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자의 비유 (6)

큰 아들 II

 

“함께 하기 싫은 사람들은 없는지요? 하나님께서 찾으시는데 우리가 살짝 제쳐둔 사람은 없는지요? 하나님을 혼자 독점하고 싶고 행여나 저런 사람과 함께 천국 간다면 ‘난 싫어’라고 속으로 말한 적은 없는지요? 수군거린 적은 없는지요? 우리 자신이 최고라는 특권 의식을 가진 적은 없는지요? 집에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화를 내는 맏아들의 모습은 없는지요? 하나님을 향해서 섭섭하다고, 정당하지 않다고 불평한 적은 없는지요?”

 

지난주일 첫째 아들에 대한 말씀을 나누면서 마지막에 함께 생각했던 질문들입니다. 우리 안에도 첫째 아들의 속성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곁을 끝까지 지킨 자신에게 잔치를 벌여주지 않은 아버지에 대한 섭섭함입니다. 동생에 대한 불만이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불만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아버지 재산을 팔아서 먼 나라로 가서 모두 허비하고 돌아온 동생과 달리 자신은 들에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자신이 아니라 동생을 위해서 잔치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아버지께서 자신을 위해서는 잔치를 해주신 적이 없습니다. 어찌 보면 화를 낼만 합니다.

 

문밖에서 화를 내며 집안에 들어오지 않는 첫째 아들을 보고 아버지가 직접 밖으로 나왔습니다. 저 멀리 둘째가 오는 것을 보고 뛰어나갔던 아버지와 같습니다. 아버지는 맏이의 대우를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첫째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31-32절). 아버지 말씀에 큰아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성경은 알려주지 않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섭섭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열심히 믿은 자신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사람에게 더 큰 복이 임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무너질 때도 있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반감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때는 우리를 맞으러 문 밖에 나오셔서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라는 하나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큰 아들의 속성이 스멀스멀 올라와서 화가 난다면, 그때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필요한 순간입니다. 아버지를 떠난 사람만 탕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곁에 있으면서도 아버지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며 시기와 질투, 섭섭함에 젖어 있던 큰아들 역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필요한 탕자입니다.

 

그런 점에서 첫째와 둘째의 성품을 모두 갖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탕자에게 임한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우리의 상한 마음을 회복하기 원합니다.-河-

탕자의 비유 (5)

큰 아들 I

 

탕자의 비유는 공관복음서 중에서도 누가복음에만 나옵니다. 누가복음의 저자 누가가 유대인이 아닌 헬라(그리스) 사람이었듯이 누가복음은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에 관심을 갖습니다. 그런 점에서 잃은 양, 잃은 은전, 잃은 아들의 비유는 누가복음의 정신에 잘 맞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세 가지 비유는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듣기 위해서 예수님께 가까이 오는 것을 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리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잃은 양 한 마리, 잃은 은전 하나, 둘째 아들은 예수님께 나와서 말씀을 듣고 식사를 함께하던 세리와 죄인들을 가리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도 찾으시고, 하나님께 돌아오길 기다리십니다. 한 명이라도 하나님께 돌아오면 기뻐하시며 잔치를 벌이십니다. 하나님께는 세리나 죄인들도 귀하기 때문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탕자의 비유 속 첫째 아들은 예수님의 비유를 듣고 있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가리킵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 재산을 모두 없애고 돌아온 동생을 맞아주는 것이 못마땅했습니다. 둘째 아들을 종으로 취급하던지 문전박대하는 것이 옳다고 여겼습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가 둘째를 위해서 잔치를 벌인다는 말을 듣고 분노했습니다. 집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둘째는 그렇다 쳐도 그를 향한 아버지의 대우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첫째 아들에게 옵니다. 아버지에게는 집에 돌아온 둘째나 밖에서 들어오지 않고 화를 내는 첫째나 모두 중요합니다.

 

비유를 듣고 있던 바리새인들과 세리들은 둘째 아들에 대한 말씀에서 비유가 끝날 줄 알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겨냥할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첫째 아들에 비유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도 첫째 아들이 자신들을 가리킨다고 금세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자신들은 나름대로 율법을 지키고 신앙 가운데 살려고 애썼습니다. 반면에 예수님과 함께 식사하는 세리들이나 죄인들은 자신들의 기준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환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니 화가 나고 수군거릴 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옳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 안에도 첫째 아들과 같은 모습이 있습니다. 일종의 교만입니다. 자신과 다르거나 신분이나 신앙적으로 약간 부족한 사람들을 배제하려는 마음입니다. 내 방식대로 하나님을 믿습니다. 나 중심이 되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기 힘듭니다. 주인공에서 밀려나는 순간 섭섭함이 밀려오고 급기야 분노할 수 있습니다. 행여나 우리 안에 숨겨 있을 첫째의 모습을 생각하고 꺼내서 그것도 하나님께 드리기 원합니다.-河-

탕자의 비유 (4)

탕자의 귀환 II

 

“이에 일어나 아버지께 돌아가니라”(20절). 아버지 재산을 팔아서 먼 나라로 떠났던 탕자가 정신이 들면서 하나님과 아버지께 범한 잘못을 회개하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탕자가 아버지를 떠날 때는 다시는 아버지를 보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홀로서기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재산을 모두 없애고 돼지만도 못한 취급을 받게 되면서 아버지를 떠올렸고 아버지께 돌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스스로 돌이킨 결과입니다.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1606-1669)는 자신만의 화법으로 그의 신앙이 고스란히 담긴 성화를 많이 남겼습니다. 렘브란트 성화의 특징은 성경 인물들의 심리와 상황을 세심하게 묘사한 것입니다. 자신의 신앙과 성경해석을 작품을 통해서 고백한 셈입니다.

 

렘브란트는 누가복음 15장에 있는 탕자의 비유를 갖고 “탕자의 귀환”이라는 작품을 남겼습니다. 아들을 기다리느라 볼이 움푹 패이고 힘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늙은 아버지가 돌아온 아들의 등에 손을 얹고 안아줍니다. 둘째 아들의 등에 올려진 아버지의 손은 오른손은 부드러운 여성(어머니)의 손이고, 왼손은 거친 남성(아버지)의 손입니다.

 

아버지 품에 얼굴을 묻고 있는 둘째 아들은 머리를 모두 깎아서 갓 태어난 태아처럼 보입니다. 그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서 거듭 태어난다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진정한 회심을 표시한 것입니다. 옷은 누추합니다. 왼쪽 샌들이 벗겨졌습니다. 오른쪽 샌들도 발바닥이 드러날 정도입니다. 그래도 오른쪽 허리에 작은 단검을 차고 있습니다. 아들됨의 표시입니다. 성경에서 검을 하나님 말씀에 비유하니 그가 신앙은 잃지 않았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아버지 품에 안긴 둘째의 모습은 흐느끼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그의 등에 올려진 아버지 두 손이 그리웠기에 한없이 편해 보입니다. 아버지를 떠난 삶이 얼마나 외롭고 혹독한 것인지 몸소 깨달았기에 돌아온 탕자의 모습은 아버지를 떠나서 먼 나라로 갈 때와 정반대입니다.

 

신학자 헨리 나우웬이 인생의 갈림길에 있을 때  렘브란트의 작품 탕자의 귀환을 만났습니다. 그가 살아온 삶을 그림 속의 탕자, 아버지, 큰아들에 적용하면서 그의 인생을 다시 조율할 수 있었습니다. 돌아온 탕자의 행복한 모습 속에서 자신이 궁극적으로 가야 할 곳은 하나님 품 임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을 때가 최고의 행복임을 다시 발견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돌아갈 곳이 있고, 우리를 기다리는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은 큰 축복입니다. 거친 세상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하나님 품에 안겨야 할 부족한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기억하며 하나님께 돌아가서 힘을 얻고 다시 시작하는 한 주간의 삶이 되길 원합니다.-河-

탕자의 비유 (3)

탕자의 귀환 I

 

지난주 말씀을 통해서 우리 삶을 둘째 아들에 적용할 수 있음을 배웠습니다.

 

둘째 아들을 보면서 말 그대로 “탕자(Prodigal son)”라고 비난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우리 역시 탕자임에 틀림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우리의 존재나 삶이 하나님의 아들로 의롭게 되었지만, 여전히 둘째 아들 탕자의 삶을 살거나 생각하는 영역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믿으면서도 자기 마음대로 삶을 좌지우지 하는 것들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삶의 영역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삶의 모습입니다. 교만이 앞서면 하나님을 멀리하기 쉽습니다. 욕심 역시 우리를 탕자의 처지로 몰아넣는 주범입니다.

 

탕자의 삶은 겉보기에 멋지고 희망차게 시작하지만, 끝이 초라합니다. 하나님 없이 자유를 만끽하지만, 결국에는 날개도 없이 추락할 수 있습니다. 물론 기준이 다를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의 성공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하나님 없이도 나름 멋진 인생을 살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이라는 기준으로 우리 삶을 돌아보면,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은 절망, 초라함, 영적 배고픔, 외로움입니다. 그 끝에는 죽음이 있습니다.

 

비유 속의 둘째 아들 역시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랐습니다. 아버지를 떠나서 자기만의 삶을 사는 것에 도취하였습니다. 막상 집을 떠나서 먼 나라로 갔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나쁜 친구들, 가뭄, 돼지가 먹는 음식도 먹지 못하는 초라함이었습니다. 생명이 위협당할 정도의 위기상황입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의 비극입니다.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도 먹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을 때, 둘째 아들이 비로소 자신을 돌아봅니다. 돌아서는 순간입니다. 여기서 돌아서지 않으면 그 앞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지만, 칠흑처럼 어두운 인생의 순간에 아버지를 떠올리고 집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는 것은 생명의 길입니다.

 

아버지 집에는 먹을 것이 많이 있는데 괜히 아버지를 떠나서 굶어 죽게 생겼습니다. 죽음을 떠올리는 것이 의미심장합니다. 아버지께 가서 어떻게 말할지 미리 연습합니다.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고백할 참입니다. “죄”는 하나님은 물론 아버지의 생각에 거꾸로 행한 것들입니다. 다시 아들로 대우해 달라고 말할 수 없어서 아들이 아니라 종으로 삼아 주길 부탁할 참입니다. 탕자가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갑니다. 생각과 결심을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아버지를 떠올리고 아버지께 돌아오는 둘째 아들은 행복한 탕자입니다. 하나님은 돌아오는 발걸음을 가장 귀하게 여기십니다. 언제나 자신에게 돌아오는 탕자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한 주간 주님께 돌아가는 발걸음이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河-

탕자의 비유 (2)

잃어버린 아들(Prodigal son)

 

누가복음 15장에는 세 가지 비유가 나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 잃어버린 은전 하나, 그리고 잃어버린 아들입니다. 모두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았고 공통적으로 기쁨의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세 가지 비유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마음을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도 중요하지만,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끝까지 찾으시는 분입니다. 한 사람도 놓칠 수가 없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소중합니다.

 

세 가지 비유 가운데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잘 보여주는 말씀이 탕자의 비유입니다. 비유 속의 아버지가 하나님을 뜻하는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명확하게 알려줍니다. 탕자의 비유가 소개하는 아버지 하나님을 우리가 믿고 만난다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 감사하고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비유 속의 아버지는 살아생전에 재산을 팔아달라는 둘째의 요청을 기꺼이 수락합니다. 재산을 팔아서 탕자의 삶을 살 것을 알면서도 재산을 건네주는 아버지는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습니다. 자식을 진정으로 사랑해서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존중하고 기대하는 것인데 아버지는 진정한 사랑을 몸소 실천했습니다.

 

비유 속의 아버지를 보면서 우리도 자녀들의 요구를 무작정 들어주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비유 속의 아들은 상속을 받을 정도의 성인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미성년 자녀들의 경우 적절한 훈육이 필요할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 재산을 팔아서 먼 나라로 갔습니다. 아버지를 떠난 것입니다. 그동안 베풀어주신 아버지의 사랑을 참견이라고 생각했기에 자유를 찾아 자신의 길을 갔습니다. 먼 나라는 아버지는 물론 가족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곳입니다. 신앙적으로 보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곳입니다.

 

둘째 아들은 그곳에서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자유를 누리며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 기껏 탕자의 삶이었다는 것이 실망스러울 정도입니다. 갖고 있던 돈이 모두 떨어질 즈음 설상가상으로 가뭄이 들었고 둘째 아들은 간신히 돼지 농장에 취업했습니다. 돼지는 구약의 율법에서 부정한 동물입니다. 그가 가장 밑바닥까지 떨어졌음을 뜻합니다. 급기야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도 먹지 못한 채 굶어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를 떠난 둘째 아들의 삶은 자신의 기대와 정반대로 펼쳐졌습니다. 자유는 커녕 목숨을 걱정 해야 할 지경입니다. 탕자의 모습에서 하나님을 떠난 존재의 비극을 발견합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신앙의 자각(awareness)입니다. 아버지를 떠난 탕자를 통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기 원합니다. 우리 안에서도 탕자의 모습이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