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대강절에 (3)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을 기다리는 대강절 셋째 주일입니다. 대강절은 우리와 똑같은 몸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우리는 또한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인은 기다림의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읽은 데살로니가전서 말씀에도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마음가짐이 나옵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에 탁월했던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는 자신의 편지 마지막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를 강조합니다.

 

본문 속의 데살로니가 교회는 물론 우리도 성육신하신 예수님과 다시 오실 예수님 사이의 중간기(interim period)를 살아갑니다. 지금 이곳에서의 삶이 끝이 아닙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 가운데 바라봅니다. 그러니 이곳에서의 삶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을 준비하는 과정입니다. 이 세상이 목적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꽤 유명한 말씀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5:16-18). 세 가지 그리스도인의 삶의 태도가 곧 예수님을 믿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 가지 명령이 개인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 또는 예수님을 믿는 성도 모두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신앙은 개인을 넘어서 다 함께 걷는 여정입니다.

 

성령을 소멸하지 말고 예언을 폐하지 말라는 말씀은 매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위하고 어떤 모양이라도 악을 버리라는 말씀과 연결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인도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행여나 성령의 불이 꺼진다면,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과 능력이 사라질 것입니다. 믿음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내 힘이 아니라 성령을 의지해서 신앙의 길을 가야 합니다.

 

예언은 사도바울 당시 교회에서 선포되고 권면하는 하나님 말씀이었습니다. 지금처럼 성경이 없으니, 사도바울의 서신이나 교회에서 공인된 예언자들의 권면이 중요했습니다. 이방 풍속이나 세상 것을 추구하지 말고 하나님 말씀을 좇아 살라는 부탁입니다. 그때, 선한 것을 분별하고 좋은 것을 취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동시에 악한 것들을 정리할 결심도 섭니다.

 

사도 바울은 환난과 핍박 가운데 살고 있는 교인들에게 “평강의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팬데믹을 사는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평강이 필요합니다. 우리 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거룩하게 구별하시고, 영과 혼과 육이 다시 오실 예수님 앞에서 떳떳하게 보존되길 기도합니다. 이 모든 것을 이루시는 분이 우리를 선택하시고 부르신 하나님이십니다. 할렐루야! -河-

마스크

좋은 아침입니다.

 

1.

엊그제 예일대학에서 발표한 것을 보니

2020년 한 해 동안 가장 많이 듣고 사용한 말은

“마스크를 쓰세요 wear a mask”였답니다.

 

팬데믹 전까지

일상생활에서는 마스크를 거의 착용하지 않았습니다.

마스크 하는 것을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는 의도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미국에서 얼굴에 마스크를 쓰는 것은

의료, 건설 현장 등 특별한 직종에 종사하는 분들로 한정되었습니다.

 

실제로,  펜데믹 초기에는

마스크를 착용하라는 질병관리본부(CDC)의 권고를 무시하고

많은 사람이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이들까지

거의 모든 사람이 마스크를 착용합니다.

자신은 물론 이웃을 향한 배려요 보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2.

사실 얼굴을 가리는 마스크는

인류 역사에서 아주 오래된 전통입니다.

 

왕을 비롯한 권력자들이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

얼굴 일부를 가리거나 멋지게 장식했습니다.

전쟁에 나가는 장수들과 군병들도 보호용으로 마스크를 착용했습니다.

 

우리나라 탈춤에서 보듯이

페스티벌이나 얼굴을 가리고 춤을 추곤 했습니다.

자신의 실체를 가리기 위함이고,

종종 하층민이 권력자들을 풍자하기 위해서 마스크를 쓰고 무대에 섰습니다.

 

이처럼 마스크는 오래전부터

얼굴 가리개 이상으로 두루 사용되었습니다.

 

3.

성경에도 천으로 얼굴을 가린 대표적인 인물이 있습니다.

시내산에서 40주야를 머물면서 하나님과 대화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고 내려온 모세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모세의 얼굴이 너무 빛이 나서

그의 형 아론을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쳐다볼 수 없었습니다.

모세의 거룩한 모습에 두려워하는 백성들도 있었습니다.

 

그러자 모세는 천(수건)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습니다.

다시 하나님을 만나러 갈 때 수건을 벗은 것을 보면

모세가 마스크를 착용한 것은 철저히 백성들을 위한 배려였습니다.

 

지금도 미국 일부에서는

마스크 착용을 꺼린다는 보도를 종종 듣습니다.

모세의 예를 알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앞장서서

마스크 착용을 적극적으로 권장해야 할 겁니다.

 

백신이 보편화되기까지

마스크 착용이 최선의 바이러스 전파 방지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4.

마스크가 민 낯을 가려주는 역할을 하니 편할 때도 있습니다.

마스크가 얼굴을 가리니 화장을 할 필요도 없고

모자 정도를 써주면 외모를 치장할 이유도 없습니다.

 

하지만, 마스크를 착용하면서

아름다운 미소도 잃어버렸고,

얼굴 표정으로 전하는 소통도 상실했습니다.

 

팬데믹처럼 특별한 이유가 아니면,

마스크로 자신을 가리는 것도 정상은 아닙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이웃을 대하는 것이 바람직하지요.

 

그런데,

마스크 착용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일상이 될 것 같습니다.

이웃을 위한 배려요 사랑이니 적극 동참해야 합니다.

 

대신, 우리 자신이 마스크 속에 숨어서는 안 됩니다.

비록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살지만,

우리의 내면은 훨씬 더 아름다워지고 깊어지길 원합니다.

 

언젠가 마스크를 벗고 만났을 때

우리의 모습이 모세처럼 밝게 빛나길 기대합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 (출34:33)

And when Moses had finished speaking with them,

he put a veil over his face.(Exo 34:33)

 

하나님,

숨김이 일상이 된 요즘이지만,

우리의 내면은 더욱 빛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0. 12. 10 이-메일 목회 서신)

 

 

 

2020년 대강절에 (2)

내 백성을 위로하라

 

마음속에 촛불 두 개 켜고 맞는 대강절 둘째 주일입니다. 대강절의 주제는 ‘기다림’입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기다리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기다림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 상반된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소망입니다. 우리는 좋은 일을 기다립니다. 좋은 날을 기다립니다. 기다림이 소망과 연결되면, 우리 삶에 큰 활력을 줍니다. 언제 끝이 올지 모르면서 막연히 견디는 기다림도 있습니다. 정해진 것이 없습니다. 확실한 것도 없습니다. 힘이 듭니다. 그래도 참고 견딥니다.

 

지난주에는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리는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이사야 64장 1-9절). 포로에서 풀려나서 고향으로 돌아온 것은 기다림의 끝이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어려움이 닥치니 옛 습관이 살아나서 하나님을 떠납니다. 그래도 회개하고 목자 되신 하나님께 돌아옵니다.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맡기고 다시 시작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시계를 거꾸로 돌려서 이스라엘이 아직 바빌론에 포로로 있을 때 임하신 하나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70년의 포로 살이가 지나면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약속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 입장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힘겹고 막막한 포로 생활이었습니다.

 

당시는 나라가 크고 강하면 그들이 믿는 신 덕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제국의 신이 최고이고 약소국이 섬기는 신은 명함도 내밀 수 없는 지경입니다. 만약, 바빌론에 의해서 멸망한 나라의 신은 바빌론 신 마르둑의 부하가 되는 식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약한 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깊이 베어져 있었고 이스라엘도 예외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성전이 무너지고,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온 이스라엘 백성들도 바빌론의 신 마르둑에게 무너졌다고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바빌론 포로 시대를 배경으로 한 이사야서의 두 번째 큰 단원(40-55장)이 선포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두 번째 이사야의 서론에 해당합니다.

 

하나님께서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하십니다. 죄를 지어서 나라를 잃고 포로로 잡혀갔다는 죄의식과 패배감에 사로잡힌 이스라엘을 두고 “내 백성”이라고 부르십니다. 고속도로와 같은 큰길을 만들라고 부탁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오실 대로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빌론 신을 능가하는 큰 힘으로 오십니다. 하나님께서 장차 바빌론도 무너뜨리고 온 세상을 다스리는 유일한 주님이 되실 것입니다. 목자가 양을 보호하고 먹이듯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어린양을 품에 안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새로운 역사를 쓰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할렐루야! -河-

느슨함

좋은 아침입니다.

 

1.

자고 일어나면

미국의 코로나바이러스 숫자가

눈덩이처럼 늘어납니다.

 

경제활동 제한은 물론

통행 금지를 권할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고 있습니다.

이 지루한 팬데믹이 언제나 지나갈지요!

 

그런데

요즘 동네를 다니다 보면,

사람들의 경계심이 느슨해진 것을 발견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마스크를 착용하지만

가끔은 마스크 없이 거리나 공원을 거니는 사람들을 봅니다.

코스코를 비롯한 시장에 가도

6 ft 거리 두기를 잘 지키지 않습니다.

 

여기서 다시 경제를 닫게 되면

소상공인들은 물론 일용직 노동자들에게

큰 어려움이 닥칠 것이 분명하기에 염려스럽습니다.

 

2.

팬데믹과 같은 전염병이 돌면

자신의 건강도 중요하지만,

이웃의 건강을 위해서도 규칙을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22:39)는

예수님 말씀의 적용입니다.

 

지난번에 나눴던 요한일서 말씀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한데,

그동안 기독교는 이웃 사랑에 큰 관심을 쏟지 않았습니다.

 

개인 구원을 강조하면서

모든 사람이 함께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는 공동체 구원을 무시했습니다.

 

죽어서 가는 하나님 나라를 강조하면서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도 무시했습니다.

 

팬데믹 기간 동안

주일예배로 모이지 못하고

교회가 문을 닫는 초유의 사태를 경험했습니다.

목숨 걸고 예배드리던 예전의 사고방식으로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바뀐 예배 형태를 통해서

세상을 향한 기독교인의 또 다른 사랑의 실천을 배웠습니다.

나보다 남을/이웃을/세상을 먼저 생각하라는

예수님 말씀을 억지스럽게(?) 실천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일찍 깨닫고

세상을 사랑하는 것에 느슨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3.

모든 것이 느슨해지기 쉬운 시간입니다.

 

코로나에 대처하는 방식이나 우리의 마음가짐,

매주 현장 예배로 드리지 못하면서

솔직히 우리 신앙도 느슨해지는 지점이 있을 것입니다.

 

팬데믹이 갖고 온 새로운 일상에

점차 길들여진 느슨함입니다.

 

이제 2020년의 마지막 달력을 살고 있습니다.

올해는 전 세계 사람들이

모든 세대가 특별한 해로 오랫동안 기억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또한 세상을 향해서도

느슨해진 것들을 다시 정돈하면서

한 해를 근사하게 마무리하기 원합니다.

 

p.s. 팬데믹 초반에는 Happy birthday노래를 두 번 부르면서 손을 씻었는데

요즘은 손을 씻는 시간도 조금씩 줄어듭니다. 다시 처음/기본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너희 안에 마음을 품으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5)

Have this mind among yourselves,

which is yours in Christ Jesus (Philippians 2:5)

 

하나님,

팬데믹의 고난이 얼른 지나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0. 12. 3이-메일 목회 서신)

2020 대강절에 (1)

교회력에 따르면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강절로 오늘부터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됩니다. 대강절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기다리는 기간이기에 네 번의 대강절 주일에 촛불을 하나씩 켜놓고 예배합니다. 우리도 마음속에 또는 가정에 촛불을 밝히면서 예수님을 기다리면 더욱 뜻깊은 대강절이 될 것 같습니다.

 

올해 대강절과 성탄절 말씀은 성서일과(lectionary)에 주어진 본문을 따라서 말씀을 준비해서 나눌 계획입니다. 오늘 함께 나눌 이사야서 64장 1-9절은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장면입니다.

 

70년 동안 바빌론에서 포로로 살았습니다. 비록 포로로 이방 땅에 살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잊지 않았습니다. 과거의 잘못된 신앙을 바로잡는 등 이스라엘에게 바빌론 포로 기간이 신앙을 다시 세우는 의미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제국 바빌론이 페르시아와 고레스에 무너지면서 예루살렘에 돌아옵니다.

 

예루살렘에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을 다시 짓고 신앙 회복에 힘썼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예레미야의 예언이 성취되었기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바빌론을 물리친 페르시아가 이스라엘을 통치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 고향에 돌아온 감격이 사라지고, 하나님을 떠났던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이 이처럼 다시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깁니다. 죄로 찌들은 이스라엘 안에 하나님께서 거하실 자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임재(presence)가 하나님 부재(absence)로 변했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도 없고,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 셔도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할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무관심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때 다시금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길 간구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임하시길 간청합니다. 불로 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강림에 산들이 진동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제국들도 하나님의 임재 앞에 벌벌 떨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신도 하나님처럼 임할 수 없습니다. 가장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깨어 있는 주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하나님께 나옵니다. 토기장이 하나님께 자신을 맡깁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길 간청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구하는 회개입니다.

 

올해 대강절 역시 각자의 자리에서 맞이합니다. 흩어진 참빛 식구들 삶 속에 하나님의 임재를 구합니다. 하나님을 잊은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 세워지고 우리 안에 능력으로 임하실 하나님을 기대합니다.-河-

감사절에

Happy Thanksgiving!

 

1.

2020년 추수감사절을 맞았습니다.

팬데믹으로  대부분의 모임이 취소되고

조촐하게 맞는 감사절입니다.

 

그래도 한 해 동안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마음 깊은 곳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샘솟길 원합니다.

 

2.

올해는

1620년 겨울, 메이플라워를 탄 102명의 청교도들이

미국 동부 플리머스에 도착한 지 400년되는 해입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신대륙에 도착한 청교도들은

원래 예정했던 뉴욕 허드슨강 하구가 아닌

보스턴 근처 플리머스에 상륙해서 혹독한 겨울을 보냈습니다.

이듬해 봄이 되었을 때는 절반 이상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때 근처에 살던

원주민(Native American)들이

집을 짓는 법부터, 씨를 뿌리고 농사를 짓는 법과

사냥까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서 살아가는 비법을 알려주었습니다.

 

이들의 도움으로 청교도들이

한 해 농사를 마치고 함께 모여서 잔치를 벌인 것이

추수감사절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3.

그런데 400여 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기득권이라고 할 수 있는 청교도들의 관점이 아닌

원주민의 입장에서 당시의 상황을

새롭게 조망하고 해석하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엊그제 USA Today/Cape Cod Times에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추수감사절에 대한 오해와 진실에 대한 기획 기사가 실렸습니다.

 

청교도들이

자신들에게 생존 비법을 알려준 원주민들을 초대해서 함께 잔치를 벌였다는 것에 대해서,

사실 청교도들은 자신들만의 조촐한 감사절 축제를 했고,

총을 쏘면서 분위기를 한껏 돋우었는데

총소리를 들은 원주민들이 무장하고 찾아오면서

협상과 동시에 원주민들이 사냥한 사슴 등으로 잔치를 벌였다는 것입니다.

 

화기애애한 축제이기보다

어색한 긴장감 속에서 펼쳐진

일종의 외교적인 만남이었다는 것이지요.

 

원주민들 입장에서는 신대륙을 찾아온 청교도들이

자신들을 해칠 수 있다는 불안함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청교도들도 원주민을 무시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서로 신사협정을 맺지만, 청교도들에게 유리한 조문들이었습니다.

 

결국, 원주민들은

총으로 무장한 청교도들에게 제압당하고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깁니다.

 

그러니,

우리가 추수감사절로 지키는 오늘이

이 땅에서 원래 살고 있던 네이티브 어메리칸들 입장에서는

통곡의 날(the day of mourning)이 된 것입니다.

 

4.

청교도들이 신대륙에 도착한 지 400년,

에이브러햄 링컨이 11월 셋째 주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제정한 지 157년,

그동안 우리는 추수감사절을 축제의 날로 흥겹게 지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우리 마음 한쪽에

추수 감사절을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보호구역으로 내어쫓긴 비극이  시작된 날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일에 명암이 있게 마련입니다.

누군가 혜택을 입으면, 누군가 손해를 입고

누군가 행복하면, 누군가는 불행하고

세상일이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고 평화로울 수 없습니다.

 

감사절을 보내면서,

올 한 해 동안, 행여나 나(우리)로 인해서 슬퍼하거나 손해 본 이웃은 없는지

내가 기뻐하고 감사할 때, 같은 상황에서 슬퍼하고 힘들어하는 분들은 없는지

우리의 삶과 세상의 역사를 세심하게 살피고, 매사를 속단하지 말아야겠습니다.

 

가난한 자와 부한 자가 함께 살거니와

모두를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 (잠언 22:2)

The rich and the poor meet together; the LORD is the maker of them all. (Prov 22:2)

 

하나님,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 주님의 마음으로

어그러진 세상을 품고 사랑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0. 11. 26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