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손과 발 (1)

예수님의 생각에 이어서 예수님의 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을 닮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이고 특권입니다. 예수님의 생각 속에 “생명”이 있었다면, 예수님의 마음에는 “긍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둠으로 대표되는 죽음을 이기고 세상에 생명을 주셨습니다. 믿음으로 겸손하게 하나님께 나오는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의 생각과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살림(살길)”을 생각합니다. 죽음을 뛰어넘습니다. 세상에는 죽음의 세력들이 많습니다. 결국에는 죽음으로 끝나는 일들도 많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배제하고 생명을 선택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불쌍히 여기는 예수님의 마음을 갖고 삽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게 된 생명을 사랑으로 이웃에게 전합니다. 각박한 세상에서 넉넉한 마음으로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면서 살아갑니다.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 외로운 이웃들, 힘이 없는 이웃들의 친구가 되고 힘닿는 대로 돕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이웃들에게 되갚는 것입니다.

 

이번 주부터 예수님의 생각, 마음에 이어서 예수님의 손과 발에 관해서 공부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생각과 마음이 실제로 어떻게 실행되었는지 배우게 될 것입니다. 살리시는 예수님,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생각과 마음이 손과 발로 연결되고 마무리됩니다. 예수님의 생각에 ‘생명’이, 예수님의 마음에 ‘긍휼’이 있었다면, 손과 발에는 “샬롬(평화)”이 깃들어 있습니다.

 

오늘은 나병 환자를 고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나병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죄로 여겼습니다. 접촉을 통해서 전염되기에 세상에서 격리되어 지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구약의 율법에 근거한 조치였습니다(레13-14장). 피부에 의심되는 질환이 생기면 곧바로 제사장에게 갔습니다. 구약의 제사장은 병을 고치는 의사가 아니라, 정함과 부정함을 분별하는 재판관이었습니다.

 

나병처럼 심각한 피부질환으로 의심되는 환자가 제사장에 오면, 7일 동안 격리해서 질병의 진행 상황을 살폈습니다. 7일 후에도 그대로이면 7일을 더 격리했고, 그때도 문제가 없으면 정하다고 판정하고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하지만, 14일의 격리와 진찰에서 나병으로 판정되면 부정함이 확정되고 격리해서 살아야 했습니다. 부정한 나병환자와 접촉하는 사람도 부정하게 취급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나병 환자가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입니다. 사람들은 “부정하다”고 외치면서 나병환자를 외면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의 환부를 손으로 만지시면서 그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부정한 나병 환자, 부정한 그의 질환을 만지시는 예수님의 손은 치료와 회복의 손입니다. 죄와 저주에 살던 나병 환자에게 그리스도의 샬롬이 임했습니다.-河-

예수님의 마음 (4): 긍휼

예수님은 살아생전에 세 번 정도 우셨습니다. 첫 번째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러 가시면서 나사로의 오누이 마르다와 마리아가 슬퍼하는 것을 보고 그들과 함께 우십니다(요11:35). 조금 지나면 나사로를 살리실 예수님께서 나사로 친지들의 슬픔에 동참하신 모습이 의외입니다. 하지만, 슬퍼하는 자와 함께 슬퍼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고스란히 느낍니다.

 

두 번째는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앞두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면서 성전과 도시를 보고 우셨습니다(눅19:41-44). 하나님께서 선택해서 세운 예루살렘의 망가진 모습이 예수님의 마음을 힘들게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평화의 일”을 언급하십니다. 단지 분열과 갈등, 다툼을 넘어서는 평화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에서 찾아오는 진정한 샬롬입니다.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을 믿고 열심히 종교 행위를 하지만, 진정 종교를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평화를 잃어버린 사람들인데, 이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세 번째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입니다(눅22:43-44). 성경 본문에 예수님께서 우셨다는 표현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눅22:42)라고 기도하셨던 예수님의 마음은 비탄에 젖어 있었습니다.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다면, 예수님께서 우시면서 기도하셨다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떠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우셨다는 구약성경의 표현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이 전달되는 구절은 창세기 6장 6절입니다:”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한탄하신 것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함>은 후회하셨다는 뜻입니다.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께서 후회하셨다니 하나님께서 얼마나 실망하셨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근심은 애통에 가까운 비통한 마음입니다. 한탄하셨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릇된 길로 가는 자식을 보면서 어머니가 한탄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죄악에 빠져 사는 인류를 보면서 탄식하셨습니다. 소리는 내지 않으셨지만, 속으로 우셨을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악함과 반역을 보면서 예레미야가 눈물을 흘립니다:“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렘9:1). 예레미야의 마르지 않고 흐르는 눈물은 곧 하나님의 눈물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대변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악함 앞에서, 사랑하는 자를 잃는 슬픔 앞에서, 하나님 백성의 그릇됨 앞에서 하나님도 우셨고, 예수님도 우셨습니다. -河-

예수님의 마음 (3): 긍휼

이번주에도 헨리 나우웬의 책 <긍휼>에서 예수님의 긍휼을 설명한 부분을 발췌해서 소개합니다. 나우웬은 책 결론부에서 긍휼의 삶을 감사와 연결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 때, 예수님의 긍휼을 따라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속에 있는 악과 맞대결하는 것이든 선을 지지하는 것이든 간에, 훈련된 행동의 특징은 늘 감사하는 마음이다. 분노는 우리를 적극적으로 만들고, 심지어는 우리 안에 많은 창조적인 에너지를 분출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오래가지는 못한다. 1960년대 분노에 근거해서 열심히 활동했던 사회 활동가들은 곧 탈진하고 말았다. 종종 그들은 신체적 탈진과 정신적 탈진 상태에 이르는 바람에 심리 치료나 ‘새로운 영성’이 필요할 지경이 되었다. 눈에 보이는 성공이 없는 상황을 꾸준히 견뎌내기 위해서는 감사의 정신이 필요하다.

 

분노에 찬 행동은 상처받은 경험에서 비롯되는 반면, 감사에 찬 행동은 치유받은 경험에서 비롯된다. 분노에 찬 행동은 취하고 싶어하나, 감사에 찬 행동은 나눠 주고 싶어 한다. 감사야말로 그 행동이 인내의 한 부분으로서 취해진 행동이라는 표시다. 그것은 은혜에 대한 반응이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정복하거나 파괴하도록 하지 않고, 오히려 이미 존재하고 있는 선을 볼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므로 긍휼 어린 삶이란 감사하는 삶이며, 감사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은 강제적이지 않고 자유로우며, 음침하지 않고 즐거우며, 광신적이지 않고 자유케 해주는 것이다. 감사가 행동의 근거가 될 때, 우리가 주는 것은 받는 것이 되며, 우리가 사역하는 대상은 우리에게 사역자가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보살피는 가운데 우리를 돌보는 존재를 감지하고, 우리의 노력 가운데서 우리를 격려하는 후원을 감지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늘 즐겁고 평화로울 수 있다. 내세울 만한 성공담이 별로 없을 때조차 말이다.

 

요한, 베드로, 바울 그리고 모든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가지고 당시 세계를 ‘정복했던’ 그 엄청난 에너지는 바로 그 만남[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온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선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지고 자신이나 서로에게 굳이 확신시켜 줄 필요가 없었다. 자신들이 하는 일의 가치에 대해서는 추호도 의심이 없기 때문이며, 자기들의 행동의 적실성에 대해서도 주저할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로지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그분을 칭송하고 그분께 감사하고 그분을 예배하는 일 외에는 할 것이 없었다. 그들은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듣고 보고 만졌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그들의 진정한 생명이요 그들의 진정한 관심사요 그들의 진정한 사랑이 되셨기 때문에, 삶은 곧 행동이 되었고 삶의 모든 것은 자신을 내어 주신 하나님의 크신 성물에 대한 지속적인 감사의 표현이 되었다.-河-

예수님의 마음 (2): 긍휼

예수님의 마음을 대표하는 단어는 “긍휼(compassion)”이라고 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하나뿐인 아들을 잃은 나인성 과부를 향한 예수님의 긍휼을 배웠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긍휼을 구하는 시각 장애인 두 사람이 은혜와 치유를 경험한 사건을 배웁니다.

 

지난주와 마찬가지로 헨리 나우웬의 책에서 예수님의 긍휼을 설명한 부분을 발췌해서 소개합니다:

 

‘스플랑크니조마이(splangchnizomai)라는 헬라어 동사는 표현이 얼마나 심오하고 강력한 것인지 보여 준다. ‘스플랑크나(splangchna) 몸의 내장, 오늘날 우리가 하는 말로 뱃속(gut)’ 가리킨다. 이곳은 가장 친밀하고도 강렬한 감정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이곳은 강렬한 사랑과 강렬한 미움이 가는 중심 장소이다. 복음서가 예수님의 긍휼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분의 뱃속(내장) 움직였다고 표현할 때는 무언가 아주 깊고 신비스러운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느끼신 긍휼은 피상적이거나 스쳐 지나가듯이 느끼는 슬픔 혹은 동정과 사뭇 다른 것이었다.

 

긍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라카밈(rachamim)인데 이것은 야훼의 자궁을 일컫는 말이다. 예수님의 긍휼이 어찌나 깊고 중심적이며 강력한 감정인지, 하나님의 자궁이 움직인다는 식으로 밖에는  표현이 안 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모든 온유와 친절이 숨어 있으며, 바로 여기서 하나님은 아버지이자 어머니가 되신다. 바로 여기서 모든 감정과 열정이 거룩한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된다. 예수님의 마음이 긍휼로 움직일 때, 모든 삶의 근원이 떨리고 모든 사랑의 근거가 활짝 열리며, 거대하고 마르지 않고 다함이 없는 하나님의 온유하심이 드러난다.

 

신약 성경에 나오는 치유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는 긍휼을 눈으로 보게 되는데,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의 신비이다. 예수님은 무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유리 방황하는 것을 보시고, 자신의 존재 중심으로부터 그들과 한가지로 느끼셨다(마9:36). 예수님은 눈먼 자들, 중풍 병자들, 귀머거리들이 사방에서 자신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는,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떠셨고, 마음으로 그들의 고통을 함께 겪으셨다(마14:14). 며칠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수천 명이 지치고 배고픈 것을 보시자, 예수님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고 말씀하셨다 (막8:2). 예수님을 부르며 따라갔던 소경 두 명에 대해서도(마9:27), 예수님 앞에 나와서 무릎을 꿇었던 나병 병자에 대해서도(막1:41) 그리고 외아들을 장사 지내던 나인 성 과부에 대해서도(눅7;13) 불쌍히 여기셨다.

 

그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였으며, 예수님은 친밀한 감성으로 그들의 슬픔의 깊이를 느끼셨다. -河-

예수님의 마음 (1): 긍휼

예수님의 생각에 이어서 오늘부터 예수님의 마음에 관한 공부를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마음 한 가운데 “긍휼(compassion, 불쌍히 여기심)”이 있습니다. 긍휼은 또한 하나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탄식하면서 기도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마음속에도 긍휼이 있습니다. 이처럼 긍휼은 삼위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헨리 나우웬의 <긍휼>이라는 책에서 옮겨온 글을 나누면서 예수님의 마음에 관한 공부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긍휼이라는 단어는 긍정적인 느낌을 준다. 우리는 스스로를 긍휼 어린 사람,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선하고 온화하며 이해심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싶어 한다. 대체로 긍휼을 인간의 고통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전제하는 것이다. 가난한 노인이나 굶주린 어린아이, 혹은 전신이 마비된 군인이나 겁에 질린 여자아이를 보고 긍휼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명백한 인간의 속성 중에서 긍휼을 제외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긍휼이 없다고 비난한다면 우리는 마음 깊이 상처를 받지 않겠는가? 사실 우리는 인간 답다는 것과 긍휼이 많다는 것을 즉각 동일시한다. 긍휼 없는 인간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하지만 인간 답다는 것과 긍휼이 많다는 것이 동일하다면, 왜 인류는 갈등과 전쟁, 미움과 억압으로 찢겨 있는가? 그리고 왜 우리들 가운데는 기아와 추위 때문에, 혹은 쉼터가 없어서 고생하는 사람들이 그렇게도 많단 말인가? 또 왜 우리는 인종적, 종교적 차이로 인해서 서로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공동체를 형성하지 못하는가? 왜 수백만의 사람들이 소외와 분열 혹은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단 말인가? 왜 우리는 서로 상처 주고 괴롭히고 죽인단 말인가? 세상은 왜 이리도 혼란스럽단 말인가?

 

이런 질문들을 생각할 때, 우리가 긍휼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해 좀 더 진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긍휼을 뜻하는 영어 단어(compassion)는 라틴어  ‘파티’(pati 고통)와 ‘쿰’(cum 함께)에서 파생된 말이다. 이 두 단어를 합치면 ‘함께 고통받다’라는 의미가 된다. 긍휼은 우리에게 상처가 있는 곳으로 가라고 고통이 있는 장소로 들어가라고, 깨어진 아픔과 두려움, 혼돈과 고뇌를 함께 나누라고 촉구한다. 긍휼은 우리에게 비참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울부짖고, 외로운 사람들과 함께 슬퍼하며, 눈물 흘리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도전한다. 긍휼은 우리에게 연약한 사람들과 함께 연약해지고, 상처 입기 쉬운 자들과 함께 상처 입기 쉬운 자가 되며, 힘없는 자들과 함께 힘없는 자가 될 것을 요구한다. 이런 의미에서 긍휼을 생각하면, 긍휼에는 평범한 친절이나 부드러운 마음씨 이상의 것이 관련되어 있음을 분명히 알게 된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