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함께

좋은 아침입니다.

 

1.
엊그제 보도에 의하면
코로나바이러스가 야생 사슴에게서 발견되었답니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여러 가지 변종이 있어서
야생 동물에서 발견되곤 했지만,
이번처럼 사슴에게서 바이러스가 발견된 것은 특이한 현상이랍니다.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 연구팀이
2020년 12월부터 2021년 1월까지 아이오와주에서 채집한
사슴의 80%가 코로나바이러스에 양성 반응을 보였답니다.
다른 연구에서도 400여 개의 사슴 샘플 가운데
30% 이상에서 바이러스 항체가 발견되었답니다.

 

하지만, 사슴이 사람에게 바이러스를 옮겼거나
반대로 주택가를 비롯한 사람들과 친숙한 사슴이 사람에게서
바이러스에 노출되었는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사슴에게서 바이러스가 발견된 이상
보건 당국은 사냥한 사슴 관리에 각별한 주의를 당부했습니다.
동부나 중서부에서는 사슴 사냥이 인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2.
지난 2년 동안
온 세상이 코로나바이러스와 사투를 벌였습니다.

 

“팬더믹”이라는 용어에 걸맞게
지구에 사는 거의 모든 인류가
남녀노소, 빈부귀천 불구하고 코로나바이러스에 노출되었습니다.

 

그래도 온 세계가 함께 대응해서
코로나바이러스를 저지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백신을 발명한 과학자들, 의료진들, 행정 당국
무엇보다 마스크를 쓰고 거리두기를 실천하고
심지어 교회 건물까지 문을 닫을 정도로 협조한 시민 정신의 승리입니다.

 

아직 아프리카를 비롯한 저개발국가의 백신 접종률이 낮아서
델타 바이러스처럼 코로나 변종이 나타날 수 있지만,
그동안 인류가 연대했던 뒷심을 발휘하면
결국에는 팬더믹을 극복할 것입니다.

 

3.
사슴에게서 코로나바이러스가 발견되었다는 보도를 접하면서
지구상의 모든 생물이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실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죄로 인해서 타락한 세상을 모든 피조물의 “탄식과 고통”으로 요약했는데
지난 2년여 팬더믹을 보내면서
모든 피조물이 ‘함께’ 탄식하고 어려움을 겪는다는 말씀을 실감했습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롬 8:22)

 

그렇다면 이제 살길을 여는 것도
모든 피조물이 다 함께 힘을 합쳐서 한길로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앞장 서야 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청지기로 위임하신 인간의 책임이 매우 큽니다.

 

4.
이제 얼마 남지 않은 한 해를 보내면서
우리 역시 혼자 살 수 없음을 새삼 느낍니다.

 

그동안 우리를 돕는 손길들이
언제나/어디서나 있었습니다.
가족과 공동체가 다 함께 힘을 합쳤기에
올 한 해도 소처럼 여기까지 걸어왔습니다.

 

무엇보다
삼위 하나님의 인도하심, 도우심, 함께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은혜로 이곳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참빛 식구들이 서로에게 신앙의 동지가 되고
주님의 백성이 가야 할 길을 다 함께 걸어가기 원합니다.
사랑으로 완성된 믿음의 교제가 우리 안에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전도서 4:12)

 

하나님,
혼자가 아니라 다 함께 손에 손을 잡고
주의 길을 걷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11. 18이-메일 목회 서신)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좋은 아침입니다

 

1.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
지난주 설교 시간에 스치듯 말씀드린
톨스토이의 단편 소설 제목입니다.

 

하나님께 죄를 지은 미카일이라는 천사가
세 가지 질문을 갖고 세상에 내려왔습니다.
질문에 답을 찾아야 다시 하늘로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1) 사람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2)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3)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성당을 지나던 구두 수선공이
성당 앞에서 맨몸으로 누워있던 미카엘 천사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서 구두 수선하는 일을 시켰습니다.

 

이것을 본 미카엘 천사는
사람의 마음속에 어려운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착한 마음’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첫째 질문의 답을 찾은 것입니다.

 

하루는 한 부자가 하인과 함께 구두 수선집을 방문해서
아주 까다로운 모양의 장화를 주문하면서
제대로 만들지 않으면 감옥에 넣겠다고 겁을 주었습니다.

 

미카일 천사는 장화가 아니라 죽는 사람이 신는 슬리퍼를 만듭니다.
그것을 본 주인이 안절부절못합니다.
그때 부자의 하인이 들어와서 자기 주인이 죽었다면서
장화가 아닌 슬리퍼를 주문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앞을 내다보는 능력이
주어지지 않았음을 발견했습니다.
두 번째 질문에 답을 찾은 것입니다.

 

하루는 한 부인이 쌍둥이 아이를 데리고 구두집을 찾아왔습니다.
아빠가 죽고 곧이어 엄마까지 죽은 이웃집 쌍둥이를
그 부인이 맡아서 키우고 있었습니다.
미카엘은 부인을 보면서
사람은 ‘사랑’으로 사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세 번째 질문의 답을 찾은 것입니다.

 

2.
세상에 사랑이라는 언어가 흘러넘칩니다.
교회에서조차 하도 많이 사용해서
진부한 표현으로 취급받곤 합니다.

 

그런데 사랑 앞에 “진실한”이란 형용사를 붙이고 읽으면
사랑의 깊이와 넓이에 숙연해집니다.
진실한 사랑이 우리에게 있는지 고민하게 되고
진실한 사랑을 사모하는 우리 자신을 발견합니다.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부릅니다.
하나뿐인 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우리가 아무리 잘못해도 조건 없이 맞아 주시는 아가페 사랑,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가 맞습니다.

 

지난주일 설교에서 나눈
골로새 교회의 영적 지도자 에바브라와 빌레몬은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했고
그 진실함에 감격해서 고향으로 돌아와서 복음을 전하고
예배 처소로 자기 가정을 개방했을 것입니다.

 

사랑을 맛보니 그 사랑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3.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
소설 속의 천사 미카엘은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는 해답을 찾아내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삽니다.
그런데 믿음이 드러나는 것이 곧 사랑입니다.

 

오늘 하루,
사랑으로 살아봅시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요일4:20)

 

하나님,
우리 안에 임한 주의 사랑을
꼭 세상에 전하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11. 11이-메일 목회 서신)

감사의 달

좋은 아침입니다

 

1.
새해를 맞은 지 엊그제 같은데 달력이 달랑 두 장 남았습니다.
이제 (추수)감사절만 지나면
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닥칠 것입니다.

 

어릴 적에는 얼른 커서 어른이 되고 싶어도
시간이 너무 느리게 갔건만
나이가 들수록 시간의 흐름에 가속도가 붙습니다.

 

헬라어에 시간을 뜻하는 두 가지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는 <크로노스>인데,
일 년 365일 달력의 숫자를 따라서 사는 시간입니다.

 

아무리 힘을 가진 사람도
벽 위에 있는 시계의 초침을 다스릴 수 없듯이
우리는 크로노스를 통제할 수 없습니다.

 

다른 한 가지는 <카이로스>입니다.
카이로스는 크로노스와 달리 통제 가능합니다.
내가 만들어 가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365일을 각자의 자리에서
뜻깊은 시간으로 만드는 창조적 시간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시간의 흐름에 쫓기는 크로노스가 아니라
다만 한순간이라도 의미를 찾고 가치 있게 만드는
창조적인 시간 카이로스를 추구합니다.

 

2.
야고보서에서는
크로노스를 사는 인생은 안개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약 4:14).

 

“안개”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트미스>는
물방울(vapor), 연기(smoke), 내쉬는 숨(exhalation)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안개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백세 시대가 되었다고 해도
크로노스의 인생길만 산다면 인생이 늘 짧게 느껴질 것입니다.
안개와 같다는 말에 사로잡히고 아쉬움만 쌓일 수 있습니다.

 

인생의 연수에 상관없이
우리 삶이 참된 의미로 채워질 때
밀도 있고 보람된 삶이 될 것입니다.

 

3.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아가는 비결 있다면
“사랑과 감사”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웃과 세상을 바라보고
선행(charity), 작은 사랑이라도 기회가 될 때마다 실천하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 감사를 표현하는 말과 행동 역시
의미 있는 삶을 이끄는 비결입니다.

 

하나님은 물론 가족과 가까운 이웃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품고
진심으로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 우리의 삶을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인도합니다.

 

11월 한 달은
‘감사’를 입에 달고 살아봅시다.

 

감사 속에 임하는 기쁨, 행복, 은혜, 넉넉함을 누립시다.
그리고 서로 사랑합시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 (시 118:28)

 

하나님,
감사의 새달을 맞고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11. 4이-메일 목회 서신)

피난처

좋은 아침입니다

 

1.
어느덧 10월도 저물어갑니다.
길가에 낙엽이 뒹굴고
엊그제 단비까지 내리면서
나뭇가지가 앙상하게 변하고 있습니다.

 

저는 새싹이 돋는 봄을 좋아하고
낙엽이 지는 가을은 솔직히 별로입니다.
그렇지만 자연의 순리를 어길 수 없어서
어느덧 60 번에 가까운 가을을 맞고 있습니다.

 

싹이 트고, 파란 잎과 열매를 맺고
거기에 멈추면 좋은데
마지막으로 화려한 단풍과 함께
하나하나 잎이 떨어질 때는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라는 소설도 생각나고 마음이 울적해집니다.

 

그래도 우리 교회가 있는 샌프란 도심은
사시사철 서늘하고 계절의 변화를 거의 느끼지 못하기에
우리 권사님들이 연세에 비해서 젊게 사시는 것 같습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2.
하여튼
가을이 찾아오면 한 해를 돌아봅니다.

 

기쁘고 감사한 일들은 나뭇가지에 달려있습니다.
바닥에는 힘들고 외롭고 막막한 일들이 낙엽처럼 뒹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우리 역시 연약하고 부족해서
나뭇가지에 달려있는 기쁨과 감사보다
길가에 뒹구는 어려운 일들이 눈에 들어오고 마음에 밟힙니다.

 

참빛 식구들께서도 각자의 자리에서
정말 열심히 사셨습니다:

감사하고 기쁜 일들이 많이 생긴 식구들
힘들지만 참으면서 한 해를 믿음으로 사신 식구들
예상치 않은 일들로 인해서 마음고생을 하신 식구들
선하게 살았는데 힘든 일이 닥치니 욥처럼 하나님 앞에서 씨름하신 식구들
혼란하고 악한 세상을 보면서 하박국처럼 탄식하고 질문하시는 참빛 식구들.

 

목사로서는
어려운 한 해를 사신 참빛 식구들께 마음이 더 쓰입니다.
목회의 자리에서 기도하고 마음으로 응원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간절히 구합니다.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3.
무엇보다
어려운 중에도 피난처 되신 하나님이 계시기에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믿음이 남아있고
그 믿음이 우리를 견인하는 것에 역시 감사할 뿐입니다.

 

“하나님” “주님”
무심코 또는 간절히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신 것도 감사합니다.

 

주일에 하박국을 함께 살펴보면서
“탄식(lament)”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탄식은 금기 사항이고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모범 답안처럼 여겼는데
하박국과 아침에 읽는 욥기를 통해서 “탄식”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신앙의 요소/덕목임을 배웠습니다.

 

10월을 마무리하면서
하나님 앞에 솔직히 서기 원합니다.
우리 힘으로 다스리기 어려웠던 것들
저절로 눈물이 나오고 원망과 탄식이 나왔던 순간들
하나님 앞에 남김없이 내어 드리기 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탄식하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표시가 아니라
그만큼 하나님을 가까이 느끼고 의지한다는 표시입니다.

 

마음껏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흘려보내고
홀가분하게 올해 남은 두 달을 맞이합시다.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시 62:8)

 

하나님,
주님 앞에 나와서 마음을 쏟는
참빛 식구들의 피난처가 되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10. 28이-메일 목회 서신)

작은 손길 큰 도움

단비가 내리는 좋은 아침입니다

 

1.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종종 외로운 순간을 맞습니다.

 

모든 일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솟아오르기도 하지만,
너무 자주 작은 일에 무너집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견디지만,
때로는 신앙까지 썰물처럼 빠져나갑니다.
작은 일에도 흔들립니다.

 

우리의 삶과 존재 자체를 힘들게 하는 큰 일이 찾아오면
지축이 흔들리는 느낌에 휘말립니다.

 

그때 누군가 손을 꼭 잡아주고,
마음과 기도로 함께 해준다면 얼마나 큰 힘이 되던지요.

 

2.
지난 월요일 참빛 카톡방에
바이든 대통령의 부인, 질 바이든(Jill Biden)에 관한 기사를 소개했습니다.

 

바이든 대통령 부부는
2015년 장성한 아들(46세)을 뇌종양으로 잃었습니다.
질 바이든은 그때부터 4년여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우리가 주일에 배우는
탄식의 과정에서 “왜”라는 질문에 쉽게 답을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신과 가족에게 닥친 엄청난 비극에 신앙의 축이 흔들린 것입니다.
하나님께 배신감을 느겼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2019년 대통령 유세를 하면서
사우스캐롤라이나에 있는 브루클랜드 침례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주로 아프리칸 아메리칸100여명 교인이 참석한 작은 교회였습니다.
그때 목사님의 아내가 질 바이든 옆에 앉아서 손을 잡고
“제가 당신의 기도짝(prayer partner)이 되어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더랍니다.

 

그 이후로 두 사람은 수요일마다 텍스트를 주고받았고
그 작은 도움으로 인해서 질 바이든은 다시 신앙을 회복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일, 질 바이든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브루클랜드 침례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경호원들이 교회에 배치되는 등 특별한 일이 생겼지만,
목사님 부부는 상원의원 정도가 오는 줄 알았는데
영부인이 예배에 와서 자신이 어떻게 신앙을 회복했는지 간증까지 했더랍니다.

 

얼마나 깜짝 놀랐을까요!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이었을까요!

 

3.
우리의 삶이 만만치 않습니다.
속을 내보이면,
힘들고 어려운 부분이 마음 곳곳에 숨겨져 있습니다.
혼자서 끙끙 매는 일도 다반사입니다.

 

물론, 우리 주님께서 늘 함께 하시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시기에 멀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때는
누군가의 작은 도움이, 작은 마음 씀씀이가
어려움 속에 있는 이웃들에게 기적과 같은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깜짝 놀랄 경이로운 일의 시작점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 주님께서 보내주시는 천사의 손길을 기대합니다.

 

우리 자신이 주님의 손과 마음이 되어서
이웃을 보듬어 앉아주고 기도짝이 되고
같은 길을 걷는 신앙의 동지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마 25:40)

 

하나님,
참빛 식구들이 알게 모르게
서로에게 주님 보내신 천사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10. 21이-메일 목회 서신)

코비들의 그림자

좋은 아침입니다

 

1.
1년 6개월 이상 미국은 물론 전 세계를 괴롭혔던
코비드19의 어두움이 조금씩 걷히는 느낌입니다.

 

우리 지역은 내일(15일)부터 실내 마스크 착용도 완화되어서
사무실을 비롯한 일터에서는 마스크를 벗어도 됩니다.
물론, 많은 군중이 모이는 장소에서는 마스크 착용은 의무입니다.

 

백신 접종률과 3차 접종을 고려하면
올해 겨울만 잘 보내고 새해를 맞으면
예전의 일상을 거의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경제 상황, 팬데믹으로 인한 마음의 답답함 등을 고려하면
더 이상 코로나바이러스에 붙잡혀 살 수 없습니다.

 

하여튼
코로나바이러스는 지나갈 것입니다.
세월 앞에 장사가 없다는 속담도 생각납니다.

 

2.
지난주일 AP통신 뉴스는
코로나로 인해서 부모님, 할머니/할아버지, 후견인을 잃은 아이들이
미국에만 14만 명에 이른다는 조사 결과를 보도했습니다.
지난 7월에는 4만 명 정도라고 했는데, 다른 방법으로 조사하니
10만 명이 넘는다는 것입니다.

 

유색인종 출신 아이들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캘리포니아의 경우, 보호자를 잃은 아이들의 67%가 히스패닉 가정입니다.
미시시피의 경우, 57%가 흑인 가정 출신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코비드로 부모와 후견인을 잃은 아이들은
백만 명이 넘는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코비드19이 만들어 놓은 어두운 그림자입니다.
조지아에 사는 케이트 켈리(Kate Kelly)는 54세 된 아버지를 코로나바이러스로 잃고
두 명의 자매와 어머니와 살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지역 사회는 물론 이웃들의 도움이 이어졌지만
한 달이 지나면서 발길이 뜸해지고 국가가 주는 지원금으로 살아남아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겪는 어려움은 누구에게나 닥칩니다.
처음에는 모든 사람이 주목하니 위로와 큰 힘이 됩니다.
그런데 어느 시점이 되면, 관심은 식고 섬처럼 외롭게 남겨지게 마련입니다.

 

20년 전에 일어난 9.11 에서 남겨진 가족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처럼
코비드로 인해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총체적으로 돕고 지원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AP 통신은 보도했습니다.

 

3.
세상은 크고 넓습니다. 여러 사람이 모여 삽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어디선가 전쟁이 일어나고,
식량이 없어서 죽어가고, 부모와 가족을 잃고
삶이 완전히 망가진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살아간다면
어둠의 그림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분들도 계십니다.

 

종종 멈춰서서
우리가 모르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세상의 뒷면도 살피기 원합니다.

 

우리 개인적으로도
앞만 보고 나가는 발길을 잠시 멈춰서
뒤에 드리운 그림자를 바라보면서 삶을 돌아보고 반추하기 원합니다.

 

코비드가 지났다고 모든 사람이 기뻐할 때,
기뻐하지 못하고 여전히 슬픈 가운데 있을 수 있는 이웃들을 생각하며
그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시 68:5)

 

하나님,
외롭고 슬픔 가운데 있는 세상 사람들의
보호자와 아버지가 되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10. 14 이-메일 목회 서신)

 

그리스도인의 탄식

좋은 아침입니다

 

1.
주일 예배에서
구약성경의 하박국서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3장으로 이뤄진 하박국서는
1장과 2장에서 하박국이 하나님께 질문하고
하나님께서 대답하시는 방식으로,
마지막 3장은 질문과 응답을 통해서 만난 하나님을
하박국이 악기에 맞춰서 노래하고 고백하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선지자 하박국은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절박한 시대에 살았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살펴보았듯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완전히 떠났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온몸과 삶으로 외쳤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말씀을 외면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지적했듯이 세상에는
“죄악, 패역, 겁탈과 강포, 변론과 분쟁”이 판을 쳤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침묵하고 아무 일도 하시는 것 같지 않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 앞에 나와서
“언제까지 하나님의 간섭과 구원을 기다려야 하는지” 탄식하며
침묵하시는 하나님께 항의합니다.

 

2.
“언제까지입니까? How long?”
하나님을 향한 한탄과 호소는
하박국뿐 아니라 하나님의 간섭, 하나님의 응답, 구원을 기다리던
하나님 백성들의 탄식이었습니다.

 

시편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탄식시도
“언제까지입니까? 주님”으로 시작합니다.

 

탄식(lament)은
찬양과 감사와 함께 주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우리의 삶이 온전하지 않고, 늘 밝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응답과 구원도 즉시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때마다,
주의 백성들은 하나님께 나와서
자신의 마음을 토로하고 때로는 눈물로
외치면서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고난 가운데 드리는 솔직한 기도입니다.

 

3.
우리의 삶도 녹록치 않습니다.
기도 응답이 더뎌지고 삶의 어둠이 깊어지면
자기도 모르게 “언제까지입니까? How long”라는 탄식이 나옵니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되느냐는 한탄이요 항의입니다.
이것은 고난 가운데 있는 모든 주의 백성의 자연스러운 고백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에 꼭 붙들려서
그리스도인들은 탄식하거나 불평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탄식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내어 드리고
우리 속을 숨김없이 꺼내서 하나님께 내보일 수 있습니다.
그것도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 못지않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우리의 기도입니다.

 

4.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가기 원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고민, 힘듦, 아픔, 불안, 염려, 두려움,
행여나 부끄러운 모습들, 안타까운 현실 등등 –
하나님께 갖고 와서 솔직하게 기도하기 원합니다.

 

행여나 하나님에 대해서 섭섭함이나 불신이 생겼다면
자기 선에서 판단하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하박국 선지자처럼
끝까지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고,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 앞에서 해결하기 원합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시편13:3)

 

 

하나님,
참빛 식구들의 탄식에
주님의 귀를 기울여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10.7 이-메일 목회 서신)

요즘 세상

좋은 아침입니다

 

1.
우리 동네에는
인앤아웃(In-and-Out) 햄버거 매장이 있습니다.
공항 근처여서 매일 줄이 길게 서는 곳입니다.

 

매장에서 일하는 손길이 부족한지
종업원을 구한다는 표시가 유리창에 붙어 있는데
시간당 19불로 시작해서 22.5불까지 올려 줄 수 있답니다.

 

주 40시간으로 계산해 보니 한 달에 3,000 – 3,600불 정도가 됩니다.
매점 안에서 일하는 종업원들이 고등학생부터
젊은 청년들인 것을 생각하면 적은 임금이 아닙니다.
풀타임으로 채용되면 복지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우리 동네가 속한 산 마테오 카운티의 최저 임금이
시간당 15.62달러 (샌프란은 $16.32)임을 고려하면
인앤아웃이 20% 정도 많은 임금을 지불하는 셈입니다.

 

동종 업계에서는 경쟁력 있게 대우하는 편이지만,
온종일 서서 쉴틈 없이 일하는 종업원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아주 높은 임금도 아닙니다.

 

흰옷을 입고, 빨간색 테두리가 둘린 모자를 쓰고,
아주 큰 옷핀으로 앞치마를 묶고 열심히 일하는
젊은이들을 보면 대견하고 또 때로는 안쓰럽습니다.

 

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2.
인앤아웃은 1948년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시작했습니다.
창업자의 손녀인 린시 스나이더(Lynsi Snyder, 1982)가
2010년부터 사장이자 대주주로 있습니다.
2012년에는 미국에서 가장 어린 나이의 여성 빌리어내어 (billionaire)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녀의 개인사는 평탄한 편이 못 됩니다.
부모님이 이혼했고, 자신도 세 번 이혼하고
현재 네 번째 남편과 7년째 살고 있습니다.
두 번째와 현재의 남편이 인앤아웃 사원이었다는 점이 눈에 뜨였습니다.

 

인앤아웃 컵 뒤에 성경 구절이 있듯이
스나이더 역시 독실한 기독교인이랍니다.
자신의 인생, 결혼의 실패, 경영권 다툼 소송 등의 어려움을
믿음으로 극복했다고 간증한 적도 있답니다.

 

서른도 되지 않아서 한 기업의 사장이 된 스나이더,
그곳에서 열심히 일하는 젊은이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가지각색 다양합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모습에 박수를 보낼 뿐입니다.
일한 것만큼 보수와 보람을 얻는 세상이 된다면 더 바랄 것도 없습니다.

 

3.
우리가 아침에 읽는 디모데전서에서
사도 바울은 재물(돈)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교훈합니다.
돈을 잘못 사용하고 돈에 노예가 되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잃어버리는 것은 물론
돈이 일만 가지 악의 뿌리가 된다고 경고합니다.

 

우리의 소망을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께 두고
여유가 있다면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라고 권면합니다(딤전 6:18).

 

현대를 살면서 재물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솔직히 돈이 최고인 세상을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다 보니 여기저기서 일확천금을 벌었다는 소문도 들려오고
그때마다 성실하게 일상을 사는 자신이 초라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우리는
돈에 노예가 되지 않고, 돈에 대한 욕망을 제어하고
돈과 비교할 수 없는 믿음, 소망, 사랑에 우리의 마음을 두기 원합니다.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딤전 6:19)

 

하나님,
물질에 얽매이지 않고
물질을 다스릴 수 있는 지혜와 힘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9. 30 이-메일 목회 서신)

상 아래 개들도

좋은 아침입니다

 

1.
그동안 주일 예배에서 살펴보았던
수로보니게 여인에 대한 말씀에 “개(dog)”가 등장했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개 취급하셔도
상관없다고 말하면서 자신을 도와주시길 간청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개”는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자녀”에 반대되는 이방인을 가리키는 험한 표현입니다.

 

물론, 본문의 개는 거리를 배회하는 들개라기보다
집에서 키우는 애완견(작은 개)에 가깝습니다.
주인의 식탁 앞에 앉아서 기다리는 강아지를 떠올리면 됩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자녀)의 잃은 양을 위해서 오신 것을 인정합니다.
대신, 식탁에서 개에게 던져주는 부스러기라도 달라는 요청입니다.
그만큼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았고, 예수님의 은혜와 능력을 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을 향해서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마태15:28)고 말씀하시니
그 시각에 험한 귀신에 들려 있던 딸이 회복되었습니다.

 

2.
개는 인류와 아주 오래전부터 친숙한 동물입니다.
사냥은 물론 운송 수단, 양몰이를 비롯한 경비견으로 사용되었고,
집에서 키우는 애완견의 역사도 제법 깁니다.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는 개를 신의 형상으로 사용하고
주인이 죽었을 때 함께 무덤에 묻을 정도로 거룩하고 친숙한 동물이었습니다.
오늘날은 가족처럼 대우받는 최고의 애완동물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개를 귀하게 대우하지 않습니다.
우선, 식습관에 대한 구약의 율법에서 부정한 음식을 개에게 던지라고 하니
개는 부정한 음식을 먹는 동물이고 개 자체가 부정합니다(출 22:31)

 

엘리야 시대의 가장 악랄했던 왕 아합과 그의 왕비 시돈 출신 이세벨이 죽었을 때
개들이 그들의 시체와 피를 핥아먹을 것이라고 했으니
죽은 것을 접촉하는 개 역시 부정합니다(왕상21:23-24).

 

예수님께서 수로보니게 여인을 향해서 “개”라는 표현을 쓰신 것도
구약과 같은 맥락입니다. 부정한 이방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개를 비교적 좋게 묘사한 것은 경비견인데
그것도 짖지 못하는 경비견이라고 했고(사56:10)
욥기에는 양을 지키는 개라는 표현이 나오는 정도입니다(욥 30:1)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들어와서
복음의 정신을 흐리고 교회를 헤치는 사람들을
거리를 배회하는 들개에 비유했습니다(빌3:2).

 

요한계시록에서도 개들은
점술가, 음행하는 자, 살인하는 자, 우상숭배하는 자,
거짓말을 좋아하고 지어내는 자들과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질 성 밖에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3.
그러니 수로보니게 여인을 향해서 “개”라는 표현을 쓰신 것은
심하셨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정도로
여인의 신분, 자존심, 가능성을 모두 망가뜨린 말씀입니다.

 

그런데, 수로보니게 여인이 자신을 개에 대입해서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대답했으니
예수님도 깜짝 놀라셨을 것입니다.

 

그만큼 다급했고, 그 정도로 예수님을 신뢰했다는 표시입니다.
예수님 한 분만을 바라보고, 한길만 가겠다는 결단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을 닮고 싶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마음가짐과 믿음을 갖고
예수님을 찾고 끝까지 예수님을 쫓기 원합니다.

 

다급한 기도 제목을 갖고
예수님을 찾고 부르는 참빛 식구들에게
“네 소원대로 되리라”는 예수님의 음성이 임하길 기도합니다.

 

오늘 하루도 예수님을 깜짝 놀라게 하시는
참빛 식구들이길 기도하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마태 15:28)

 

하나님,
저희도 큰 믿음을 갖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9. 23 이-메일 목회 서신)

한 끗 차이

좋은 아침입니다.

 

1.
수요예배에서는
사무엘상을 마치고 사무엘하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사무엘상에서는 엘리 제사장과 사무엘,
사울과 다윗을 비교하면서
첫 번째 지도자 엘리와 사울이 무너지고
그다음에 세워진 사무엘과 다윗이 하나님께 쓰인 받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특히, 사무엘상 후반부는 사울과 다윗을 비교하면서
왜 사울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고
다윗은 흥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었습니다.

 

2.
사울의 외모는 출중했습니다.
그의 외모와 달리
사울이 처음 왕으로 세워질 때는 수줍고 소심했습니다.
그가 훗날 교만하고 권력욕에 사로잡힌 왕으로 변질된 것이 신기할 정도였습니다.

 

사울의 영적 멘토는 사무엘이었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을 왕으로 기름 부었고,
이스라엘 첫 번째 왕 사울을 차근차근 정성을 다해서 가르치고 조언했습니다.
사울 역시 하나님 앞에서 행하고
사무엘 선지자와 동역할 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말렉이라는 이스라엘의 고질적인 적대국을 물리치고
연거푸 전쟁에 승리하면서 사울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사무엘 선지자를 무시하고 결국에는 하나님을 떠납니다.

 

제사장들을 모조리 죽이고 안하무인이 됩니다.
다윗이 장차 왕이 될 것을 알면서도
다윗을 제거하고 사울 왕국을 세우려 합니다.

 

마지막 블레셋과의 전쟁에서는
자신이 쫓아냈던 신접한 여인(당시의 무속인)까지 찾아갔습니다.
처음 모습은 온데간데없습니다.

 

3.
다윗은 베들레헴 목동 출신입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베들레헴을 찾아왔을 때,
다윗은 들에서 양을 치고 있을 정도로 존재감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윗을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부으십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이기고, 왕궁에서 사울에게 임한 악령을 쫓아내지만,
왕이라는 직책에 미련을 갖기보다
순간순간 닥친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을 피해서
광야 생활을 할 때도 하나님을 의식하고
아비멜렉이라는 제사장을 곁에 두고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사울을 죽일 기회가 두 번씩 있었지만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사울이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것을 인정하고
사울을 제거하지 않고 그 힘든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환대하고
그들과 동고동락하면서 자기 사람들(군사)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과 지혜로
장차 이스라엘 왕으로 세워질 때를 착실하게 준비했습니다.

 

4.
사울과 다윗을 ‘사람’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큰 차이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외모는 사울이 다윗보다 훨씬 앞섰습니다.

 

하지만 사울과 다윗의 인생,
이스라엘 왕으로서의 지위와 명성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차이를 보입니다.

 

어디서 이런 차이가 시작되었을까요?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을 향하는지에 있었습니다.
처음과 끝이 같은 신실(信實)함이 두 사람의 큰 차이였습니다.
어찌 보면 한 끗 차이입니다.

 

세상에서는 격차가 심하고, 매우 다양한 인생이 펼쳐지지만,
하나님 앞에 서면 한 끗 차이로 성패가 갈림을 보입니다.

 

우리 마음을 다스리고,
끝까지
그리고 변함없이 주의 길을 걷기 원합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삼상 16:7)

 

하나님,
처음과 끝이 같은 신실함을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9. 16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