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닝 포인트 (3): 요한 웨슬리

10월 한 달 동안 “터닝 포인트”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미국 생활이 단조로워서 직장(또는 학교)과 집 그리고 주말에 교회에 오는 것이 다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몸과 마음이 늘 쫓기는 나그네 인생이다 보니, 정작 중요한 것을 챙기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이번 연속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매 순간 선택하고 결정해야 하는 길목에 서곤 합니다. 완전히 돌아서는 경우부터 좌나 우로 방향을 바꿔야 하는 순간입니다. 알고 보니 우리만 그런 순간을 맞는 것이 아니라, 앞서간 신앙의 선배들도 전환점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사명을 발견했으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함께 나누면서 우리에게 닥치는 선택의 순간이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계기가 되길 바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터닝 포인트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오늘 살펴볼 요한 웨슬리는 감리교의 창시자입니다.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될 무렵인 1703년 성공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열아홉 형제 가운데 열다섯 번째였는데 어머니 수산나로부터 신앙교육을 잘 받고 자라서 일찍이 성공회 목사가 되었습니다.

 

웨슬리는 옥스퍼드에서 가르치면서 동생 찰스 웨슬리와 친구 두 명과 함께 신성클럽(Holy Club)을 시작했습니다. 일주일에 3-4일 저녁에 모여서 성경을 읽고, 수요일과 금요일에 금식하면서 신앙을 연마했습니다. 가난한 자와 감옥에 갇힌 자들을 방문하는 등 신앙과 삶이 통합된 온전한 신앙을 추구했습니다. 신성클럽은 하도 엄격하고 스스로 규칙을 잘 지키는 그룹이었기에 사람들은 이들을 규칙쟁이(Methodist)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현재 감리교회의 명칭이 되었습니다.

 

웨슬리가 미국 조지아에 선교를 와서 미국 감리교회가 시작되었는데, 오고 가는 배 위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웨슬리는 행여나 죽을까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풍랑 속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는 독일 모라비안 교도들을 보고 큰 충격을 받습니다. 자신에게 구원의 확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영국에 돌아온 웨슬리는 모라비안 교도들에게 배우고, 이성과 규칙에 치우친 자신의 신앙을 놓고 고민하다가 올더스게이트라는 곳에서 열린 부흥 집회에 우연히 참석했다가 사회자가 말틴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을 때 마음에 뜨거움을 체험했습니다. 그 이후로 웨슬리는 이성적인 신앙과 더불어 성령의 역사를 통한 체험을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웨슬리의 터닝 포인트였습니다.

 

신앙이 머리에 머물면 불안하고 신앙이 표류할 가능성이 큽니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신앙이 내려오는 터닝 포인트가 누구에게나 필요한 이유입니다.-河-

깊은 신앙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두 주일에 걸쳐서

극적인 터닝 포인트를 경험했던

어거스틴의 신앙과 삶을 살펴보았습니다.

 

청년 시절에

육체의 쾌락과 야욕에 빠졌던 자신을 돌아보며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정원 밖에서 들리는 “들고 읽으라”는 아이들의 노랫소리를 듣고

성경을 들고 펼친 말씀이 로마서 13장 13절이었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롬 13:13)

 

어거스틴은

자신에게 딱- 맞는 말씀을 마주 대하고

얼마나 깜짝 놀랐을까요!

 

물론, 우연이라고 무시할 수도 있었고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말씀이니 덮어 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거스틴은 이 말씀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었습니다.

그 순간 “확실성의 빛”이

자기 안에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고 고백했습니다.

 

2.

터닝 포인트는

순간에 찾아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순간이 인생 전체를 바꿔놓고

존재 자체가 180도 변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지난날의 모든 경험이 응축되는 과정을 거쳤고

모아진 에너지가 한 순간에 폭발하면서

존재와 삶 전체를 완전히 바꿨을 가능성도 큽니다.

 

어거스틴 역시

진정한 진리를 찾기 위해서 당시 유행하는 종교와 학문을 섭렵했습니다.

집요한 추구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깊이 성찰했습니다.

나중에 돌아보니,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에너지를 모으는 과정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은 회심 후에도

성경, 신앙, 자신의 삶을 성찰했습니다.

어거스틴의 내적 곱씹기의 열매가 바로 “고백록”입니다.

 

3.

필요 없는 것을 끝까지 쫓는 것은

내려놓아야 할 집착입니다.

 

하지만,

영원한 것, 진리, 하나님을 끝까지 추구하고 곱씹는 것은

신앙 여정에 꼭 필요한 작업입니다.

 

대충 넘어가지 말고

한 가지라도 깊이 탐구해 봅시다.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고

하나님 말씀을 곱씹으면서 하나님 마음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깊이”있는 신앙 –

곱씹고 읊조리면서 내면 깊이 예수님을 모시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올가을이 되길 바랍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로마 13:13-14)

Let us walk properly as in the daytime, not in orgies and drunkenness, not in sexual immorality and sensuality,

not in quarreling and jealousy. But put on the Lord Jesus Christ, and make no provision for the flesh, to gratify its desires. (Rom 13:13-14)

 

하나님 아버지,

참빛 식구들의 신앙과 삶이

주님 안에서 깊이 깊이 자라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 10. 18 이-메일 목회 서신)

수요예배에서는

어르신들이 참석하시는 우리 교회 수요예배에서는 성경을 한 장씩 공부합니다.

 

지난 1년 동안은 예레미야서와 마가복음을 읽었습니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가 자신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것이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예레미야의 예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계속해서 죄의 길을 걷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화가 치밀 정도로 안타까웠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것을 보면서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짐을 보았습니다. 또한 예레미야서 한가운데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과 이스라엘의 회복을 알리는 위로와 소망의 말씀이 위치한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예레미야 말씀이 너무 딱딱해서 중간에 마가복음을 읽었습니다. 복음서 말씀은 늘 은혜롭습니다. 예수님의 사역과 선포하시는 말씀,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일대기를 읽으면서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고 우리에게 임한 구원의 은혜에 감사했습니다. 묶인 사자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섬기는 종으로 한평생을 사신 예수님의 모습이 마가복음 전체에 잘 드러났습니다.

 

앞으로 수요예배에서는 창세기를 읽습니다. 중간에 복음서를 읽고 오면 일 년 넘게 읽을 말씀입니다. 창세기는 말 그대로 인류는 물론 세상의 기원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아담과 이브로 인해서 낙원을 잃고 죽음과 노동, 관계의 단절과 소외가 인류에게 닥쳤습니다. 창세기 이후의 성경 말씀은 하나님을 떠난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끊임없는 노력을 전하고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 사랑이 정점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 역시 창세기 말씀과 맥을 같이 합니다.

 

창세기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고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워지는 과정을 그립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아들 이삭을 낳고, 이삭의 아들 야곱은 하나님과 씨름해서 이겼다는 뜻의 새로운 이름 이스라엘을 갖게 됩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됩니다. 형들에 의해서 이집트로 팔려간 요셉이 이집트 총리가 되고 야곱과 그의 가족이 가뭄을 피해서 이집트로 간 것이 400년 종살이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창세기는 이어지는 출애굽의 서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수요 예배에 참석하시면 더욱 좋겠습니다. 먼 거리와 바쁜 삶으로 참석하지 못하시면 안내석에 준비되고 이메일로 보내드리는 교재를 참고해서 함께 창세기 말씀을 읽어가기 원합니다. 말씀에 굳게 서는 우리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河-

무라드와 무퀘게

좋은 아침입니다.

 

1.

매년 이맘때가 되면

각 분야의 노벨상 수상자가 누구인지 세계의 이목이 집중됩니다.

 

올해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특별히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한 두 분이 눈에 띄었습니다.

 

무라드는 2014년 ISIS에게 엄마를 잃고

자신은 성노예로 팔려갔다가 극적으로 탈출한 25세 여성입니다.

 

이라크의 소수민족인 야지디족 출신인 무라드는

ISIS에서 탈출한 이후 여성 인권운동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3개월 동안 성노예로 살았던 칠흑 같은 경험을 떠올리며

여전히 노예처럼 붙잡혀 있는 여성들의 해방을 위해서 일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아픈 경험을 극복하고

같은 처지에 있는 여성들을 돕는 일에 나선 20대 중반의 여성

무라드가 대단해 보입니다.

 

올해 63세인 무퀘게는

아프리카 콩고의 산부인과 의사입니다.

 

20년동안

성폭행을 당했던 여성들의 치료와 재활을 도왔습니다.

그가 치료한 여성이 3만 명이 넘는다는 통계를 통해서

무퀘게 한 사람이 펼친 사랑의 의술이

얼마나 많은 여성에게 새 삶을 주었는 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무퀘게는 생명의 위협을 받아서 병원을 접고 콩고를 떠난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여성이 여전히 성폭력의 희생자가 되는 것이 안타까워

다시 돌아와 병원을 열었고,

그에게 치료받은 여성들이 돌아가면서 불침번을 서면서

무퀘게와 그의 병원을 지켰습니다.

 

우리가 주목할 일은

무퀘게가 신실한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목숨을 건 그의 희생적 사랑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결과일 것입니다.

 

작은 자 하나에 행한 것이 곧 예수님께 한 것이라는 예수님 말씀처럼

무퀘게는 열악하고 위험천만한 곳에 병원을 열었고

아무도 돌보지 않는 연약한 피해 여성들을 치료하고 사랑으로 돌보았습니다.

노벨 평화상에 손색이 없습니다.

 

2.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악하고 험하지만

곳곳에서 말없이 희생하고

변화를 모색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힘이 없어 보이지만,

그분들이 하는 일을 통해서 생명을 얻고

상처 입은 사람들이 회복됩니다.

얼마나 귀한 일인지요!

 

처음 시작은 미미했을 것입니다.

우연히 시작했을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경험이 너무 험해서 다시는 자신과 같은 피해자가 없어야 한다는

절실한 마음으로 시작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노력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지난달 우리 교회 <작은사랑나눔> 헌금도

일본 우토로 한인 마을에 찾아온 평화를 기념하는데

귀하게 사용되길 바랍니다.

 

무엇보다

참빛 식구들이 하시는 일이

하나님 나라가 세상에 임하는 데 자연스레 사용되는

주님의 손길/섭리가 임하길 기도하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마 25:40)

Truly, I say to you, as you did it to one of the least of these my brothers, you did it to me. (Mat 25:40)

 

하나님 아버지,

지금 이순간에도 세상 곳곳에서

묵묵히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손길들을 보호하시고 축복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 10. 11 이-메일 목회 서신)

터닝 포인트: 어거스틴 (1)

10월이 되면 결실의 계절이라는 말에 걸맞게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런데 종종 매너리즘에 빠져서 의미 없이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새롭게 다시 시작해야 할 모멘텀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인생은 물론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교회사에 커다란 발자국을 남긴 신앙의 위인들이 경험한 인생의 전환점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터닝 포인트, 즉 전환점을 경험한 신앙 선배들의 인생 앞에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올가을에 우리 역시 인생과 신앙에서 전환점을 경험하길 바랍니다.

 

우리가 살펴볼 첫 번째 신앙의 인물은 어거스틴입니다. 어거스틴은 현재 알제리가 위치한 북아프리카의 다가스데라는 곳에서 이교도 아버지와 신실한 기독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들의 출세를 원했던 부모님은 어거스틴이 열두 살 때부터 카르타고를 비롯한  큰 도시로 유학을 보내서 고전과 수사학을 공부시켰습니다.

 

어거스틴 역시 총명한 젊은이였지만, 청년의 쾌락에 빠져서 18세에 한 여인과 동거를 시작해서 아들을 낳을 정도였습니다. 매사에 열심을 냈던 어거스틴에게는 진리를 깨닫고 싶은 열망도 강했습니다. 당시 유행했던 마니교와 점성술에도 빠져보고, 플라톤 철학을 공부하면서 궁극적인 진리가 무엇인지 탐구했습니다. 어거스틴이 청년의 쾌락과 세상의 학문과 관습을 쫓다 보니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하지만 어거스틴에게는 밤낮으로 기도하는 어머니 모니카가 있었습니다. 모니카는 눈물로 기도하는 어머니가 있는 한, 언젠가 아들이 하나님께 돌아올 것이라고 확신하며 기도했습니다. 당대 학식과 덕망이 높았던 암브로시우스 감독에게 어거스틴을 소개해서 신앙의 회복을 도왔습니다. 어머니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컸습니다.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와 믿음 대로 어거스틴이 스스로 성경을 읽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신앙의 세계로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루는 어거스틴이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고뇌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때, 정원 밖에서 “들고 읽으라”는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성경을 펼쳐서 읽었는데 로마서 13장 13절(“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라”)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이 어거스틴 인생에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은 훗날 그 순간을 회고하면서 “확실성의 빛”이 자신에게 들어왔다고 고백했습니다. 세상을 쫓던 어거스틴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된 순간입니다.

 

우리도 어거스틴처럼 하나님을 확실히 만나기 원합니다. 크고 작은 전환점을 통해서 매너리즘을 벗고 하나님 앞에서 확신과 소망으로 살기 원합니다.-河-

일체의 비결

빌립보서 말씀을 공부하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지난 4개월여에 걸쳐서 빌립보서 말씀을 온 교회가 함께 읽었습니다. 특별히 마음깊이 다가오신 하나님 말씀이 있다면 잘 간직하셔서 앞으로의 신앙과 인생길에 생명의 양식으로 삼으시길 바랍니다.

 

감옥에 갇힌 채로 자신의 안부와 헌금을 갖고 바울을 방문했던 에바브로디도 편에 편지를 써서 빌립보 교회에 전달했습니다. 바울을 방문하러 와서 에바브로디도도 죽음에 이를 정도로 아팠지만 회복되어서 바울의 편지를 갖고 빌립보 교회로 돌아갔고, 교회 앞에서 읽어주었을 것입니다.

 

편지 마지막에 바울을 자신을 향한 빌립보 교회의 호의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바울을 생각하며 기도해 주었고, 헌금을 거둬서 바울에게 전달했기 때문입니다. 편지 첫 부분에 의하면 바울도 감옥에서 빌립보 교회를 잊지 않고 항상 기도했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줄것이 없지만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랑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이상한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바울을 비난하고 자기들이 정통이라고 말하는 와중에도 빌립보 교회는 바울을 잊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사랑을 느낀 바울이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했습니다.

 

물론, 바울에게 물질이 중요하지 않았고 헌금에 깃든 빌립보 교회의 사랑에 감사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필요를 채워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이 세상의 삶이 어떻게 전개되고, 그가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그 안에서 생활하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와 함께 하시고 능력을 주시면 어떤 일도 가능함을 몸소 체험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4:13)는 유명한 말씀이 본문에 등장합니다. 이것은 때때로 우리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능히 해 낼수 있다는 긍정의 힘을 주는 말씀으로 읽곤 합니다. 그런데 본문을 살펴보면, 바울이 예수님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음은 물질의 많고 적음, 죽음과 삶을 뛰어넘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음을 알리는 말씀입니다.

 

배부름과 배고픔, 풍부와 궁핍이 그에게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자신에게는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외에는 배설물로 여긴 바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신앙과 삶의 축을 그리스도와 교회로 옮기도 나니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때 자신에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담대히 고백했습니다.

 

우리에게 바울이 터득한 일체의 비결을 갖고 있다면 삶이 얼마나 자유롭고 행복할까요! 세상에 매이지 않고 예수님께 붙잡힌 멋진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일체의 비결을 터득한 참빛 식구들 되길 기도하겠습니다.-河-

속도를 낮춥시다

저는 그리 빨리 운전하는 편이 아닙니다. 제한속도를 지키거나 아무리 빨리 달려도 제한속도에서 10마일 이상을 넘기지 않습니다. 차선도 자주 바꾸지 않고 될 수 있으면 같은 차선을 달립니다. 옆에 있는 아내는 제 운전습관에 익숙하지만, 종종 운전을 아주(?) 잘하는 분께서 옆자리에 타시면 답답해하시는 모습이 역력합니다. 그러면 장난기가 발동해서 슬쩍 액셀러레이터를 밟습니다. 차선도 바꿔봅니다. 운전을 못 해서 늦게 가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안전운전을 하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제한 속도를 지켜서 운전하는 것이 편합니다. 속도를 내면서 급하게 달려가도 나중에 보면 별 차이가 나지 않고 자칫 교통 티켓에 벌금 폭탄을 맞기 십상입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빨리빨리”에 익숙합니다. 자판기에 동전을 넣고는 뜨거운 커피가 내려오는데도 손으로 종이컵을 잡고 기다립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문이 저절로 닫히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몇 번씩이나 “닫힘” 버튼을 누릅니다. 일종의 조급증입니다.

 

마찬가지로 인생길을 걸으면서도 서두를 때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에 비해서 뒤처졌다고 느끼거나 남들보다 훨씬 뛰어나기 위해서 경쟁심이 발동할 때 서두르게 됩니다. 지금 서두르지 않으면 기회를 놓칠 것 같은 초조감도 한몫 합니다. 지나치게 서두르다 보면 실수하게 되고 자칫 서두른 대가를 지불하게 됩니다.

 

인생길을 걸어가면서 때때로 속도를 낮출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적합한 속도로 주어진 인생길을 가는 것입니다. 곁눈질하지 않고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방향을 향해서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오스 기니스라는 분은 그의 책 <소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쫓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 앞에서 사는 것이다. 그것은 ‘코람 데오(coram deo,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사는 것이며, 청중을 의식하는 데서 돌이켜 오직 최후의 청중이요 최고의 청중이신 하나님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의미 있는 인생을 사는 것이 부르심을 쫓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스 기니스의 말을 실제 삶 속에서 실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보다 사람과 세상을 의식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칭찬은 사람의 칭찬처럼 귓전을 울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뤄가는 소명을 보고 계신다는 확신을 갖는 것도 어렵습니다. 그러니 “최후의 청중이요 최고의 청중이신 하나님”보다 사람을 의식하곤 합니다. 무엇보다 조급할 때 그렇습니다.

 

조급하게 세상을 쫓아가느라 애쓰지 않고 자신의 속도를 유지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자신을 돌아보는 내적 성찰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삶을 내려놓고 말씀과 기도로 점검하는 시간도 필요합니다. 의식적으로 삶의 속도를 낮춰보는 것입니다. 속도를 낮추지 않으면 자신을 돌아볼 틈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끔은 인생의 엔진을 완전히 끄고 쉼을 가질 필요도 있습니다. 시끄러운 세상으로부터 차단된 자신만의 골방에 들어가서 삶을 돌아보고,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을 대면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읽고 그 말씀 앞에 자신의 삶을 드러내는 순간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깊은 침묵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힘든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고 답답한 심정을 하나님께 토로하면서 삶을 조율합니다. 침착하게 자신이 가야 할 인생길의 방향을 잡아가고 속도를 조절합니다. 속도를 낮추고 쉴 때 가능한 일입니다.

 

오스 기니스는 그의 다른 책 <인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인생을 살아갈 때, 우리는 모두 창조자이자, 예술가이자, 기업가다. 이것이 바로 인간으로서 우리가 지닌 소명의 핵심이다.”

 

어느덧 올해도 석 달 남았습니다. 세 달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또다시 조급해집니다. 그동안 최고의 속도로 여기까지 달려왔다면, 남은 석 달은 속도를 낮추고 하나님께서 주신 삶을 마음껏 즐기고 음미해 봅시다. 유일하신 청중이신 하나님 앞에서 소명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창의적이고 아름답고 알찬 인생을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2018년 9월 27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