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언약

일찍이 소금은 인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소금이 생산되고 유통되는 곳에 도시가 형성될 정도였습니다. 사람이 육식을 하면 동물의 육질에서 우리 몸에 꼭 필요한 하루 1g 정도의 소금을 섭취할 수 있지만, 채식을 한다면 소금을 섭취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니 농경사회가 시작되면서 소금의 중요성은 점점 커질 수밖에 없어서, 소금을 유통하는 업자들이 부를 축적했고 나중에는 소금의 생산과 유통을 국가가 주관하고 세금을 매겼습니다.

 

로마 시대에는 소금으로 병사들의 봉급을 지급하기도 했습니다. 소금을 뜻하는 라틴어 <살라리움(salarium)>에서 봉급에 해당하는 영어 샐러리(salary)가 나온 이유일 것입니다. 앞의 “살(sal)”이 소금을 뜻하는데 여기서 우리가 잘 아는 샐러드, 살사, 소시지와 곁들이는 살라미가 파생되었습니다. 소금으로 간을 맞춰야 상품성이 생기는 것들입니다. 이 모든 것은 바위에서 소금을 채취하거나 바닷물을 말려서 소금을 얻었던 천연 소금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화학 소금이 등장하면서 소금은 값싸게 구할 수 있는 생필품이 되었습니다.

 

소금이 우리 인체에 꼭 필요한 영양소라는 것 외에도 소금의 진가는 여러 곳에서 증명됩니다. 무엇보다, 부패를 막아줍니다. 맛을 냅니다. 음식에 소금이 들어가지 않고 간이 맞지 않으면 산해진미도 입에서 뱅뱅 돌 뿐 넘어가질 않습니다. 소금은 나쁜 습관이나 부정을 막는 데도 사용되었습니다. 어렸을 때, 행여나 이불에 실례를 하면 키를 머리에 쓰고 이웃집에 가서 소금을 얻어와야 했습니다. 원치 않는 발길이 집에 들어오면 소금을 뿌려서 퇴치했습니다.

 

성경에도 소금이 종종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둠을 밝히는 빛과 더불어 부패를 막고 세상을 신선하게 유지하는 소금이 되라는 부탁입니다. 맛을 잃은 소금은 길가에 버려져서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라는 경고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구약성경 레위기에서는 곡식을 빻아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누룩이나 꿀을 넣지 말고 소금을 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누룩이나 꿀은 곡식을 부패시키지만, 소금은 부패를 막기에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의 신선함을 유지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고 하셨습니다. 소금이 살아있는 것들의 기를 죽이듯이 서로 양보하면서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라는 부탁입니다.

 

이스라엘이 70년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에 기록한 구약성경 역대기서에 “소금 언약”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우상을 섬겼다가 나라를 잃었습니다. 70년이라는 긴 시간을 바빌론에서 포로로 살다가 선지자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고향 예루살렘에 돌아왔습니다. 비로소 이들은 조상 아브라함과 모세 그리고 다윗과 하나님이 맺으신 언약을 기억하면서 그것을 “소금 언약”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소금처럼 변함이 없으셨는데, 자신들이 하나님을 떠나면서 재난을 당했으니 다시 신실하신 하나님께 돌아가겠다는 결심입니다.

 

실제로 고대 근동에서는 상거래는 물론 계약을 맺을 때 소금을 사용했습니다. 소금을 뿌리기도 하고, 소금을 위약금으로 걸거나, 계약 당사자가 소금을 친 음식을 먹으면서 상호 계약을 지킬 것을 약속했습니다. 소금 친 음식을 함께 먹는 것을 친구 관계의 상징으로 생각했습니다. 소금의 변하지 않는 속성 때문일 것입니다. 신약에서 입술의 말에 소금을 치라는 구절이 등장하는데 이말 저말 하지 말고 말에 책임지라는 교훈입니다.

 

이처럼 소금은 변치 않는 신실함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소금 언약을 하신 것은 신실하신 하나님을 밝히신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등지고 떠나지만, 하나님은 밤하늘의 북극성처럼 언제나 그곳에 계십니다. 하나님을 두고 사람들이 왈가왈부하지만, 하나님은 미동도 하지 않으시고 소금 언약을 지키십니다. 이처럼 신실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길은 우리 역시 소금 언약을 마음에 품고 신실함으로 하나님께 나가는 것입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추수감사절을 맞았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소금 언약이 유효했기에 은혜로 맞는 감사절입니다. 감사절을 맞아서 신실하신 하나님께 소금처럼 변하지 않고 맛을 내는 신실한 믿음으로 응답하기 원합니다.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기로 결심하면서 감사절을 맞기 원합니다. (2018년 11월 22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해피 땡스기빙

Happy Thanksgiving!!!

 

1.

단비와 함께 맞는

2018년 추수 감사절입니다.

오늘과 내일, 그리고 다음 주에도 비소식이 있으니

산불도 꺼지고, 덕분에 공기도 좋아지고,

우리 동네 산천초목이 푸르게 변할 것 같습니다.

 

여름철 교회 앞 정원(?)에 물을 줄 때마다

제가 아무리 정성껏 물을 줘도

아침마다 내리는 이슬과 밤새 내린 보슬비를 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마다 창조주 하나님의 힘을 경험하곤 하는데

주님의 긍휼하심을 구했던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 주신 것 같습니다.

 

지난주일 설교에서

추수감사절과 구약의 절기 (특히 가을의 초막절)을 연결해 보았지만

추수감사절 자체는 꽤 미국적인 절기입니다.

그러다 보니 미국에 사는 우리에게 추수감사절이 실감나게 다가옵니다.

 

추수감사절 전주에 늘 있는 교회에서의 터키를 곁들인 만찬,

추수감사절에 가족 친지들과 함께 나누는 만찬과 대화,

그리고 추수감사절 다음날(요즘은 상술이 발달해서 당일 저녁부터 시작하는데)

Black Friday shopping 등등 – 나름 추수감사절을 꽤 즐기고 있습니다.

 

원래 추수감사절이 지나면

코스코에서 크리스마스트리를 팔기 시작했는데

올해는 이번 주부터 팔고 있어서 서둘러 트리 하나를 사다가 교회에 세워놓았습니다.

이번 주일에 청년들과 주일학교 아이들이 함께 트리를 장식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렇게 한 해가 지나갑니다.

 

2.

올해 우리 교회는

<작은 일에 충성>이라는 표어로 한 해를 살았습니다.

 

지나치기 쉬운 작은 일에도 마음을 쓰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요즘 유행하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누리고 싶었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하나님의 칭찬을 듣기 원했습니다.

 

미국 생활이 그렇듯이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시라도 한눈을 팔면 금세 자리가 나는 것이 나그네로 사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오늘 추수감사절을 맞고 있습니다.

지난 설교에서 말씀드렸 듯이,

한 해를 지켜주시고 함께 해주신 하나님께,

곁에서 한 길을 걸어간 가족, 교우, 친지들께

무엇보다 한 해를 꿋꿋하게 살아준 자신에게 감사하기 원합니다.

 

찬송가 429장 가사 대로

받은 복을 세어보고, 그 복에 이름을 붙이면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찬양하고 감사하기 원합니다.

 

조금 부족하고 아쉬워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실 하나님을 믿으니

앞으로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기대하면서 감사절을 맞는 것입니다.

 

산불로 인해서 집과 가족을 잃은 이웃들과

명절이기에 더욱 마음이 힘들고 외로운 분들도 마음 한 켠에 두고

겸손한 마음으로 추수감사절을 맞는 것도 기독교인의 미덕입니다.

 

복된 추수감사절 맞으십시오

Happy Thanksgiving!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8)

Give thanks in all circumstances; for this is the will of God in Christ Jesus for you.(1thes 5:18)

 

하나님 아버지,

감사절을 맞는 참빛 식구들 한 분 한 분

가정 가정을 축복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 11.22이-메일 목회 서신)

                   

2018년 11월 3주 말씀과 찬양 (추수감사주일)

로마서 3장 강해 (2):  우리는 나으냐/ 로마서 3:9

찬양: 하늘을 바라보라

 

찬양: 저 천국 음악소리

봉헌송: 참 아름다워라 (바이올린; 이지수)

2018 감사절에

올해도 어김없이 추수감사절을 맞습니다. “추수”라는 말은 예전 우리나라가 농경 문화일 때 붙여진 명칭입니다. 미국은 물론 영어의 표현은 “감사절”입니다.

 

추수감사절의 유래는 1620년 12월 102명의 청교도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에 도착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은 계획과 달리 보스턴 근교 플리머스에 도착했는데 동부의 겨울을 지내면서 절반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이듬해 가을 추수를 끝내고 감사의 예배와 축제를 가졌고 이것이 추수감사절의 시작입니다.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성경에서 찾으면 가을 수확을 마치고 지키는 수장절(또는 초막절)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3대 절기(유월절, 오순절, 초막절)는 봄, 여름, 가을에 걸쳐서 수확했던 이스라엘의 농경문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서 지킨 절기들이고, 추수감사절이 단순히 미국의 명절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넘어서 성경에 기초한 것임을 되새길 수 있습니다. 예전 우리나라도 농사가 주업일 때는 가을에 수확을 끝내고 감사의 예배를 드릴 수 있었기에 추수 감사라는 용어가 생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감사절”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것은 뜻깊은 일입니다. 모든 일이 우리가 뜻한 대로 펼쳐진 것은 아닙니다. 솔직히 아쉽고 부족한 것이 더 많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까지 왔음을 감사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신앙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온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입니다. 가정과 생업을 지켜주신 것도 감사할 일입니다. 크고 작은 일들 속에 임한 주님의 손길을 기억하면서 감사하기 원합니다.

 

400여 년 전 청교도들이 처음 추수감사절을 지키면서 그들을 도와준 인디언 추장과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초청했습니다. 이들이 농사와 사냥은 물론 집을 짓는 생존방법을 알려주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으니 생명의 은인들이었습니다. 감사절을 맞아서 일 년 동안 함께 한 이웃들을 향한 감사의 마음도 놓칠 수 없습니다. 자칫,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가족과 이웃에 대한 감사를 소홀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이웃의 손길을 통해서 우리에게 임했음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것도 소중한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올 한해도 잘 견뎌준 자신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 원합니다. 홀로 설 수 없지만, 때때로 외롭고 험한 길을 스스로 잘도 걸어왔습니다. 때때로 혼자라서 외로웠지만 대견하게 견뎠습니다. 그러니 자신을 향한 감사도 빼놓고 싶지 않습니다. 감사절을 맞아서 하나님 말씀대로 범사에 감사하고 기뻐하기 원합니다. 참빛 식구들 모두 복되고 풍성한 감사절 맞으시길 바랍니다.-河-

산불

1.

캘리포니아 역사상 최악의 산불이

우리 지역에서 160여 마일 떨어진 곳에서 일어났습니다.

서울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지역이 불에 탔고

목숨을 잃은 숫자가 40명이 넘어섰지만

실종자를 고려하면 더 늘어날 것 같습니다.

아직도 산불 잡히지 않았습니다.

 

둘째가 있는 데이비스는

산불로 인해서 공기가 나빠지니 어제 휴교령이 내렸답니다.

 

우리 지역도 지난주 내내 낙엽 타는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셀폰으로 날씨를 검색하면 계속해서

“건강에 해로운 공기 (unhealthy air quality)”라고 나옵니다.

 

이번 산불로

파라다이스 마을은 주택 7,700여 채가 모두 불에 탔습니다.

마을 전체가 사라진 것입니다.

내년에 학교도 문을 열 수 없을 것 같다는 소식도 들립니다.

 

연일 보도되는 “캠프파이어” 산불 소식을 접하면서

안타까움만 더해 갑니다.

 

2.

그러고 보니

우기가 이미 시작되었는데도

비가 한 번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산불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늦은 감이 있지만

다음주 수요일에 비소식이 있는 것이 얼마인지요!

일기예보가 왔다갔다하는데 이번엔 꼭 맞추길 바랍니다.

 

사람이 그 큰 산불과 싸우는데 한계가 있으니

어서 비가 내려야 합니다.

 

신앙의 용어를 빌리면

하나님께서 캘리포니아를 불쌍히 여기셔서

큰비로 산불을 끄시고, 갈색 산을 얼른 초록으로 만드셔야 합니다.

 

3.

자연재해 앞에서

인간의 한계를 발견합니다.

 

AI가 출현하고, 과학 문명이 아무리 발달해도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큰 산이 “자연”입니다.

 

이번과 같은 산불, 쓰나미, 태풍

요즘은 뜸하지만, 가끔 지축을 흔드는 지진까지

인간이 예측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영역이 존재합니다.

 

그때마다 창조주 하나님을 떠올리고,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겸허히 인정하며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갑니다.

 

수요예배에서 살펴보는 창세기 말씀도

결국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주인이 되신다는 고백입니다.

혼란에 질서를 부여하시고, 공허를 채우시고,

어둠에 빛을 비추시는 분이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고백합니다.

 

과학 문명 시대에 살고 있지만

이렇게 커다란 자연재해 앞에서

그 옛날 성경의 인물들처럼 “비를 내려주시길” 기도하게 됩니다.

어쩌면 원초적인 기도입니다:

 

주님, 비를 주옵소서!

산불로 인해서 가족과 재산을 잃은 분들에게 힘을 주옵소서!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도다 (시편145:9)

The LORD is good to all,

and his mercy is over all that he has made. (Psalm 145:9)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사는 세상을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 11.15 이-메일 목회 서신)

로마서 3장 (1): 로마 교회에 보낸 편지

10월 한 달 동안 살펴보았던 교회사 속의 세 인물은 모두 로마서를 통해서 인생이 바뀌는 터닝 포인트를 경험했습니다.

 

어거스틴은 쾌락을 버리고 낮과 같이 단정히 행하라는 로마서 13장 13절 말씀을 들고 읽으면서, 젊음의 쾌락과 성공을 향한 욕망을 벗어나서 그의 인생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회의 교리를 굳게 믿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의로움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탑의 경험”이라고 불리는 터닝 포인트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로마서 1:17절 말씀을 통해서 오직 믿음과 오직 은혜의 복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요한 웨슬리가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을 때, 우연히 찾은 부흥 집회에서 사회자가 마틴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는 것을 듣고 마음에 뜨거움을 경험했습니다. 웨슬리는 그 이후로 자신과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갖고 복음 전도자로 살았습니다.

 

우리가 살펴본 세 명의 인물 외에도 신약성경의 로마서는 수많은 사람의 인생을 바꿔 놓았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예전에 로마서의 보석이라 불리는 로마서 8장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한 5장을 주일 설교에서 함께 나눈 적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로마서의 시작이며, 복음의 시작인 로마서 3장 말씀을 함께 나누면서 우리 자신은 물론 우리가 사는 세상을 점검해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살펴보면서, 자기 성찰과 우리 안에 임하는 은혜로 올 한 해를 마무리할 예정입니다.

 

로마서는 바울이 로마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당시 로마는 제국의 수도였습니다. 성공을 위한 경쟁과 암투, 다양한 종교들의 전파, 쾌락은 물론 도덕의 무너짐이 절정에 달해 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사는 오늘날의 모습이 2천 년 전 로마를 그대로 재현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도 예수님을 믿는 교회가 세워졌고, 신앙을 지키고 교회를 세우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능력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세상이 얼마나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는지 진단합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순리대로 사용하지 않고 거꾸로 이용하고,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의롭게 된다고 말하지만 실제 행함은 없고, 모든 사람이 죄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이 필요한 시점이었기에 바울은 로마서에서 복음이 무엇인지 제시합니다. 로마서의 주제는 복음과 복음에 합당한 삶입니다. 앞으로 살펴볼 로마서 3장 말씀을 통해서 교회사 속의 인물들처럼 우리 역시 말씀의 은혜에 깊이 빠지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河-

로마서 3장

좋은 아침입니다.

1.

이번 주일부터 함께 나눌

설교 본문은 로마서 3장입니다.

 

세상 사람들이나, 하나님을 알고 있던 유대인들이나

철학과 도덕을 앞세운 헬라인들도

하나님을 등지고 자기 길을 가는 죄인임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죄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것보다

“하나님을 거역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물론, 하나님을 등지고 자기 마음대로 살다 보면

파생적으로 도덕적인 죄들을 짓게 마련입니다.

 

로마서는 이렇게 죄(거역)의 문제를

심각하게 제기하면서 시작합니다.

 

2.

죄, 하나님을 거역한 인간의 문제는

수요예배에서 살펴보는 창세기 2-3장 말씀과 긴밀히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를 만드시고

에덴동산을 경작하고 (히브리어 “아바드”가 쓰였고, 경작하다, 일하다, 섬기다 특히 예배하다라는 의미가 있음)

지키며 (“샤마르”라는 히브리어에는 듣다, 지키다, 순종하다는 의미)

각종 생물에 이름을 짓는 자율적이고 창조적인 과업(그때는 일이 곧 예배)을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이브가 선과 악을 분별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으면서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예배하지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도,

하나님을 거역하는 데 자유를 사용하면서

세상에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가 들어왔습니다.

 

죄가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라면

“악”은 조금 더 구조적이고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죄를 야기시킨 창세기의 “뱀(사단)”이 대표적입니다.

 

이처럼 죄와 악의 문제는

창세기 3장 이후로 시작된 근본적이고 고질적인 문제입니다.

 

그때부터 일이

예배가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한 노동으로 변질되기도 했습니다.

 

3.

C.S 루이스는 “고통의 문제(The Problem of Pain)”라는 책에서

악과 인간의 고통을 다루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은 쾌락 속에서 우리에게 속삭이시고, 양심 속에서 말씀하시며

고통 속에서 소리치십니다.

 

고통을 하나님의 메가폰이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개인적으로 죄를 짓고 고통스러워 하거나

악한 세상이 고통을 안겨줄 때가 있는데,

그 순간에 소리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루이스의 역설입니다.

 

로마서 3장 말씀을 함께 살펴보면서

우리 자신을 깊이 성찰하고,

악(죄)의 본성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생각해보기 원합니다.

 

결국에는 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한지,

은혜가 임할 때 일이 노동이 아니라 예배가 될 수 있을지

그 가능성과 확실함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롬 3:9)

What then? Are we Jews any better off? No, not at all.

For we have already charged that all, both Jews and Greeks, are under sin (Rom 3:9)

 

하나님 아버지,

합력해서 선을 이루실 주님을 바라보고

고통 속에서 소리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 11.8 이-메일 목회 서신)

터닝 포인트 (4): 마틴 루터

지난 번에 살펴보았던 어거스틴은 “지향성”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우리가 어디를 바라보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이 가는 곳에 마음이 갑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보고 싶지 않습니다. 어거스틴은 자신이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젊음의 쾌락, 세상의 야욕, 심지어 자기를 매료시킨 학문에 시선을 두었습니다.

 

어머니 모니카가 아들의 회심을 위해서 그토록 간절히 기도했건만, 하나님께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익숙하게 들은 신앙이었기에 별것 아닌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신앙의 길로 돌아갈 수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만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길이 생각보다 오래 걸렸습니다. 한참을 돌아서 하나님께 왔을 때, 그는 하나님 앞에서 참회의 눈물을 한없이 흘렸습니다. 서른두 살이 되도록 헛된 것을 바라보고 산 것을 회개했습니다. 그렇게 터닝 포인트를 경험했습니다.

 

웨슬리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신성 클럽을 만들어서 성경과 고전을 읽고, 엄격한 규칙을 지키고, 어려운 이웃을 방문하는 등 신앙적으로 탁월한 엘리트의 길을 걸어갔지만, 대서양의 폭풍우 앞에서 그의 신앙은 속절없이 무너졌습니다. 그동안 바라보며 추구한 신앙이 소용없을 만큼 웨슬리의 고민이 깊어졌습니다. 올더스게이트 집회에서 마음의 뜨거움을 경험하고 나서야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몸소 체험하니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게 되었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습니다. 돌아선 것입니다.

 

오늘 살펴볼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도 터닝 포인트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의 생각이 판치는 당시의 교회에서 성직자가 되었고 로마 교황청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갈 정도로 의로운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의 의를 바라본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신앙의 업적을 쌓으려는 교만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자유함이 없었습니다. 노력하면 할 수록 부끄러운 자신의 모습만 눈에 들어와서 괴로웠습니다.

 

어거스틴이나 웨슬리가 그랬듯이 마틴 루터 역시 로마서 말씀을 읽는 중에 자기 안에서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낯선 의”가 들어와서 자신을 변화시킬 때 의롭게 된다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깨달았기에 “오직 말씀으로,”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가능함을 알았기에 “오직 믿음으로,”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임을 알았기에 “오직 은혜로”라는 종교 개혁의 표어를 내세우게 되었습니다.

 

터닝 포인트라는 제목의 연속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며 살고 있는지를 깊이 살펴보기 원합니다. 하나님을 지향하는 참빛 식구들이 되시길 바랍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