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월드컵이 한창 열기를 더하고 있습니다. 각국을 대표하는 젊은 선수들이 조국을 위해서 땀을 흘리며 열심히 뛰는 모습을 보면 덩달아 숨이 차오르면서 월드컵 승부의 세계로 빨려 들어갑니다. 모든 운동경기가 그렇듯이 월드컵 축구 역시 이기느냐 지느냐의 갈림길에 섭니다. 물론 무승부도 있지만 조별 예선이 지나면서 승리한 팀만이 살아남는 정글의 법칙이 적용됩니다. 그러다 보니 모든 사람들의 이목은 누가 이기느냐에 집중되게 마련입니다.
4년 전 남아공 월드컵이 열릴 때 독일의 한 수족관에 사는 문어 한 마리가 인기를 끌었습니다. 월드컵 문어 폴(Paul)이라는 이름까지 갖게 된 이 문어는 독일 국가대표팀 경기를 비롯해서 월드컵 결승전까지 여덟 경기의 승부를 모두 맞췄습니다. 독일 국기에 익숙해진 문어의 행동이거나 수족관의 조작이라는 주장도 있었지만 신기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세계의 언론은 물론 도박사들까지 월드컵 문어 폴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2010년 문어 폴이 죽자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질 정도였습니다. 미래의 결과를 알고 싶은 사람들의 욕망이 문어 폴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것입니다.
지금 브라질에서 벌어지는 월드컵에서 중계를 맡은 한 해설위원이 경기결과를 연거푸 맞춰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분의 예언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예언이 맞아떨어지는지 관심을 가지면서 중계를 봅니다. “족집게 예언” “인간 문어”’라는 별명도 얻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자신이 문어처럼 경기 결과를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각국 대표팀의 경기 결과를 분석해서 최대한 예측(豫測)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도 언론이나 사람들은 과정보다 그분이 주장한 결과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으니 자칫 본인에게는 큰 부담이 될 수 있겠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미래는 안개와 같은 미지수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호기심과 불안을 마음 한 켠에 갖고 살아갑니다. 그러다 보니 미래를 알려주는 사람이 있거나 종교가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주르륵 그곳으로 몰려갑니다. 소위 역술인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한국에 40만에 이르고 4조원 정도의 매출을 올린다는 기사를 오래 전에 보고 깜짝 놀랐는데, 이런 수치만 보아도 미래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어느 정도이고, 현대인들이 불안지수가 얼마나 높은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에도 예언이 있습니다. 성경에 예언서라는 말씀이 있을 정도입니다. 성경의 예언자들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들입니다. 그들의 직업은 농부, 목동, 귀족, 몰락한 제사장 가문의 후손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예언자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에 넣어주신 말씀만 전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예언자를 한자로 예언자(預言者)라고 씁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마음 속에 넣어주신 말씀만을 전한다는 뜻입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성경의 예언자들은 사소한 개인의 예언이나 소소한 일상적인 일을 두고 예언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커다란 역사의 흐름과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민족의 앞길을 예언합니다. 예언의 목적도 다릅니다. 단지 미래에 펼쳐질 일을 미리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늦기 전에 하나님께 돌아와서 올바른 삶을 살라는 교훈적인 의미가 강합니다.
이처럼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룰 것을 믿고 지금 여기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올바른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한걸음 더 나가면 하나님의 예언을 사사로운 것에 적용하기 보다 이 세상의 불의와 모순, 차별과 압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것을 해결하려는 예언자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세상에 미래를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앞길을 예측하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지만 그들의 예언이 정확하지도 않습니다. 월드컵 문어든지 아니면 승부를 정확히 예측하는 전문가들의 말과 행동에 집착할 이유도 없습니다.인생이라는 전차는 미리 정해놓은 운명의 궤도를 따라 달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월드컵 축구는 물론 우리들 인생도 얼마든지 역전승이 가능하고 예측불허의 결과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앞 날을 알고 싶은 호기심은 삶에 대한 기대로 승화시키고, 불안한 마음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고, 값진 땀을 흘리면서 오늘 하루도 최선을 다하기 원합니다. (2014년 6월 26일 SF 한국일보 종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