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서 읽기: 내 사랑하는 자야 (1)/ 아가서 1장 5-6절
Category: 말씀과삶
아가서 읽기: 내 사랑하는 자야 (1)
우리는 한 주간 아침마다 구약성경 아가서를 읽었습니다. 성경을 차례로 읽어가는 말씀 묵상이나 성경 통독이 아니면 쉽게 접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엊그제 보낸 목요 서신에서 나눴던 아가서 소개 가운데 일부분을 옮겨왔습니다:
“아가서는 구약성경에서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와 함께 성문서에 속합니다. 다른 성문서에 비해서 8장으로 짧지만, 우리가 아침에 읽고 있듯이 매우 독특한 말씀입니다. 아가서는 ‘솔로몬의 아가라’로 시작합니다. 우리말 ‘아가(雅歌)’는 아름다운 노래라는 뜻입니다. 영어나 히브리어 본문을 따라서 다시 읽으면 ‘솔로몬에 속한(솔로몬을 위한) 노래 가운데 노래’가 됩니다.
특별히 아가서는 솔로몬으로 대표되는 신랑과 술람미 여인으로 불리는 신부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신랑과 신부의 노래가 번갈아 등장합니다. 들러리와 비슷한 친구들의 코러스도 중간중간에 등장해서 아가서를 풍성하게 만듭니다. 이처럼 구약의 아가서는 한 편의 뮤지컬과 같은 사랑 노래입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아가서를 하나님과 교회, 하나님과 그리스도인의 매우 친밀한 관계에 초점을 맞춰서 읽었습니다.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는 남녀의 애틋하고 친밀한 사랑을 통해서 교회와 자기 백성을 최고로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또한, 신랑을 그리워하고 찾아 나서는 적극적인 여인의 모습 속에서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매는 듯한 하나님 백성의 갈급함을 발견했습니다.
물론, 아가서를 본문 그대로 남녀 간의 사랑으로 읽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근대 이후 최근의 흐름입니다. 육체적인 사랑을 부정하고, 금욕적인 신앙을 칭송하던 고대 시대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몸과 마음을 비롯한 모든 사랑을 허락하셨음을 강조한 아가서 읽기입니다.
아가서에 등장하는 포도원과 낙원(garden)을 아담과 이브의 에덴동산에 비유합니다. 아가서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낙원에서 남녀가 부끄러움 없이 완전한 사랑을 누리고, 하나님과 함께 거닐며 교제하는 최고의 삶을 그렸다는 것입니다.
아가서의 주인공은 모습이 검은 술람미 여인과 목자 또는 솔로몬왕으로 묘사되는 남성입니다. 여인은 당시 남성 우위의 사회에서 형제들의 폭력에 희생되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의 모든 여인이 부러워하는 최고의 신랑을 만났습니다. 큰 은혜입니다. 신랑은 신부를 최고라고 찬양합니다.
어둠 속에 살던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목숨까지 내어주시고, 우리를 신부로 삼아주신 예수님이 생각납니다. 예수님의 은혜 속에 있으니, 우리도 이 시대의 술람미 여인이 되고, 최고로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신부가 됩니다. 할렐루야! -河-
2026년 10월 4주 말씀
종교개혁주일에: 얀 후스/ 요한복은 12장 24절
2026 종교개혁 주일에
선구자: 얀 후스 (Jan Hus)
진리를 찾으라. 진리를 들으라. 진리를 배우라. 진리를 사랑하라. 진리를 말하라. 진리를 붙잡으라. 그리고 죽기까지 진리를 지키라( Seek the truth, hear the truth, learn the truth, love the truth, speak the truth, hold the truth, and defend the truth until death) –얀 후스, Jan Hus–
오늘은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가 독일의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95개의 반박문을 게시한 이후 불길처럼 타오른 개혁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종교 개혁 주일입니다. 비텐베르크 대학 교수였던 마틴 루터는 당시의 타락한 가톨릭의 비리를 낱낱이 고발하고 새로운 신앙이 무엇인지 논의하고자 반박문을 준비했지만, 마틴 루터의 처음 의도와 달리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된 것입니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톨릭 사제의 신분에서 파면되었고, 핍박과 박해를 피해서 바르트부르크성에 숨어서 지내야 했습니다. 그 성의 조그만 방에서 독일어 성경을 번역했고, 이것은 종교개혁의 커다란 불길을 만들었습니다. 그로부터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성경으로”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가진 개신교(protestant)가 탄생한 것입니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루터보다 150년 전 존 위클리프(1320-1384)라는 영국 옥스퍼드대학 교수는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습니다. 사제들이 독점하던 라틴어 성경을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루터의 독일어 성경 번역과 맥을 같이 합니다.
위클리프가 영어로 성경을 번역한 50여 년 후, 체코 프라하 대학의 총장을 지냈던 얀 후스(1369-1415)는 체코어 성경을 완성했고, 체코어로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성찬에서 성도는 떡만 먹고 포도주는 사제가 독점하였는데, 후스와 그의 동료들은 예수님의 피인 포도주도 성도들과 함께 나눴습니다. 그러자 체코 프라하에는 얀 후스를 따르는 신도들이 많아졌습니다.
가톨릭교회는 얀 후스를 콘스탄츠 종교회의(1415년)에 소환했고, 그를 불에 태워서 죽였습니다. 그리고 이미 죽은 위클리프의 무덤을 파헤쳐서 그의 유골을 불에 태우고 강에 버렸습니다. 하지만, 얀 후스를 따르는 후스파 개신교회는 지속적으로 가톨릭교회에 저항했습니다. 200여 년 후에는 개신교와 가톨릭 간의 전쟁인 30년 전쟁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습니다.
체코의 모라비아 지방에 살던 후스파 기독교인들은 모라비아 형제단을 조직했고, 박해가 닥치자, 독일로 이주해서 모라비안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훗날 감리교를 창시한 요한 웨슬리는 모라비안들의 확신과 하늘나라 소망에 도전받고 새롭게 회심하였습니다.
마틴 루터는 자신이 후스의 후예라고 말했답니다. 얀 후스가 그의 뜻을 마음껏 펼치지 못한 채 순교했지만, 진리를 찾고 진리를 배우고 따르려는 그의 신앙은 100여 년 후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결실을 맺었습니다.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 놀라운 결실을 맺은 한 알의 밀알이 된 것입니다. -河-
2026년 10월 3주 말씀
찬송가 해설 (17): 내 갈 길 멀고 밤은 깊은데 (찬송가 379장)
찬송가 해설 (17)
내 갈 길 멀고 밤은 깊은데 (찬송가 379장)
연속 설교 막간에 살펴보는 찬송가 해설 시간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자주 부르는 찬송가 379장 “내 갈 길 멀고 밤은 깊은데”입니다.
영국 성공회 사제이고 옥스퍼드 대학 교수였던 존 뉴먼(John Henry Newman, 1801-1890)이 찬송시를 썼습니다. 존 뉴먼은 당시 타락했던 영국 성공회를 향한 개혁을 주도하다 건강을 잃고, 이탈리아 시칠리아섬으로 요양을 떠났습니다. 그러던 중 장티푸스에 걸려서 사경을 헤매다가 영국으로 귀국하는 배에 올랐습니다. 존 뉴먼이 탄 배가 짙은 안개로 지중해 한 가운데서 멈추고 말았습니다.
존 뉴먼의 연약한 육신의 건강, 항해의 어려움, 막막한 교회의 현실 앞에서 탄생한 찬송가가 “내 갈 길 멀고 밤은 깊은데”입니다. 우리 말 가사도 좋지만, 영어 가사를 그대로 옮겨오면 다음과 같습니다:
(1절)자비로운 빛이여, 나를 둘러싼 어둠 속에서 나를 인도하소서. 나를 계속 이끌어 주소서. 밤은 어둡고 나는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나를 계속 인도하소서. 내 발걸음 지켜 주소서, 저 멀리 앞에 펼쳐질 길을 보여 달라고 구하지 않겠습니다. 한 걸음이면 충분합니다.
(2절) 저는 언제나 이렇지는 않았습니다. 주께서 저를 인도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제 길을 제가 선택하고 그 길을 제 눈으로 보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주께서 나를 인도하여 주소서. 저는 눈부시고 화려한 세상을 좋아했고, 두려움이 있으면서도 교만이 제 뜻을 지배했습니다. 주여, 지난날의 저를 기억하지 마소서.
(3절) 지금까지 주의 능력이 나를 지키고 복되게 하셨으니, 앞으로도 분명 나를 계속 인도하실 것을 믿습니다. 황야를 지나고 습지를 지나며 바위산과 거센 물결을 지나서라도 주께서 나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마침내 이 밤이 지나갈 때까지, 그리고 아침이 밝아오면, 오래전부터 사랑했으나 잠시 헤어져 있었던 그 천사 같은 얼굴들이 미소 지으며 나를 맞이할 것입니다.
존 뉴먼의 가사에 곡을 붙인 존 다익스(John B Dykes, 1823-1876)는 존 뉴먼의 찬송시에 감동을 받고 “룩스 베니그마(친절한 빛)”라는 곡을 썼습니다. 존 뉴먼의 가사 첫 줄 “자비로운 빛”에서 나온 라틴어 곡명입니다. 존 다익스는 우리가 아는 찬송가 8장(거룩 거룩 거룩), 79장(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85장(구주를 생각만 해도)의 작곡가입니다.
부러울 것이 없었던 존 뉴먼이지만, 교회를 위해서 봉사하다가 육신의 병을 얻었고, 고향에 돌아가는 배가 바다 한 가운데서 멈추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하지만, 그 막막한 순간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에는 자기 마음대로 살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실했기 때문입니다. -河-
2026년 10월 1주 말씀
야베스의 기도: 역대상 4장 9-10절
야베스의 기도 (3)
1) 저에게 복을 주옵소서
2) 저의 지경을 넓혀 주옵소서
3) 주의 손으로 저를 도와주옵소서. 4
4) 환난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개역개정)
3주 동안 야베스의 기도를 주제로 공부했습니다(역대상 4장 9-10절). 야베스는 그의 어머니가 어렵게 낳았습니다. 야베스의 이름은 “고난” “수고”를 뜻하는 히브리어 <오베츠>에서 왔습니다. 이처럼 어렵게 태어난 야베스는 그의 형제들보다 존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기도의 힘이었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2천 년에 출판된 브루스 윌킨슨의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으로 유명해졌습니다. 한국어로 번역된 윌킨슨의 책에서는 야베스의 기도를 “복에 복을 더하소서. 나의 지경을 넓혀 주소서.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소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소서”로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이 기도를 외워서 지속적으로 기도하면, 야베스의 기도가 우리에게도 이뤄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야베스의 기도를 히브리어 본문 그대로 읽으면, 확신에 찬 강청 기도보다는 힘없고 약한 야베스가 하나님의 선처를 구하는 기도에 가깝다고 배웠습니다. “복을 주시려면, 지경을 넓혀 주신다면, 주의 손으로 도와주신다면, 환난(악)에서 벗어나 어려움을 없애주신다면”이라는 조심스러운 소원에 가까웠습니다.
윌킨슨이 제시하는 야베스의 기도는 힘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야베스의 기도를 통해서 인생이 변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합니다. 그런데 윌킨슨의 기도 속에는 하나님보다 ‘나’가 앞서 있습니다. 자칫 하나님을 이용해서 나의 소원을 이루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반면, 제가 소개한 히브리어 본문 속 야베스의 기도는 기도하는 마음가짐에 대해서 배울 수 있지만, 따라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 각자가 야베스의 기도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정리해 보았습니다.
첫째, 주보 앞에 소개한 야베스의 기도, 네 가지를 갖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야베스가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을 명확하게 요약했기 때문입니다. 단지, “복에 복을 더하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히브리어 본문의 강조형인데 “진정한 복을 주옵소서” 또는 “저에게 꼭 복을 주세요”라는 기도이지, 복을 갑절로 달라는 뜻이 아닙니다.
둘째, 야베스의 기도를 주문 외우듯이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중언부언의 기도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또한 기도가 그대로 이뤄지길 바라는 기복신앙으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지만, 응답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셋째, 야베스는 자기의 상황에 맞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우리도 각자의 기도를 만들어서 야베스처럼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이 꼭 필요한 우리만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입니다.-河-
2026년 9월 4주 말씀
야베스의 기도 (2): 역대상 4장 9-10절
야베스의 기도 (2)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역대하 4:10)
앞으로 두 주 동안 야베스의 기도를 살펴볼 예정입니다. 야베스는 자기가 믿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면 그곳에 있는 토속신을 믿는 부족들을 쫓아내고 오직 하나님만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진멸’이라는 표현을 쓰실 정도로 옛것을 없애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갈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사사기에서 “옆구리의 가시”라고 부른 가나안 족속들을 남겨 놓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그들의 신인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비하면 화려했습니다. 풍요와 다산의 신이었습니다. 세상에서 당장 필요한 물질의 축복을 갖다주니 바알과 아세라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입니다. 야베스는 이처럼 하나님이 잊혀지고 세상의 신을 쫓는 시대를 살면서 자기가 믿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에는 야베스의 기도가 “-하면(if)”로 시작합니다. 야베스는 부르스 윌킨슨이 정리한대로 ”복에 복을 더하소서” “나의 지경을 넓혀 주소서”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소서” “환난을 벗어서 근심이 없게 하소서”라고 강청하지 않았습니다. 야베스는 주문을 외우듯이 네 가지를 하나님께 반복해서 요청한 것도 아닙니다.
야베스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어 주실 생각이시면, 즉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가 소원하는 네 가지를 응답해 주시길 조심스럽게 기도했습니다. 조금 과장되게 들릴 수 있지만,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가 생각납니다: ”아버지,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눅22:42).
워낙 어렵게 태어났기에 하나님 앞에서 겸손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의 어머니가 이름을 야베스라고 지었고 야베스의 뜻은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라고 했습니다. 슬픔 가운데 야베스를 낳았다는 뜻입니다. 어머니만 그랬을까요? 야베스의 삶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때 야베스는 하나님께 나와서 기도했습니다. 기도로 인생 역전을 이뤘습니다.
야베스는 심령이 가난했습니다. 실제로 가난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무엇을 달라고 자신 있게 또는 교만하게 요청할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야베스 자신처럼 가난하고 힘든 사람도 하나님께서 기억하신다면, 자기가 갖고 있던 기도 제목을 들어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다고 기도했습니다. 약하고 낮은 자의 기도였습니다. 작은 신음으로 간절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