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 (6): 룻과 보아스 1 / 룻기 2:1-7
룻과 보아스
룻기에는 세 명의 중요한 인물이 나옵니다. 첫째는 모압 여인 룻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자기 나라로 피난 온 가정의 아들과 결혼했는데, 그만 병약한 남편이 먼저 죽고 시어머니와 함께 지냈습니다. 시어머니가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올 때, 룻은 끝까지 시어머니 나오미를 붙좇았습니다. 특별한 충성이었습니다.
둘째로 시어머니 나오미입니다. 룻기 1장의 주인공이 나오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남편 엘리멜렉을 따르는 여성이었지만, 남편과 두 아들이 죽으면서 <에솃 하일, 용맹한 여성>이 됩니다. <마라> 쓰디쓴 인생을 살면서도 며느리 룻과 함께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용기도 남달랐습니다.
세 번째 인물은 룻기 2장(막)에 등장하는 보아스입니다. 보아스는 “유력한 자”라는 소개에 걸맞게 베들레헴에서 명성과 부 그리고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인물입니다. 본문에서는 용맹한 여성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솃 하일”과 짝을 이루는 “이쉬 깁보르 하일”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깁보르”는 전쟁에 나가는 용사, 또는 부와 명예를 갖고 있는 인물을 가리킵니다. “하일”은 힘이 있다는 뜻이고 “이쉬”는 남성입니다. “유력한 자”라는 한글 번역 그대로입니다.
보아스는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척이었습니다. 보아스는 <깁보르 하일, 힘 있는 자>라는 이름 뜻대로 베들레헴에서 유력한 집안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보아스가 베들레헴에 있는 자기 보리밭에 도착해서 일꾼들에게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4절)고 인사합니다. 일꾼들 역시 보아스를 향해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4절)로 응답합니다. 주인 보아스와 일꾼들 간의 관계가 꽤 훌륭합니다. 보아스는 유력한 인물이지만, 사리 분별이 확실하고 친절하며 약한 자들을 배려하는 선한 성품을 갖고 있습니다.
베들레헴에 돌아온 나오미와 룻의 삶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오미는 사람들에게 솔직하게 자기 사정을 말했지만, 실제로 닥친 어려움에 마음과 삶이 무너지고 살길이 막막했을 것입니다. 그때 룻이 나섭니다. 룻이 <에솃 하일, 용맹한 여성>이 됩니다. 룻기 1장에서 행동하는 사람이 나오미였다면, 2장으로 오면서 나오미는 조언하고 룻이 행동합니다. 마침 보리 추수 때이니 들에 나가서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에게 허락된 보리 이삭을 주워 오겠답니다. 나오미는 담담하게 허락했습니다. 그리고 룻이 찾아간 곳이 바로 보아스의 밭이었습니다.
이렇게 룻과 보아스의 인연이 시작되고 하나님의 손길(섭리)이 나오미, 룻, 보아스 위에 임하기 시작합니다. 우연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을 믿는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간섭입니다. -河-
좋은 아침입니다.
1.
“하루에 한 가지”는
아마도 가장 구태의연한 표현(cliché)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영어 공부를 할 때는
하루에 한 가지 영어 표현만 배워서 익히면
불과 몇 년 안에 영어 도사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루에 열 단어 외우기도 별책 부록처럼 따라다녔습니다.
한창 성령이 충만할 때는
하루에 한 구절 성경 암송에 도전했습니다.
하루에 성경을 세 장씩만 읽으면,
일 년에 성경을 통독하는 것은 물론입니다.
작은 일 한두 가지를 지속해서 하면
그것이 모여서 큰 업적을 이루는 것이 사실입니다.
작심삼일, 결심한 것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입니다.
2.
하루하루를 살지 않고
건너뛸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하루살이 인생길을 예외 없이 걷고 지나야 합니다.
인생은
하루 (1일)라는 작은 벽돌이 모여서
전체를 이루고 세워가는 건축물 같습니다.
그러니 아래부터 차근차근 쌓아가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기초가 튼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매사가 그렇습니다.
직장이나 사회생활도 마찬가지여서
아래부터 차근차근 위를 향해서 올라간 사람은
일의 전후 사정을 모두 파악하고
아래 사람의 어려움을 깊이 공감합니다.
반면,
낙하산처럼 갑자기 윗자리에 앉은 사람은
일의 순서는 물론, 함께 일하는 동료들의 애로사항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3.
코로나 팬데믹으로
집에서 포로가 되어 지낸 지 정확히 일 년이 지났습니다.
하루하루를 살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흩어져서 예배한 지도 일 년이 지났습니다.
지난 일 년 동안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한 참빛 식구들이 많습니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정해진 것도 없습니다.
작년 이맘때, 팬데믹이 이렇게 길어질 것을 예상했다면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과연 일 년을 견딜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과 염려에 휩싸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데 한주 한주 영상으로/zoom으로 만나다 보니
일 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참빛 식구들 대부분이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계십니다.
하루하루 작은 벽돌의 힘이요 하나님 은혜입니다.
4.
힘들수록, 지루할수록
우리가 걷는 인생길을 잘게 잘게 끊어서
생각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해결하려고 하면
도리어 부담이 되고 막막한 마음에 실망합니다.
하루를 길게 펼쳐 놓고, 꼼꼼히 채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찬송가 545장 가사가 생각납니다: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믿음만을 가지고서 늘 걸으면
이 귀에 아무 소리 아니 들려도/하나님의 약속위에 서리라.
걸어가세 믿음 위에 서서/눈과 귀에 아무 증거 없어도.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애가 3:23)
하나님,
오늘 하루도
주의 성실하심을 경험하고 그것으로 하루를 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1. 3. 11 이-메일 목회 서신)
마라: 쓰디쓴 인생
구약성경 룻기의 시작은 나오미가 자신을 부르듯이 “마라” 즉 쓰디쓴 인생길입니다. 베들레헴의 유력한 가문의 가장 엘리멜렉이 아내와 두 아들을 이끌고 모압 땅으로 가면서 생긴 마라의 삶입니다. “나의 하나님은 왕이십니다”라는 이름을 가진 엘리멜렉입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셨다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자신의 인생을 맡기고 살았던 엘리멜렉입니다.
그의 아내 나오미는 “나의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것이 완벽할 수 없다고 두 아들은 건강이나 능력 면에서 조금 부족했지만, 훌륭한 남편을 만났습니다. 무엇보다 물질적으로 풍족해서 베들레헴에 가뭄이 들기 전까지 기쁨의 삶을 살았던 나오미입니다.
그런데 집안의 가장 엘리멜렉과 상속자 두 아들이 모압 땅에서 죽고 나오미 혼자 남았습니다. 모압 출신 두 며느리가 있었지만,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를 끝까지 따르기 전까지 그들은 모압 여인이었습니다. 나오미에게 닥친 엄청난 고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남의 이야기를 쉽게 하는 분들은 나오미 가족이 약속의 땅을 버리고 모압으로 이주한 것에서 원인을 찾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두 번씩이나 이방 땅으로 이주했지만, 그것이 도리어 전화위복이 되었으니 나오미가 모압으로 이주해서 어려움을 겪었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남에게 닥친 고난을 쉽게 생각하고, 단순하게 정죄하는 성향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설교 시간에 나오미에게 닥친 고난을 우연(랜덤/random)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나오미 자신은 하나님의 손이 자신을 쳤고(1:13),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벌을 내리셨고 괴롭게 하셨다고 말합니다(1:20-21). 누구나 어려움이 닥치면, 나오미처럼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그렇게 정죄하는 것은 조심할 일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에서 쫓겨나면서,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고생길이 되고 말았습니다. 질서가 깨지고, 악이 판을 치고, 세상 사람들은 자기 좋을 대로 행하는 사사 시대의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앞으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면 현재의 고난과 악은 사라지고 다시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낙원이 회복되겠지만, 그것은 우리 마음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는 소망입니다.
일단 우리의 삶은 힘겹습니다. 나오미가 아니라 마라의 삶을 사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닥치는 고통을 어떻게 맞이하고, 그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고, 기독교인답게 살아가느냐입니다. 앞으로 펼쳐질 룻기를 통해서 우리가 배울 교훈이랍니다.-河-
좋은 아침입니다.
1.
가끔 고속도로를 운전하다 보면
배트맨 영화에 나올 법한 자동차를 만납니다.
그 위용에 “와”하는 탄성이 나옵니다.
아우디를 만드는 폭스바겐 계열사인
이태리제 “람보르기니/Lamborghini”라는 자동차입니다.
람보르기니는
또 다른 이태리제 고급 차인 페라리와 쌍벽을 이룹니다.
“무조건 페라리를 이겨라”는 창업자의 구호에 따라
람보르기니가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정말 멋있습니다.
물론 가격도 우리 같은 서민은 언감생심 근처에도 갈 수 없는
최하 20만 불에서 최고 3백만 불에 이릅니다.
2.
엊그제 미국 공용방송 NPR에
“폼페이 람보르기니 발견”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폼페이는 주후 79년
나폴리 연안에 있던 베수비오 화산이 갑자기 폭발하면서
2천여 명이 목숨을 잃고, 도시 전체가 화산재에 덮였습니다.
16세기부터
폼페이 유적발굴이 시작되었는데
화산재를 맞고 얼음처럼 굳어버린 연인들,
거리의 주민들, 동물들의 형상이 유명합니다.
이번에는
폼페이의 람보르기니라고 불릴 정도의
호화스러운 전차 유물이 발견된 것입니다.
그동안 발견된 폼페이의 마차들과 차원이 다른 최고급 전차랍니다.
유물을 발견한 사람들이 얼마나 깜짝 놀랐으면
이태리 람보르기니를 생각해 냈을까요!
그런데
보도된 사진을 보니2천여 년이 지나면서 녹이 슬었습니다.
고고학자들이 아니라면 그 고급스러움을 알아채기 힘들게 변했습니다.
3.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최고급 승용차 람보르기니를 보면서
누가 저런 차를 타고 다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2천 년 전,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폼페이를 헤집고 다니던 당시의 최고급 전차를 보면서
그때 사람들도 같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2천 년이 지나고 나니,
그때의 위용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3백만 불이 넘는 이태리제 람보르리니도 언젠가는 같은 길을 가겠지요.
어제 읽은 마태복음 19장 23절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기보다 어렵다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4.
지금도 고속도로를 누비는 21세기 람보르기니,
화산재로 덮이기 전까지 폼페이를 누렸던
폼페이의 람보르기니를 보면서
우리의 시선과 마음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다시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 생명, 복음, 그리고 사랑과 섬김
– 요즘 세상에서 잊혀 가는 가치들을 다시 붙잡고 싶습니다.
내 마음속의 람보르기니를 지우고
시간이 가도 절대 변하지 않는 “영원”을 살고 싶습니다.
우리의 삶이 어떠하든지
작은 것까지 소중히 여기고,
그 안에 깃든 창조주 하나님의 손길(섭리)을 발견하기 원합니다.
참새 한 마리가 얼마에 팔리는지,
우리 머리카락까지 세고 계시는 하나님의 마음속으로 들어가고 싶습니다.
핵심을 붙잡고 싶습니다.
행여나, 세상 풍조에 밀려서
가장 중요한 가치를 잃어버리지 않고
복음이 주는 지혜와 행복을 꼭 붙드는 사순절이길 바랍니다.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네가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도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잠언 3:15)
She is more precious than jewels, and nothing you desire can compare with her. (Prov 3:15)
하나님,
세상 흐름에 휩쓸려가지 않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1. 3. 4 이-메일 목회 서신)
베들레헴에서
4장으로 구성된 룻기는 각 장에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서, 룻기를 연극 무대에 올린다면 1장부터 4장까지 4막의 연극이 될 것입니다. 룻기 1장의 주인공은 나오미입니다. 나오미는 잠언 31장에 나오는 “에셰트-하일, 강인한 여성”입니다.
고향인 베들레헴에 가뭄이 들면서 나오미는 남편 엘리멜렉의 인도로 두 아들과 함께 모압 땅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습니다. 두 며느리와 셋이 살다가 고향 베들레헴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모압 며느리 룻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를 향한 룻의 충성이 돋보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나오미와 룻 모두 “에셰트-하일, 강인한 여성”입니다.
룻이 돌아온다는 소문을 듣고 작은 동네 베들레헴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온 동네가 떠들썩했을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은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온 나오미를 보고, “이 사람이 진정 나오미냐”(19절)고 수군거렸습니다. 여러 날을 며느리 룻과 함께 걸어서 왔으니 나오미의 모습은 더욱 더 형편없었을 것입니다.
나오미가 나서서 자신의 처지를 알립니다. 자신을 더 이상 “즐거운, 기쁜, 행복한”이라는 뜻의 나오미라고 부르지 말고 “마라(쓰디쓴)”로 부르랍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엘-샤다이)께서 자기에게 고통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풍족하게 모압으로 떠났는데 빈손으로 돌아온 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치신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을 나오미라고 부르지 말라고 부탁합니다.
알고 보니 나오미는 베들레헴의 유력한 가문이었습니다. 재산을 정리해서 넉넉한 자금을 갖고 모압으로 이주했습니다. “내가 풍족하게 떠나갔더니”라는 나오미의 말이 증명합니다. 그런데 빈털털이가 되어서 돌아왔습니다. 예전에는 풍족했는데 지금은 비었습니다. 나오미는 그 모든 것을 전능자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나오미의 말을 들은 베들레헴 사람들의 반응은 본문에 없습니다. 쯧쯧 혀를 차면서 나오미를 동정하거나, 무시하거나, 수군수군 비난했을 것입니다. 고향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벌을 주신 것이라고 속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오미의 과거는 화려했습니다. 그런데 모압에서 십여 년을 살고 돌아온 현재의 모습은 초라합니다. 현재는 아예 나오미가 없고 “마라”가 되었습니다. 인생의 가장 깊은 골짜기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오미의 새로운 모습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오미를 벌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나오미에게는 모압 며느리 룻이 있습니다. 앞으로 전개될 룻기 말씀이 흥미진진합니다. -河-
좋은 아침입니다.
1.
사순절(Lent)을 보내고 있습니다.
교회력에서 사순절은
부활절을 기다리는 매우 중요한 절기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사순절 기간 동안
금식하고, 기도하고 구제하면서
예수님의 3년 공생애부터 십자가 죽으심까지
예수님의 삶을 닮으려 애썼습니다.
부활절에 세례를 받기로 예정된 분들은
사순절 동안 세례 교육은 물론
기독교인의 삶을 연습하면서 세례를 기다리고 준비했습니다.
2.
사순절을
모든 것을 금지하고 참는
금욕의 시간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수도원이나 세상에서 따로 격리된 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가능할 수 있지만,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지나친 금욕은
자칫 위선적인 모습의 신앙이 될 수 있기에 조심해야 합니다.
사순절의 정신을
“절제 (self-control)” 정도를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그동안 지나칠 정도로 세상에 빠져 있었다면
삶의 축을 하나님께로 옮겨 놓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것에 몰두한 것이 있다면,
탐닉하는 것에서 빠져나와서 신앙과 삶의 균형을 잡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이런 저런 핑계로 무늬만 그리스도인인 경우가 있었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훈련(discipline)”도 사순절에 생각할 일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길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마라톤처럼 지루한 천로역정입니다.
훈련하지 않으면
중간에 포기하거나 대충대충 믿기 쉽습니다.
기도와 말씀, 사랑의 실천,
배려, 신중함과 지혜로움, 근사함 등등 –
신앙의 덕목을 훈련해서 몸에 익히기 원합니다.
3.
사순절은
1년 365일 가운데 십 분의 일에 해당합니다.
삶의 십일조를 드린다는 마음으로
2021년 사순절을 맞기 원합니다.
팬데믹으로 흩어져서 사순절을 보내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깊은 신앙,
웬만해서는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신앙,
누가 보아도 구별된 성도의 신앙을 훈련하고 장착하는 사순절이기 바랍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태 5:16)
In the same way, let your light shine before others, so that they may see your good works
and give glory to your Father who is in heaven. (Mat 5:16)
하나님,
사순절을 지나면서
참빛 식구들의 신앙이 깊어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1. 2. 25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