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자의 비유 (3)

탕자의 귀환 I

 

지난주 말씀을 통해서 우리 삶을 둘째 아들에 적용할 수 있음을 배웠습니다.

 

둘째 아들을 보면서 말 그대로 “탕자(Prodigal son)”라고 비난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우리 역시 탕자임에 틀림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우리의 존재나 삶이 하나님의 아들로 의롭게 되었지만, 여전히 둘째 아들 탕자의 삶을 살거나 생각하는 영역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믿으면서도 자기 마음대로 삶을 좌지우지 하는 것들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삶의 영역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삶의 모습입니다. 교만이 앞서면 하나님을 멀리하기 쉽습니다. 욕심 역시 우리를 탕자의 처지로 몰아넣는 주범입니다.

 

탕자의 삶은 겉보기에 멋지고 희망차게 시작하지만, 끝이 초라합니다. 하나님 없이 자유를 만끽하지만, 결국에는 날개도 없이 추락할 수 있습니다. 물론 기준이 다를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의 성공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하나님 없이도 나름 멋진 인생을 살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이라는 기준으로 우리 삶을 돌아보면,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은 절망, 초라함, 영적 배고픔, 외로움입니다. 그 끝에는 죽음이 있습니다.

 

비유 속의 둘째 아들 역시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랐습니다. 아버지를 떠나서 자기만의 삶을 사는 것에 도취하였습니다. 막상 집을 떠나서 먼 나라로 갔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나쁜 친구들, 가뭄, 돼지가 먹는 음식도 먹지 못하는 초라함이었습니다. 생명이 위협당할 정도의 위기상황입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의 비극입니다.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도 먹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을 때, 둘째 아들이 비로소 자신을 돌아봅니다. 돌아서는 순간입니다. 여기서 돌아서지 않으면 그 앞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지만, 칠흑처럼 어두운 인생의 순간에 아버지를 떠올리고 집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는 것은 생명의 길입니다.

 

아버지 집에는 먹을 것이 많이 있는데 괜히 아버지를 떠나서 굶어 죽게 생겼습니다. 죽음을 떠올리는 것이 의미심장합니다. 아버지께 가서 어떻게 말할지 미리 연습합니다.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고백할 참입니다. “죄”는 하나님은 물론 아버지의 생각에 거꾸로 행한 것들입니다. 다시 아들로 대우해 달라고 말할 수 없어서 아들이 아니라 종으로 삼아 주길 부탁할 참입니다. 탕자가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갑니다. 생각과 결심을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아버지를 떠올리고 아버지께 돌아오는 둘째 아들은 행복한 탕자입니다. 하나님은 돌아오는 발걸음을 가장 귀하게 여기십니다. 언제나 자신에게 돌아오는 탕자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한 주간 주님께 돌아가는 발걸음이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河-

탕자의 비유 (2)

잃어버린 아들(Prodigal son)

 

누가복음 15장에는 세 가지 비유가 나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 잃어버린 은전 하나, 그리고 잃어버린 아들입니다. 모두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았고 공통적으로 기쁨의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세 가지 비유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마음을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도 중요하지만,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끝까지 찾으시는 분입니다. 한 사람도 놓칠 수가 없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소중합니다.

 

세 가지 비유 가운데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잘 보여주는 말씀이 탕자의 비유입니다. 비유 속의 아버지가 하나님을 뜻하는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명확하게 알려줍니다. 탕자의 비유가 소개하는 아버지 하나님을 우리가 믿고 만난다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 감사하고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비유 속의 아버지는 살아생전에 재산을 팔아달라는 둘째의 요청을 기꺼이 수락합니다. 재산을 팔아서 탕자의 삶을 살 것을 알면서도 재산을 건네주는 아버지는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습니다. 자식을 진정으로 사랑해서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존중하고 기대하는 것인데 아버지는 진정한 사랑을 몸소 실천했습니다.

 

비유 속의 아버지를 보면서 우리도 자녀들의 요구를 무작정 들어주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비유 속의 아들은 상속을 받을 정도의 성인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미성년 자녀들의 경우 적절한 훈육이 필요할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 재산을 팔아서 먼 나라로 갔습니다. 아버지를 떠난 것입니다. 그동안 베풀어주신 아버지의 사랑을 참견이라고 생각했기에 자유를 찾아 자신의 길을 갔습니다. 먼 나라는 아버지는 물론 가족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곳입니다. 신앙적으로 보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곳입니다.

 

둘째 아들은 그곳에서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자유를 누리며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 기껏 탕자의 삶이었다는 것이 실망스러울 정도입니다. 갖고 있던 돈이 모두 떨어질 즈음 설상가상으로 가뭄이 들었고 둘째 아들은 간신히 돼지 농장에 취업했습니다. 돼지는 구약의 율법에서 부정한 동물입니다. 그가 가장 밑바닥까지 떨어졌음을 뜻합니다. 급기야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도 먹지 못한 채 굶어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를 떠난 둘째 아들의 삶은 자신의 기대와 정반대로 펼쳐졌습니다. 자유는 커녕 목숨을 걱정 해야 할 지경입니다. 탕자의 모습에서 하나님을 떠난 존재의 비극을 발견합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신앙의 자각(awareness)입니다. 아버지를 떠난 탕자를 통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기 원합니다. 우리 안에서도 탕자의 모습이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河-

탕자의 비유 (1)

아버지와 아들

 

지난 두 달여 구약 성경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돌봄에 대한 말씀을 나눴습니다. 하나님의 돌봄과 은혜가 우리 교회와 참빛 식구들께 깊이 스며들길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돌봄으로 우리 삶을 가득 채우고 싶었습니다. 그 힘으로 가정과 교회를 섬기고 세상을 섬기길 원했습니다. 자신들 생각만 옳다고 여기는 요즘 세상을 가슴에 품고 돌보는 참빛 식구들이 되시길 바랐습니다.

 

9월 한 달 동안은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유명한 말씀입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팔아서 먼 나라로 떠난 둘째 아들, 동생이 돌아왔을 때 화를 내면서 아버지의 입장을 거부했던 첫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을 떠난 아들을 기다리며 빈손으로 돌아온 둘째를 사랑으로 맞아 주신 아버지 –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인물들을 차례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탕자의 비유하면 그 제목처럼 아버지 재산을 갖고 먼 나라로 떠난 둘째 아들이 먼저 떠오릅니다. 하지만 탕자의 비유가 말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입니다. 히브리어 <헤세드>, 헬라어 <아가페>로 표현됩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처럼 탕자의 비유 속에는 그동안 살펴보았던 하나님의 돌봄이 고스란히 들어 있습니다.

 

오늘은 아버지의 재산을 갖고 먼 나라로 떠난 둘째 아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말 그대로 탕자(prodigal son)입니다. 둘째는 아버지 집에서 지내는 것이 지루했고 불만족스러웠습니다. 열심히 아버지 재산을 돌보는 형이 껄끄러웠을 수도 있습니다. 결국 아버지를 찾아가서 자신에게 돌아올 상속분을 요구합니다. 자기가 노력해서 모은 재산이 아니라, 아버지 재산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상속분을 미리 요구하는 경우가 가끔 있었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뜻에 따라야 합니다.

 

아들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아버지입니다. 아들이 재산을 갖고 가서 어떻게 사용할지 훤히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아들의 의사를 존중합니다. 아버지는 둘째가 어떻게 하든지 끝까지 그를 기다리시고 돌보실 참입니다. 둘째가 잘났거나, 재산을 갖고 가서 성공했을 때만 그를 아들로 대우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일을 벌이든지 상관없이 둘째를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기에 재산을 팔아 주었습니다.

 

비유 속의 아버지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둘째에게 자신의 재산을 팔아준 아버지만큼 우리를 존중하십니다. 우리가 잘못할 줄 아시면서도 재산을 팔아 주신 것은 우리의 잘못을 책임지시겠다는 표시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생각을 뛰어넘습니다. 한 주간 오늘 비유 속의 하나님을 이모저모로 묵상하면서 하나님을 깊이 만나기 원합니다. -河-

하나님의 돌봄 (8)

돌보는 교회

 

올해 우리 교회 표어인 <돌보는 교회>에 맞춰서 지난 7월부터는 하나님의 돌봄에 대한 말씀을 나눴습니다. 하나님의 돌봄이 우리 안에 충분히 임했을 때 자연스레 교회와 세상을 돌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흙을 빚어서 정성껏 아담을 만드시고, 그의 갈빗대에서 아담의 돕는 배필 이브를 만드시는 모습 속에 하나님의 세심한 돌봄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당혹스럽고 인간을 만든 것을 후회할 일이 생긴 것입니다. 그때도 하나님께서는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면서 구원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관심 두지 않은 양치기 목동 다윗을 찾아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카탄> 막내 다윗을 챙기고 돌보신 것입니다. 왕위에 오른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큰 죄에 빠집니다. 다윗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지만, 그가 치를 죗값이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둘째 솔로몬을 주시고 “여디디야(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라고 부르셨습니다. 비록 죄를 지었어도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었던 다윗을 위한 돌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돌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경계를 뛰어넘었습니다. 3년 6개월 동안 가뭄이 계속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악독한 왕비의 고향인 시돈으로 가서 한 과부의 돌봄을 받을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엘리야는 바알 종교의 본산지인 시돈 땅 사르밧에 갔습니다. 마지막 음식을 만들고 생을 마감하려는 과부를 만나서 그의 돌봄으로 가뭄을 넘길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르밧 과부를 돌보셔서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지만, 시돈 땅 사르밧 과부를 찾으신 하나님의 돌봄이 특별했습니다.

 

요나의 설교를 듣고 온 백성이 회개한 니느웨를 돌보신 하나님의 사랑도 성경 전체에서 특별했습니다. 아무리 니느웨가 회개해도 그곳 백성은 물론 짐승까지 하나님께서 돌보신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니느웨도 돌보셨습니다. 요나는 물론 우리의 선입관까지 뛰어넘은 돌봄입니다. 우리의 돌봄의 넓이가 어디까지 확장되어야 하는지 새롭게 느꼈습니다.

 

시편 142편 말씀은 돌봄을 실천하려는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원통함과 상한 심령을 아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을 때, 피난처가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니 주의 구원을 볼 수 있고, 주의 백성들과 더불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우리도 돌봄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돌봄을 교회는 물론 세상과 나누기 원합니다 -河-

하나님의 돌봄 (7)

다윗의 동굴 기도

 

<돌보는 교회>라는 우리 교회 표어에 맞춰서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돌봄의 삶을 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돌봄이 필수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을 통해서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을 약속하셨듯이, 우리의 돌봄도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 가운데 세상으로 펼쳐집니다. 우리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돌봄이 꼭 필요한 이유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142편에는 다윗이 동굴에 숨어 있을 때 지은 기도라는 표제어가 붙어 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다윗은 사울의 시기와 질투 속에 10년 이상을 광야에서 도망자로 살았습니다. 사울은 집요하게 다윗의 목숨을 노렸고 다윗은 동굴에 숨는 것은 물론 미친 척도 하고, 때로는 이웃 나라에 몸을 숨기면서 살아남았습니다.

 

다윗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어려움이 닥치면 하나님의 돌봄을 더 크게 느낍니다. 고난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을 매우 가까이서 느낍니다. 또한 고난은 하나님께 마음을 집중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 그리스도인에게 어려움이 닥치면 다른 것을 돌아볼 틈도 없이 하나님을 찾게 마련입니다. 이처럼 고난은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기회입니다.

 

다윗이 그랬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목소리로 하나님을 찾습니다. 다른 이에게 기도를 부탁할 겨를도 없습니다. 4절에 있듯이 다윗의 사정을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다윗을 돌볼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나와서 단독자로 기도할 뿐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원통함을 하나님께 토로합니다. 자기 앞에 닥친 어려움도 하나님 앞에서 차근차근 진술합니다. 육체와 마음만 힘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통하는 영도 지쳤습니다. 기도가 나오지 않는다는 뜻이고, 하나님을 찾는 것도 힘겹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다윗은 자신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피난처가 되셨습니다. 어려울 때 피할 곳이 있다는 사실보다 더 큰 은혜가 없습니다. 피난처는 마지막 순간에 찾아갈 수 있는 곳입니다. 말 그대로 깜깜한 동굴에 피해 있으니 다윗에게 하나님만이 빛이 되십니다. 그때 다윗은 하나님만이 자신의 분깃(몫)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구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의 기도는 하나님의 돌봄을 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견딜 수 없고 어려움을 헤쳐나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의 돌봄이 필요합니다. 매 순간 하나님의 돌봄을 구하면서 살아야 할 인생입니다. 피난처되시고 분깃되시는 하나님께서 참빛 식구들을 돌보시고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시길 기도하겠습니다. 할렐루야!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