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 (4)

우리의 용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나와서 형제가 자신에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성미가 급한 베드로는 예수님의 대답을 기다리기 전에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되느냐고 스스로 답변했습니다. 베드로나 당시의 관습상 일곱 번도 꽤 많이 용서하는 것입니다. 세 번 정도 용서하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을 용서하라고 답변하셨습니다. 이것은 무한대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한 가지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일만 달란트의 빚을 졌습니다. 일만 달란트는 평생 벌어도 갚지 못할 엄청난 금액입니다. 상황을 파악한 주인은 종에게 갚을 능력이 없으니 몸과 아내와 자식과 모든 소유를 팔아서 가능한 만큼 변상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종이 엎드려서 모두 갚을 테니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사정합니다. 마음씨 좋은 주인이 딱하게 여겨서 큰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그 큰 빚을 탕감해 준 것입니다.

 

천문학적인 빚을 탕감받은 종이 밖에서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났습니다. 백 데나리온은 석 달 정도 일하면 갚을 수 있는 금액입니다. 그런데 주인에게 큰 빚을 탕감받는 종은 자신의 것에 비하면 아주 조금 빚을 진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고발해서 감옥에 가둡니다. 이것을 주인이 알게 됩니다. 주인은 일만 달란트를 탕감해 주었던 종을 불러들이고 빚을 다 갚도록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때 주인이 한 말은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33절)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속에 주인은 하나님을 가리킬 것입니다. 큰 빚을 탕감받는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죽을죄에서 살아난 그리스도인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빚을 대신 갚아 주시고 우리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이렇게 큰 은혜를 입었다면, 자신에게 손해를 입힌 이웃을 너그럽게 용서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이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야박하게 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말한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는 것은 우리에게 잘못한 이웃이 있다면 그를 하나님의 용서에 기초해서 받아주고, 그의 잘못을 없애 주라는 것입니다.

 

물론 용서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실제로 체험한다면 예수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거꾸로 말하면,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한다면, 예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용서를 인정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용서는 하나님의 용서에서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단지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무한대로 베풀어주신 용서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용서를 실천하기 원합니다. 받은 은혜를 이웃에게 그대로 적용하기 원합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