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단상

월드컵 단상

시간이 어찌나 빠르게 흐르는지 어느새 4년이 훌쩍 지났고 러시아에서 또다시 월드컵이 열리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1986년 멕시코 월드컵부터 9회 연속 본선에 진출한 여섯 번째 국가가 되었습니다. 이번 월드컵에서는 미국 팀은 물론 전통적인 강호 이탈리아와 네덜란드도 본선에 나가지 못하고 예선에서 탈락했으니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것만도 대단한 일입니다.

 

제가 중고등학교 시절만 해도 대한민국 축구팀이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는 것을 꿈처럼 여겼습니다. 열심히 해서 아시아 예선을 통과해도 호주를 비롯한 다른 대륙의 팀들과 최종전을 벌여야 했고 번번이 본선 진출 길이 막혔습니다. 당시에도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유명한 선수들이 꽤 있었는데 월드컵 본선 진출이 쉽지 않았습니다. 흑백텔레비전 앞에 숨을 죽이고 앉아서 월드컵 예선전을 시청하던 때가 생각납니다.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으로 시작되는 아나운서의 익숙한 멘트도 귓전에 들리는 듯합니다.

 

그런데 2002년에는 월드컵을 주최하는 국가가 되고 아무리 안방에서 열린 대회였어도 히딩크 감독의 지도하에서 4강에 오르는 기적을 일으켰으니 대한민국의 저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셈입니다. 그런데 이번 러시아 월드컵에 진출한 대한민국 대표팀은 처음부터 최약체로 평가받았습니다. 본선에 진출한 서른 두 개 팀 가운데 맨 밑에서 두세 팀에 들 정도였습니다. 공은 둥글다는 뻔한 표현(cliché)이 현실이 되어야 16강에 올라갈 실력이었으니 다음을 기약하면서 격려할 뿐입니다.

 

월드컵은 선수들에게 꿈의 무대가 되기도 하지만 가슴 아픈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현재 세계에서 축구를 가장 잘한다는 아르헨티나의 리오넬 메시는 아이슬란드와의 예선 첫 경기에서 페널티킥에 실패했습니다. 메시는 페널티킥을 실축한 후에 “매우 고통스럽다. 내가 페널티킥에 성공했다면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었다”고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답니다.

 

“축구의 신”이라고 불리는 천하의 메시이지만 페널티킥에 약한 편입니다. 그는 지난 시즌에 여섯 번 페널티킥을 시도해서 절반만 성공했습니다. 그라운드에서 공을 다루고 슛을 성공시키는 실력은 신기(神技)에 가깝지만, 상대편 골키퍼와 마주 대하는 페널티킥에서는 지나치게 긴장하는 것 같습니다. 하긴, 한 선수가 모든 것에 완벽하면 그것도 싱겁습니다. 한 두 가지 부족한 점이 있어야 동정심도 생기고 더 열심히 응원할 것 같습니다.

 

아르헨티나와 무승부를 기록한 아이슬란드도 흥미로운 팀입니다. 북대서양 한 중간에 떠있는 섬나라 아이슬란드는 전체 인구가 34만 명밖에 되지 않은 국가로 역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습니다. 아이슬란드 팀의 감독은 치과의사 출신입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가듯이 어쩌다가 치과의사가 되었고, 우연치 않은 기회에 축구 감독까지 되었습니다. 우리의 인생길이 어떻게 펼쳐질지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을 되새겨줍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메시의 페널티킥을 막아낸 아이슬란드의 골키퍼는 영화감독 출신입니다. 이번 월드컵동안 자신의 조국 아이슬란드에서 방영하는 코카콜라 광고를 연출했답니다. 수비수 가운데 한 명은 소금 공장에서 포장하는 일을 하면서 대표선수가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이슬란드는 말 그대로 축구를 즐기는 선수들로 구성된 팀인데 첫 경기에서 강호 아르헨티나와 무승부를 거뒀으니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듯합니다.

 

이처럼 개인은 물론 국가의 명예를 걸고 한판 대결을 벌이는 월드컵이기에 보는 이의 마음도 승패에 따라 춤을 춥니다. 멋진 승부가 펼쳐지고, 마지막 순간에 골을 넣어서 승패가 뒤바뀌는 것을 보며 짜릿함을 느낍니다. 운동장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죽기 살기로 뛰지만, 끝나면 곧바로 악수를 하고 땀 냄새 가득한 유니폼을 교환하는 선수들이 참 멋집니다. 보란 듯이 예상을 뒤엎고 의외의 승리를 거두는 팀들을 보면서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합니다. 열심히 하려다 보니 실수도 하고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할 수 있는데 의기소침하지 말고 더욱더 힘을 내기 바랍니다. 기회는 다시 찾아올 것입니다. 무엇보다 월드컵이 막바지로 달려갈수록 스포츠만이 선사할 수 있는 감동과 미담이 쏟아지길 기대합니다. (2018년 6월 28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헛발질

좋은 아침입니다.

 

러시아에서 월드컵이 한창입니다.

한국팀은 첫 경기에서 그런대로 선전했지만,

16강에 들라는 국민의 성화에 부응하지 못한 채

내일모레 멕시코와의 2차전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한국은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32개 팀 가운데

뒤에서 두세 번째 드는 전력이니 16강에 들려면 기적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선수들이 경기 결과를 떠나서

가슴의 태극 마크가 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뛰어서

국민들에게 흐뭇함을 선사하면 좋겠습니다.

 

2.

이번 월드컵에서 가장 주목받는 스타는

당연히 포르투갈의 호날두와 아르헨티니아의 메시입니다.

 

포르투갈의 호날두는 첫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달성하고

두 번째 경기에서도 골을 넣어서 득점 1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자신감이 지나쳐서 교만해 보일 수 있는 그의 눈빛과

두 손을 아래로 펼치는 골 세레모니를 자주 보게 됩니다.

 

반면에, 아르헨티나의 메시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첫 경기에서는 페널티 킥을 놓쳤습니다.

메시의 킥을 막은 아이슬란드의 골키퍼가

영화감독 출신이라니 메시의 자존심이 더 상할 것 같습니다.

 

오늘 아침에 있었던 경기에서

메시가 속한 아르헨티나는 3대 0으로 패했습니다.

인터넷 기사를 챙겨보니

메시가 상대편 수비에 꽁꽁 묶였답니다.

 

예선 마지막 경기가 남아있지만

4년 전 브라질에서 결승전까지 팀을 이끌었던 메시로서는

어쩌면 평생에 마지막이 될 월드컵에서

실력 발휘를 못해서 무척 아쉽겠습니다.

마지막 경기를 기대해 보겠습니다.

 

3.

저는 메시가 처음 두 경기에서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두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하나는, 아무리 뛰어난 선수도 혼자서는 경기에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팀이 하나 되었을 때, 없던 힘도 생기도 개별 선수의 실력도 발휘됩니다.

 

다른 하나는, 아무리 뛰어난 선수도 완벽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난주 설교에서 나눴듯이 99%의 노력이 있어도,

1%의 영감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겸손하게 해주고,

더욱더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듭니다.

 

메시를 보니 누구나 헛발질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실수도 하고 불완전한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지나치게 완벽해 지려는 집착을 내려놓고

지금 주어진 일을 즐깁시다.

1%의 영감,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하면서…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빌 1:6)

I am sure of this, that he who began a good work in you will bring it

to completion at the day of Jesus Christ.(Phil 1:6)

 

하나님 아버지,

행여나 실수해도

주님을 바라고 의지하는 하루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목사 드림

(2017. 6. 21이-메일 목회 서신)

빌립보서 읽기

좋은 아침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두 달여 주일예배에서

신약성경의 빌립보서를 함께 읽게 됩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렸듯이

빌립보서는 바울이 어렵게 개척한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입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바울의 마음이

빌립보서 각 구절에 진하게 베어져 있습니다.

 

빌립보서는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와 함께 바울의 <옥중서신>입니다.

 

바울은 현재 로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러니 빌립보의 깊은 감옥에 갇혔던 때가 금방 떠오르고

자신의 동역자 실라와 함께 한밤중 깊은 감옥에서

큰 소리로 기도하고 찬양하던 때가 생각났을 것입니다.

 

로마 감옥에서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쓰는 마음이

각별할 수밖에 없습니다.

 

앞으로 빌립보서를 읽어가면서

이러한 바울의 마음을 고스란히 느끼고 싶습니다.

바울의 마음속에 들어가서 빌립보서 말씀을 읽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교회와 성도를 사랑하시고, 바르게 세우시려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2.

빌립보서는 4장 밖에 되지 않습니다.

앞으로 두 달 동안 수없이 빌립보서를 읽으시길 부탁드립니다.

 

빌립보서 말씀을 노트에 옮겨 적으시는 것도 추천합니다.

한글로, 영어로, 그리고 다른 번역본으로 차근차근 옮겨 적다 보면,

2천 년 전 로마 감옥에서 빌립보 교회에 보낼 편지를 쓰고 있는

바울의 마음과 손길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속에 하나님의 영감(숨결)이 깃들어 있음을 믿습니다

빌립보서를 읽고 또 읽으면서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는 것입니다.

바울을 넘어서 하나님과 함께 호흡하면서 말씀을 읽는 은혜가

우리 교회에 있기를 간절히 간절히 원합니다.

 

그렇게 우리 모두 한 마음으로 빌립보서를 읽으면,

주일 설교는 물론 스스로 말씀을 읽으면서 임하는 말씀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귀한 일인지요!

 

3.

유진 피터슨은 <이 책을 먹으라>에서

성경 읽기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책을 먹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의 조직에 동화시키는 것이다.

독자는 자신이 읽은 것이 된다

 

말하고 듣고 쓰고 읽는 말은 우리 안에서 무엇인가를 하게 되어 있다.

건강함과 온전함, 생명력과 거룩함, 지혜와 소망을 주게 되어 있다. 그렇다. 이 책을 먹으라.

 

이번 주부터 빌립보서를 읽기 시작합니다.

말씀과 함께 호흡하면서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고,

말씀을 먹으면서 생명에 활기를 불어넣고

위로, 회복, 은혜, 능력, 그리고 말씀의 진리 속으로 들어가기 원합니다.

 

빌립보서 말씀이 우리 안에 스며들어오고

우리가 그 말씀에 동화되는 은혜가 임하길 원합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시 119:18)

Open my eyes, that I may behold wondrous things out of your law. (Psalms 119:18)

 

하나님 아버지,

빌립보서를 통해서

하나님 말씀과 우리가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목사 드림

(2017. 6. 14이-메일 목회 서신)

작은 자 하나

좋은 아침입니다.

1.

새벽기도회를 쉬는 지난주 토요일에는

예배 준비와 청소를 위해서 느지막이 교회에 갔습니다.

 

모든 정리를 끝내고,

본격적인 건기로 접어들었기에

호스를 연결해서 정원에 물을 주는데

아기 참새 한 마리가 물벼락을 맞고 밖으로 뛰어나왔습니다.

 

저도 깜짝 놀랐으니 참새는 더 놀랐겠지요.

고의는 아니었지만

괜스레 미안하고 더욱 측은해 보였습니다.

날지도 못하고 기우뚱거리면서

옆집 풀 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습니다

 

물을 모두 주고 호스를 정리하는데

나무 위에서 계속 참새가 울고 있습니다.

아마 어미 참새가 찾고있거나, 자신에게 오라고 신호를 주는 것 같았습니다.

 

어미와 아기가 상봉하기를 바라면서

얼른 호스를 정리해서 자리를 떴습니다.

 

다음날 주일 아침,

교회 계단을 올라가는데

참새 한 마리가 앉아서 울고 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만약에 아기를 찾지 못했다면 저를 원망하는 울음소리였겠지요.

제가 아기 참새를 해치지 않고 그대로 놓아주었으니

만약 둘이 만났다면 감사 인사였겠지요.

제게는 전자로 들려서 역시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2.

오늘 새벽에 읽은 마태복음 18장은

“작은 자 중 하나”를 강조합니다.

어린아이, 잃은 양 한 마리, 두세 사람이 모인 곳을 포함해서

공동체를 이루는 작은 자들 가운데 “하나”를 강조합니다.

 

세상에서는 하찮고 작지만, 천국에서는 큰 자들입니다.

그러니 작은 자들을 업신여기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그뿐 아닙니다.

땅에서 두 사람이 합심해서 기도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들으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두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두세 사람은 공동체를 이루는 최소 단위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작은 모임에도 함께 하심을 뜻합니다.

 

3.

올해 우리 교회 표어대로

작은 일, 작은 자에게 관심을 기울이기 원합니다.

 

무엇보다

가까이 있는 작은 자들을 돌보는 것입니다.

나보다 작고 약한 자들은 모두 돌봄의 대상입니다.

 

특별히 오늘 하루 지내면서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않거나, 존재감이 별로 없는 이웃이 눈에 띄면

예수님의 마음으로 챙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사랑을 나누고 주님의 함께 하심을 경험하기 원합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 18:20)

For where two or three are gathered in my name, there am I among them. (Matthew 18:20)

 

하나님 아버지,

이웃의 작은 숨결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목사 드림

(2017. 6. 7이-메일 목회 서신)

하나님의 일, 나의 일

좋은 아침입니다.

 

지난주 설교 초반에는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는 예수님 말씀을 소개하면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단순히 하나님께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했습니다.

 

우리는 종종 신앙이 좋은 것을 두고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으로 생각하곤 합니다.

그런데 신앙은 무임승차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무시하고

혼자 힘으로 모든 일을 한다면

신앙과 삶이 둘로 나눠질 가능성이 큽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지점에서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2.

  1. S. 루이스는 그의 책 <순전한 기독교( mere Christianity)>

“믿음”이라는 챕터에서 믿음과 행위의 관계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조금 길지만 발췌해서 인용합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태어나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까지 실천하신 완전한 순종의 삶을

자기 역시 어떻게 해서든지 살게 해 주신다는 사실을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더 닮아 가게 해 주신다는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의 부족함을 채워 주신다는 사실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어떤 것을 거저 주신다는 말로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는 모든 것을 거저 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떤 의미에서 바로 이 놀라운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의미에서 볼 때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맡긴다는 것은 노력을 포기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을 그리스도께 맡겼다면, 그에게 순종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때는 전과는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 즉 전만큼 안달하지 않으면서 노력하게 됩니다.

 

성경은 한 놀라운 구절 안에 이 두 가지를 통합함으로써 문제를 마무리짓습니다.(빌 2:12-13)

12절에서는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하였습니다.

이것만 보면 마치 모든 것이 우리와 우리의 선행에 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13절에 “너희 안에서 행하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시므로 우리는 아무 할 일이 없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두가지 말씀이 한 구절에 등장하는 것을 C.S. 루이스는 주목했습니다.

하나님의 몫과 인간의 몫을 명확히 구분하기 어렵지만,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시고,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3.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맡긴 사람은

조바심을 내지 않고, 자기 욕심이나 이익만을 챙기지 않고

받은 구원과 은혜에 감사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답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에

모든 힘을 들여서 노력하고, 책임 있게 자신의 삶을 세워갈 것입니다.

 

하나님 일과 우리 일을 구분 짓지 말고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이 하나님의 일이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감당하기 원합니다.

 

매사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심을 보기 원합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빌1:6)

And I am sure of this, that he who began a good work in you

will bring it to completion at the day of Jesus Christ.(Phil 1:6)

 

하나님 아버지,

참빛 식구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일하는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목사 드림

(2017. 5. 31이-메일 목회 서신)

요나

 

좋은 아침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물고기 뱃속에서 드린 요나의 기도를 함께 나눴습니다.

 

요나는 이스라엘의 적국이자

당시에 제국인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말씀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요나는 자신이 왜 니느웨로 가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단단히 화가 난 요나는

하나님의 낯을 피해서 니느웨 반대쪽 다시스로 향합니다.

누가복음의 탕자, 아니 꼭 청개구리 같습니다.

 

배 맨 밑에 내려가서 잠을 청합니다.

바다에 폭풍이 일어도 잠을 자는 것을 보면,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무감각과 무지를 발견합니다.

 

2.

죗값을 물어서 바다에 던져진 요나는

바다 맨 밑까지 떨어집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추락입니다.

 

하나님께서 큰 물고기를 동원해서

요나를 구하십니다. 구사일생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바다 한가운데 물고기 뱃속입니다.

불안하고 불완전한 실존입니다.

 

요나는 그 순간 기도했고,

그곳이 하나님 마음속이 되는 은혜를 누렸습니다.

그리고 물고기가 요나를 육지에 토해냈습니다.

정말 살아서 돌아온 것입니다.

 

정신이 번쩍 든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예언하라는 하나님 명령에 순종합니다.

 

니느웨에 간 요나는 설렁설렁 하나님의 심판을 전했는데

니느웨 백성들이 귀담아듣고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일반 백성들부터 시작된 회개 운동이 왕에게 확대되고

심지어 하루만 굶어도 큰일 날 가축까지 금식하면서 회개합니다.

 

언제나 회개는 하나님 마음을 움직입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에 내리시려는 심판을 거두십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이방 국가 니느웨까지 임한 것입니다.

 

이것을 본 요나가 화를 냅니다.

하나님께서 계획대로 니느웨를 심판하지 않으시면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고 억지를 부리면서 하나님께 대항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는지 천막을 쳐 놓고 감시합니다.

요나가 하나님 머리 꼭대기에 앉은 느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리저리 요나를 설득하시지만 (요나 4장)

요나의 마지막 반응은 독자인 우리에게 남긴 채

모든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말씀으로 요나서가 끝납니다.

 

3.

요나를 통해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우리도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받은 은혜를 금방 잊어버립니다.

자기 생각에 꽉 들어차서 열린 사고가 불가능합니다.

나만 잘 되어야 합니다.

종종 하나님 머리 위까지 올라갈 정도로 교만합니다.

하나님 속을 엄청 썩입니다.

 

누구를 탓할 것 없이

우리 모두 도긴개긴 현대판 요나들입니다.

그래서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찬양이 그토록 좋은가 봅니다.

 

그런데, 은혜에만 머물면 조금 감상적일 수 있습니다.

행함이 없는 위선도 있지만, 은혜에 숨는 위선도 문제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사람으로, 예수님을 닮은 제자로,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가기 원합니다.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요나 4:11)

And should not I pity Nineveh, that great city, in which there are more than 120,000 persons

who do not know their right hand from their left, and also much cattle? (Jonah 4:11)

 

하나님 아버지,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근사한 그리스도인들로 가득 채워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목사 드림

(2017. 5. 24이-메일 목회 서신)

 

기도로 사는 한달

좋은 아침입니다.

 

우리 교회의 사역은

아주 적극적인 편이 아니고

겉으로 보기에도 커다란 변화가 없어 보입니다.

 

그렇게 형식은 반복되지만

“내용”의 변화를 위해서 저 나름 무척 애를 씁니다.

물론, 늘 부족해서 저만 알아차릴 때가 많지요 ㅠㅠ

 

매년 한 달은 기도에 대한 말씀을 전했습니다.

부활절이 지난 4-5월에 전하면서

부활절을 산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성령강림절의 열정과 그 이후의 삶을 기도로 살기 원했습니다.

 

형식과 제목은 <기도>였지만,

기도의 인물을 살피고,

참빛 식구들이 힘드실 때는 “간구와 기도의 능력”을

여유가 있으신 것 같으면 “이웃을 위한 기도”를

물론 기도의 기본(첫 단추)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10여 년을 매년 기도에 대한 말씀을 준비했으니

이제 기도에 대한 주제는 거의 다룬 셈입니다.

그래도 기도는 언제나 필요합니다.

기도야말로 “앎이 아니라 삶”이기 때문입니다.

 

올해는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한나, 요나, 예레미야, 다윗의 기도를 나눕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진솔하고, 간절히 드리는

내면의 깊은 기도를 본받기 위함입니다.

 

2.

기도를 생각하면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고 응답받는 “간구”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도의 지경은 높고, 깊고 넓습니다.

 

무엇보다, 기도를 통해서

그동안 살펴보았던 사도신경의 삼위 하나님을 만납니다.

모든 것을 주관하시며 전능하신 창조주 아버지 하나님,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보혜사 성령 하나님!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기도하고

우리의 이름이 아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마무리하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와 능력을 구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삼위 하나님께 드려짐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 예수의 사람,

성령에 사로잡힌 능력의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가기 원합니다.

 

기도는

앎에서 삶으로

그리고 자라감(변화)으로 이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3.

기도합시다.

 

꼭 교회에 나오고, 무릎을 꿇고, 형식을 갖추지 않아도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실제로 기도하면서 한 달을 살기 원합니다.

 

간구하는 기도와 응답을 넘어서

우리가 믿는 삼위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중세의 프랑스 수도사 클레르보 버나드의 기도문을 갖고

우리도 오늘 하루 간절히 주님을 갈망합시다.

 

오 생명의 떡이신 주님, 우리가 주님을 맛보며

여전히 주님으로 즐거워하기를 갈망하나이다.

생의 근원이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영혼의 갈증을 채우기 원하나이다.

 

하목사 드림

(2017. 5. 17이-메일 목회 서신)

은밀한 중에 보시는

좋은 아침입니다.

 

요즘 새벽기도회에서는

구약성경에 이어서 마태복음을 읽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산상수훈의 한가운데

마태복음 6장에는 온전한 신앙의 모습과

신앙의 길을 가는 자신의 백성을 책임지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등장합니다.

 

온전한 신앙은

사람에게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은밀함입니다.

 

2.

예수님께서

자랑하기 쉬운 세 가지 신앙 행위를 예로 드셨습니다.

 

구제할 때에

사람들 앞에서 나팔을 불며 자랑하지 말고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에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이나 큰 거리로 나가지 말고

골방에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의미없이 이말 저말을 길게 기도함으로

기도를 많이 하는 척할 것도 아니고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을 따라서 기도하면 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이웃을 용서하고 화해할 일이 생각나면

먼저 해결하고 하나님께 나와야 합니다.

 

금식할 때에

일부러 슬픈 기색을 보이면서 자랑하지 말고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외모를 단정히 꾸며야 합니다.

 

3.

구제, 기도, 금식을 실천하면서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을 받았다면

그것으로 상을 다 받은 셈입니다.

 

온전한 신앙은

하나님 앞에서 은밀히 행합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서

은밀하게 갚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밀월(蜜月, honeymoon)입니다.

 

남에게 자랑하고 싶을 때

하나님만을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서 은밀히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웬만한 신앙 내공이 아니면 지키기 힘듭니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에 들어갔을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은밀히 행하고

은밀한 중에 보시고

은밀히 갚아 주시는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하루가 되기 원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마태 6:1)

“Beware of practicing your righteousness before other people in order to be seen by them,

for then you will have no reward from your Father who is in heaven. (Matthew 6:1)

 

하나님 아버지,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하루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 5. 10이-메일 목회 서신)

보혜사 성령

좋은 아침입니다.

 

지난 3주 동안

보혜사 성령 하나님에 대한 말씀을 나눴습니다.

 

보혜사

– 곁에서 함께 해 주시고

– 도와주시고

– 안내해 주시는 성령 하나님!

 

우리 안에 계시고

사방에서 생기를 불어넣어 주시는

능력의 성령 하나님!

 

성령 하나님을 믿는 우리 안에

사랑, 희락(기쁨),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친절)

충성, 온유, 절제

성령의 열매가 맺히길 원합니다.

 

거기에

성령의 은사까지 우리 안에 임하면

우리 자신은 물론 교회에도 커다란 덕이 될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넘치게 임하길 간절히 바랍니다.

 

2.

성령 하나님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위로”입니다.

 

보혜사라는 말에

곁에서 함께 해 주시고, 기도해 주시는

“위로자(Comforter)”라는 의미가 있음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우리 모두에게 위로가 필요합니다.

위로의 수단과 경로가 다양하지만,

사람이나 세상이 주는 위로는 한계가 있고

만족함 없이 계속 갈증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위로가

참빛 식구들 위에 임하길 기도합니다.

 

우리 마음 깊은 곳을 만져 주시고

언제나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는

성령 하나님을 사모하고 사랑합니다.

그리고 감사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g00ajpu9sE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며)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시편46:1)

God is our refuge and strength,

a very present help in trouble. (Psalms 46:1)

 

하나님 아버지,

참빛 식구들의

진정한 위로자와 피난처가 되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 5. 3이-메일 목회 서신)

기대

좋은 아침입니다.

 

미국에 살면서 가장 어려운 것은

언어 문제입니다.

살면 살수록 영어가 안되고,

그때마다 의기소침해지면서

우리 말에 대한 사랑과 집착이 점점 커집니다.

 

언어, 특히 같은 말을 사용한다는 것은

마음과 생각을 나누고

하나가 되는데 필수적입니다.

 

오늘은

조국 대한민국에서

남과 북의 정상들이 만났습니다.

 

남과 북의 경계선에 마주 선 정상들이

악수를 나누고 대화하는 모습이 감동적이었습니다.

 

여느 나라 정상들이 만나면 언어가 틀리니 중간에 ‘통역’이 꼭 필요합니다.

그런데 남과 북의 정상들은 통역없이 대화를 나눕니다.

자국어로 서로 대화하고 협상하니

답답함이나 중간에 에러가 발생할 확률도 낮겠습니다.

 

“진심(眞心)”만 전제된다면

말 그대로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나누고

놓치기 쉬운 뉘앙스까지 잡아내면서

우리 민족 앞에 큰 선물을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

정상회담을 지켜보는 우리들 마음은 여전히 조마조마합니다.

과거를 생각하면 또 속지 않을까 염려되고,

앞으로 가야 할 길 역시 험하기에

한반도에 전쟁이 그치고 평화가 임하길 진심으로 기도하게 됩니다.

 

어떻게 첫 술에 배부를 수 있을까요!

같은 말을 쓰는 민족끼리 서로 소통하면서

앞으로 나가면 결국에는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겠지요.

 

“one day at a time (하루하루)”이라는 영어표현대로

남과 북이 손을 잡고 평화를 도모하는

오늘 하루를 즐겨도 좋겠습니다.

 

이사야를 통한 주님의 약속이

조국 대한민국에 임하길 간절히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이뤄가실 한반도의 역사를 소망 가운데 바라봅니다.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이사야 2:4)

They shall beat their swords into plowshares, and their spears into pruning hooks;

nation shall not lift up sword against nation, neither shall they learn war anymore.(Isa 2:4)

 

하나님 아버지,

우리 조국 대한민국에서

날마다 기쁜 소식이 들려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4.26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