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있을 때 저녁을 먹고 가족들과 함께 동네 뒷산에 올라가곤 했습니다. 땅거미가 지면 온 도시가 불을 밝히고 빨간색 십자가가 곳곳에 눈에 띄었습니다. 커다란 교회의 높은 십자가부터 여기저기 크고 작은 건물 위에 세워진 수많은 십자가를 보면서 교회가 많이 있는데도 세상이 바뀌지 않는 것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곤 했습니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로마 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족의 해방을 가져올 강력한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과 일들을 보면서 백성들은 열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로마를 무너뜨리고 다윗 왕국을 다시 세우실 것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종려나무를 흔들면서 “호산나(구원하소서)”를 외친 이유도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아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어떤 야만족들이 고안했고 나중에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진 형틀이었습니다. 죄수를 벌거벗겨서 십자가에 매달아 놓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형틀에 달린 그를 저주합니다. 죄수는 십자가에 달려서 서서히 죽어가고 그의 시체는 새들의 먹이가 되거나 지중해의 강렬한 햇볕에 부서져 내립니다. 로마의 시인 키케로는 십자가형을 가장 잔인하고 혐오스러운 형벌이라고 했습니다. 야만족들을 죽이는 방법으로는 사용될 수 있지만 절대로 로마 시민을 십자가에 달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구약성경 신명기에서는 나무에 달린 사람을 저주받은 죄인으로 규정했습니다. 로마 시대의 십자가가 국가가 행하는 형틀이었다면, 구약의 율법에서 나무는 하나님 앞에서 저주받은 사람이 달리는 형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에 의해서 로마 황제를 거부하고 자칭 유대인의 왕으로 행세했다는 정치범으로 십자가에 죽으셨고, 율법을 따르면 저주받는 자로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도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 앞에 잡혀갔을 때, 자신들이 믿는 예수님을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라고 증언했습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절대로 자랑거리가 될 수 없었습니다. 로마 사람들에게는 미련한 것이고 조롱거리였습니다. 율법을 믿던 유대인들에게 저주받은 자가 달리는 곳이기에 거리끼는 나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저주받은 자들이 달리는 나무에 벌거벗은 채로 달려서 죽으셨습니다. 철저하게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죄인들이 세상에서 버림받고, 율법을 어긴 사람들이 하나님께 버림받듯이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버림받으셨습니다. 오죽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셨겠습니까?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나무에 달려서 우리가 받은 저주를 몸소 받으셨고,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기꺼이 그의 몸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렇게 십자가는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자랑이요 능력이 되었습니다.
나무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지라고 부탁하셨습니다. 매일같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명령입니다. 하필이면 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하셨을까요? 다른 방법으로 예수님을 따를 수는 없었을까요? 예, 없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만이 예수님의 제자임을 드러내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2천 년 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듯이, 2016년 고난주간을 보내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말씀하십니다:”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을 믿는 것은 고난의 길입니다. 저주의 상징인 나무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것도 자신을 위해서 나무에 달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나무에 달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편안하게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십자가를 건물 위에 높이 달 생각만 했지,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았습니다. 십자가를 장식품으로 만들고, 십자가 넘어 부활의 영광에 도취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고 몸소 보여주신 기독교의 진리를 세상에서의 성공과 형통, 자기만을 위하는 이기주의로 바꿨습니다. 고난 주간을 보내면서 나무에 달리신 예수님을 다시 바라봅니다. 나무에 달리신 예수님처럼 살기로 재차 결심합니다. 나무에 달리신 예수님의 그 고귀한 사랑이 온 세상에 넘치길 기도합니다.(2016년 3월 24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