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가지 밭

성경을 한 장씩 차례로 읽어가는 새벽기도회에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로 유명한 누가복음 본문을 만났습니다. 공관복음서로 알려진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모두 등장하는 비유입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의 농부들은 씨를 심기보다 옆구리에 망태기를 메고 손으로 휙휙 뿌리는 식이었답니다. 그러니 씨가 여기저기 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경 본문을 읽다 보면, 씨를 뿌리는 농부보다 말씀을 뜻하는 씨와 씨가 뿌려진 밭이 강조되는 것을 발견합니다.

 

농부가 뿌린 씨는 길가, 바위, 가시덤불, 그리고 좋은 땅에 각각 떨어졌습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는 사람들에게 밟히고 공중의 새가 와서 쪼아먹었습니다. 바위에 뿌려진 씨는 싹은 났지만, 습기가 없는 바위 위에서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하고 말라버렸습니다.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는 강력한 가시나무가 기운을 막으니 크게 자라지 못했고, 좋은 땅에 뿌려진 씨만이 백배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비유의 의미를 알려주십니다. 길가는 말씀을 들었지만,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마귀가 그 말씀을 빼앗아갔습니다. 바위는 기쁨으로 말씀을 듣지만, 시련이 닥치니 말씀을 저버리고 배반했습니다. 가시덤불은 신앙의 성장을 막는 염려, 물질, 쾌락입니다. 가시덤불이 현대를 사는 우리의 상황을 가장 잘 대변하는 것 같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밀물처럼 몰려오고, 마음속에서 바이러스처럼 생기는 염려는 복음의 씨가 자라는 것을 막습니다. 염려를 완전히 떨칠 수 없지만, 염려가 생길 때마다 예수님께 맡기고 그 자리에서 기도하므로 염려를 몰아내야 합니다. 계속해서 염려가 몰려오니 쉬지 않고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시덤불의 두 번째 요소인 재물은 없으면 없는 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신앙 성장을 방해합니다. 재물이 없으면 그 자체가 시험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 얼마나 비참하고 초라한지 우리 모두 잘 압니다. 재물이 많으면 대부분 하나님을 떠나거나, 재물에 노예가 됩니다. 요즘 한국에서 세간의 손가락질을 받는 대형교회의 문제들 대부분이 재물과 관련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염려와 재물에 이어서 세 번째로 등장하는 쾌락은 하나님을 향해야 할 우리의 마음을 홀딱 빼앗아갑니다. 쾌락만큼 달콤한 것이 없습니다. 어릴 적 꿀단지에서 꿀을 손가락으로 찍어 먹다가 며칠 지나면 한 단지를 모두 훔쳐 먹듯이 쾌락은 슬며시 우리 안에 들어와서 마음과 삶을 소리소문없이 망가뜨립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기뻐하고 즐긴다면 그 모든 것이 쾌락에 속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좋은 밭이 등장합니다. “착하고 좋은 마음”입니다. 착한 것은 거리낌 없이 정직한 마음입니다. 좋은 것은 예수님 말씀대로 원수까지 사랑하고 미운 자를 위해 기도하며, 약한 자를 돕는 말 그대로 예수님을 닮은 성품입니다. 말씀을 소중히 여기고 지켜서 인내로 결실하는 신앙입니다. 그러니 백배의 열매를 맺는 것은 당연합니다.

 

복음서가 쓰일 당시에는 씨가 뿌려진 밭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전도자의 책임은 단지 씨를 뿌리는 것임을 알려주고, 교회 안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을 밭에 비유하면서 좋은 밭을 가진 성도가 되길 부탁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비유 속의 밭을 우리 각자의 마음과 신앙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어도 도움이 됩니다. 우리 안에는 네 가지 밭들이 모두 존재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신앙이 한결같이 좋은 밭일 수 없습니다. 마음 한편에는 길가도 있고, 다른 편에는 바위는 물론 가시덤불이 넓게 차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은 우리의 마음을 좋은 밭으로 갈아엎는 훈련이고 과정입니다.

 

때로는 네 가지 밭이 차례로 또는 두서없이 나타납니다. 마음 전체가 길가와 같아서 말씀이 마음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태연하지만 속은 바위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릴 때도 있습니다. 염려와 재물 그리고 쾌락에 빠져서 가시덤불로 뒤덮일 때도 있습니다. 물론 성령 충만해서 우리 마음 전체가 좋은 밭일 수 있습니다. 가능하면 좋은 밭이 오래가도록 신앙의 끈을 꼭 붙들고 있어야 합니다.

 

신앙의 여정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순례길입니다. 여기서 끝까지 견디고 인내하는 것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착하고 좋은 마음을 갖고 주어진 신앙과 인생의 여정을 감사와 기쁨으로 완주하기 원합니다. (2018년 8월 23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푯대를 향하여

우리의 삶은 물처럼 흘러갑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여서 어느 한 지점에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빠르지 않더라도 꾸준히 자라가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과거의 신앙 이력이 좋다고 해서 현재도 똑같이 좋으란 법이 없습니다. 앞으로 펼쳐질 미래는 더 불확실합니다. 따라서 인생이나 신앙의 여정을 지나면서 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앞을 향해서 나갈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선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바울도 빌립보서에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권면했습니다. 확정된 것이 없는 여정임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빌립보 교회를 어지럽혔던 유대인들은 몸에 받은 할례를 두고 자신들만 하나님 백성이며 그 자체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교만입니다. 이들과 대조적으로 사도 바울은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으로 할례는 물론 율법까지 완벽히 지킨 탁월한 유대인이었지만, 예수님을 만나고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이 가장 고상하고 귀한 것임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자신의 인생과 신앙을 두고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일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님께 잡힌 바 된 그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부르셨다는 확신일 것입니다.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신 자신의 소명의식을 잊지 않고 하늘의 상을 받을 때까지 자신의 길을 가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았습니다. 현재에 머물지도 않고 푯대를 향해서 앞으로 나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걷는 길을 달리기 경주에 비유했습니다. 달리기에서 모든 선수는 마지막 결승점을 향해서 힘차게 달려갑니다. 중간에 멈출 수 없습니다. 뒤를 돌아보는 것도 시간 낭비입니다. 끝까지 달려간 선수만이 준비된 면류관을 머리에 쓸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신앙 여정을 경주에 비유하면서 과거에 도취되거나 현재에 머물지 않고 달려갈 길을 다 가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우리도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의 길을 걸어갑니다. 달음박질하는 선수처럼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을 있는 힘을 다해서 완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세워 두신 푯대(goal)를 향해서 달려가는 인생길입니다. 그 푯대는 바로 우리가 닮아야 할 예수 그리스도일 것입니다.

 

바울과 마찬가지로 이전 것에 미련을 갖거나 과거의 업적에 도취되는 것은 금물입니다. 이전 것은 거기까지 인도하신 에벤에셀 하나님 앞에서 돌을 하나 세워두고, 가장 고상한 지식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품고 앞으로 달려 가야 합니다. 그리스도께 사로잡힌 자로서 우리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서 하루하루 달려가기 원합니다. 그 길에서 함께하시고, 갈 길을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기 원합니다.-河-

우토로 마을

좋은 아침입니다.

 

1.

어제는 우리 민족이 일제 치하에서 해방된 광복절이었습니다.

미국에서 바쁘게 살다 보니 무심코 지나치기 쉽지만

적어도 삼일절이나 광복절은 기억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더욱, 우리 샌프란시스코는

한인 이민은 물론 독립운동과 인연이 깊습니다.

1902년 하와이 사탕수수밭의 노동자로 이민 온 한인들이 본토로 진입하는 관문이었고,

1902년 도산 안창호 선생의 샌프란 유학과 한인회 조직,

1908년 장인환/전명운 열사의 일제 앞잡이 스티븐슨 저격 등

한인 이민사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샌프란 도심(St. Mary Square Park)에

위안부 기념비가 세워지기도 했지요.

기회가 되면, 특히 자녀들과

샌프란 한인들의 발자취를 답사해도 뜻 깊을 것 같습니다.

 

2.

1941년 일본 교토 비행장 공사를 위해서 끌려온

한인들이 모여 살던 <우토로>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해방 70년을 맞은 2015년에

MBC 무한도전팀이 방문해서 감동을 주었던 곳입니다.

 

비행장 공사를 위한 인부 2천 명 가운데

1300명이 조선인이었답니다.

이들은 해방 이후에도 그곳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현재까지 한인 촌을 이루며 살고 있습니다.

 

공항을 만들기 위해서 언덕을 깎고 웅덩이를 만든 곳에

집단 주거지를 만들었기에 비가 조금만 와도 침수가 됩니다.

일본 정부가 상/하수도 등 사회 제반 시설을 해 주지 않아서

무척 열악한 환경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닛산 자동차 그룹이 대지를 매입해서

수십년 터전에서 쫓겨나게 되었는데,

2007년 한국의 시민단체와 정부의 지원으로 재건축이 기능해졌답니다.

 

일본 한가운데서 “섬”처럼 살아가면서도

이들의 구호는 “에루화 좋다”입니다.

한국학교를 세워서 우리 말과 문화를 보존하는 등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한국인으로 살아온 대표적인 공동체입니다.

 

*우토로 마을에 대한 영상은 많습니다. 아래는 한인 3세가 안내하는 방송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X2Qezv3ucI

 

3.

샌프란에 처음 정착한 한인들이나

일본 토쿄 우토로 마을의 한인들은

떠나온 조국을 마음에 그리면서 혹독한 세월을 견뎠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갑니다.

견디는 것이 힘이요 믿음입니다.

살아남고, 우리가 있는 현장이 간증이 되는 것이 축복입니다.

 

오랜만에 초등학교 시절 불렀던

광복절 노래를 검색해 보았습니다. 2절이 참 좋습니다

 

꿈엔들 잊을 건가  지난 일을 잊을 건가

다같이 복을 심어 잘 가꿔 길러 하늘 닿게

세계에 보람될 거룩한 빛 예서 나리니

힘써 힘써 나가세 힘써 힘써 나가세

 

하나님 아버지,

우리 조국 대한민국이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하나가 되고 세계를 비추는 빛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목사 드림

(2017. 8. 16이-메일 목회 서신)

가장 고상한 지식 (2)

지난 주일에는 야외 예배를 다녀오느라 빌립보서 말씀을 나누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야외 예배에서도 빌립보서 성경 퀴즈를 통해서 그동안 배운 말씀을 확인하고, 예습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 세세한 내용까지 알고 계시는 참빛 식구들을 보면서 흐뭇하고 열심히 말씀을 읽으시는 모습에 감사했습니다. 성경과 늘 가까이 하시고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놀라운 경험을 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개”에 비유할 정도로 악하고 못된 사람들이 구약의 할례 규정을 갖고 빌립보 교회를 어지럽혔습니다. 무엇이든지 세우기는 힘들어도 공들여 세운 것을 무너뜨리기는 아주 쉽습니다. 또한, 세상을 변화시키라는 하나님의 사명을 갖고 있는 교회는 언제나 악한 세력의 주된 공격 목표입니다. 교회가 무너지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세울 기관이 사라지니 교회를 노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겸손하게 깨어 기도하면서 교회를 지키고 세워야 합니다.

 

빌립보 교회에 들어온 악한 세력들은 예수님을 믿어도 몸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육체의 할례는 이미 효력을 잃었고 마음의 할례가 중요한데 할례가 마치 진리요 강령인 것처럼 교회를 어지럽혔습니다. 이방인들에 비해서 육체의 할례를 받은 자신들이 정통이고 우위에 있다는 자기 자랑이요 교만입니다. 바울은 이들을 조심하고 경계할 것을 거듭 밝히면서, 성령으로 봉사(예배)하고, 예수님을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말 것을 권고했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자신의 이력과 신앙을 간증합니다. 바울로 말하면 유대인 중에서도 정통 유대인입니다.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랍비들을 양성하는 최고의 학자에게 교육받은 바리새인입니다. 율법으로도 흠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완벽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 이 모든 것이 아무 가치가 없는 배설물로 보였습니다. 그 정도로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고상하고 귀했습니다. 바울의 존재는 물론 그의 인생이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바울은 율법에서 나오는 의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전가된 의를 발견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쌓은 것은 결국 교만과 자랑거리일 뿐인데, 예수님 안에서 발견한 신앙은 하나님을 높이고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생명의 길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바울의 생각과 삶의 축이 자신에서 그리스도로 완전히 옮겨진 것입니다. 자신이 열심히 쌓아온 것이 배설물로 생각될 정도로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고귀한 궁극적 진리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우리 안에 임한 십자가의 은혜를 발견하고, 그 안에서 자신을 새롭게 찾고, 생각과 삶이 그리스도 중심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가 우리 안에서 날마다 일어나길 바랍니다.-河-

늘 그리운 곳

 

좋은 아침입니다.

 

1.

점심을 먹고 거실 바닥에 누워 있으니

둘째가 “아빠는 바닥이 좋아?”라고 묻습니다.

 

저는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서 셀폰을 확인하거나 책을 볼 때가 많은데

둘째가 보기에 불편하게 보였는지

방에 들어가 침대에 누우라는 것입니다.

 

“응. 사실 아빠는 바닥에 누워서 눈을 감고 있으면

옛날 할머니 집 마루가 생각나거든.

여름이 되면 시골집 마루에 누워서

책도 보고, 생각도 하고, 낮잠도 자고 그랬어.

문을 열어놓으면 바람이 솔솔 불고 너무 시원했지.”

둘째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우리 집 거실에 누워서 눈을 감고 있으면

30-40년 전 시골집 마루에 누운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합니다.

그 옛날 시원한 대청마루를 생각만 해도 마음이 시원해집니다.

 

2.

지난 주일에는 우리 교회가

샌 부르노 공원으로 야외 예배를 다녀왔습니다.

세 번째 같은 장소로 소풍을 갔는데 갈 때마다 참 좋습니다.

 

한적해서 마음까지 편안해지고

쉼터가 있어서 햇볕도 막을 수 있고

고기를 굽는 그릴도 넓고 커서 일하기 편하고

우리 교회 야외 예배 장소로 안성맞춤입니다.

 

다음 야외 예배 때는 또 어떤 분들이 함께 하실지,

우리 권사님들께서 모두 건강하시고

아이들은 부쩍 크고, 교회도 나름 더 자라 있기를 바라면서

2년 후의 야외 예배를 기약했습니다.

 

그렇게 야외 예배를 마치고

마지막 정리를 위해서 교회에 왔는데

교회가 우리를 반갑게 맞아줍니다.

매 주일 오던 참빛 식구들이 교회에 오지 않았으니

우리 교회 “건물”이 섭섭했나 봅니다.

 

다음 주일 교회에서 예배할 것이 기대되었습니다.

예배는 성전에서 드리는 것이 더 은혜로운 법이지요!

 

3.

우리 모두에게는

추억에 잠기게 하고

앞일을 기대하게 하며

언제나 가고 싶고 그리운 “장소”가 있습니다.

 

그곳을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곳에 가면 힘을 얻습니다.

그곳에 가면 반가운 사람들을 만나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만납니다.

 

누구에게나 그런 장소가 있게 마련인데

참빛 식구들께 우리 교회가 바로 “그 장소”가 되면 좋겠습니다.

힘든 세상살이의 피난처가 되고

새 힘을 얻는 재충전의 장소가 되길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예배하고

좋은 분들이 함께 하고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기로

더불어 결심하고 격려하는 공동체를 세워가기 원합니다.

 

(물론,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은 언제나 sweet home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와 가정이 함께 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다음 주일은 예쁜 우리 성전에서

다 함께 하나님을 예배합시다.

 

그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가! 형제자매가 어울려서 함께 사는 모습 (시133:1)

Behold, how good and pleasant it is when brothers dwell in unity! (Ps 133:1)

 

하나님 아버지,

우리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선하고 아름다운 공동체로 더욱더 자라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목사 드림

(2017. 8. 9이-메일 목회 서신)

참 아름다워라

오늘은 2년마다 갖는 우리 교회 야외 예배입니다. 올해로 세 번째 같은 장소인 샌 부르노 시립공원에서 모이고 있습니다. 장소가 넓고 한적한 곳에 위치해서 참 좋습니다. 지붕이 있는 쉼터가 있어서 예배를 드리거나 모임을 갖기가 수월하고 햇볕도 피할 수 있습니다.

 

2년마다 갖는 야외 예배인데도 매년 참석하시는 분들이 조금씩 바뀝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교회를 떠나신 분들의 얼굴도 떠오릅니다. 연로하신 권사님들을 다시 뵐 수 없어서 많이 아쉽습니다. 어르신들의 건강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처음으로 야외 예배에 참석하신 반가운 성도님들도 계십니다. 무엇보다 지난 2년 동안 우리 아이들이 참 많이 컸습니다. 엄마 품에 있던 아기가 걷고 뜁니다. 유치원에 다니던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고, 심지어 중학교에 들어갈 만큼 컸습니다. 지난 2년 동안 참빛 식구들의 삶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늘 같은 삶의 반복인 것 같지만 잠깐 멈춰서 돌아보면 여러 가지 일들이 우리 삶의 여정에 일어났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오랜만에 자연에 나왔으니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을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비가 오지 않는 여름철에도 꿋꿋하게 초록색의 잎들과 위엄을 자랑하는 주변의 나무들을 보면서 세상 만물을 키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생각하고, 많은 사람이 밟고 흥겨운 놀이를 했을 공원의 잔디들의 근성도 배우기 원합니다. 여기저기 피어있는 들꽃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꾸미시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기 원합니다.

 

시편 133편에서는 형제자매가 함께 하는 공동체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보라”로 시작됩니다. 형제자매가 함께 거하고 하나된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라는 초청입니다. 형제자매가 함께 어울려 지내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보라는 말씀입니다. 본문에서는 형제가 하나된 모습을 머리에 부어진 값진 향유가 수염을 타고 옷깃을 적시는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기름 부음의 풍성함입니다. 하나된 공동체에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두 번째로 저 멀리 보이는 헐몬산의 이슬이 시온 산 성전뜰에 내리는 것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슬은 비가 없는 건기에 자연 만물을 살리는 생명수입니다. 하나된 공동체에 이슬처럼 촉촉히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킬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공동체가 하나되면 그곳이 하나님 나라임을 알려줍니다.

 

매 주일 교회에서 만나는 참빛 식구들을 야외에서 보니 더욱 반갑고 소풍 오시는 기분으로 멋지게 차려 입고 오셔서 모두 아름다우십니다. 교회에서 나누지 못했던 대화와 성도의 교제가 풍성하기 원합니다. 편안한 분위기에서 우리 공동체의 하나됨을 몸과 마음으로 느끼기 원합니다. 주님 만드신 자연과 그 속에서 하나된 우리 공동체의 아름다움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河-

마음의 교만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에는

빌립보 교회에 침투해서 교회를 어지럽혔던

유대인 할례주의자들에 대해서 배웠습니다(빌 3:2).

 

바울은 이들을

“개” “행악하는 자들” “몸을 상해하는 자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개라는 비유로 시작해서

그들의 행위가 악함을 알려주었고

마지막으로 그들의 악한 행위가 할례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들은 구약의 율법을 꼭 붙들고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은 것과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았다고 우쭐대던

유대교 배경의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할례와 구약의 율법을 놓지 못하고

그것을 손에 쥐고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들을

“불쌍한 이들” “가난한 사람들(에비오니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기독교 전통에서 사라졌습니다.

 

2.

이 사람들이 할례를 비롯한

구약의 율법을 포기하지 못한 것은

그들 안에 있던 “교만”이었습니다.

 

자신들만이 정통 하나님 백성이라는 교만,

할례를 하지 않은 이방인들을 무시하는 교만,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할례를 포기하지 못한 채 기득권으로 여기던 교만이

이들을 무너뜨렸습니다. 아니 스스로 무너져 내렸습니다.

 

수요예배에서 배우는

예레미야서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던

이방 민족들의 교만도 소개합니다.

 

이집트, 모압, 암몬, 다메섹, 바벨론과 같은

이스라엘을 둘러싼 열강들은

자신들의 국력, 산업, 역사를 믿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민족에게 어려운 일이 닥치면

그것을 고소하게 생각하면서 그 틈을 타서 자신의 영토를 넓혔습니다.

국가 간의 전쟁으로 합리화될 수 있지만

결국 자신의 국력을 앞세운 교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들 열강과 이스라엘을 둘러쌓고 있던

크고 작은 국가들을 차례로 무너뜨리십니다.

재판하듯이 죄목을 하나하나 거론하시면서

결국 “유죄판결”을 내리십니다.

 

3.

하나님 백성들이 교만을 해결하지 못하면

스스로 무너지게 됨을

빌립보 교회를 힘들게 한 개들과 같은 악한 사람들을 통해서 배웁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이방 민족의 교만도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고, 결국 심판하십니다.

 

우리 역시 신앙 가운데 교만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세상일에서도 교만할 수 있고,

마음속의 교만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앞에 겸손하기 원합니다.

함께 하는 이웃들을 배려하기 원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교만은 물론

마음의 교만도 통제하기 원합니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2:12)

As you have always obeyed, work out your own salvation with fear and trembling(Phil 2:12)

 

하나님 아버지,

겸손이 우리의 인격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목사 드림

(2017. 8. 2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