

좋은 아침입니다.

 

1.
오늘은 한국식으로
5월 5일 어린이날입니다.

 

올해는
100번째 맞이하는 어린이날이랍니다.

 

어린이날 노래가 생각납니다: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 날 우리들 세상

 

팬데믹이 물러가고
어린이들이 마음껏 뛰놀고
꿈을 펼칠 수 있는 세상이 찾아오길 기도합니다.

 

2.
5월 8일은 어버이날입니다.
미국에서는 5월 둘째 주가 Mother’s Day입니다.

 

자녀들 선물에 부모님 선물 또는 용돈까지
젊은 부모님들은 허리가 휘는 5월초가 되겠습니다.

 

그래도 부모님과 자녀들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귀하고 큰 선물이니
기꺼이 기쁘게 섬기는 어린이날이요 어버이날입니다.

 

Mother’s day에 우리 교회에서 부르는

어머니 마음이라는 노랫말은 늘 감동을 줍니다:
낳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를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하리요/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 없어라.

 

특별히, 팬데믹 동안 얼굴을 뵙지 못한
조국에 계신 부모님들의 건강과 평안을 위해 기도합니다.

 

3.
5월 15일은 스승의 날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곳에 있기까지 많은 스승이 계셨습니다.
꼭 학교 선생님이 아니어도,
우리를 빚어주고, 가르쳐준 선생님들이 얼마나 많았는지요!

 

스승의 노래도 기억합니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 지네
참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 주신
스승은 마음의 어비이시다
아아 고마워라 스승의 사람
아아 보답하리 스승의 은혜

 

4.
베이지역에서 5월이 되면 건기가 시작되지만,
한국의 5월은 온 세상이 찐한 초록으로 물드는
하늘까지 맑은 청록의 계절입니다.

 

부활절 이후를 사는 우리들에게는
죽음을 이기신 예수의 생명이 넘치는 기간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죄짐을 모두 지신 친구요,
따라야 할 스승이요,
우리를 자녀 삼아 주신 하나님(아버지) 이시니
예수님께 감사하는 것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푸르른 계절 5월을 맞아서
우리 주변을 사랑으로 섬기고,
무엇보다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과 사랑이
변함없이 푸른 초록 색깔이길 바랍니다.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시 92:13)

 

하나님,
5월을 맞는 참빛 식구들에게
변치 않은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5. 5이-메일 목회 서신)

사이 잇기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에는
루스드라의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바울의 후계자가 된 디모데에 대한 말씀을 나눴습니다.

 

디모데는 아버지가 헬라 인이고
어머니와 할머니는 신실한 유대인이었습니다.

 

순혈주의를 고집하는 유대인으로
헬라인과 결혼하는 것이 쉽지 않았겠지만,
나라를 잃고 사방으로 흩어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가운데는
다른 민족과 결혼한 사람들이 꽤 있었을 것입니다.

 

디모데는 어릴 적부터
할머니와 어머니로부터
유대인 가정의 신앙 교육을 잘 받았습니다(딤후 1:5)

 

구약 성경에 대한 지식을 충분히 갖고 있었기에
바울이 설명하는 예수님을 금방 구약 성경에서 예언한
메시아로 믿고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사전지식, 기초지식,
신앙도 초기 교육이 중요함을 디모데를 통해서 배웁니다.

 

2.
주일에 말씀드렸듯이
디모데의 몸에는 유대인과 헬라인의 피가 함께 흘렀습니다.
유대인의 밭에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의 씨가 뿌려졌으니
신앙적으로 두 종교가 섞여 있습니다.
어쩌면 경계선에 서 있던 인물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안에 있는 디모데는
유대인은 물론 헬라인을 위한 전도에 딱 맞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의 제안으로 몸에 할례까지 받음으로
유대인의 비난도 면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다문화 가정들이 보편화되었고
부모들이나 자녀들이 제한 없이 자기 인생을 펼쳐 나가지만,
바울과 디모데 시절에는 쉽지 않은 선택이고 삶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디모데를 선택하셔서
그를 통해서 하나님 선교 사역을 이뤄 가셨습니다.
경계선에 있는 인물이 아닌,
두 민족과 종교를 통합하는 인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간격과 차이를 이어주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3.
사실 우리도 경계선에 서 있을 때가 많습니다.

 

미국에 살다 보니
한국 사람도 미국 사람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곤 합니다.
말 그대로 어중간한 모습입니다.

 

우리도 살다 보면
이것도 저것도 아니거나,
여기도 저기도 속하지 않은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을 놓고도
딱 부러지게 잘하는 것 같지 않고
그렇다고 아주 못하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에 처하곤 합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걷는 인생길 자체가 경계선이요
모호한 길을 걷는 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그 여정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사이를 잇는 다리와 같은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디모데처럼 우리를 사용하시길 기대합니다.
미국에 사는 한국인의 장점이 발휘되고,
여기저기, 이것저것을 통합하고 화평케 하는 삶을 살고
우리의 모든 삶이 결국 합력해서 선을 이루는 것을 보기 원합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셨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처지를 아시고, 우리를 통해서 놀라운 주님의 역사를 써 가실 것입니다.

 

하나 되게 하시고, 사이를 잇게 하시고,
모든 것을 들어서 참되고 선하고 아름답게 만드시는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4월을 마감하고 새달 맞읍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8)

 

하나님,
우리의 모든 것이 주님께 드려지고
주께서 쓰시는 것을 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4. 28 이-메일 목회 서신)

 

앞을 향하여

좋은 아침입니다.

 

1.
부활절을 보내고
이제 부활 이후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면서
뿔뿔이 흩어졌던 제자들이 다시 모였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사실이요
진리였음이 증명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제자들은 능력 있는 사도가 되었고
예루살렘에서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2.
살아생전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예고하셨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 자
제자들이 모두 흩어지고
두려움에 떨면서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 있었던 이유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말씀대로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셨습니다.

 

여기서부터
새로운 세상이 열렸습니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앞을 향하는 열린 세상입니다.

 

3.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를 해결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악한 세력을 이기신
우주적인 승리였습니다.
과거의 청산입니다.

 

반면,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을 넘어서 영원한 생명의 문을 열었습니다.
미래를 향합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아담의 죽음을 해결하셨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었습니다 (고전 15:21).

 

부활이 없다면
십자가의 죽으심은 과거에 머물렀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부활은 십자가 죽으심의 완성입니다.
십자가가 구원의 은혜를 알려준다면
부활은 영원히 펼쳐진 희망을 살게 합니다.

 

4.
이제 우리도 부활을 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모든 것을 내어놓고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소망 가운데
앞을 향해서 나가는 것입니다.

 

버릴 것, 정리할 것,
미련을 갖고 양손에 쥐고 있던 욕심과 집착 등등
과거를 청산하고
앞을 향해서 부활을 살기 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전 15:57)

 

하나님,
소망 가운데
부활을 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4. 21 이-메일 목회 서신)

2022년 고난주간에

좋은 아침입니다.

 

1.
올해도 어김없이 고난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 설교에서 함께 나눴듯이
“세상에 쉬운 일이 없습니다”
– 행복한 순간은 잠시일 뿐,
엉겅퀴와 가시덤불을 내는 에덴 이후의 세상은
크고 작은 어려움이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물론, 파도가 밀려오지 않기를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만 어려움에서 제외된다면
그것은 자연법칙 위반이자 지나친 이기주의입니다.

 

어려움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밀려오는 파도를 어떻게 마주하고 넘어야 할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 지점에서 어려움을 현명하게 풀어나갈
힘과 용기 그리고 지혜를 하나님께 구할 수 있습니다.
고난 가운데 더욱 깊이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2.
사도 바울이 자기가 개척한 교회들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환난을 겪게 될 것이니
단단히 준비하고 믿음 안에 거하라고 부탁한 말씀을 다시 생각합니다.

 

물론, 초대 교회의 어려움과 우리가 겪는 어려움이 다를 수 있고
우리의 어려움이 꼭 예수님을 믿는 데서 오는 특별한 어려움이기보다
인생길을 가면서 마주치는 일반적인 어려움일 수 있지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목에서 환난을 겪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우리 상황에 그대로 적용해도 무리는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행복, 완전함, 위로와 소망을
꼭 간직하면서 세상을 사는 것도 커다란 도움이 될 것입니다.

 

3.
2022년 고난주간을 보내면서
다시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합니다.

 

“아사셀의 염소”라는 구약의 전통이 있습니다(레16장).
염소 하나를 정해서 그곳에 이스라엘의 죄를 모두 얹고
광야로 내보내는 예식입니다.

 

혹자는 여기에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대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모든 죄를 한 몸에 지셨기에
십자가 앞에서 괴로워하시고 힘들어하시는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그렇지만, 결국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이뤄지길 원하십니다.

 

절대 쉽지 않은 그 길을 가셨습니다.

 

4.
팬데믹 막판이라고 생각해서인지
멀리서 들려오는 전쟁의 참상 때문인지
게다가 “쉬운 것이 없다”는 우리 각 개인의 현실까지 겹치니
올해 고난주간에는 아세살 염소와 같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게 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기보다
우리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의 모든 짐을 지고
십자가의 길을 가신 우리 주님을 의지하고,
단지 예수님의 은혜를 구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우리 자신과 삶을 얹어 놓고
말 그대로 공짜로/은혜로 생명의 부활절을 기다립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참으로 큽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11:28)

 
하나님,
우리 주님의 은혜를 묵상하고 구하며
오늘 하루를 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4. 14 이-메일 목회 서신)

한 가지 의도

좋은 아침입니다.

 

1.
팬데믹이 계속되면서
아무래도 신앙의 끈이 점점 느슨해집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안간힘을 쓰지만,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여러 방향으로 분산됩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을 따라 사는 신앙이
우선순위에서 뒷전으로 밀립니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빼앗아 가는 것들이
하도 많아서 신앙이 치고 올라 틈도 없습니다.

 

그러다 보면
신앙의 집에 물이 새고, 흔들거리고
여기저기 부숴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알면서도 당하는 것입니다.

 

2.
엊그제 목사님 모임에서
“순수한 의도 a single intention”라는 제목의
웨슬리 설교 한 편을 읽고 생각을 나눴습니다.
저는 “한 가지 의도”라고 옮기고 싶었습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웨슬리는
두 가지 마음을 품는 것을 경고하고
한 가지 의도만 꼭 갖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라는 산상수훈 말씀을 본문으로
우리의 눈이 한 곳을 바라보길 부탁합니다.
눈이 바라보는 곳, 우리의 시선이 머무는 곳이
우리 생각의 목적지라는 것입니다.
그곳은 오직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
세상일도 하나님 안에서 실행하고,
먹는 것, 말하는 것, 심지어 오락의 영역에서도
하나님 생각하는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무슨 말을 하고 생각하든지
혹은 무슨 행동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 한 분만이 여러분의 목적이 되도록 하십시오!
하나님 만을 기쁘시게 하고, 그분 만을 사랑하십시오. (웨슬리 설교 본문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추구합니다:
하나님 만을 기쁘시게 하고, 그분 만을 사랑하십시오.

 

3.
웨슬리 시대와 우리 시대는 많이 다릅니다.
우리 삶이 훨씬 복잡해서
생각할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니니
하나님께만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들리지 않습니다.

 

그래도
우리 참빛 식구들께 부탁하고 싶습니다.
“처음 믿음, 순수한 믿음”을 마음에 품고 한 가지 의도에 집중합시다.
“의도(intention)”라는 말을 기억합시다.

 

웨슬리가 부탁하듯이
한 가지 의도(a single intention)로부터
신앙은 물론 삶을 정돈하고 그 힘으로 사는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분산된 우리 생각을(의도를)
하나님께 모으고 그 힘으로 살아갈 때입니다.

 

여러분의 눈을 하나의 의도에 고정시키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온 몸은 빛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더욱더 그분의 도우심의 빛을 여러분 위에 비치실 것입니다 (웨슬리 설교 본문에서)

 

 

하나님,
우리에게 당신을 향한
한 가지 마음, 생각, 의도를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4.7 이-메일 목회 서신)

 

뚜벅뚜벅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주까지 수요예배에서는
구약성경 사사기부터 사무엘상하를 거쳐서
다윗의 마지막과 솔로몬의 등극을 전하는
열왕기상 1-2장을 모두 읽었습니다.
팬데믹 기간에 맞먹는 1년 반 이상 걸린 여정이었습니다.

 

수요예배에 빠지지 않고 오시는
권사님들께 감사드리고
나중에 영상으로 함께 하는 참빛 식구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어제 수요일부터는
신약성경으로 넘어와서 누가복음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탄생부터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까지 역사가로 불릴 정도의 누가가
조목조목 차례로 자세히 기록한 말씀입니다.
앞으로 반년 정도 수요예배에서 누가복음을 읽으면서
예수님을 더욱 깊이 만나기 원합니다.

 

2.
누가복음을 ‘소’에 비유합니다.
누가복음에는 소에 걸맞게
예수님께서 갈릴리 사역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여정을
누가복음 전체의 절반에 가까울 정도로 아주 길게 기록했습니다(9-19장)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서
장차 자신이 겪을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도 예고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허투루 들었습니다.

 

길을 가시면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시고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고치시니
제자들과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소처럼 뚜벅뚜벅
예루살렘을 향해서 올라가셨습니다.
그 자체가 십자가를 지고 오르신 골고다 언덕길이었습니다.

 
3.
우리도 뚜벅뚜벅 주어진 인생길을 걸어갑니다.
독수리처럼 날아오르고 싶지만,
대부분 인생길은 소처럼 묵묵히 걸어갑니다.
아니 그렇게 걸어가야 합니다.

 

지나 온 길을 가슴에 품고
기대를 갖고 앞을 향해서 걸어가지만,
꼭 좋은 일만 기다리는 것은 아닙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예수님의 길에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그 끝에 부활이 있음을 믿기에
우리는 부활의 능력, 생명을 생각하면서

주어진 인생길을 소처럼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습니다.
믿음의 힘입니다.

 

오늘도 각자의 자리에서
주어진 인생길을 차근차근, 힘을 다해
그리고 뚜벅뚜벅 걸어가시는 참빛 식구들을 응원합니다.

 

힘내십시오.

 

[예수님께서]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를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눅 9:57)

 

하나님,
오늘도 주의 길을 걷고 계시는
참빛 식구들과 함께 하시고 힘을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3. 31 이-메일 목회 서신)

 

세 가지 믿음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 말씀에서
루스드라에 간 바울과 바나바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을 걷게 하는 장면을 나눴습니다.

 

예배 후에 교회 집사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면서부터 걷지 못할 경우는 의학상 쉽지 않고
태어나는 과정 또는 어렸을 때 사고나 질병으로 걷지 못한 것을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으로 표현했을 것으로 정리했습니다.

 

평생 걷지 못하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서 걷는 것도 현대 의학으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신비로운 능력이 이 사람에게 임했다고 봐야겠습니다.

 

이처럼 수천 년 전에 기록된 성경의 자세한 내용을
현대 과학이나 오늘날 상식에 맞춰서 꼼꼼히 살펴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해석이 필요한 “하나님 말씀”이고
올바르고 건전한 그리고 우리에게 타당한 해석이 되기 위해서
성경이 기록될 당시와 우리 시대 사이의 간격(gaps)을 잘 메워야 합니다.

 

대충 읽으면 별일이 없지만
세심하게 읽다 보면 성경이 더 어려워질 수 있는데
그래도 그 길을 가야 성경이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살아있고 운동력 있는 하나님 말씀”이 될 것입니다.

 

설교 후에
집사님들과 유익한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함께 배워가는 과정이요,
그런 대화 속에서 일하실 성령 하나님을 기대합니다.

 

2.
바울과 바나바는
걷지 못하는 사람에게서
“구원받을 만한 믿음”을 보고 그를 걷게 했습니다.

 

구원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 속에는
구원받다와 더불어 회복되다는 뜻도 있으니
“걸을 수 있겠다는 믿음”으로 보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사람은 걷는 것을 구원이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성경에서 “믿음”이라고 말할 때도
여러 가지 의미가 포함될 수 있습니다.

 

마커스 보그라는 신학자가 그의 책에서
리처드 니이버가 소개한 세 가지 유형의 믿음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확신(assurance)입니다.
기독교 신앙에 대한 지식, 교리에 대한 확신입니다.
머리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는 신실함(fidelity)입니다.
앞에서 말한 자신감이 지적인 동의라면
신실함은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삶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는 것입니다.

 

마지막 셋째는 신뢰(trust)입니다.
니이버는 신뢰를 믿음의 가장 깊은 차원이라고 말합니다.
생각이나 마음을 넘어서 우리 삶을, 관계를, 인생 전체를 하나님께 연결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사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니이버는 신뢰로 대표되는 믿음의 반대말은
의심(doubt), 회의(skepticism), 불신(unbelief)이 아니라
불안(anxiety), 염려(worry), 두려움(fear)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말하면서
불안, 염려, 두려움에 휩싸여 있다면,
신뢰로 표현되는 믿음이 부족한 표시입니다.

 

3.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 그리고 삶이
니이버가 제시한 세 가지 믿음에 근접하길 바랍니다.

 

불안, 염려, 두려움을 극복하고 이길 수 있는
정말 멋진 믿음을 갖고 싶습니다.
그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기를 원합니다.

 

주여, 믿음을 주옵소서.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행14:9)

 

하나님,
온전히 주님을 신뢰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3. 24 이-메일 목회 서신)

인구조사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수요일에 마무리한
구약 성경 사무엘하 마지막 말씀(24장)은
다윗이 인구조사를 하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사무엘하에서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마음을 일으켜서 인구조사를 했다고 말하고
같은 사건을 기록한 역대상 21장에서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탄이 다윗에게 시켰다고 했습니다.
사탄이 시킨 것으로 읽는 것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룟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서 예수님을 팔았듯이,
다윗 역시 사탄에 무너진 것입니다.

 

다윗은 인구조사를 통해서
자기 세력을 과시하고 싶었습니다.
숫자로 계산해 보고 싶었습니다.

 

인구 조사를 하는데 9개월 20일이 걸렸으니
다윗 왕국이 엄청나게 강해졌습니다.
당장 전쟁에 동원할 수 있는 용맹한 자가80만이었고,
그 가운데 50만은 다윗이 속한 유다 지파 병력이었습니다.

 

베들레헴 목동 다윗이
수많은 병력과 백성을 다스리는 이스라엘 왕이 되었으니
스스로 얼마나 자랑스럽고 뿌듯했을까요!

 

2.
그러나 기쁨도 잠시,
인구 조사를 끝낸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잘못을 크게 뉘우칩니다: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종의 죄를 용서해 주소서 (삼하24:10)

 

다윗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자신의 공로로 바꾸고 말았습니다.
숫자로 정리해서 온 세상에 자기 이름을 높이고 싶었습니다.
다윗은 곧바로 회개합니다. 큰 죄라고 고백합니다.

 

이 일로 인해서 이스라엘에 사흘 전염병이 임하고 무려 칠만 명이 죽었습니다.
다윗은 자기 잘못으로 백성들에게 화가 임한 것을 두고
차라리 자기와 자기 가족이 벌을 받았어야 한다고 한탄합니다.

 

안타까운 사건이 사무엘하 맨 뒤에 위치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다윗이 아라우나라는 사람의 타작마당을 제 값(은 50세겔)에 사서
그곳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니 역병이 그칩니다.
다윗이 돈을 주고 산 타작마당이 훗날 솔로몬이 지은 성전터가 됩니다.
이곳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친 모리아 산에 속한 지역이었습니다.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다윗의 인구조사는 나름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3.
다윗뿐이 아닙니다.
우리도 숫자의 유혹에 걸려 넘어갈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주의 백성으로
다윗이 범한 인구 조사의 실수와 잘못을 늘 마음 한쪽에 두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역시 숫자를 갖고 자랑하고, 숫자에 얽매이고
때로는 숫자로 인해서 기가 죽을 수 있습니다.

 

숫자로 표현되는 디지털 세상이고
모든 것을 데이터가 말해주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니
숫자를 완전히 무시할 수 없습니다.

 

대신, 숫자에서
자랑, 교만, 얽매임, 열등의식, 집착 등과 같은 불순한 요소를 제거하고
숫자는 숫자로 대할 수 있는 대범함이 필요하겠습니다.

 

우리는 숫자를 넘어서 더 중요한 가치인
믿음, 은혜, 소망, 사랑, 생명을 붙잡고 사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시편 37편 24절)

 

하나님,
오늘도 숫자가 판치는 세상을 살아가는 참빛 식구들을
주님의 손으로 꼭 붙들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3.17 이-메일 목회 서신)

2022 사순절

좋은 아침입니다.

 

1.

2022년 사순절을 맞고 있습니다.

팬데믹 이후 세 번째 맞는 사순절입니다.

 

사순절은 기독교의 오랜 전통으로

초기에는 부활절에 세례받을 교인들이

금식하고 세례 문답을 준비하는 기간이었다가

주후 4세기경에 기독교의 연례 절기가 되었습니다.

 

사순절은 재의 수요일로 시작해서

부활절 전 주간까지 40일을 가리킵니다.

40이라는 숫자는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40일을 금식하신 것부터, 모세의 시내산 금식까지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거룩한 기간입니다.

 

교회사 속의 사순절 전통에서

금식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금식을 통해서 우리 안에 기본적으로 내재된 본능을 제어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깊은 기도의 시간을 갖습니다.

 

단지 금식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금식하면서 절약한 양식이나 물질을 어려운 이웃을 돕는 데 사용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알려주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도 묵상했을 것입니다:

 

6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7 주린 자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8 그리하면 빛이 새벽같이 비칠 것이며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공의가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뒤에 호위하리니

9 네가 부를 때에는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사58:6-9)

 

2.

2022년 사순절을 맞이하는 우리도

각자의 자리에서 사순절을 의미 있게 보내길 바랍니다.

한두 가지라도 구체적인 실천 사항을 정하면 좋겠습니다:

말씀읽기, 기도하기, 삶 속에서 경건의 연습하기,

이웃 돕기, 세상 속으로 들어가기 등등

 

새해 결심과 마찬가지로

사순절 결심도 지키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고 죄책감에 쌓이거나

그것을 두고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너무 바빠서 그냥 넘어가도

하나님은 우리의 사정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과도한 의무감에 휩싸일 필요는 절대 없습니다.

 

기준(목표)을 정하고, 운동선수들이 꾸준히 연습하듯이

각자의 사순절 결심을 훈련하고

가능한 대로 지켜나가면 됩니다.

 

사순절이 끝나고 부활절을 맞을 때,

누가 알아주지 않고, 아무에게 보이지 않았어도

스스로 뿌듯한 마음이 든다면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3.

40일은 일 년 365일의 10분의 1에 가깝습니다.

교회력을 따라 살면서,

일 년 가운데 40일을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살 수 있다는 것이

기쁨이고 감사입니다.

 

이미 사순절이 일주일 정도 지나갔지만,

지키고 싶고, 지킬 수 있는 사순절 결심을 생각하고

하나님과 단둘이 또는 부부와 가족 안에서 지켜나가는

기쁨과 보람을 느끼시길 바랍니다.

 

부활절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참빛 식구들을 응원합니다.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사58:9)

 

하나님,
사순절을 보내는 참빛 식구들과 함께 하시고
깊은 은혜를 더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3.10 이-메일 목회 서신)

 

어떤 인생

좋은 아침입니다.

 

1.
우크라이나에서 들려오는 안타까운 소식으로
좋은 아침이라고 인사하기가 망설여집니다.
전쟁터로 변한 우크라이나에
하루 속회 좋은 아침이 찾아오길 간절히 기도할 뿐입니다.

 

러시아 대통령 푸틴은
이번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입니다.

 

올해 70세인 푸틴은
2000년에 러시아 제2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래
헌법까지 바꾸면서 22년 동안 총리와 대통령 자리를 오가며 장기 집권하고 있습니다.
2018년에 다시 법을 바꾸어서 임기를 2036년까지 연장했으니
평생 대통령직을 수행할 가능성이 큽니다.

 

전쟁에서 장애인이 된 아버지와 기독교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푸틴의 어린 시절은 유복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가 자기에게 장애를 일으킨 독일 병사들을 미워하지 않고
모든 것이 전쟁의 비극이라고 이야기했을 때,
푸틴은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체구가 크지 않았던 푸틴은 유도를 배워서 자신을 방어하고,
대학을 졸업하면서 KGB 요원에 자원했고
정치에 입문해서 2000년 옐친에 이어서 러시아 최고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과거 소련으로 불리던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된 것에 불만을 느꼈답니다.

 

2.
초기에는 서방 세계와 비교적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러시아 경제 회복에 힘을 쏟았기에
러시아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호평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전쟁광, 독재자, 미친 사람(mad-man)으로 변합니다.
구소련에서 독립한 체첸, 우크라이나 등을 침공하고
우크라이나 영토인 크림반도를 점령하면서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과 갈등을 빚습니다.

 

2018년 네 번째 대통령 임기를 시작하면서
“강한 러시아”를 외친 그의 속셈을
이번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3.
푸틴은 정기적으로 러시아 정교회 성당에 출석한답니다.
북한의 김정일에게 정교회 성화상을 선물하면서
북한에 러시아 정교회 성당이 세워지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벌이는 전쟁이나, 개인적인 탈선, 부정부패를 생각할 때
푸틴에게 기독교인이라는 명칭을 달아 줄 수 없습니다.

 

어머니로부터 전해지는 예수님의 사랑이 그에게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얼른 전쟁을 그치고,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분들께 고개 숙여 사과하고
더 이상 세상의 평화를 깨는 일을 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4.
우리는 지난 두 주간, 시리아의 안디옥 교회를 공부하면서
지도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달았습니다.
선한 마음을 가진 바나바와 그리스도인이라는 별칭에 걸맞은
지도자들과 성도들로 인해서 교회가 굳게 서는 것을 보았습니다.

 

헤롯의 젖동생(친한 친구) 마나엔은 헤롯 왕궁에서 자랐지만,
예수님을 믿고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반면, 헤롯은 세례 요한을 죽이는 탐욕스러운 지도자가 되었으니
같은 성장 배경을 갖고 있어도 그 끝이 전혀 다른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의 생명을 마음과 삶 한가운데 가졌는지 여부가
인생의 진로와 결과를 결정한 것입니다.

 

5.
다시금 지도자의 품격과 자질을 생각합니다.

 

조국 대한민국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습니다.
이번처럼 후보들의 비호감도가 높은 선거도 없었다지만
경제는 물론 정치와 외교 등 매우 중요한 시기에
대한민국을 옳게 세울 대통령이 선출되길 기도할 뿐입니다.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시편 147:3)

 

하나님,
전쟁과 탐욕,
지도자들의 부정부패로 인해서 망가진
이 땅을 고쳐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3.3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