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갑 족속

좋은 아침입니다.

 

1.

엊그제 아침 묵상에서

예레미야 35장의 레갑 족속을 만났습니다.

 

레갑 족속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습니다.

레갑은 모세의 장인이 속했던 겐 족속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지만, 가나안 땅에 거주했습니다.

 

레갑의 아들 요나답(여호나답)이 성경에 나옵니다.

엘리야가 바알을 섬기던 이스라엘 왕 아합 가문을 심판하도록

예후를 기름 부어 세웠는데

예후가 레갑의 아들 요나답을 동역자로 불렀습니다(왕하10:15-17).

 

요나답은

예후의 초대에 기꺼이 응합니다.

 

2.

예레미야 35장에 의하면

레갑 족속은 바빌론 느부갓네살 왕이 침입하자

예루살렘에 옮겨와서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그들의 조상 요나답의 명령대로

200여년 동안

포도주를 입에 대지 않고,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소유하지 않고

집도 짓지 않고 평생을 장막에서 살았습니다.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는 유목민으로 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예루살렘에 잠시 이주해서 살고있는

레갑 족속을 성전으로 초대해서

그들에게 포도주를 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 말씀대로 했더니

레갑 사람들이 자신들은 조상 요나답의 명령을 따라서

절대로 포도주를 입에 대지 않는다고 강력히 거부합니다.

 

하나님께서 레갑 족속을 통해서

하나님 말씀을 내동댕이친 이스라엘 백성을

따끔하게 교훈하시려는 의도였습니다.

 

레갑 족속은

조상의 명령도 목숨 걸고 지키는데

이스라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냐는 하나님의 탄식입니다.

 

3.

지금도 전해 내려오는 전통을

그대로 지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국 동부와 중서부에 많이 있는 아미쉬들이 대표적입니다.

전기는 물론 문명의 이기를 거부한 채

자신들 만의 생활방식을 고수합니다.

 

헨리 나우웬이 활동했던 라르쉬(방주the ark) 공동체도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생활하는 전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삶은 물론 물질과 재능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부루더호프 공동체도 있습니다.

 

오래된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하면서

자신들의 신앙과 생활방식을 유지하는 현대판 레갑 족속인 셈입니다.

 

이런 공동체를 통해서

혹시 세속에 물들어 있는 기독교 공동체와

기독교인들이 도전을 받습니다.

 

4.

우리에게도 레갑의 전통이 필요합니다.

 

우리 참빛교회만 갖고 있는 전통을 만들면 좋겠습니다.

계속 계승하고 발전시킬 전통을 만들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축복입니다.

 

가정 별로도 레갑의 전통을 세워가는 겁니다.

자신의 가정만이 간직하는 레갑의 전통입니다.

 

우리 개인의 신앙과 삶에도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끝까지 간직하려는 자신만의 레갑 전통을 갖고 있다면

그것만으로 근사한 기독교인이 될 것입니다.

 

정신 차리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

끝까지 간직하고 싶은 레갑의 신앙을 꼭 만들기 원합니다.

 

 

레갑의 아들 요나답에게서

앞에 사람이 영원히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예레 35:19)

Jonadab the son of Rechab shall never lack a man to stand before me.(Jer 35:19)

 

하나님,

우리 교회, 우리 가정, 개인마다

시대와 상관없이 변하지 않는 레갑의 전통을 세우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0. 9. 24이-메일 목회 서신)

 

 

예수님 우리 예수님 (9)

불쌍히 여기시니

 

마태복음 8장과 9장에 나오는 마지막 아홉 번째 기적은 귀신들려서 말을 못 하는 사람을 고치신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맹인들의 눈을 뜨게 하시고 다시 갈릴리 선교를 위해서 집을 떠나셨습니다. 맹인들은 비밀로 하라는 예수님의 부탁을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을 전파했기에 예수님의 명성은 갈릴리 전체로 퍼져 나갔을 것입니다.

 

누군가 귀신들려서 말하지 못하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귀신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스스로 예수님께 올 수 없습니다. 이 사람이 귀신이 들렸지만,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간 친구가 있었듯이 이 사람에게도 가족이든 친구이든 돕는 손길이 있었기에 예수님 앞에 나왔을 것입니다.

 

말을 못 한다고 모두 귀신이 들린 것도 아닙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는데 이 사람의 경우는 귀신의 영향으로 말을 못 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나 옛날에는 귀신들린 사람이 많았습니다. 의료체계가 발달하지 않은 탓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니 이 사람이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고 놀라워했습니다. 하지만, 현장에 있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귀신의 왕을 의지해서 귀신을 쫓아냈다고 비아냥거렸습니다. 귀신을 쫓아낸 것은 사실이니 부인할 수 없고, 대신 하나님이 아니라 귀신의 왕을 의지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논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하늘나라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통치자가 되시며, 하나님께서 여전히 그에게 나오는 백성들을 사랑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수훈의 연장선에서 가는 곳마다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8장과 9장에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이 모여있습니다.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과 더불어 행함으로 복음을 전하시고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밝히 드러내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 앞에 나온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힘없는 백성들이 목자 없는 양처럼 고난받고 힘없이 살아가는 것을 한없이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긍휼입니다. 이들을 지도하고 인도할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자기 배를 채우기에 급급했습니다. 그러니 백성들의 신앙과 삶이 허약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면서 추수할 곡식은 많은데 그것을 거둘 일꾼이 적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사는 세상도 불쌍히 여기실 것입니다. 우리 세상에서 기쁜 소식을 전할 일꾼을 찾고 계실 겁니다. 우리가 그 일꾼이 되기 원합니다. -河-

예수님의 손길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에는

6개월 동안 묵혀 놓았던

<예수님 우리 예수님>이라는 말씀을 마저 나눴습니다.

 

마태복음 8장과 9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적을 차례로 살펴보는 연속 설교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5-7장)을 통해서 구약의 모세 율법을 뛰어넘는

새로운 계명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음 두 장에서

산상수훈을 선포하신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기적을 통해서 증명하셨습니다.

 

2.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맹인 두 사람이

“다윗의 자손 예수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치면서

집요하게 쫓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맞아 주십니다.

보이지 않는 눈에 ‘손을 대시면서’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말씀하시니

맹인들의 눈이 밝아져 보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나누면서

예수님의 손길에 주목했습니다.

 

예수님 정도면

굳이 맹인들의 눈을 만지지 않으시고

말씀하심으로 그들의 눈을 뜨게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맹인들의 눈을 만지셨습니다.

 

3.

맹인만이 아닙니다.

산상수훈 이후에 행하신 첫 번째 기적에서

예수님은 나병 환자의 몸을 만지셨습니다.

나병은 접촉을 통해서 옮깁니다.

나병 자체도 부정했지만, 부정한 나병 환자를 만지는 것은 절대 금기 사항입니다.

예수님은 나병 환자를 만지시면서 그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죽은 관리의 딸을 손을 잡아 일으키셨습니다.

죽은 상태에 있는 것도 부정했습니다.

구약의 율법에서 생명이 없는 것을 만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관리의 딸을 만지시면서

“달리다굼/소녀야 일어나라” 말씀하고 살려 주셨습니다.

 

3.

코로나바이러스 이후에

우리는 거리두기(distancing)라는 말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가까운 친지를 만나는 것도 조심스러울 정도이니

낯선 사람과 악수하던 것은 아주 옛날 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더욱더 예수님의 손길이 특별했습니다.

 

예수님은 부정한 나병 환자도, 죽은 소녀도

그리고 앞을 못 보는 맹인들도 만지셨습니다.

 

말씀을 나누면서

예수님께서 우리 참빛 식구들도 만져주시길 기도했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누군가의 손길이 그리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주님의 손길을 다시 한번 구합니다.

예수님께서 참빛 식구들을 꼭 안아 주시고

손을 잡아 일으켜 주시고, 함께 걸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가족 안에서 서로에게 예수님의 손길을 나누고,

몸으로는 떨어져도, 마음으로는  친지들과 이웃들에게

예수님의 손길을 전하기 원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마태 9:29)

Then he touched their eyes, saying,

“According to your faith be it done to you.”(Mt 9:29)

 

하나님,

참빛 식구들이

예수님의 손길을 깊이 느끼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0. 9. 17이-메일 목회 서신)

 

 

예수님 우리 예수님 (8)

눈을 뜨게 하시다

 

팬데믹이 오기 전에 <예수님, 우리 예수님>이라는 주제로 연속해서 말씀을 나눴습니다. 마태복음 8장과 9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적을 차례로 살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서 자택 격리가 시작되면서 마지막 두 본문을 다시 모였을 때 나누기 위해서 남겨놓았습니다. 그런데 올해 안에 대면 예배로 모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나중을 위해서 곱게 싸두었던 귀한 물건을 꺼내서 듯이, 지난봄에 아껴두었던 “예수님, 우리 예수님”의 마지막 두 본문을 앞으로 두 주 동안 나누려고 합니다.

 

마태복음 5장부터 9장을 한 호흡에 읽을 수 있습니다. 5-7장은 예수님께서 구약의 율법을 뛰어넘는 새로운 계명을 선포하신 산상 수훈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았듯이, 예수님도 산에서 제자들에게 계명을 주셨습니다. 8-9장은 예수님께서 말씀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 되심을 드러내는 기적들이 연거푸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고쳐주신 병자들 대부분이 사회에서 천대받던 사람들입니다. 나병 환자에게 손을 대시고 깨끗하게 하심으로 유대인들이 그어놓은 경계선을 과감히 없애셨습니다. 이방인인 백부장의 하인도 고침을 받고,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부정한 여인도 예수님의 몸에 손을 대면서 회복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당시의 고정관념을 깨는 행동이셨습니다. 죄인들을 구원하러 오셨음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귀신을 쫓아내시고, 죽은 소녀를 살리시고, 폭풍을 다스리신 예수님에게서 창조주 하나님을 발견했습니다. 바람을 다스리시는 예수님을 본 제자들은 두려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거나 경험했던 모세를 비롯한 구약의 인물들이 보인 반응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안심시키시고 그들의 믿음 없음을 한탄하셨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대면하고 경험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길을 가실 때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 두 사람이 예수님께서 거하시는 집까지 쫓아와서 고쳐주시길 간청하는 말씀입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외침을 보니, 이들은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 메시아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동하게 하는 것이 긍휼(compassion)인데 맹인 두 사람이 자신을 불쌍히 여겨주시길 간청합니다. 예수님께서 능히 이 일을 하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눈을 뜨게 했습니다:“너희 믿음대로 되라”.

 

눈이 밝아지는 것은 언제나 중요합니다. 육체의 눈은 물론 우리 마음의 눈도 떠야 합니다. 그래야 진리 되신 예수님을 밝히 볼 수 있고,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행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눈을 떠서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을 보기 원합니다.-河-

기도하는 삶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7주 동안

시편 77편을 갖고

2020년 기도에 대한 말씀을 나눴습니다.

 

어려움을 맞아서

기도의 자리로 나온 시편 기자는

밤에도 손을 들고 하나님과 씨름했습니다.

 

지체되는 기도 응답을 두고

행여나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셨는지,

베푸실 은혜를 잊으셨는지

하나님께 질문하고 은혜를 구했습니다.

 

이렇게 시편 전반부는

어려움 한가운데서 하나님께 드린

개인 탄식시였습니다.

 

2.

시편 기자가 결국 하나님을 만납니다 (10절)

기도 응답을 넘어서 진정한 기도의 결실을 맺은 것입니다.

 

그리고 시편 77편의 후반부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빌론의 마르둑은 물론 그 어떤 신보다

크고 위대하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속량(구원)을 구했습니다.

 

바다에 아니 폭풍 속에서도 곧게 길을 내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주의 인도를 구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으니

시편 77편은 상황의 변화에 상관없이

소망의 빛을 바라는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3.

기도의 끝(열매)은 단지 기도 응답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서 우리 자신이 변화되는데 있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만나고

더 깊은 신앙의 길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기도가 중요합니다.

 

4.

팬데믹을 맞아서

우리가 있는 곳이 기도처가 되었습니다.

 

지난 설교에서 말씀드렸듯이

교회에 모여서만 기도하는 것이 아님을

코로나바이러스가 일깨워주었습니다.

 

기도는 삶입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기도가 영혼의 호흡이라는 말도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사도 바울의 권면도

기도가 삶이 되었을 때 가능합니다.

 

팬데믹을 맞아서

삶의 기도를 더욱더 연습하고 몸에 익히기 원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기도가 먼저 나오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일을 진행하고 기도로 마무리하기 원합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무슨 상황에서도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연결되는

기도의 사람이 되기 원합니다.

 

2021년, 내년에 기도에 대한 말씀을 나눌 때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지금보다 훨씬 밝아지길 소망합니다.

 

이것이 바로 나의 아픔입니다. 나의 약함입니다.

그런데 지존자의 오른손이  변화시켰습니다.(시편 77:10)

This is my sorrow/sickness. The right hand of the Most High changed (Ps 77:10)

 

하나님,

오늘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0. 9. 10이-메일 목회 서신)

2020 기도 (7)

인도하셨나이다

 

기도에 끝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기도의 끝은 기도한 것이 응답되는 것으로 생각하곤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기도에 집착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다 보니 기도가 응답되면 모든 것이 잘 되는 것 같아서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특별히 사랑하시고 함께 하신다고 고백합니다. 해피 엔딩입니다. 반대로 기도가 응답되지 않으면, 실망합니다. 기도의 끝이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편 77편의 시인 역시 처음에는 개인 기도로 시작했습니다. 상황이 너무 어려우니 하나님 앞에서 씨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끝까지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구하는 시편 기자의 마음과 자세를 배우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기도했지만 쉽게 응답이 오지 않았습니다. 세상일이 쉽게 해결되지 않습니다. 기도를 만만하고 순진하게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그런 점에서 기도는 훈련이고 삶 그 자체입니다.

 

기도의 끝이 단지 기도 응답이 아닌 것을 시편 77편이 잘 보여줍니다. 시편 기자는 기도하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자신의 슬픔, 아픔과 한계를 실감했습니다. “지존자의 오른손의 능력”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변화되었습니다. 기도는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킵니다. 개인적인 욕망과 집착을 내려놓게 합니다. 자랑하는 것을 그치고 겸손의 자리로 인도합니다.

 

기도 가운데 자신이 변화되는 것이 기도의 큰 결실이지만, 기도의 끝은 아닙니다. 시편 77편이 알려주는 기도의 끝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변화되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회고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작은 소리로 읊조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빌론 마르둑을 비롯한 세상의 그 어떤 신보다 위대하다고 찬양했습니다. 기이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온 세상에 자랑했습니다. 야곱과 요셉 같은 자신의 조상을 속량(값을 치르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시편 기자는 바다에 길을 내시는 하나님도 찬양합니다. 주의 백성이 바닷길을 따라서 건너니 다시 물이 들어와서 주님의 발자취를 없애버렸습니다. 그 옛날 모세의 인도로 홍해를 건넜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모세와 아론을 통해서 목자가 양 떼를 돌보듯이 자신의 백성을 인도하셨습니다.

 

기도는 대부분 우리의 사정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무엇보다 자신이 변화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편 기자가 걸었던 기도의 여정을 우리도 따라 걷기 원합니다. -河-

숨마 쿰 라우데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번에

기적의 해라는 뜻의 라틴어
<안누스 미라빌리스>를 소개했습니다.

 

만유인력을 발견한 아이작 뉴턴이

전염병으로 고향에 머물던 2년을

기적의 해로 장식했다는 일화도 소개했습니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지만

새로운 일상을 사는 2020년을

우리 각자의 자리에서

<안누스 미라빌리스>로 만들길 소망했습니다.

 

2.

미국 대학에서 최우등으로 졸업하면

<숨마 쿰 라우데 Summa cum Laude >라는 타이틀을 얻습니다.

평생 이력서에 쓸 수 있는 최고의 명예입니다.

 

<숨마  쿰 라우데> 역시 “최고의 찬사로”라는 뜻의 라틴어입니다.

“숨마”는 최정상을 뜻합니다. 영어 summit이 생각납니다.

“쿰”은 전치사로 “라우데”와 함께 “찬사로”라는 뜻입니다.

 

졸업식에서

<숨마 쿰 라우데>로 졸업하면 얼마나 큰 명예이겠습니까?

하지만 모든 사람일 최우등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성적순으로 줄을 세워서

맨 앞에 있는 몇 사람에게만 주는 상이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상대 평가입니다.

 

3.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를 기억합니다.

 

주인은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이나 두 달란트 받은 종이나

그들이 열심히 일해서 갑절로 남겼을 때 똑같이 칭찬했습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마태 25:21)

 

세상 방식대로 하면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이 <숨마 쿰 라우데>가 되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최선을 다한 두 명의 종에게 똑같은 찬사를 보내셨습니다.

두 사람 모두 <숨마 쿰 라우데>인 셈입니다.

 

4.

세상은 팬데믹이 유행인 와중에도

끊임없이 줄을 세워서 누군가를 평가합니다.

 

팬데믹이 끝나면

우리 사회의 격차는 모든 면에서 더 커질 것같습니다.

 

모두 다 같이 겪는 팬데믹보다

이 상황에서도 격차가 생기고,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게 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곁눈질하면서 인생을 살면

무한 경쟁, 무한 욕망에 빠질 것입니다.

그것은 기독교인의 바람직한 삶의 태도도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우리가 목표할 것은

“잘 하였도다”라는 하나님의 찬사뿐입니다.

 

하나님의 찬사를 기대하면서

하루하루 일상의 삶을 살아갑시다.

 

하나님 안에 있으면

우리 모두 <숨마 쿰 라우데>입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마 25:21)

Well done, good and faithful servant.(Mt 25:21)

 

하나님,

참빛 식구들을 마음껏 칭찬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0. 9. 3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