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가슴마다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성령의 계절이 임하게 하자.” 1974년에 열렸던 엑스폴로74의 캐치프레이즈입니다. 최대 백만이 넘는 인파가 여의도 광장에 모였습니다. 만 명이 철야기도를 했고, 정부는 집회 기간 동안 여의도 일대에 통행 금지를 해제하였습니다. 체신부에서는 기념 우표를 발행하는 등 기독교가 주관한 전도 부흥 집회가 온 국민의 관심과 국가의 지원 속에 말 그대로 성황리에 개최되었습니다.
그로부터 45년이 지나면서 세상이 많이 변했습니다. 기독교의 영향력이 급속히 약화되고 세속화로 불리는 세상의 가치관이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고 세상에서 서서히 잊혀가는 후기 기독교 시대가 되었습니다.
한국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미국은 이미 60년대부터 기독교가 여러 종교 가운데 하나로 취급되는 다원주의 사회에 돌입했습니다. 대학촌에서 목회할 때, 캠퍼스에서 종교활동하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행여나 캠퍼스에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 피켓을 들고 외친다면 누군가 고발해서 금세 경찰이 출동할 기세였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현주소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종종 기독교가 세상을 주도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서울의 한 대형 교회는 공공도로 밑에 성전을 건축했다가 최근 대법원으로부터 불법 판정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이니 하나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입니다. 교회가 공공의 영역을 침범했으니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교단 총회가 부자 세습을 인정해주기로 결의한 것을 일반 언론까지 앞다투어 보도하였습니다. 예전 같으면, 일반 언론이 종교 문제 다루는 것을 꺼렸을 것입니다. 교회나 종교를 일종의 성역으로 대우해 준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특집 보도까지 만들어서 교회의 잘못된 관행을 세상에 알리고 있습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가 변화한 세상에 올바로 대처하지 못한다면, 동화 속의 벌거벗은 임금님과 같은 모습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향해서 손가락질하고 뒤로 실소를 금하지 못할 것입니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기독교는 세상 속에서 신뢰를 잃을 것입니다. 세상을 올바로 읽지 못하는 시대착오적 발상에 욕심까지 더한다면 교회의 위상은 급격히 추락할 것입니다.
세상이 변했습니다. 세상을 탓할 것도 아니고 무작정 세상을 등질 것도 아닙니다. 현실을 직시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미로슬라브 볼프는 <광장에 선 기독교>라는 책에서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대하는 자세를 세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첫째는, 이의 없이 세상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세상이 제공하는 문명의 이기와 삶의 방식을 따라 삽니다. 스마트 폰을 사용하고, 자율 자동차가 나온다면 편하게 운전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신앙의 관점에서 세상의 것들을 변혁, 또는 용도 변경하는 것입니다. 주어진 문화 안에서 다르게 사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독교의 창조성이 요청됩니다. 변화하는 세상에 적합한 복음을 제시하는 것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마지막은 세상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최근 유행인 인공지능(AI)이나 드론이 폭력과 테러에 사용된다면 당연히 거부해야 합니다. 악에 저항하고 선을 추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단순하게 생각하고 단순하게 믿으면 교회 안에서야 편할 수 있지만, 우리의 신앙이 세상에서 외면당할 수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지혜가 요청됩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죄 많은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성육신을 깊이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의 인도와 능력도 구합니다. 개인의 신앙을 넘어서 우리의 신앙을 공적인 영역까지 확대하려는 노력도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부탁을 마음 깊이 새기기 원합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태 5장 16절). 민족의 가슴마다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성령의 계절이 임하게 하자고 외쳤던 45년 전의 구호가 현실이 되는 ‘새로운’ 부흥을 소망합니다. (2019년 10월 24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