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기도 (2)

밤에 부르는 노래

 

16세기의 수도사 십자가의 성 요한은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하는 백성에게 영혼의 밤을 허락하십니다. 누구든지 영혼의 어두운 밤을 경험합니다. 그 밤을 통과하면서 감각적인 신앙이 깊은 영성을 갖게 되고, 욕심과 교만을 내려놓고 예수님과 같은 마음으로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을 섬깁니다. 영혼의 깊은 밤을 통해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경험하고 비로소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태어납니다.

 
시편 기자 역시 영혼의 깊은 밤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도 한숨이 나오고 힘이 빠질 지경입니다. 그런데도 다른 사람의 위로를 거절하고 하나님 앞에서 씨름합니다. 밤중에 손을 들고 하나님을 찾습니다. 이것이 그의 신실한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은 말 그대로 “밤에 부르는 노래”입니다. 시편 기자는 그 어려운 상황 속에도 행여나 하나님께서 자신을 잊으시면 어쩌나 염려합니다. 자신에게 닥친 어려움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밤에 잠을 잘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을 두고도 “주께서 내가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시니”(4절)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1-3절에서는 “내가”가 주어였는데, 4절로 넘어 오면서 “주님”이 주어가 되었습니다. 자신에게 닥친 어려움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잠을 이룰 수 없는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지나온 세월을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행여나 자신의 잘못이 있었는지 자신의 과거를 반추했을 것입니다. 고통이 찾아오면 과거를 돌아보기 마련입니다. 과거를 돌아보면서 우울해지고 돌이킬 수 없다는 마음에 실망에 빠져드는 것이 아닙니다. 지나간 세월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고,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연속해서 질문을 던집니다: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않으실까, 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는가, 그의 약속도 영구히 폐하였는가, 하나님이 그가 베푸실 은혜(긍휼)를 잊으셨는가?”(시77:7-9). 그의 질문 속에는 자신이 믿는 하나님의 성품이 모두 들어있습니다: 은혜, 인자하심, 약속을 지키심, 긍휼.

 
어려움이 닥치면 하나님께 불평하고 하나님을 멀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편 기자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면서 자신의 신앙을 확인합니다. 의심이 생겨도 하나님 안에서 회의하고 질문합니다. 하나님 품으로 달려들고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닥친 문제를 풀려는 신앙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과 더불어 어려움을 헤쳐나가기 원합니다. -河-

2020 기도 (1)

내가 내 음성으로 (시편 77: 1-3)

 

지난주에 성령에 대한 말씀을 마무리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계신 성령 하나님을 어머니 마음과 손길처럼 느끼고 성령을 쫓아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시고, 위로와 힘을 주실 줄 믿습니다.

 

어려움을 극복할 위력, 일을 끝까지 해내는 힘, 자신감과 무기력을 떨치고 활동할 수 있는 에너지를 주시는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기로 마음을 모았습니다. 참빛 식구들 모두 성령 충만을 사모하고 성령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사랑과 은혜 그리고 힘이 실제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부터는 시편 77편을 차근차근 연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월터 부르그만이라는 구약 학자가 팬데믹을 보내는 기독교인들에게 주는 메시지에서 시편 77편을 인용했습니다.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는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나와서 기도하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그것을 시편 77편에서는 “밤에 부른 노래”라고 했습니다.

 

기약 없는 팬데믹을 사는 이 시간도 밤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새벽을 기다리지만, 새벽이 언제 올지 알 수 없는 깜깜한 밤입니다. 여름이 되고 기온이 올라가면 바이러스가 없어질 것이라고 했지만, 바이러스의 기세가 꺾이지 않고 있습니다. 캘리포니아의 감염자 숫자가 뉴욕을 넘어섰다는 보도를 보면서 마음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밤을 사는 우리의 심정입니다.

 

시편 77편의 기자가 우리와 마찬가지로 어둠의 기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그때도 하나님을 믿기에 기도를 쉬지 않습니다. 자신이 직접 하나님께 나와서 손을 들고 기도합니다. 오늘 본문인 시편 77편 1-3절에 시편 기자 자신을 가리키는 일인칭 단수 “나”가 열 번 등장합니다. 시편 기자가 처한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그의 기도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시편 기자처럼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하나님 귓전에 우리의 기도가 도달하는 것을 보기 원합니다. 시편 기자는 밤에도 손을 들고 기도했습니다. 어려움이 닥치자 손에 있는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향하여 손을 뻗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한 것입니다. 삶에 드리운 불안과 근심으로 심령이 상했지만, 그 순간에 하나님께 나와서 손을 들고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마땅한 모습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손을 들고 우리 자신의 음성으로 기도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인정하고 신뢰한다는 표시입니다. 인생의 밤이 너무 깊으면 기도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때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탄식하면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시니 성령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과 삶을 내어 맡기면 됩니다. 한 주간 내 목소리로 하나님께 기도합시다.-河-

성령 하나님 (9)

– 성령의 능력

 

성령에 대한 말씀을 연속해서 살펴보았고 오늘이 마지막 시간입니다. 이번 연속 설교를 통해서 참빛 식구들이 성령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보혜사 성령 하나님과 친해지고, 성령의 임재와 능력을 경험하시길 원했습니다.

 

보혜사 성령 하나님은 우리 마음속에 계시는 예수님이라고 했습니다. “보혜사”는 성령 하나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심을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함께 걸으시고, 곁에서 위로하시고 힘을 주시고 인도하십니다. 진리의 영이시니 생명과 진리 되신 예수님께 인도하십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변호하십니다. 물론, 성령 하나님이 계시기에 삼위 하나님의 교제도 가능합니다.

 

성령 하나님은 삼위 하나님 가운데 가장 감정적이고 어머니같은 분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감싸주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시고, 우리가 기도할 수 없을 때 탄식하면서 기도하는 분입니다. 바람은 눈으로 볼 수 없지만, 바람의 존재를 확실히 알고 바람의 능력을 인정하듯이,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도 느낄 수 있습니다. 성령의 체험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심을 세상에 드러내 보이는 증거가 바로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이라면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 인격입니다. 성령의 열매가 우리에게 있고, 교회 공동체는 물론 기독교 전체가 성령의 열매를 세상에 보여줄 수 있다면, 추락한 기독교의 위상이 다시 회복될 것입니다.

 

오늘 마지막 시간에는 성령의 능력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을 기다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행1:8). 발전기(다이나모)를 연상시키는 <뒤나미스> 라는 헬라어가 쓰였습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은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두려움을 쫓아내고, 염려를 없애고, 어떤 어려움도 뚫고 나갈 힘을 주십니다. 따라서 성령의 사람은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초대교회에는 성령의 능력으로 죽음까지 불사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마음에 그리면서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시는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한 것을 너희가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1:19)고  기도한 것도 성령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한 주간 “성령 하나님”을 부르며 지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계시는 성령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원했습니다. 술에 취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취하는 성령 충만함을 더욱 원합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이 우리로 인해서 근심하지 않도록 하나님 뜻에 맞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플레처라는 분이 말했듯이, 참빛 식구들께서 각자의 오순절 성령 강림을 경험하시길 바랍니다.-河-

성령 하나님 (8)

성령의 탄식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키는 단어 <라함>에는 어머니가 열 달 동안 아기를 품고 있는 아기집(자궁)이라는 뜻이 있다고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 신약성경의 아가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헤세드>입니다.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가리킵니다. <라함>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긍휼(compassion)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애틋하게 사랑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삼위 하나님(성부, 성자, 성령)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 <라함>을 잘 알려주는 분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창조주 되신 성부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를 함께 보여주십니다. 성자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우리 모두를 사랑하셨습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사랑이 성령 하나님 안에 통합되었습니다.

 

성령 하나님의 심정을 잘 표현한 단어가 오늘 본문 속에서 “탄식”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테낙모스>입니다. 앞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이라는 수식어까지 있어서 우리를 향하신 성령의 마음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연약합니다. 실제로 힘이 없고 염려와 근심은 물론 두려움을 달고 삽니다. 몸과 마음만 약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도 연약합니다. 지난 세 시간에 걸쳐서 배운 성령의 열매를 맺기에 부족한 심성입니다.

 

하나님 뜻대로 드리는 기도는 우리 자신을 숨기고 하나님을 높이는 기도여야 하는데 우리 자신을 위한 간구가 기도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이기적이고 욕심이 앞서는 것이 사실입니다. 자칫 우리 기도 대부분이 하늘나라에서 잡동사니 취급을 받을 것 같아서 두려울 뿐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는 말씀이 마음 깊이 다가오는 이유입니다.

 

그때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십니다. 우리의 연약함, 망설임, 염려와 근심, 신앙의 방황까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보혜사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게다가 성령은 하나님의 완전한 뜻을 알고 계시니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26절).

 

성령의 탄식은 노아의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실 때 하나님의 마음과 연결됩니다. 사람들이 악한 길을 가는 것을 보고 슬퍼하고 후회하셨습니다. 노아의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셨지만, 하나님을 등지려는 인간의 속성은 변치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입니다. 우리 안에도 연약한 본성이 그대로 있지만, 보혜사 성령께서 하나님의 근심을 탄식으로 바꿔서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십니다.

 

이처럼 삼위 하나님 가운데 보혜사 성령 속에 하나님의 사랑 <라함>이 깃들어 있습니다. 우리를 감싸주시고 우리를 위해서 탄식하며 기도하십니다. 복음성가 가사 대로 “따스한” 성령 하나님을 깊이 느끼기 원합니다.-河-

성령 하나님 (7)

– 성령의 열매 (3)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살펴보는 마지막 시간으로 충성, 온유, 절제를 공부하겠습니다.

 

먼저, 충성은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충성은 끝까지 믿음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신 것과 하나님을 믿는 것이 헛되지 않고 반드시 보상이 있을 것을 믿고 걷는 신앙의 길입니다(히11:6).

 

충성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티스>는 신실함(faithfulness)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신실하시니 우리도 신실해야 합니다. 약속한 것을 지키고 책임감을 갖고 끝까지 맡은 일을 완수하는 것이 신실입니다. 세상 속에서 믿을만하다는 평판을 얻는 것입니다.

 

달란트의 비유(마25장)에서 각각 맡은 달란트를 갖고 열심히 장사해서 갑절의 이익을 남긴 종들은 주인으로부터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받았습니다. 착한 것은 지난 시간에 배운 “양선”입니다. 선한 동기를 갖고 맡겨진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충성입니다.

 

성령의 열매 온유야말로 예수님의 성품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자신을 가리켜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마11:2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온유와 겸손이 함께 갑니다. 겸손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교만의 반대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자리를 버리고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심으로 겸손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향한 온유는 순종으로 연결됩니다.

 

이웃을 향해서도 온유해야 합니다. 이웃을 배려하고 끝까지 참아주는 것이 온유입니다. 신사적입니다. 상처 주는 말이나 행동을 삼가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과 화목하고 조화를 이루는 것이 온유입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하고”(엡4;2)라는 말씀대로 온유와 겸손, 오래 참음과 사랑은 이웃사랑에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성령의 마지막 열매는 절제입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했습니다. 무엇이든지 지나치면 문제가 생깁니다. 욕심과 이기적 욕망을 제어하는 것이 절제입니다. 절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엥크라테이아> 역시 “어떤 영역에 머무는 것”이라는 뜻이니 경계를 넘지 않고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는 것이 절제입니다.

 

바울은 절제가 아닌 것을 자세히 알려줍니다.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는 것은 절제가 아닙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이 없는 상태입니다(딤후3;2-5).

 

그동안 살펴본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참빛 식구들에게 충만히 임해서 근사한 그리스도인의 성품과 삶을 갖추시길 기도하겠습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