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덕끄덕

좋은 아침입니다.

 

1.
수요예배에서는
구약성경 레위기를 읽고 있습니다.

 

레위기라는 말은
“레위인과 관련된”이라는 뜻의 라틴어
<레비티쿠스 Leviticus>에서 왔습니다.
영어도 제목도 <Leviticus>입니다.

 

이스라엘에서 레위인들 또는 레위 지파는
제사장 지파로서
광야 시대에는 성막에서
솔로몬 이후에는 성전에서 제의를 전담했습니다.

 

레위기는 제목에 걸맞게
레위인들 즉 제사장들과 더불어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 제사와 관련된 규정들이 많습니다.

 

2.
지난 3주 동안 배운 레위기 첫 세 장에는
소, 염소와 양 그리고 새를 불에 태워 드리는 번제(burnt offering)
곡식을 빻거나, 조리해서 드리는 소제(grain offering)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표시로 드리는 화목제(peace offering)가 나옵니다.

 

희생 제물은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기에
소와 양에게 안수하면서
우리의 허물과 죄는 물론, 우리 자신을 제물에게 이전시킵니다.

 

제물을 준비하는 모든 과정이 매우 세심했습니다.
제물을 직접 죽이고 (죽음은 꼭 필요했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연결됨)
가죽을 벗기고, 제물을 정성껏 분리해서 제사장에게 전달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 나오는 예배자의 마음과 자세를 새롭게 배웠습니다.

 

3.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 소, 양과 염소, 새,
그리고 곡식까지 다양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소를 제물로 드리는 것은
대가족이나 부족의 경우나 가능했을 것입니다.
양과 염소를 제물로 드리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대부분 서민은 새나 곡식을 갖고 왔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떤 제물을 드리든지
레위기에서 알려주는 절차를 지켜서 제물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향기가 됩니다.
제물에 차별이 없었습니다.

 

화목제로 드리는 예물은
하나님께 드리는 내장의 기름(당시는 최상의 것)과
콩팥(고대 사회에서는 마음의 자리라고 생각함),
그리고 제사장 몫을 제외하고
화목 제사를 드린 당사자들이 나눠 먹습니다.

 

감사의 예물을 드린 후에
거룩한 제물을 갖고
다 함께 모여서 기쁨의 식탁교제를 갖는 것입니다.

 

4.
레위기의 제사법들은
우리 신앙이 과하거나, 분에 넘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이해할 수 있는 영역임을 알려줍니다.

 

신앙을 지나치게 신비롭고 특별한 것으로 만들다가
상식과 합리성을 잃어버리는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특별한 것은 자연스럽고 상식적이라는 사실을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누구나 고개를 끄덕끄덕 하면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올 수 있을 것입니다.

 

기념물로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레 2:2)

 

하나님,
우리의 신앙이 자연스러우면서
하나님 기뻐하시는 향기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11. 10 이-메일 목회 서신)

두려워하지 말라 (9)

섭리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10장은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이들을 세상에 보내시면서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부탁하시는 말씀입니다. 장차 제자들은 세상의 미움을 받고 심지어 세상 임금들 앞에 끌려갈 것입니다. 그래도 성령께서 함께하실 것이니 어떤 상황 속에서도 신앙을 지킬 것을 부탁하십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10:1-23절).

 

앞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고난의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두고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이라고 했으니 예수님과 한 가족이나 다름없는 제자들에게 험한 말을 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때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의 주인 되신 하나님만 두려워할 뿐입니다.

 

첫째로, 감춘 것이 모두 드러나고, 숨은 것이 모두 알려질 것입니다.  결국에는 무엇이 진리이고 누가 옳은 지 확실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미움과 비난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담대하게 예수님의 말씀을 세상에 선포해야 합니다. 어두운 데서 들은 것을 밝은 데서 말하고, 귓속말로 들은 것을 큰 소리로 외쳐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 사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그것을 세상에 알리라는 말씀입니다.

 

둘째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몸은 결국 죽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몸과 삶은 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죽음 이후를 주관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고, 몸과 영혼을 모두 지옥에 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이 세상의 삶을 뛰어넘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실 것이기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까지 아십니다. 참새는 작고 헐값에 팔리는 새입니다. 앗사리온은 우리 식으로 페니에 해당합니다. 영원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이 참새 두 마리의 거래 가격까지 아십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아주 작고 하찮은 곳까지 임한다는 뜻입니다. 심지어 머리카락까지 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가장 작은 것까지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우리는 참새보다 귀합니다. 그렇다면 참새까지 돌보시고 머리카락까지 세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다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시인할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인정하고 함께하실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 담대하게 하나님 백성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크신 하나님께서 작고 작은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참새 한 마리와 머리카락까지 세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을 믿기에 큰 것은 물론 작은 것까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할 뿐입니다.-河-

재난 가운데

1.
지난 주말,
조국 대한민국에서 엄청난 참사가 있었습니다.

 

팬데믹 이후,
마스크를 벗고 맞이한 핼러윈 주말에
150명이 넘는 아까운 청춘이 목숨을 잃었으니 말입니다.

 

핼러윈 날에 대해서 부정적인 기독교인들은
감정이입 없이 나름 냉철하게(?) 이태원 참사를 판단했을 것입니다:
“왜 핼러윈을 지킬까? 왜 그곳에 갔을까? 쯧쯧”

 

물론, 내 자식이, 형제자매가, 친구가 그곳에 가서 희생되었다면
참사를 바라보는 관점은 180도 바뀌었겠지요.
조금 미숙하고 이기적 관점입니다.

 

사고 전체를 관망하듯이 보지 말고
사고 속으로 들어가서
희생당한 분들의 마음을 자세히 살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이웃의 아픔과 슬픔에 동참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세심함이 요청됩니다.

 

2.
하루는 몇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갈릴리 지방에서 일어난 특별한 소식을 전했습니다.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을 죽여서
그 피를 제물에 섞는 짓을 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런데 이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은
빌라도에게 죽은 사람들이
그럴 만한 죄를 지었을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하나님께 벌을 받았다고 속단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런 비통한 일을 당했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의외의 답변을 하십니다:
“너희들, 죄가 작아서(없어서) 살아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죽은 사람들에 죄를 덮어씌우는 것은 나쁜 것이다.”
누구든지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실로암 망대 사고를 아실 정도로
시사에 밝으셨고 세상일에 관심을 갖고 계셨습니다.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서 죽은 열여덟 명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보다 죄가 더 커서 죽었겠냐고 반문하시면서
“No, 아니라”고 강력히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죄와 상관없는 재난입니다.
일종의 사고였습니다.

 

그것을 보고 죽은 사람에게 죄인 프레임을 씌우고
살아있는 자신들이 의로운 척,
무엇보다 살아있어서 감사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일침을 가하신 것입니다.

 

의기양양하게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은
멋쩍어서 자리를 떴을 것입니다.

 

3.
두 가지 사건 모두에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단어가 있습니다.
“회개”입니다.

 

누구도 회개하지 않으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죽음(“이같이 망하리라”)은
사고와 희생으로 죽은 특정한 죽음이 아니라
누구나 가는 죽음의 길을 가리킵니다.

 

재난 또는 사고를 보면서 자기의 의로움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보편적인 길을 떠올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삶을 다시 조율하라는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대명제 앞에 겸손하고
적극적으로 회개하라는 당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회개를 두고,
빌라도와 같은 악한 인물이 사라지는 것,
실로암 망대를 허술하게 지은 건축가들이 대가를 치르는 것,
백성들이 마음 놓고 생활할 수 있는 사회 안전망이 확보되는 것을 생각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처럼
찍어 버리게 될 것이라는 경고도 기억합니다(눅13:6-9).
여기서 무화과나무는 개인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임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4.
자연재해 또는 사고와 같은 참사는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님도 그것을 두고 정죄하지 않으시고,
살아남은 자들에게 회개라는 커다란 의무를 부여하셨습니다.

 

유가족들에게 주님의 위로가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은 분들에게 완전한 쾌유가 임해서
더욱 씩씩하고 떳떳하게 세상을 살아가시길 기도합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눅13:5)

 

하나님,
우리가 사는 세상을 긍휼히 여기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11; 3 이-메일 목회 서신)

종교개혁 주일에

지금부터 505년 전인 1517년 10월 31일.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95개조의 반박문을 공포한 날입니다. 가톨릭교회에서 모든 성자를 기념하고 추모하는 만성절(All Saint’s Day) 전날입니다.

 

비텐베르크 대학 교수였던 마틴 루터는 95개조 반박문에서 가톨릭교회가 면죄부를 팔고 교황에게 신적 권위를 부여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무엇보다 교회와 성직자들의 타락이 성경에서 말하는 올바른 신앙과 교회의 모습이 아니라고 조목조목 비판했습니다.

 

마틴 루터가 발표한 95개조의 반박문 가운데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5.교황은 그 직권 혹은 교회법의 위세로 부과된 형벌 이외의 어떤 벌이든지 용서할 힘이나 뜻(意志)을 가지지 못한다. 27.연보궤 안에 던진 돈이 딸랑 소리를 내자마자 영혼은 연옥에서 벗어 나온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의 학설을 설교하는 것이다. 43.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필요한 사람에게 꾸어 주는 것이 면죄증을 하는 것보다도 선한 일이라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95.이같이 하여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위안에 의해서보다 오히려 많은 고난을 통하여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데 더욱 깊은 신뢰를 가지게 하라(행 14:22).

 

루터 외에도 가톨릭교회를 비판한 선구자들이 있었습니다. 존 위클리프는 사제들의 전유물이었던 성경을 번역했습니다. 성경을 번역한 것이 이단이라면서, 죽은 지 31년 만에 무덤이 파헤쳐지는 치욕을 당했습니다. 위클리프에 영향을 받은 얀 후스는 면죄부의 부당함과 교황의 권위에 반대하다가 불에 타서 죽었습니다. 땅에 떨어져서 죽은 한 알의 밀알과 같은 교회사 속의 인물들입니다.

 

거기에 구텐베르크에 의해서 발명된 인쇄술의 발달로 루터가 제기한 95개조의 반박문이 인쇄물로 제작되어 세상으로 퍼져 나갔고, 훗날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성경도 일반 백성들에게 손쉽게 보급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시대의 흐름 외에도 루터의 종교 개혁을 지지하는 비텐베르크 교수와 학생들, 멜랑톤과 같은 동지들, 루터를 보호하던 당시의 프레더릭 선제후 등의 후원자들이 있었습니다.

 

원래 루터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법률가의 길을 걷다가 우연한 기회에 수도사가 되기로 결단하고 사제의 길을 걸었습니다. 하지만, 루터에게는 온전한 신앙에 대한 고민이 있었습니다. 자기 안에 있는 죄의 문제와 씨름했습니다. 기도와 성경 읽기, 참회와 선행 등을 통해서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길 기대했지만, 루터에게 평안함은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루터는 자신에게 의롭게 될 가능성이 없고 낯선 의가 손님처럼 찾아왔을 때 그 은혜로 의롭게 됨을 깨닫게 됩니다. 여기서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이라는 종교 개혁의 캐치프레이즈가 나왔습니다. 개인의 고민이 세상을 바꾸는 씨앗이 되었고, 교회의 잘못을 세상에 알린 용기 있는 행동이 교회는 물론 세계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물론, 루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河-

각자의 자리에서

좋은 아침입니다.

 

1.
20여 년 전
아미쉬 마을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비포장도로가 우리를 반겼습니다.
비가 부슬부슬 내려서 주민들이 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빨랫감 같은 것을 등에 지고 가는 여성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집 옆에는 염소 같은 가축우리가 있었습니다.

 

문명의 이기와 담을 쌓고
자기들만의 삶을 고수하는 아미쉬들이
왠지 안ㅆ,러워 보였습니다.

 

무엇보다,
부모의 결정으로 아미쉬가 된
청년들과 아이들이 조금은 불쌍해 보였습니다.

 

세상에서 격리되어 살아가는
아미쉬의 생활 방식이 옳다고 동의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때는 그랬습니다.

 

2.
엊그제 유튜브 첫 화면에
3백만 뷰가 넘은 아미쉬 마을 영상이 등장했습니다.

 

70여 명의 아미쉬 마을 청년들이
힘을 합쳐서 큰 건물을 옮기는 장면이었습니다.
수십명의 청년들이 특별히 고안된 구조물 사이에
자리를 잡고, 지휘자의 지시에 따라서
큰 건물을 옮기는데 왠지 그들이 행복해 보였습니다.

 

머리 모양과 옷차림은 비슷했지만,
머리에 최신식 선글라스를 장착하고
신나게 건물 이동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20-30대 청년 같았습니다.

 

20여 년 전 아미쉬 마을을 방문했을 때는
그곳에 사는 분들이 왠지 안쓰러웠는데
유튜브 영상에서 본 아미쉬 청년들이 행복해 보였습니다.

 

3.
그때만 해도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행복한 삶에 관한 기준이 분명했습니다.
일종의 고정관념입니다.

 

20여 년이 지나고, 팬데믹을 거치면서
개인의 삶이 중요해졌습니다.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것보다
자기만의 개성있는 삶을 추구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아미쉬 마을에서 살아가는 청년들의 모습을
새로운 시각에서 보게 된 것입니다.

 

물론, 아미쉬를 비롯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내부인의 시각과 외부인의 시각,
또는 편집된 유튜브 영상의 시각에 따라 다를 수 있겠습니다.

 

4.
수십 명이 수작업으로 건물을 옮기는
아미쉬 청년들을 보면서 교회 공동체를 생각했습니다.

 

참빛 식구들이 각자의 삶을 살아갑니다.
예전에는 교회 안에서 획일적인 신앙과 삶을 강조했지만,
이제는 각각 지체들의 개성 있는 신앙과 삶을 존중합니다.

 

동시에 아미쉬 마을 청년들이 건물을 옮기는 데 힘을 합치듯이
함께 이뤄 가야 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는 힘을 합칩니다.
개인과 공동체의 조화라고 할까요!

 

빠르게 변화되는 세상을 따라잡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바빌론의 다니엘이 그랬고
이집트의 요셉이 그랬듯이 살아남아야 합니다.

 

오늘도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만의 특별한 삶을 사시는 참빛 식구들을 응원합니다.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빌 2:4)

 

하나님,
각자의 자리에서 멋지게 살고
모이면 힘을 합쳐서 멋진 공동체를 세우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10. 27 이-메일 목회 서신)

두려워하지 말라 (8)

다니엘 (2)

 

바빌론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서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과 세 친구는 이름이 바뀌고 바빌론 언어와 학문을 배우면서까지 그곳에서 살아남았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제국입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학문과 일입니다.

 

다니엘이 바빌론 제국에서 야훼 하나님을 믿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다니엘과 세 친구는 뜻을 정해서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다니엘을 도우셨고, 죽을 위기에서 구출해 주셨습니다.

 

다니엘은 바빌론과 페르시아 제국에서 높은 지위에 올랐고 제국의 통치를 도왔습니다. 높은 지위에 올라가서도 야훼 하나님이 바빌론의 신 마르둑보다 크신 분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처럼 다니엘은 결코 제국에 맞서지 않았습니다. 폭력을 사용해서 제국을 무력으로 무너뜨리고 신앙을 지키는 일은 절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바빌론이라는 제국에 순응했습니다. 대신, 하나님 앞에서 뜻을 정하고, 목숨 걸고 신앙을 지키면서 살아남았습니다.

 

바빌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지도하에 성전을 다시 짓고 예루살렘 성곽을 복구했습니다. 새로운 각오로 다시 시작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이스라엘이 다시 타락합니다. 예전의 나쁜 버릇을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페르시아에 이어서 알렉산더 제국이 예루살렘을 비롯한 팔레스타인 지역을 다스립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보다 제국의 눈치를 보면서 권력을 독점하는 데 혈안이 됩니다. 그때도 순수하게 신앙을 지키려는 하나님 백성들이 있었습니다.

 

다니엘서가 빛을 발한 것은 주전 2세기 알렉산더 대제를 계승한 안티오커스 4세가 예루살렘을 통치할 때였습니다. 성전 제사를 금지하고, 헬라 종교와 문화만 신봉하도록 강요했습니다.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300여 년 만에 찾아온 가장 큰 신앙의 위기였습니다.

 

다니엘은 일찍이 이스라엘에 닥칠 어려움을 환상 가운데 보고, 하나님 앞에서 처절하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찾아오셔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다니엘의 간구를 처음부터 듣고 계셨다고 확인해 주시면서, 미가엘 천사를 동원해서 악한 세력을 심판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이 묵시의 시대를 사는 하나님 백성에게 큰 힘이 된 것입니다.

 

다니엘의 삶과 다니엘서의 예언은 박해 속에서도 신실하게 신앙을 지키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위로와 힘이 되었습니다. 때로는 다니엘처럼 목숨 걸고 신앙을 지켰습니다. 때로는 문화에 동화되면서 살아남았습니다. 이처럼 다니엘서 말씀은 세상 속에서 구별된 삶을 살려는 그리스도인들과 힘겹게 신앙을 지키는 하나님 백성들에게 지혜와 용기를 줍니다.-河-

착각

좋은 아침입니다.

 

1.
그동안 몸이 편치 않으셔서
예배에 오지 못하시던 권사님 댁을 방문했습니다.

 

저를 보자마자
“목사님, 얼굴이 마르신 것 같다”고 하십니다.

 

체중에 변화가 없는데 아무래도 머리숱이 적어지고
얼굴에 살짝 주름이 생기니 말라 보였던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종종 듣는 인사말이어서
권사님 말씀이 새삼스럽지 않았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젊었을 때의 모습은 조금씩 조금씩 사라지고
육십 대의 모습이 새록새록 나타납니다.

 

사진을 찍으면
상상하던 제 모습이 아니라
젊은(?) 노인이 사진 속에 있습니다.
자연스레 사진 찍히는 것을 피하게 됩니다. ㅎㅎ

 

세월을 거스를 수 없습니다.

 

2.
지난 주일에
교회 식구들과 축구 경기를 했습니다.

 

하루라도 젊었을 때
조금이라도 더 하고 싶은 운동이 축구이기에
교회 정리를 아내에게 맡기고 운동장으로 달려갔습니다.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공 차는 것을 즐깁니다.
공을 찰 수 있는 지금이
제 인생에서 가장 젊은 시간이니까요!

 

어느덧 우리 자녀들이 커서 제법 공을 잘 찹니다.
축구 클럽에서 공차는 법을 배운 아이들은
발 재간까지 좋습니다.

 

팬데믹 전만 해도
아빠를 귀찮게 하던 아이들인데
이제는 아빠와 함께 경기에 몰입합니다.
축구 실력이 이제 곧 아빠들을 추월할 기세입니다.

 

저는 반대입니다.
마음은 펄펄 날고 싶지만, 몸이 따르지 않습니다.
공을 찬 다음 며칠 동안 찾아오는
온몸의 통증을 생각하면 달리다가도 발이 멈춥니다.

 

한 세대가 가면,
또 새로운 세대가 오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늘 젊을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3.
거울을 보기 전까지는
제가 젊은 줄로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날렵하게 움직이면서 공을 차는 모습을 상상하곤 합니다.

 

착각입니다.
운동장에서 뛰어다니는 모습도 기우뚱기우뚱,
그리고 헛발질이 잦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엇박자를 내면 안 됩니다.
젊은이가 노인처럼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도,
노인이 여기저기 참견하며 수선을 떠는 것도
착각이고 엇박자입니다.

 

솔직한 자기 모습,
자기가 처한 환경과 처지를 알아내고
그에게 맞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인생을 사는 지혜일 것입니다.

 

매사에 때가 있다는 전도서 말씀이 생각납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전도서 3:1,11)

 

하나님,
주님께서 보내신 자리에서
최고로 행복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10. 20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