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업 kingship

지난해 11월 처음으로 미국 대통령 선거에 투표했습니다. 미국에 산 지 20년이 가까워져 오지만 지난번처럼 미국 정치에 관심을 두고 결과를 지켜보기도 처음이었습니다. 트럼프가 대통령 선거에 나섰을 때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가 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냥 웃어넘길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의 예상을 뒤엎고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대통령이 되고 반년이 다가오지만, 좌충우돌은 물론 탄핵까지 언급되는 등 가닥을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 했는데 지도자의 모습 속에서 귀감과 품격을 찾기 힘드니 안타깝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지난 몇 개월처럼 조국 대한민국의 정치에 관심을 갖고 신문을 꼼꼼히 읽고 뉴스를 챙겨본 적도 없습니다.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라고 치켜세울 때가 엊그제 같은데 국정 농간으로 중간에 대통령직을 내려놓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국론이 갈리고 선거기간에도 막말이 오가는 등 한국 정치에서도 품격을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되어서 깜깜한 밤하늘을 비추는 달처럼 허니문 기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약속한 대로 통합과 협치를 이루려는 행보에 80퍼센트가 넘는 국민이 박수를 보냅니다. 누구나 새로운 지도자로 선출되면 높은 지지를 받고 시작합니다. 권력이 집중된 대통령직이야말로 직임을 마치고 내려가는 아름다운 뒷모습이 정말로 중요한 것 같습니다.

 

구약 성경에 왕의 직무에 대한 지침이 나옵니다. 원래 이스라엘에는 왕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위대한 지도자 모세와 여호수아가 죽고 약속의 땅에서 살아갈 때는 사사(士師)들이 백성을 재판하고 국가를 다스렸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이웃 나라처럼 왕을 세우고 싶은 충동이 일었습니다. 왕을 세우면 나라가 더욱 강해지고 모든 일이 잘될 것 같았습니다. 결국, 백성들이 왕을 요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왕이 세워지는 것을 염려하셨습니다. 왕이 세워지면 그들이 백성을 위해서 일하기보다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고 백성들을 더욱 힘들게 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래도 백성들은 왕을 세우면 자신들을 잘 다스리고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자신들의 왕이신 하나님 대신에 여느 민족처럼 눈에 보이는 지도자를 원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구약성경 신명기 (17:14-20)에서 왕의 직무를 구체적으로 알려 주셨습니다. 그만큼 왕업(kingship)을 염려하신 것입니다. 무엇보다,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를 왕으로 세워야 합니다. 타국인은 왕이 될 수 없었는데, 이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신과 그들이 섬기는 점쟁이를 따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병마를 두지 말라고 했습니다. 백성들을 희생시키는 과도한 군비경쟁이나 전쟁을 피하라는 명령입니다. 셋째로, 아내를 많이 두지 말고,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쌓아두지 말라고 했습니다. 아내를 많이 두면 쾌락에 빠지고 도덕성을 상실합니다. 권력을 이용해서 재산을 축적해도 안 됩니다. 왕이야말로 청렴해야 합니다. 왕의 자리는 사리사욕을 챙기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넷째로, 율법서를 옆에 두고, 평생 배우고 그대로 지켜 행하라고 했습니다. 왕이라고 해서 법과 규칙을 무시한 채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면 안 됩니다. 왕에게도 하나님 말씀을 비롯한 일정 수준의 지식이 필요합니다. 평생 동안 겸손히 배워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왕의 자리에 오른 후에 교만해져서 백성들을 업신여기지 말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하나님 말씀을 따라서 통치한 왕들은 다윗과 요시야를 비롯해서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그만큼 왕업을 끝까지 수행하기가 힘든 것 같습니다.

 

시대가 바뀌었지만, 신명기 말씀의 원리를 오늘날 국가 지도자인 대통령직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공의와 정의가 아닌 다른 것을 우상처럼 섬기면 안 됩니다. 자기 관리에 엄격하고,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펼쳐야 합니다. 조국 대한민국과 우리가 사는 미국의 대통령이 자신에게 위임된 왕업을 충실히 수행하고, 힘없는 백성들에게 위로와 힘이 되길 기도합니다. (2017년 5월 24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리턴없는 인생

몇 달 전, 동네 창고형 매장에서 아내가 사놓은 물건이 있었습니다. 친지에게 선물하려고 구입했는데 그만 시간을 놓쳐서 선물도 못하고 우리가 쓰기에는 양이 너무 많은 데다 물건을 살 때 받았던 영수증도 잃어버렸습니다. 빠듯한 살림에 아내의 시름이 깊어 갑니다. 곁에서 지켜보던 제가 용기를 내서 리턴을 시도하기로 했습니다. 구매한 시간도 3개월 가까이 지났고 영수증까지 없으니 거절당할 것 같았지만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물건을 가지고 매장을 찾았습니다.

 

입구에서 반납할 물건임을 확인한 후, 담당 직원 앞에 줄을 섰습니다. 그 날은 웬일인지 기다리는 사람도 별로 없어서 금방 우리 차례가 닥쳤습니다. 차라리 줄이나 길었으면 직원들이 무심코 처리할 법도 한데 줄까지 짧으니 마음이 더욱 졸여왔습니다. 세 명의 직원 가운데 매니저처럼 보이는 분이 걸렸습니다. 예상대로 쉽지 않아 보입니다.

 

이분은 저희가 산 물건을 꼼꼼하게 확인했습니다. 물론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새것 그대로입니다. 영수증은 있냐고 묻습니다. 없다고 했더니 권총처럼 생긴 레이저건으로 물건을 스캔합니다. 구입한 날짜를 확인하는 것 같았습니다. 짧은 시간인데 저와 아내에게는 꽤 길게 느꼈습니다. 그러더니 아무 말 없이 초록색 영수증을 주면서 제 카드로 입금되었답니다. 싱거울 정도로 리턴이 쉬웠습니다. 누구보다 아내가 기뻐합니다. 진작 가져올 걸 괜스레 집에 두고 속앓이를 한 셈입니다.

 

누군가 말했듯이 미국은 리턴의 나라인 것 같습니다. 옷가지를 구입했다가 한두 번 입고 리턴한다는 거짓말 같은 얘기도 들었습니다. 몇 개월을 잘 쓰던 전자기기를 리턴하고 신제품으로 바꿔오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리턴이 이처럼 쉽게 이뤄지다 보니 물건을 구입하면서 “맘에 들지 않으면 리턴하지”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좋지만, 물건을 만들고 대형 매장에 출품한 업체 입장에서는 죽을 맛이겠습니다.

 

너무 손쉽게 물건을 리턴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우리 인생도 리턴이 가능하면 어떤 일이 생길까”라고 아내가 묻습니다. 갑자기 무슨 말인가 싶고 가슴이 철썩 내려앉았습니다. 50대 중반이 되면 남편이 약자가 되고 아내가 올라서기 시작한다는데 제가 너무 눈치없이 군림했나 싶었습니다. 순간적으로 몸을 낮추면서 자동차 브레이크를 밟았습니다. 아내는 말 그대로 인생 자체를 생각하며 질문한 것인데 제가 괜히 넘겨짚고 긴장한 것입니다.

 

인생길에 리턴은 없습니다. 리턴은 고사하고 잠시도 멈춰 세울 수 없습니다. 브레이크를 잡아도 소용없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가장 무서운 것이 한 시도 쉬지 않고 째깍째깍 소리 내며 가고 있는 벽에 걸린 시계의 분침과 초침이랍니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과 후회가 생기지만, 그때 그 순간으로 되돌아가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한 번뿐인 인생을 살다가 하나님께 갈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인생에 리턴이 없기에 하루하루가 소중합니다. 현재를 가리키는 영어 표현에 선물(present)이라는 뜻이 있듯이 우리에게는 24시간이라는 선물이 매일같이 주어집니다. 이 세상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입니다.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브랜뉴, 새날을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십니다. 하얀 백지와 같아서 마음껏 상상력을 발휘하고 힘을 다해서 채워 넣을 수 있는 가능성입니다. 누구도 대신 살아 줄 수 없는 우리만의 고유한 날입니다. 그러니 하루하루가 소중합니다. 지우개로 지울 수도 없고 리턴도 불가능한 한 번뿐인 인생입니다.

 

돌아보니, 하루하루가 저절로 생기는 것처럼 살았습니다. 매일같이 해가 뜨니 오늘과 내일이 같은 날이라고 무심코 생각해 버렸습니다. 리턴이 편리한 나라에 살다 보니 인생도 리턴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한 번뿐인 인생을 참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삶으로 하나님께 올려 드리고 싶습니다. 리턴할 수 없어서 아쉬운 것이 아니라, 리턴할 수 없기에 더욱 귀한 인생길을 걷고 싶습니다. 한 걸음 더 나가면, 내 인생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남의 인생도 한 번뿐임을 알고 이웃을 존중하고 배려하면서 리턴 없는 인생길을 사랑으로 걷기 원합니다. (2017년 4월 27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봄이 오는 소리

올겨울은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렸습니다. 사람 마음이 간사해서 비를 간절히 기다리던 때를 잊어버린 채, 하루가 멀다 않고 내리는 비에 약간 짜증을 내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캘리포니아의 가뭄이 거의 해갈되었다니 감사할 일입니다.

 

매일같이 흐리고 비가 올 것만 같더니 지난 주간에는 화창한 날씨가 이어졌습니다. 기온도 꽤 많이 올라가서 한낮에는 반소매를 입고 다니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습니다. 길가 가로수들의 가지마다 아기 손처럼 연한 잎들이 너도나도 앞다투어 세상 밖으로 피어났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연두색 새잎들이 돋아나는 것을 보면서 봄이 오는 소리를 듣습니다. 계절을 좇아 어김없이 싹을 내고 한 해를 준비하는 자연 만물 속에서 신실하신 하나님도 만납니다.

 

봄은 시작의 계절입니다. 농부들은 봄철에 씨를 뿌리면서 한 해 농사를 시작합니다. 세상 만물들도 싹을 틔우면서 한해살이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봄은 새색시처럼 살며시 왔다가 수줍은 듯 뒷문으로 금세 빠져나갑니다. 이처럼 순식간에 지나칠 봄을 느끼려면 우리의 감각을 모두 동원해야 합니다. 봄이 오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 귀를 쫑긋 세우고 눈을 크게 떠야 합니다. 붙들어 매 놓을 수 없기에 순간순간 봄기운을 만끽해야 합니다.

 

구약성경에서도 봄은 시작의 계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400년 동안 종살이하다가 모세의 인도로 해방된 때가 봄이었습니다. 고집스러운 이집트의 바로 왕은 하나님께서 아홉 가지 재앙을 차례로 내리시는 데도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양질의 노동력을 제공하던 히브리 민족을 쉽게 내보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비극적인 열 번째 재앙까지 이르게 됩니다. 하룻밤에 이집트의 장자는 물론 짐승의 첫 번째 새끼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이집트에 대재앙이 내리던 밤, 이스라엘 사람들은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에 발랐습니다. 이집트를 휩쓸고 간 죽음의 사자는 어린양의 피가 묻혀진 이스라엘 백성의 집들을 건너뛰었습니다. 유월절(逾越節,pass-over)의 시작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밤에 재산과 생필품을 모두 챙겨서 이집트를 빠져나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훗날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에게 이집트에서 해방된 날을 그 해의 첫 달로 정할 것을 부탁하셨습니다. 시작점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유월절이 있는 첫 달을 “아빕월”이라고 부릅니다. 곡식이 싹을 틔운다는 뜻입니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0년 이집트의 압제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알리는 달입니다. 죽음의 기운이 감돌고 압제와 학대가 판을 쳤던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 왔음을 알리는 절기입니다.

 

신약성경의 봄 역시 유월절의 어린양으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더불어 찾아옵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문설주에 발라놓은 어린 양의 피를 죽음의 사자가 건너뛰었듯이, 십자가위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새로운 생명을 얻습니다. 400년 동안 이집트에 종살이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유의 몸이 되었듯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서 죄로부터 해방되는 자유함을 누립니다. 겨우내 땅속에 묻혀 있던 씨가 새싹을 틔우듯이 이전 것이 지나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 태어납니다. 우리는 이처럼 계절의 봄 뿐만 아니라 신앙의 봄도 매년 맞이합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 부활절을 준비하는 사순절 한가운데 서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세력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를 믿는 자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셨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 주셨습니다. 봄이 오는 소리를 들으면서 우리 안에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힘있게 임하길 기도합니다. 어두웠던 과거를 청산하고, 죽음의 세력을 몰아내고, 죄에 사로잡혀 있던 옛 것들로부터 해방될 새날과 새 시대를 기대합니다.

 

새봄에는 거짓과 폭력과 죽음의 세력이 물러가고 진리와 생명과 평화의 복음이 온 세상에 임하길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봄을 마음껏 느끼고 싶습니다. 귀를 기울여 봄이 오는 소리를 듣고 그 소리에 맞춰서 신실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습니다. 사순절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실 부활의 주님을 향해서 힘차게 달려가고 싶습니다.(2017년 3월 23일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히브리어 “타밈”

미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가짜 뉴스”라는 용어가 회자되고 있습니다. 뉴스는 동서남북 사방에서 일어난 최신 소식을 가감 없이 사실대로 전하는 것인데 그 앞에 가짜가 붙었습니다. 영어 표현을 빌리면 옥시모론(oxymoron, 모순 어법)으로 들립니다. 공개된 비밀(open secret)이란 말이 성립될 수 없듯이 엄밀히 보면 “가짜 뉴스”는 모순 어법입니다. 뉴스에 가짜가 붙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이 꽤 어지럽습니다. 가짜 뉴스 때문인지 사람들의 마음이 갈리고 있습니다. 한마음과 한 뜻으로 선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도 쉽지 않은데 마음이 둘로 셋으로 갈려 있으니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윗사람부터 자기 마음대로 진실을 왜곡하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목적을 이루면 된다는 식입니다. 일단 권력만 잡으면 어떤 것도 숨길 수 있고 자기식대로 처리할 수 있다는 그릇된 심리가 가득 차 있습니다. 거기에 가짜 뉴스까지 합세하니 서로를 향한 불신이 더해집니다.

 

구약 성경 잠언 19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가난하여도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입술이 패역하고 미련한 자보다 나으니라.” 입술이 패역하고 미련한 것을 요즘 세상에 적용하면, 가짜 뉴스를 생산해 내고 거짓을 일삼는 행위를 가리킬 것입니다. 가난해도 성실한 것은 세상의 관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대로 진실되게 살려는 노력일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올바른 모습입니다.

 

“가난하여도 성실하게 행하는 자”에서 “성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톰”입니다. 동사로 쓰이면 “타맘”이라고 발음하고 형용사는 “타밈”이라고 읽습니다. 잠언에서 성실로 번역된 “타밈”의 의미는 무엇보다 완전한 것입니다. 시작한 일을 말끔하게 끝맺는 것이 타밈입니다. 부족함이 없습니다. 중간에 포기하거나 대충 얼버무리지 않습니다. 맡겨진 일을 끝내느라 모든 힘을 쏟아서 소진될 정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정도의 완벽함이 타밈입니다.

 

히브리어 타밈은 잠언 말씀대로 성실을 뜻합니다. 몸과 마음이 균형을 이루는 건강함도 타밈입니다. 불의한 생각이나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입술로 남을 저주하거나 몹쓸 말을 쏟아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물론 사람 앞에서 신실합니다. 우직하게 의로운 길을 걸어갈 뿐입니다. 무엇보다 세상에서 믿을만하다는 칭찬을 듣습니다. 마음과 행동이 똑같이 성실하기 때문입니다.

 

타밈은 진실을 뜻합니다. 앞뒤가 같습니다. 겉과 속이 같습니다.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해서 책임을 집니다. 억지로 핑계를 대거나, 거짓으로 자신의 잘못을 가릴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거짓을 일삼고 다른 이들까지 속이려 하지만, 타밈 속에는 거짓이 자리 잡을 수 없습니다. 가짜라는 말은 얼씬도 할 수 없습니다. 구약 성경 곳곳에서 정직과 성실이 짝을 이뤄서 나타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가짜 뉴스가 퍼지는 것은 세상에 타밈이 실종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어떻게 뉴스 앞에 가짜가 붙을 수 있을지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습니다. 인터넷과 스마트 폰으로 서로 연결된 요즘 세상에서 누군가 가짜 뉴스를 생산해서 퍼뜨린다면, 우리는 매번 뉴스의 사실 여부를 점검해야 합니다. 이 얼마나 번거롭고 시간 낭비입니까? 행여나 정보에 어두운 분들은 가짜 뉴스를 사실로 믿고 그것을 추종할 수도 있습니다. 속임수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사회적인 약속이자 중요한 가치인 신뢰를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진실이 가짜 뉴스에 가리게 될 가능성도 큽니다. 세상이 얼마나 어지럽게 변하겠습니까? 타밈을 가로막는 가짜와 거짓은 하루속히 근절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거짓과 폭력을 일삼는 입술과 행동이 물러가고 <타밈>이 온전히 세워지길 원합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세상이 되어도 타밈이 실종되면 순식간에 지옥으로 변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난할 지 언정 진실된 세상을 만들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진실(타밈)된 것이 최고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삶에도 타밈이 임하길 원합니다. 처음과 끝이 같고,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조화를 이루고, 거짓 없이 진실한 타밈의 인격을 갖추는 것입니다. 가짜 뉴스와 같은 모순 어법이 사라지고 진실만이 인정받는 세상이 오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2017년 2월 23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마음에서 마음으로

조국 대한민국이나 우리가 사는 미국이나 불확실성 속에서 새해를 맞고 있습니다. 게다가 사람들의 마음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습니다. 자칫 부딪칠까 염려될 정도입니다. 특별한 계기가 생겨서 한마음이 되면 좋겠지만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니, 모든 사람이 한 가지 생각을 갖기를 기대한다면 시대를 잘못 읽은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적인 기준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상대적으로 변한 다원화 시대에 살기 때문입니다. 마음과 생각이 하나가 되기보다 공동의 선을 위해서 서로 협력할 수 있다면 그나마 감사할 일입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마음과 마음으로 소통하면 좋겠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서로 마음을 닫고 산다면 그것만 한 비극이 없습니다. 가정 안에서도 서로 마음을 열지 않고 사는 경우를 봅니다. 공동체 안에서도 마음에 벽을 쌓곤 합니다. 세상 속에서 자신만을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곁에서 지켜봐도 아슬아슬하고 저절로 기도가 나옵니다. 가치관이 다르고 추구하는 목적이 달라도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면서 마음으로 소통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새해에는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일들이 세상과 가까운 이웃 사이에 많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새해를 맞아서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교회 식구들의 기도 제목을 받았습니다. 빼곡하게 기도 제목을 꼼꼼히 적으신 분부터 적당히 큰 글씨로 서너 개 적은 기도 제목까지 다양합니다. 기도 제목을 강대상 성경책 맨 앞에 끼어 놓고 매일같이 한 장씩 넘기면서 기도합니다. 다급한 기도 제목부터 인생이 걸린 매우 중요한 기도 제목까지 어느 한 가지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기도 제목은 다양하지만,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하나로 모아집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주관해 주시길 기도하는 것입니다.

 

몸이 편찮으신 어르신들의 경우, 점점 약해지는 육신을 하나님 손에 맡기는 믿음과 평안이 마음속에 자리 잡기를 기도합니다. 마음이 무너지면 몸도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어르신들을 돌보는 가족들의 마음도 넉넉하고 따뜻해지길 기도합니다. 취업을 기다리는 젊은이들의 마음도 하나님께서 굳게 잡아 주셔야 합니다. 요즘처럼 취업이 힘들고 앞길이 어두울 때, 좋으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견뎌내기 힘들 것입니다.

 

공부하는 학생들도 교수님과 마음으로 교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직장에 다니는 분들도 직장 상사와 동료들과 마음이 통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서로 마음이 통해야 합니다. 처음 교회에 오신 분들도 마음을 교회에 두면 우리 식구가 되지만, 마음이 떠나면 아무리 정성을 다해도 공동체 식구가 되기 어렵습니다. 가족 안에서는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마음을 합쳐서 힘을 모으고 서로 사랑하면 아무리 어려운 일도 해낼 수 있습니다. 잠언 말씀대로 진수성찬을 앞에 놓고 다투는 것 보다 마른 떡 한 조각 밖에 없어도 화목한 것이 최고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사람들과 마음이 통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마음으로 소통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다윗을 두고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마음이 합한 다윗에게 나단 선지자가 다음과 같이 말해줍니다: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하시니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행하소서.” 다윗이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고 그의 하는 일을 책임져 주실 테니 마음에 있는 일을 그대로 행하라는 충고입니다. 하나님과 마음이 통한 사람이 누리는 최고의 행복입니다. 백지 수표와 같은 말입니다. 이 말을 들은 다윗이 얼마나 행복하고 기뻤을까요!

 

어느덧 새해의 첫 달이 지나고 있습니다. 올해는 마음과 마음이 소통하는 일들이 가정과 교회 그리고 가까운 이웃부터 온 세상까지 퍼져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과 마음이 합한 자가 되어서 하나님 눈길 닿는 곳을 우리도 바라보고, 하나님 마음이 가는 곳에 우리 마음도 가고, 하나님 손길 닿는 곳에 우리 손이 닿아서 하나님의 마음을 세상에 전달하는 주의 백성이 되길 원합니다.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고, 우리 앞에 안개처럼 드리운 불확실성을 거둬낼 수 있는 하늘의 지혜와 용기를 하나님께 구합니다. (2017년 1월 26일 한국일보 종교칼럼)

알레포의 왕관

“저는 지금 집이 없어요. 부상은 크지 않지만 어제부터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너무 배가 고파요. 살고 싶습니다. 죽고 싶지 않아요.” 5년째 내전이 계속되면서 폐허가 된 시리아 알레포에 사는 한 소녀가 지난달 말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서 세상에 전한 애절한 메시지입니다.

 

2011년에 시작된 “아랍의 봄” 물결은 50년 이상 지속된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려는 시리아 국민의 저항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민주화를 열망하던 국민적 저항이 내전으로 발전하고, 러시아와 아이시스(ISIS)까지 개입하면서 시리아는 완전히 폐허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수백만 명의 국민이 고향을 떠나서 피난민으로 전락했고 그 중에 2천 명 이상은 국경을 넘고 지중해를 건너다 목숨을 잃었습니다.

 

지난 8월에는 다섯 살 소년이 친구들과 밖에서 놀다가 폭격을 맞고 먼지를 뒤집어쓴 채 무표정으로 앰브란스에 앉아 있는 사진이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었습니다. 가족과 함께 지중해를 건너다 배가 뒤집혀서 터키 해안가에서 발견된 빨강 셔츠를 입은 세 살배기 아기의 시신을 보고 온 세상이 함께 울었습니다. 이 모든 비극의 참상이 시리아에서 일어났고, 반군이 주둔하고 있던 알레포라는 도시가 가장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알레포의 시민 운동가들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은 음식이나 옷 심지어 기도도 아니고, 국제 사회가 공조해서 러시아와 정부군의 폭격을 멈추게 하는 것이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폭격에 대한 상처로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볼 수 없을 정도라니 전쟁의 참상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알레포라는 도시는 우리가 현재 갖고있는 구약성경과 관련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었습니다. 구약성경의 원본은 없고 현재 가장 오래된 사본은 맛소라로 지칭되는 학자들이 필사한 것입니다. 900년경 유대인 랍비들이 양피지 위에 쓸개로 만든 잉크를 갖고 한 자 한 자 정성껏 필사했습니다. 그때까지 모음 없이 자음만으로 문맥에 따라서 성경을 읽었는데, 맛소라 학자들이 정확한 발음을 위해서 모음을 첨가했고 액센트는 물론 노래로 말씀을 음미할 수 있도록 악상 표시까지 기입했습니다. 여백에는 주석도 기록했습니다. 이들의 노력 덕분에 우리가 구약성경 히브리어를 바르게 읽을 수 있고 원본에 가깝게 해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본이 십자군 전쟁을 겪으면서 소실되었지만, 그 가운데 한 권의 필사본이 이집트를 거쳐서 600년 가까이 시리아 알레포에 살던 유대인 공동체에 의해서 보존되었습니다. “알레포 코덱스”라 불리는 히브리어 필사본으로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구약성경 사본입니다. 2015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알레포가 특별할 수밖에 없습니다. 1947년 이스라엘의 건국이 발표되면서 알레포에서 폭동이 일어났고, 알레포 코덱스는 우여곡절 끝에 모세 오경을 비롯한 많은 분량이 소실 된 채 현재는 이스라엘 국립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구약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읽는 우리는 600년 동안 필사본을 보관해준 알레포라는 도시에 커다란 빚을 지고 있는 셈입니다.

 

알레포가 하나님 말씀인 구약성경을 600년 동안 품고 있었듯이, 이제 하나님께서 알레포를 품어 주시고 그곳에 평화가 임했으면 좋겠습니다. 알레포 왕관으로 불리는 알레포 코덱스처럼 전쟁으로 찌들고 절망 속에 살고 있는 알레포 아이들 머리 위에 왕관이 씌어 지는 날이 속히 오기를 기도합니다. 왕관까지는 아니어도 밖에서 마음껏 뛰놀고, 학교에서 배우고, 오손도손 가족과 함께 지내고, 폭격의 공포 없이 해맑은 눈으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늘을 바라만 볼 수 있어도 그들에게는 최고의 축복일 것입니다.

 

칼럼을 준비하면서 시리아 어린이들을 도울 방법을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그들을 후원하는 단체가 있었습니다. 연말이 가기 전에 조그만 정성이라도 보내야겠습니다. 새해 정유년(丁酉年)에는 어두운 밤이 지나고 새벽이 왔음을 알리는 수탉의 울음소리가 알레포를 비롯한 전 세계에 평화의 메시지로 울려 퍼지길 간절히 바랍니다. (2016년 12월 29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유토피아

영국의 저술가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소설 속의 유토피아는 유토푸스라는 사람이 만든 육지에서 조금 떨어진 섬입니다. 가족 단위로 생활하는 주민들은 한 군데 오래 머물면 타성에 젖고 부패하기 쉽기 때문에 10년마다 이사해야 합니다. 유토피아의 주민들은 하루에 여섯 시간 일하는데, 게으름 피우는 사람없이 모든 주민이 똑같이 일하니 노동생산성이 매우 높습니다. 화폐가 없어서 재산 축적이 불가능합니다. 주민들은 시장에 가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만큼 갖다가 먹고 쓰면 됩니다. 금이나 은같은 귀금속은 노예들을 결박하는 쇠사슬로 사용됩니다. 주민 투표로 선출된 지도자가 독재를 일삼거나 부패하면 곧바로 퇴각시킵니다.

 

16세기 르네상스 시대를 살았던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모든 사람이 꿈꾸는 이상향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유토피아>라는 제목은 “없다”라는 헬라어 <우>에 장소를 가리키는 <토포스>가 결합한 말로서 “지상에 없는 장소(no-place)”를 가리킵니다. 유토피아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탐욕과 교만, 권력에 취한 세상이 유토피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을()로 사는 우리네 범인들은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살아가는 유토피아를 꿈꾸지만, 재물과 권력을 손에 쥐고 수퍼 갑(甲)으로 사는 이들은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사는 유토피아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을 것입니다.

 

토머스 모어의 친구였던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는 <우신예찬>이라는 풍자소설을 썼습니다. “모리아”라는 여신을 통해서 당시에 부패했던 종교계와 가진 자들의 위세를 비판합니다. 두 눈 가진 사람이 외눈박이 동네를 방문하면 바보 취급받는 것이 우리네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동굴 안에서 그림자만 보고 사물을 인식하는 사람들에게 동굴 밖의 세상을 알려주면 도리어 그를 어리석다고 놀립니다. 우신예찬의 주인공 모리아가 세상을 올바로 보고 있지만 바보 취급받듯이 말입니다.

 

지금으로부터 396년 전, 유토피아를 꿈꾸며 유럽을 떠나서 신대륙에 도착한 102명의 청교도가 있었습니다. 영국 국교회에 저항하며 바보처럼 살았던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66일 동안 메이플라워를 타고 우여곡절끝에 대서양을 건넜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유토피아를 꿈꾸며 목숨 걸고 대서양을 건넜지만, 신대륙의 혹독한 추위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해 겨울을 나면서 절반이 죽고 50여 명만 살아남습니다.

 

이들이 찾은 신대륙도 유토피아는 아니었습니다. 망연자실하고 있을 때, 아메리칸 인디언 원주민들이 씨를 뿌리고, 바다에 나가서 고기를 잡고, 가축을 키우는 법 등을 가르쳐줍니다. 어리석고 야만인처럼 여겼던 원주민들이 청교도들에게 살길을 열어준 것입니다. 그해 가을, 청교도들이 원주민들을 초대해서 감사의 예배와 축제를 벌였는데 그 순간은 유토피아였을 것입니다. 첫 번째 추수감사절의 아름답고 정겨운 모습입니다.

 

세상에 유토피아는 없을 것 같습니다. 토머스 모어가 그린 유토피아 역시 완벽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는 “디스토피아(나쁜 곳)”로 불릴 정도로 추하고 슬픈 일들이 매일같이 일어납니다. 편견도 심해서, 두 눈을 통해서 세상을 보는 사람을 바보 취급하고 진실을 왜곡합니다. 정치 지도자들은 선거 때마다 유토피아를 약속하지만, 권력을 손에 쥐면 자기 배를 채우고 갑질하기에 바쁩니다. 하나님께서 선하고 아름답게 만드신 세상이 망가지는 것을 보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유토피아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의와 희락과 화평의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임하길 기도합니다. 대서양을 건넌 청교도들처럼 밀려오는 파도를 넘어서 유토피아를 향해서 나갑니다. 힘없이 살아가는 사람들끼리 연대하고 서로 격려합니다. 어리석다고 손가락질당해도 진실되고 바른길을 걸어갑니다. 더불어 사랑을 나누고, 깜깜한 세상에 빛을 밝힙니다. 정의가 물같이, 하나님의 공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라는 아모스 선지자의 말씀도 기억합니다. 세상 속에 개입하실 하나님의 손길을 기대하면서, 유토피아를 마음 속에 꼭꼭 숨겨둔 채 눈물로 씨를 뿌립니다. 가까이는 추수감사절에 함께 모이는 가족, 교회 식구들 그리고 이웃들과 더불어 하나님 나라 유토피아를 경험하길 간절히 원합니다. (2016년 11월 24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살아남기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2001년 <타임>지가 선정했던 미국 최고의 신학자입니다. 그는 1940년 텍사스의 시골 마을에서 벽돌공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벽돌 쌓는 일을 배웠습니다. 그런 일은 백인보다 흑인들이 주로 하던 작업이었는데 스탠리의 아버지는 아들이 밑바닥부터 건축 일을 익히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훗날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자신의 신학과 삶을 벽돌 쌓기에 비유해서 이야기체로 풀어냅니다.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목회자가 되려면 대학에 가야 한다는 부모님과 주변의 권유로 텍사스에 있는 조그만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그곳에서 자신이 알지 못하던 학문의 세계를 경험하고, 좋은 친구들을 만납니다. 4학년 때는 사교모임에 갔다가 “앤”이라는 여학생을 만나서 일 년 만에 결혼에 이릅니다. 그러나 앤과의 결혼이 자신의 인생에 커다란 짐이 될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스탠리의 아내 앤은 평범한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녀에게는 심각한 정신질환이 있었습니다. 연애 시절부터 은근한 남성 편력이 있었고 때때로 자기 통제가 되지 않아서 화를 내곤 했지만, 스탠리는 아내의 성격과 행동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서 두 사람 사이에는 “아담”이라는 아들도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아내 앤의 성격이 포학해집니다. 조울증이 심해져서 감정 조절이 되지 않고, 때때로 발작까지 했습니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스탠리 가정 안에서는 전쟁입니다. 어떤 일이 생길 때마다 아내 앤은 그 책임을 남편인 스탠리에게 돌리면서 남편을 집중적으로 심하게 괴롭혔습니다. 하루도 견디기 힘든 나날이었지만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24년 동안 아내와 아들을 돌봤습니다. 대단한 내공이요 신앙입니다. 결국 아내 앤은 새로운 남자를 찾아서 집을 떠나고, 얼마 후에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자서전 <한나의 아이>에서 자신의 신학 여정과 가정사를 숨김없이 솔직하게 이야기합니다. 어머니가 구약 성경의 한나처럼 기도해서 스탠리를 얻었기에 자신을 “한나의 아이”라고 불렀습니다. 그의 자서전 <한나의 아이>의 부제는 “어떤 신학자의 회고록”입니다. 텍사스 시골에서 벽돌공의 아들로 태어나서, 예일대학에서 기독교 윤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듀크 대학에서 가르치게 된 학문의 여정을 벽돌 쌓기 하듯이 꼼꼼하고 정확하게 짚어갑니다. 그런데 그가 겹겹이 쌓아가는 인생의 벽돌마다 조울증을 앓았던 아내와 지낸 질곡의 삶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자신이 겪은 어려움을 놓고 답을 찾지 못했다고 솔직히 시인합니다. 아니 찾을 수 없었답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스스로 선택할 겨를도 없이 닥쳐온 우발적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종류가 다를 뿐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어려움이기에 답을 제시하거나 서로 판단하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대신에 그는 인생의 페달을 쉬지 않고 밟았습니다. 견디기 힘들었던 개인적 어려움 속에서도 위대한 신학자의 자리에 우뚝 서게 된 비결이었습니다.

 

“살아남기(survival)”는 그의 자서전에 있는 소제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심각한 정신 질환을 앓는 사람과 같이 살아야 하는 이들에게 내가 줄 수 있는 최선의 조언은 일단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이 살아남지 못한다면 누구도 살아남지 못한다.” 고통의 끝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바라보면서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희망의 끈을 붙들고 있게 된답니다.

 

스탠리 하우어워스 정도는 아니어도 우리도 인생길 여기저기서 많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갑자기 닥쳐오기도 하고, 서서히 찾아오는데 미처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왜 그런 어려움이 닥치는지 해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해답지 없이 주어진 인생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답이 없다고 체념하거나 질문만 쏟아내지 말고, 끝까지 견디고 결국 살아남는 것이 신앙의 힘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누군가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고 응원하고 있음을 믿으면서 말입니다. (2016년 10월 27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구약성경 룻기

올가을에는 청년들과 구약성경 룻기를 읽기로 했습니다. 룻기는 네 장밖에 되지 않는 짧은 말씀이지만, 책의 제목이 룻기라는 것부터 예사롭지 않습니다. 룻은 이스라엘과 껄끄러운 관계였던 이방 민족 모압 출신입니다. 남편을 잃고 시어머니를 따라서 베들레헴에 온 외국인 여성입니다. 룻의 출신과 신분을 고려하면 39권 구약성경의 제목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룻은 자신의 이름을 성경에 올렸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족보에도 룻이 등장합니다.

 

룻기의 배경은 이집트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광야생활을 마감하고 약속의 땅에 정착한 사사 시대입니다. 꿈에 그리던 약속의 땅에 들어왔건만, 이스라엘은 광야 시절보다 더 심하게 타락합니다. 룻기 바로 앞에 위치한 구약 성경 사사기의 마지막 다섯 장은 하나님을 떠난 백성들이 펼치는 막장 드라마입니다. 오늘날 성직자에 해당하는 레위인들이 이스라엘의 타락에 관여했다는 것 자체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전이 일어나서 한 지파의 남자가 모두 살해되는 비극까지 초래합니다. 우상숭배와 타락, 폭력과 살인, 거기에 극도의 개인주의가 판을 치던 사사 시대가 요즘 세대와 닮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처럼 룻기는 악하고 험한 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룻기는 가뭄을 피해서 모압 땅으로 이주한 베들레헴 출신의 한 가족에게 밀어닥친 비극으로 시작합니다. 병약한 두 아들을 데리고 살기 위해서 피난을 갔는데 가장이 죽습니다. 홀로 남은 아내 나오미가 두 아들을 모압 여인과 결혼시켜서 10년을 잘 지냈는데 그만 두 아들마저 죽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와 모압 출신 두 며느리, 즉 남편을 잃은 세 여인만 남았습니다.

 

결국, 시어머니 나오미는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두 며느리 가운데 룻만이 시어머니를 따라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옵니다. 나오미가 돌아온다는 소식에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금의환향은 커녕 남편과 두 아들을 모두 잃고, 며느리 룻과 단둘이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왔으니 인생무상입니다. 이름 뜻 그대로 쾌활한 여인이었을 나오미는 자신을 “마라” 즉 쓰디쓴 인생의 여인으로 불러달라고 부탁합니다. 이렇게 룻기의 1막은 비극으로 끝이 납니다.

 

그 다음부터는 분위기가 완전히 바뀝니다. 며느리 룻이 시어머니를 모시기 위해서 생활 전선에 뛰어듭니다. 보리를 수확하던 때였기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남겨놓은 보리 이삭을 주우러 나간 것입니다. 그때 룻이 우연히 간 곳이 베들레헴의 유력자 보아스의 밭입니다. 보아스는 매우 선한 인물입니다.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따뜻한 마음씨를 갖고 있습니다. 보아스는 자신의 밭에서 모압 여인 룻이 보리 이삭을 마음껏 줍도록 배려합니다.

 

양식을 충분히 마련해서 돌아온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자초지종을 말합니다. 나오미는 모압 며느리 룻을 베들레헴의 유력자 보아스에게 시집 보낼 생각을 합니다. 보아스가 추수를 끝내고 타작 마당에서 자고 있을 때, 그에게 슬쩍 들어가서 프러포즈를 하라는 것입니다. 룻은 시어머니의 말에 그대로 순종합니다. 룻기의 여인들이 꽤 적극적입니다. 보아스 역시 룻을 흔쾌히 받아줍니다. 보아스보다 룻을 책임질 가까운 친척이 있었는데 그 사람의 의견을 먼저 묻고 룻을 아내로 맞이합니다. 그리고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가 오벳, 즉 다윗의 할아버지입니다. 이처럼 룻기의 후반부는 타작 마당에서 펼쳐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입니다.

 

룻기 속에는 주인공들에게 어려움이 닥쳤을 때 하나님께 나가서 기도하거나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대목이 없습니다. 하나님도 이들에게 나타나셔서 직접 말씀하시지 않고 보이지 않는 손길로 뒷전에서 일하십니다. 모든 이들이 제 뜻대로 행하는 악하고 혼란스러운 시대에, 룻기의 주인공들은 하나님의 사랑 “헤세드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키는 히브리어)”를 생활 속에서 실천할 뿐입니다. 힘없고 가난한 이방 여인 룻을 책임지고 구해주는 보아스를 통해서 우리를 죽음에서 구하시고 책임져 주신 예수님의 모습도 발견합니다. 그런 점에서 룻기의 신앙은 철저히 “생활 영성”입니다. 신앙이 삶 속에 녹아있고, 삶이 곧 신앙입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요청되는 신앙의 모습을 룻기를 통해서 배웁니다. (2016년 9월 22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올림픽 미담 (美談)

브라질에서 열린 2016년 하계 올림픽이 16일간의 일정을 모두 마치고 지난 주일 막을 내렸습니다. 시작하기 전부터 브라질의 불안한 치안과 공중위생, 대통령 탄핵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구설수에 올랐던 올림픽이었는데 큰 사고 없이 막을 내려서 다행입니다.

 

4년 마다 열리는 올림픽은 지구촌의 축제입니다. 각 국가와 언론들이 금,은,동 메달을 집계하고 순위를 발표하지만, 실제 올림픽 조직위원회는 순위를 매기지 않습니다. 지구촌의 평화와 우정을 도모하는 친선 대회인 셈입니다. 물론 오늘날의 올림픽은 눈에 거슬릴 정도로 상업화된 것도 사실입니다.

 

여느 올림픽과 마찬가지로 이번 리우 올림픽에서도 마음을 울리는 감동적인 이야기, 미담(美談)이 쏟아졌습니다. 120년 올림픽 역사상 처음으로, 전쟁을 피해서 조국을 떠난 열 명의 선수가 난민팀을 구성해서 참가했습니다. 올림픽의 상징인 오륜기를 가슴에 달고 입장하는 난민팀 선수들에게 전 세계는 박수를 보냈습니다. 어떤 선수들은 20대 젊은 나이에 암에 걸렸지만, 자신들에게 찾아온 역경을 이기고 올림픽에 참가하기도 했습니다. 올림픽에 참가할 경비가 없어서 노상에서 모금하며 간신히 참가했는데 동메달을 목에 거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남한과 북한의 선수가 함께 찍은 사진이SNS를 통해서 전 세계로 퍼져 나갔습니다. 대한민국의 한 펜싱 선수는 결승전에서 끝까지 투혼을 발휘하며 다 진 경기를 뒤집고 국민들에게 금메달을 선사했습니다. 100여 년 만에 올림픽 종목이 된 골프의 금메달 역시 대한민국이 가져왔습니다. 지난 보름 동안 브라질 리우에서는 이처럼 각본 없는 드라마가 매일같이 펼쳐지면서 전 세계를 올림픽에 빠져들게 했습니다.

 

그 중에 눈에 띄는 선수가 한 명 있었습니다. 여자 마라톤에 참가한 캄보디아 선수입니다. 올해 마흔네 살의 리 나리 선수는 우승을 차지한 케냐 선수보다 1시간 이상 늦은 3시간 20분을 달려서 맨 마지막에 결승점을 통과했습니다. 마흔네 살의 나이로 올림픽 마라톤에 출전했다는 것이 눈에 띄었는데, 이 선수의 인생 여정은 더욱 특별했습니다.

 

나리 선수는 어릴 적 크메르루즈 군에 의해서 수백만이 학살당한 “킬링필드”에서 살아남았습니다. 고아가 된 어린 소녀는 아홉 살에 국제 적십자사에 의해서 프랑스로 입양되었습니다. 스물여섯에 조국 캄보디아로 돌아온 나리 선수는 에이즈 연구소에서 일하면서 생물학 박사가 되었습니다. 10년 전 서른네 살의 나이로 에이즈 퇴치를 위한 자선 마라톤에 참가한 것이 계기가 되어서 불혹도 훨씬 넘은 나이에 국가 대표가 되었고 이번 올림픽에 참가하게 된 것입니다.

 

나리 선수는 157명이 참가한 이번 마라톤에서133등을 했습니다. 중간에 포기한 선수들을 제외하면 맨 마지막으로 결승점을 통과한 것입니다. 텔레비전을 보니 경찰들과 경기 진행 요원들이 나리 선수를 쫓아가면서 도로에 설치해 놓은 보호벽을 철거하고 교통통제를 해제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조국 캄보디아 국기를 들고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결승점을 통과했습니다. 그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던 관중들은 나리 선수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주었습니다.

 

왠지 우리 식 이름과 비슷해서 더욱 친근해 보이는 마흔네 살의 마라토너 “나리” 선수를 보면서 부모를 잃고 낯선 나라에 입양되어서 성인이 되기까지 그녀가 겪었을 외로움과 살아남은 끈기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나리 선수는 3시간 이상 마라톤 풀코스를 뛰는 동안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새기며 한 발 한 발 앞으로 내디뎠을 것입니다. 기록이나 입상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올림픽에서 조국의 이름을 가슴에 달고 뛰고 있다는 사실에 감격했을 것입니다.

 

나리 선수를 통해서 우리가 걷는 인생길도 생각해 봅니다. 나리 선수에게 독특한 과거와 그녀만의 이야기가 있듯이, 우리도 자신만의 사연을 가슴에 품고 주어진 인생길을 걷고 때로는 뜁니다. 속에 담고 있던 이야기들을 되뇌면서 결승점을 향해 달려가고 또 하나의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갑니다. 올림픽 경주가 아니니 우리가 뛰는 모습을 구경하는 관중도 없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기록에 신경 쓸 필요가 없으니 더욱 자유롭습니다.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주어진 인생길을 끝까지 달려가면 됩니다. 마지막 결승점에서 두 팔 벌려 우리를 맞아 주실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2016년 8월 25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