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아침입니다.
1.
이번 주부터 새롭게 시작된
6주간 새벽기도회에서
구약성경 욥기를 계속 읽고 있습니다.
욥과 세 친구들과의 논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신학적인 이론으로 철저하게 무장한 엘리바스는
욥이 고난받는 것은 그의 죄 때문이라고 단정합니다.
의인은 절대로 고난받을 수 없다는 자신의 신앙을 고집합니다.
이에 대한 욥의 대답을 오늘 아침에 읽었습니다.
욥기 6장입니다.
욥은 자신의 괴로움이 바닷가의 모래보다 훨씬 무겁다고 밝힙니다.
고통이 워낙 심하다보니 자신도 경솔할 때가 있었지만
그래도 친구라면 위로를 해주어야지
죄를 지적하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꾸짖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욥은 지금 위로와 격려가 필요합니다.
옆에서 함께 있어줄 동지가 필요하지,
이론적인 훈수나 가르침은 욥도 모두 알고 있고
그런 교훈을 들을 정도로 몸이 편하지 않습니다.
옳은 말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고,
너희의 책망은 무엇을 책망함이냐 (욥6:25)
How forceful are upright words!
But what does reproof from you reprove? (Job 6:25)
그렇습니다.
어려움을 겪는 이웃을 정죄하고
특히 신앙의 잣대로 판단하는 것은 상처에 초를 붓는 격입니다.
곁에 있어주고
조용히 기도해 주고
함께 울어주는 것이 성숙한 신앙입니다.
2.
재산과 자녀를 잃고
온 몸에 종기가 나서 기왓장으로 긁어야 할 상황인 욥이
6장 10절에서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그러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그칠 줄 모르는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였음이라 (욥 6:10)
But it is still my consolation, and I rejoice in unsparing pain,
that I have not denied the words of the Holy One. (Job 6:10)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오히려”라는 표현 앞에서 한 참을 멈췄습니다.
지금 욥은 위로를 받을 상황이 아닌데
고난이 그에게 “오히려” 위로가 되고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었다는 고백입니다.
물론 욥기가 진행되면서 욥도 사람인지라
감정의 기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속에서
“오히려”라는 말씀이 깊이 다가왔습니다.
신앙의 힘이 아니면 불가능한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앞에 여러가지 일들이 생깁니다.
특별히 힘든 상황이 펼쳐지거나
예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을 때,
“오히려”라는 말씀이 우리들 안에서도 작동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한번,
현재 여러분들 상황에
“오히려”를 대입해 보시고
그 속에서 위로와 기쁨이 임하는 경험을 하시길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하나님 아버지,
참빛 식구들께
“오히려”의 말씀이 임하고
그것으로 인해서 위로받고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6.2.25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