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로보니게 여인 (1): 두로와 시돈/ 마가복음 7장 24-30절
https://www.youtube.com/watch?v=zDg27LHrBQg
– 두로와 시돈
오늘부터 마가복음 7장(마태복음 15장)에 있는 수로보니게 여인과 예수님의 만남을 살펴보겠습니다. 수로보니게는 시리아-페니키아라는 지명으로 갈릴리 북쪽에 위치한 해안 지역입니다. 성경에 자주 나오는 두로와 시돈이 속한 곳입니다.
두로와 시돈은 서로 22마일 떨어진 지중해 연안의 해안 도시로 현재는 레바논에 속해 있습니다. 시돈은 창세기에서 노아의 아들 함의 후손 가운데 가나안의 아들로 등장합니다(창10:15). 마태복음에서 수로보니게 여인을 가나안 여인이라고 부른 것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마15:21-28). 예수님 당시에도 두로와 시돈은 가나안 즉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이방 지역이었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구약시대부터 해상 무역에 능한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솔로몬 왕이 성전을 지을 때 두로에서 백향목을 비롯한 목재와 기술자를 수입했습니다. 엘리야 시대에 선지자와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을 핍박하고 바알 종교를 전파했던 아합왕의 아내 이세벨은 시돈왕의 딸이었습니다. 이사야를 비롯한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때가 되면 두로와 시돈도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을 예고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실 때 두로와 시돈에서 온 사람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막3:8), 이스라엘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는 것을 보시고 두로와 시돈에서 복음을 전하셨다면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왔을 것이라고 탄식하셨습니다(눅10:13). 수로보니게 여인이 바로 이곳 출신입니다.
두로와 시돈이 본문의 지리적 배경이라면, 수로보니게 여인이 등장하는 마가복음의 전후 문맥도 특별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을 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의 전통을 무시하고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는다고 비난했습니다(막7:5). 그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종교 지도자들이 사람의 전통을 지키다가 하나님의 계명을 버렸다고 정곡을 찌르셨습니다. 사람의 몸, 즉 겉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막7:19-20).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않은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과 예수님께 나온 수로보니게 여인이 대조를 이룹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갈릴리 지역으로 돌아오셨을 때, 귀먹고 말을 더듬는 사람을 “에바다(열려라)” 외치시며 고치십니다(막7:31-37). 아무리 성경을 많이 알고 종교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어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귀가 있어야 합니다. 그에 비하면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을 보는 안목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말로 표현하는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수로보니게 여인에 대한 말씀을 나누면서 우리의 믿음을 점검하고 참된 마음으로 예수님께 나가기 원합니다. -河-
좋은 아침입니다.
1.
제가 샌프란에 온 지 16년이 지났습니다.
16년이면 짧은 기간이 아닌데,
샌프란은 도심의 높은 빌딩 외에 변한 것이 거의 없습니다.
예를 들면, 도심에서 바닷가를 연결하는
Geary Blvd를 운전하다 보면16년전과 같습니다.
저보다 훨씬 오래 사신 권사님들도 옛날 그대로라고 하실 정도입니다.
그러다 보니
샌프란은 100여 년이 공존하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싹- 갈아엎고 현대식으로 다시 짓는 것보다
과거와 현재, 첨단 건축과 기술이 공존하는 방식이 마음에 듭니다.
2.
지난주일 예배를 마치고 교인들을 배웅하고 있는데
60대 정도로 보이는 미국 아주머니가 교회 계단으로 올라오셨습니다.
종종 예배를 위해서 오시는 분들이 계시기에
예배가 끝났다고 친절히 말씀드렸더니 들어가도 되냐고 물으십니다.
갑자기 밖에 계신 남편을 부릅니다.
설레발을 치신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매우 감격해 하시면서
“40년 전에 저희가 이 교회에서 결혼식을 했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교인이 깜짝 놀랐습니다.
아주 활발하신 아주머니셨습니다.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그대로 인 것을 보시고
약간 흥분한 듯 환호성을 치셨습니다.
강단 앞에서 사진을 찍어 드리고,
아래층으로 내려가겠냐고 물었더니
결혼식 후에 축하연을 지하에서 했답니다.
3.
우리 교회는 1972년 그리스 사도교회(Greek Apostolic Church)
(그리스 정교회가 주류이고 사도교회는 소수 개신교회)
목사님과 교인들이 교회 부지를 구입해서 건축했습니다.
건축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목사님이 하나님께 가시고
교세도 축소되어서 여러 교회가 렌트를 얻어 사용했습니다.
주일에 오셨던 분에 의하면 1980년대 초반,
성령 충만한 은사 중심의 교회가 우리 건물을 사용한 것 같습니다.
130여 명이 임시 의자를 갖고 앉을 정도였고
교회에 들어오면 예배실은 물론 아래 친교실까지 성령의 임재가 충만했답니다.
엄청난 능력의 교회였다고 자랑하셨습니다.
저도 처음 듣는 우리 교회 건물에 깃든 역사였습니다.
4.
교회 건축 후 50여 년 동안
우리 교회 모습은 거의 변한 것이 없습니다.
강단은 우리가 설치한 커다란 TV 두 개 외에는
스테인리스 아름다운 십자가와 하얀 벽면까지 그대로입니다.
오죽하면, 엊그제 오신 부부께서 “그대로야, 그대로야”를 외치셨을까요!
그렇게 우리 교회 건물은 지난 50여 년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다양한 교회와 교인들이 렌트를 얻어서 예배했으니
그 모든 다양함을 말없이 품고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건물 자체가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는 지킴이였습니다.
우리가 처음 건축한 교회에 이어 두 번째 건물주가 되었는데
우리 건물은 우리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요?
아니 우리는 건물에 어떤 추억을 남겨놓아야 할까요?
40년 후에 우리 건물에서 누가 예배하고 있을까요?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교인(하나님께 부름 받은 성도)이라고 늘 말씀드렸는데
엊그제 주일의 만남을 통해서
건물의 귀함과 교회 건물에 깃든 영성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우리 교회 건물이 우리 모두에게 추억이 되고,
우리의 신앙은 물론
교회 건물도 소중하게 간직하는 지킴이가 되기 바랍니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시편63:2)
하나님,
우리 교회의 신앙이
우리 건물 속까지 스며들게 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8. 12 이-메일 목회 서신)
크고 은밀한 일
예레미야서(렘30-33장)를 통한 “위로와 회복의 말씀” 마지막 시간입니다. 처음 연속 설교를 시작할 때는 대부분 백신 접종을 마친 우리 지역에 팬데믹의 끝이 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 지역의 감염자 숫자가 급격히 늘고 있습니다. 샌프란시스코는 다시 실내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했습니다.
처음에 예레미야 말씀을 준비할 때와 비교하면 상황이 어려워졌지만, 하나님의 위로와 회복은 우리 모두에게 항상 필요합니다. 설령, 팬데믹이 연장되더라도 우리는 소망을 잃지 않습니다. 세상이 깜깜해질수록 우리가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어야 함도 알고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전한 위로의 말씀은 30-31장에서 약속의 말씀을, 32-33장에서는 왕궁 시위대 뜰에 갇힌 예레미야가 그의 삶을 통해서 회복과 소망의 말씀을 전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감옥에 갇힌 것은 바빌론에 포로가 된 예루살렘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감옥에 갇힌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바빌론에 포로 잡혀갈 것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레미야는 모든 삶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했습니다. 그의 삶이 곧 하나님의 메시지였습니다.
32장에서 예레미야가 고향 아나돗에 있는 밭을 샀습니다. 친척의 밭을 사야 하는 기업 무를 자(친척의 가장 가까운 후견인)였지만, 나라가 망하는 순간에 밭을 사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예레미야가 고향에 밭을 사서 계약서까지 남긴 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반드시 다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는 작은 증표였습니다.
비록 나라가 망하지만, 하나님께서 여전히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고 결국에는 회복시킬 것이라는 약속이 오늘 본문인 33장까지 이어집니다. 예레미야가 왕궁 시위대의 뜰에 갇혀 있을 때 두 번째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32장의 작은 증표에 이어서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만이 아시는 그리고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놀라운 일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라는 말씀입니다.
나라가 망하지만, 다시 하나님께서 나라를 세우실 것이라는 말씀을 믿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믿고 하나님을 끝까지 의지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다윗의 가지에서 한 공의로운 가지가 나올 것까지 준비하신 하나님이심을 믿고 현재의 어려움을 이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를 끔찍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고 우리 역시 하나님의 크고 은밀한 일을 기대하기 원합니다. -河-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수요 예배에서는
구약성경 사사기에 이어서 사무엘상을 읽고 있습니다.
사사기는 약속의 땅에 정착한 하나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가나안 땅의 우상을 따라나서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기록했습니다.
습관적인 죄와 회개를 반복하면서 이스라엘 전체가 자기 마음대로 행동했습니다.
그러면서 왕을 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길 원하셨건만
백성들은 다른 나라들처럼 왕의 통치를 받겠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그때 주신 왕이 사울입니다.
사울은 외모가 탁월한 인물이었습니다.
왕으로 세워질 때는 짐짝 뒤에 숨을 정도로 수줍음이 많았는데
왕이 되면서 권력과 명예욕에 취해 버립니다.
그러더니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 마음대로 행동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세우십니다.
하지만, 사울의 시기와 질투심에 다윗이 곧바로 왕이 되지 못하고
광야에서 도피 생활을 하게 됩니다.
사울이 집요하게 다윗을 쫓아다닙니다.
그래도 다윗은 하나님의 보호하심 가운데 몸을 숨깁니다.
2.
그렇다고 다윗이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한번은 광야에서 나발이라는 부자에게 사람을 보내서
다윗과 그의 사병들에게 음식을 조달해 주길 부탁했습니다.
다윗은 광야에서 나발의 가축 떼를 돌봐준 적이 있었기에
쉽게 양식을 구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완고하고 어리석은 나발은 다윗의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나발의 거절에 화를 참지 못한 다윗이 군대를 이끌고 그를 죽이러 나갑니다.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은 지혜롭고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다윗이 자기 가족을 치러 온다는 소식을 들은 아비가일은
서둘러 양식을 준비해서 다윗을 만나러 갑니다.
아비가일이 다윗 앞에 엎드려 예의를 갖춘 후에, 다윗을 설득합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앞으로 큰일을 할 다윗이니
모든 사람이 어리석게 여기는 나발을 죽여서
다윗의 이력에 흠집을 내지 말라는 충언입니다.
다윗이
자기가 죽이러 나가는 나발의 아내,
즉 원수의 아내인 아비가일의 말을 하나님 말씀으로 듣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위대한 점이고 믿음입니다.
다윗은 사울과 달리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귀를 갖고 있었습니다.
3.
아비가일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생명 싸개(the bag of the living)”로 싸고 계시니
어떤 사람이나 세력도 다윗을 해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생명 싸개는 다윗의 생명을 감싸고 있는 주머니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안전하게 감싸고 계신다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주머니에 다윗이 들어 있으니, 누가 다윗을 해칠 수 있겠습니까?
아비가일이 이렇게 아름다운 말로 다윗을 설득했으니
다윗의 마음이 녹아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아비가일의 남편 나발이 죽자 아비가일을 아내로 맞이할 정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들의 생명을 감싸주심을 믿습니다.
우리도 종종 광야의 모진 바람을 혼자 맞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아무도 보호해 줄 사람이 없어서,
불어오는 인생의 폭풍을 외롭게 견디고 있다는 참담함도 느낍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생명 싸개로 감싸 주심을 꼭 기억합시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생명 주머니에 들어 있음을 기억합시다.
오늘도 우리 주님과 더불어 생명의 길을 가시는
참빛 식구들을 응원하고 축복합니다.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 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삼상 25:29)
하나님,
참빛 식구들을 주님의 생명 보자기로
감싸주시고 보호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8. 5 이-메일 목회 서신)
내 밭을 사라
팬데믹의 꼬리가 매우 깁니다. 델타 바이러스로 다시 먹구름이 밀려오는 상황입니다. 코로나바이러스의 끝이 어디인지 막연하니 지치고 힘이 듭니다.
예레미야서 한가운데 있는 위로와 소망의 말씀(30-33장)을 나누면서, 지친 우리 몸과 마음에 회복을 꿈꾸고 있습니다.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을 다시 돌아오게 할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을 주시고, 아무도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하나님께서 고치시고 그곳에서 새 살이 돋게 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새 언약을 약속하면서 빛을 비춰 주셨습니다. 마음에 새겨 주시는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다시 세우시는 회복의 말씀이었습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약속의 말씀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변치 않는 사랑이었습니다.
앞으로 두 주간동안 살펴볼 예레미야 32-33장은 앞에서 약속하신 것을 이루실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부연설명이자 확증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32장은 예루살렘이 바빌론 느부갓네살 왕에게 멸망하기 직전의 상황입니다. 이미 바빌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했고, 예레미야는 왕궁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바빌론에 항복하고 일단 예루살렘 성전과 국가를 유지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은 무시당했습니다.
감옥에 갇힌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이 바빌론에 넘어갈 것이고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바빌론으로 끌려갈 것이라고 예고합니다. 예레미야가 현실을 직시한 것인데, 마지막까지 시드기야를 비롯한 남유다의 지도자들은 예레미야의 말을 애써 거부합니다. 자기들은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헛된 희망을 붙들고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매우 어려운 명령을 내리십니다. 예레미야의 고향 아나돗에 있는 예레미야의 숙부 하나멜이 예레미야를 찾아와서 자기 밭을 사라고 하면 그것을 사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멜의 기업 무를 자(구원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나라가 망하는 시점에서 땅을 사는 것은 매우 어리석고 소용없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예레미야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합니다. 값을 지불하고 땅을 사고, 거래 계약서를 두 개 만들어서 보관합니다. 사람들은 예레미야의 행동을 보고 비웃었을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행동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상징적 행위였습니다.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을 알려주는 행위였습니다. 하나님 약속이 틀림없음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행동입니다.
신앙이 말이나 이론이 아니라 삶이요 실체임을 깨닫게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구체적인 확증과 실천, 삶이 동반된 신앙을 갖기 원합니다. -河-
좋은 아침입니다.
1.
우여곡절 끝에
도쿄 올림픽이 열리고 있습니다.
2020년 도쿄(Tokyo 2020)라는 명칭을 보면서,
팬데믹으로 잃어버린 1년을 되찾는 느낌도 받습니다.
올림픽이 열릴 때마다
감동, 안타까움, 절망과 희망 등
수많은 이야기가 생성됩니다.
엊그제는
미국 최고의 체조선수 바일스(Biles)가
경기 중간에 기권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바일스는 체조 코치의 성폭력을 폭로한 선수로 유명합니다.
미국 최고의 스포츠 영웅(GOAT; Greatest of All Time)칭호도 받았습니다.
24세로 체조계에서는 노장에 속하는 바일스이지만,
첫 번째 경기 성적이 좋게 나오지 않자
그 중압감에 “내 마음을 지켜야겠다”라면서 나머지 경기를 포기했습니다.
2.
바일스 뿐만 아니라
올림픽에 참가한 선수들의 스트레스 정도가 무척 높답니다.
평소에는 주목받지 못했던 종목이나 선수들은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이 명예와 부(富)를 얻을 유일한 기회입니다.
올림픽에 인생을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에
경기에 임하는 부담감이 상당하답니다.
한순간에 4년은 물론 평생의 꿈이 무너질 수 있으니 말입니다.
게다가, 자신들의 조국을 대표해서 경기하는 부담감도
자부심 못지않게 클 것 같습니다.
바일스의 경기 포기를 두고
올림픽 선수들의 심리, 정신적 부담감이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동시에 각계에서 바일스의 포기를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부담감을 숨기고 억지로 경기하는 것보다
자신을 찾으려는 솔직함에 박수와 격려를 보내준 것입니다.
3.
평소에도 스포츠에 관심이 많은 저는
미국 올림픽 중계사인 NBC를 켜 놓고 일하곤 하는데
올림픽이 아니면 볼 수 없을 것 같은 비인기 종목들도 매우 많습니다.
동네에서 자주 보던 스케이드 보드도 올림픽 종목이었고
13살 소녀가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비인기 종목에서 자기와 싸우고,
조국을 위해서 땀을 흘린 선수들이 주는 감동이 큽니다.
이처럼 세상에는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자기의 길을 가는 작은 영웅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인기 종목이 아니어도
올림픽을 준비하고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선수들,
행여나 메달권에 진입하지 못해도 올림픽에 참가했다는 것으로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는 선수들,
중간에 경기를 포기할 정도로 부담감에 휩싸였던 유명 선수까지…
생각해 보니,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각자의 길을 걸어갑니다.
청중이 없는 경기장에서 올림픽이 열리는 것이 어색하다고 하지만,
우리는 매일같이 청중이 없는 곳에서 주어진 일상을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청중이 되심을 믿고 걷는 길이요, 인생의 경주입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작은 영웅, 일상 영웅인 셈입니다.
오늘도 각자의 자리에서
신앙의 경주, 인생의 발걸음을 뚜벅뚜벅 내딛으시는
참빛 식구들을 응원합니다.
발걸음마다 우리 주님께서 동행하심을 믿습니다.
여러분 모두 작은 영웅이십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시편37:23-24)
하나님,
오늘도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걷는
참빛 식구들의 손을 붙들어 인도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7. 29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