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 (4)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4장을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분별하라는 말씀으로 시작했습니다(4:1-6). 교회 안에 들어온 미혹의 영을 분리해 내라는 것입니다. 올바른 믿음이 무엇인지 판단하고 그것을 추구하라는 요청입니다. 신앙에서 머리(교리, doctrine)에 해당합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말씀은 사도 요한의 교훈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왔습니다(4:7-10).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도착했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고 화목 제물로 삼으시면서 우리를 향하신 사랑을 증명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를 갖고 있고 현명해도 거기에 사랑이 빠지면 하나님 백성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어려움을 이겨냅니다.

 

오늘 본문은(4:11-16)은 지난 두 시간 동안 살펴본 말씀의 통합입니다. 우리에게 임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것은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의 삼위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시작합니다. 그 믿음이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11절). 여기서 “마땅하다”는 것을 사랑해야 한다는 율법적 요청, 즉 의무로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은 앞에서 소개한 하나님의 사랑을 잘못 이해한 결과입니다. 하나뿐인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고, 화목 제물로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 사랑을 올바로 이해하고 충분히 느끼면,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씀이 의무가 아니라 특권으로 다가옵니다. 분수가 흘러 넘쳐서 물이 아래로 떨어지듯이 저절로 사랑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 요한 당시에 하나님을 직접 보았다는 신비주의자들도 있었고, 자신들만 하나님을 아는 비법을 갖고 있다는 특권 의식에 사로잡힌 이단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구약시대부터 하나님의 형상도 만들지 않았고, 하나님을 보면 죽음을 맞았습니다. 이처럼 기독교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사도 요한이 이단의 그릇된 가르침에 일침을 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길이 있었는데, 그것은 기독교인들이 서로 사랑할 때입니다:“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12절).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 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랑에 참여하는 길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시인하는 믿음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임합니다. 이처럼 사랑과 믿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갑니다. 믿음 안에서 사랑을 실천하고,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보고 느끼기 원합니다. -河-

요한일서 (3)

서로 사랑하라

 

교회에 들어온 또는 밖에서 교회를 흔드는 그릇된 영을 분별하라는 말씀으로 시작한 요한일서 4장은 7절로 오면서 분위기가 바뀝니다. 적그리스도가 아무리 판을 치고 교회를 흔들어도 하나님께 속한 자를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있는 그 어떤 세력보다 크시기 때문입니다.

 

힘들 때일수록 교회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이 모든 두려움을 쫓아내고 교회 안에 침투한 악한 세력들이 활동하지 못하도록 교회를 하나 되게 만듭니다. 사도 요한이 사랑을 강조하는 커다란 이유입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의 사도”답게 요한일서 전반부에서도 사랑을 강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둠을 밝히는 빛인데, 형제를 사랑하면 빛 가운데 거하는 것이고 형제를 미워하면 어둠에 행하는 것입니다(요일2:9-11). 또한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지 말기를 부탁하면서 세상을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사도 요한은 사랑이라는 주제를 갖고 신앙은 물론 형제와의 관계와 세상의 삶을 풀어나갑니다.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심지어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세상을 사랑하게 마련입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빠지고 맙니다. 그런 점에서 사랑은 어거스틴이 말한 대로 지향성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고 추구하느냐에 따라서 사랑이 결정됩니다.

 

사랑에는 진실함과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진실성이 없는 사랑은 아무 힘이 없고 위선적입니다. 행함이 없는 사랑은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예수님께서 진실한 사랑을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최고의 사랑을 직접 실천하신 것입니다 (요15:13).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을 사랑 그 자체로 정의하고 있습니다(요일4:8). 하나님께서 사랑의 근원이고 시작점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지만, 우리 안에서 생기는 힘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서 나눠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이 전파되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사랑을 모르면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을 통해서 세상에 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먼저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그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랑을 받았으니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 사랑을 깊이 묵상하고 느끼는 한 주간이 되길 바랍니다. -河-

요한일서 (2)

사랑하는 자들아

 

앞으로 살펴볼 요한일서 마지막 두 장에는 우리가 믿는 신앙과 삶에 대해서 세심하게 알려줍니다. 말씀을 통해서 사도 요한의 사려 깊은 마음을 느끼고 그것이 하나님 말씀으로 우리 마음에 깊이 들어오는 시간이길 바랍니다.

 

요한일서가 기록될 당시에 교회에 거짓 교사들이 들어왔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그릇된 정보를 전하면서 교회를 혼란케 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정하고, 영적인 것만을 중요시했습니다. 자신들이 믿는 신앙이 최고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보다 자신들의 신앙과 교리를 우선적으로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와 있으니 교회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4:1-6)에서는 진정한 신앙이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사랑하는 자들아”라는 첫 구절에서 요한의 마음을 느낍니다. 사랑의 사도로 불리는 사도 요한이 사랑으로 성도를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모든 교훈과 권면에는 사랑과 온유함 그리고 오래 참음이 있어야 합니다. 마음으로 전하는 말씀이 진정성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 다른 영(spirit)이 들어왔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분별(시험 test)해야 합니다. 요한은 분별하는 두 가지 기준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음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 바른 영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지 않거나 육체로 오신 것을 부정하고 영만 강조하는 것은 적그리스도에 속한 영입니다. 사도 요한 당시에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영이 이미 세상에 와서 교회에서 활동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둘째는, 하나님께 속한 자의 삶의 모습입니다. 거짓 영과 적그리스도의 영은 세상에 속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께 속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말씀을 듣고 진리의 영을 쫓아 삽니다. 우리가 무엇을 추구하는지에 따라서 거짓과 참이 판가름 날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영을 분별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세상에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있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세상에도 다양한 신앙이 존재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 믿으면 성공하고 출세한다고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자기 방식대로 예수님을 믿습니다. 기독교처럼 보이지만 예수님을 반하는 이단들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육신의 몸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믿고(정확한 신앙), 실제 삶에서 예수님을 쫓아서 사는 것이 올바른 신앙입니다(정확한 삶).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과 삶이 되길 바랍니다.

 

매사에 참과 거짓을 옳게 분별하고 하나님께 속한 참빛 식구들이 되길 기도하겠습니다.-河-

요한일서 (1)

사도 요한

 

매년 가을에는 신약성경 가운데 한 권을 정해서 읽고,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올해도 신약성경 뒷부분에 위치한 공동 서신 요한 일서를 함께 나누겠습니다.

 

요한 일서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명인 사도 요한이 기록한 말씀입니다. 복음서는 야고보와 요한을 세베대의 아들이라고 소개합니다. 요한은 베드로와 함께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였습니다. 자신의 배를 갖고 있었고, 훗날 예수님께서 잡히셔서 대제사장의 집에서 심문을 받으실 때 요한의 청탁으로 베드로와 함께 집안까지 들어갈 수 있었으니 요한은 갈릴리는 물론 예루살렘에서도 통하는 괜찮은 가문 출신 같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베드로, 요한과 야고보는 특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하나님의 모습으로 변하실 때도 세 사람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던 전 날밤,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도 비록 잠은 들었지만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끝까지 예수님과 동행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명의 제자를 특별히 훈련시키신 이유가 있습니다. 요한의 형으로 불리는 야고보는 예루살렘에 박해가 닥치면서 일찍 순교했습니다(행12:1-2). 예수님의 핵심 제자였던 야고보의 순교는 초대 교인들에게 커다란 도전이 되었을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동생 또 다른 야고보와 함께 예루살렘 교회는 물론 초대교회의 기둥이 되었습니다(행8:14)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초대교회를 감독하는 위치에 있었다면, 사도 요한은 서머나 교회를 비롯한 소아시아에서 하나님의 일꾼을 세우고, 요한복음과 요한 서신을 기록해서 자신이 목격하고 체험한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노년에 밧모섬에 귀양갔을 때 계시를 받고, 신약 성경의 마지막 말씀인 요한계시록을 기록했습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100세 가까이 장수하면서 차분하게 신앙의 길을 간 인물이어서 사도 요한 또는 장로 요한이라고 부릅니다.

 

특별히 사도 요한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부탁대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끝까지 모시고 살았을 것입니다(요19:27). 오랫동안 장수하면서 에베소와 서머나 교회의 감독 이그나티우스와 폴리갑을 세웠습니다. 두 사람 모두 신실한 주의 일꾼으로 교회를 세웠고 결국 순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을 가장 적합하게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쓰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앞으로 살펴볼 요한일서 4장과 5장에서 알 수 있듯이 요한은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에 걸맞지 않게 사랑을 강조했고, 초대교회 당시 교회에 침투했던 이단에 맞서서 자신이 직접 목격하고 경험한 예수님을 변호했습니다.

 

앞으로 요한일서를 살펴보면서 우리의 신앙은 물론 우리 안에 임하신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깊이 묵상하고, 요한처럼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하는 시간이길 바랍니다.-河-

예수님 우리 예수님 (9)

불쌍히 여기시니

 

마태복음 8장과 9장에 나오는 마지막 아홉 번째 기적은 귀신들려서 말을 못 하는 사람을 고치신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맹인들의 눈을 뜨게 하시고 다시 갈릴리 선교를 위해서 집을 떠나셨습니다. 맹인들은 비밀로 하라는 예수님의 부탁을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을 전파했기에 예수님의 명성은 갈릴리 전체로 퍼져 나갔을 것입니다.

 

누군가 귀신들려서 말하지 못하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귀신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스스로 예수님께 올 수 없습니다. 이 사람이 귀신이 들렸지만,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간 친구가 있었듯이 이 사람에게도 가족이든 친구이든 돕는 손길이 있었기에 예수님 앞에 나왔을 것입니다.

 

말을 못 한다고 모두 귀신이 들린 것도 아닙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는데 이 사람의 경우는 귀신의 영향으로 말을 못 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나 옛날에는 귀신들린 사람이 많았습니다. 의료체계가 발달하지 않은 탓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니 이 사람이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고 놀라워했습니다. 하지만, 현장에 있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귀신의 왕을 의지해서 귀신을 쫓아냈다고 비아냥거렸습니다. 귀신을 쫓아낸 것은 사실이니 부인할 수 없고, 대신 하나님이 아니라 귀신의 왕을 의지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논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하늘나라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통치자가 되시며, 하나님께서 여전히 그에게 나오는 백성들을 사랑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수훈의 연장선에서 가는 곳마다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8장과 9장에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이 모여있습니다.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과 더불어 행함으로 복음을 전하시고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밝히 드러내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 앞에 나온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힘없는 백성들이 목자 없는 양처럼 고난받고 힘없이 살아가는 것을 한없이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긍휼입니다. 이들을 지도하고 인도할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자기 배를 채우기에 급급했습니다. 그러니 백성들의 신앙과 삶이 허약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면서 추수할 곡식은 많은데 그것을 거둘 일꾼이 적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사는 세상도 불쌍히 여기실 것입니다. 우리 세상에서 기쁜 소식을 전할 일꾼을 찾고 계실 겁니다. 우리가 그 일꾼이 되기 원합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