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보는 교회 (2)

돌봄은 그리스도인에게 꼭 필요한 영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돌봄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가셔서 그들의 병을 고쳐 주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평범한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듯이 죄인들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친히 돌봄의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 하나님은 위로자와 상담자이십니다. 우리를 진리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우리와 세상을 돌보시는 보혜사가 되십니다. 이처럼 우리는 삼위 하나님으로부터 돌봄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우리 각자는 하나님께서 하나뿐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정도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구원하실 만큼,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실 만큼 귀합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알기 전에는 우리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을 부인했습니다. 혹은 자신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거나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면서 현재의 자신을 미워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향하신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면 우리 자신이 다르게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자신을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나”를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된 자신을 돌보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2절은 기독교 교리(doctrine)에 대한 설명이 끝나고 그리스도의 삶에 대한 말씀이 시작되는 서두입니다. 로마서 전체 문맥에 따르면 앞에서 사도 바울이 소개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요약한 표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응축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면 우리 위에 임한 하나님의 모든 긍휼과 사랑입니다. 12장 이하는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을 입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은 물론, 교회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돌보는 것은 우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를 돌보는 그리스도인의 최종 목표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제사는 이 세대를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에 순응(conform)하지 않고, 대신 변화를 받아서 (transform)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새롭게 된 온전한 변화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변화된 자신을 돌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기 돌봄은 단순한 순응이 아니라 완전한 변화를 지향합니다. 새롭게 된 자신이 하나님과 세상을 향해 떠나는 신앙 여정입니다. -河-

돌보는 교회 (1)

올해 우리 교회 표어는 <돌보는 교회>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돌봄이 필요합니다. 홀로서기라는 표현은 근사하지만, 실제로 홀로 설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하나님께서도 아담이 고군분투하는 것이 안타까우셔서 그에게 동역자 이브를 주시면서 에덴 동산를 가족 공동체로 만드셨습니다. 이브가 있기 전에 하나님은 아담과 교제하셨는데도 이브를 만드신 것을 보면 홀로서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돌봄을 받기만 하는 것은 어린아이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자라가면서 돌봄을 받기보다 돌보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돌봐야 할 영역을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습니다. 우선, 돌봄이라고 했을 때 지나치기 쉬운 것이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 자신도 돌봄의 영역입니다. 가정을 비롯한 공동체를 돌봐야 합니다. 가정이나 우리가 속한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이브를 주신 것과 같은 신앙과 인생의 동지입니다. 이웃도 돌봐야 합니다. 우리의 돌봄이 자신과 가정 또는 공동체에 그친다면,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과 하나님께서 만드신 만물을 돌봐야 합니다. 앞으로 한 달 동안 차례로 살펴볼 주제입니다.

 

오늘은 자신을 돌보는 신앙을 나누겠습니다. 기독교 신앙하면 자기희생을 떠올립니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눅14:27)라는 예수님 말씀이나 자신을 쳐서 복종시킨다는 바울의 고백(고전9:27)이 때때로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부인하라고 하신 것은 신앙이나 인생이 자기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돌봄만 받으려는 이기적인 신앙입니다. 바울은 실제로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하면서 복음이 전파되길 원했습니다. 바울의 특별한 소명이며 열정입니다. 무심코 따라 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을 돌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웃사랑을 명령하실 때도 “네 몸과 같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몸만 챙기는 본능을 지적하신 말씀이기보다 우리 자신을 돌보는 것을 전제로 이웃 사랑을 부탁하신 것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자신을 돌보는 것은 첫째로 육신을 돌보는 것입니다. 건강한 육체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육신이 건강해야 인생은 물론 신앙생활에도 열심을 낼 수 있습니다. 둘째는 마음입니다.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마음이 흔들리거나 어두워지거나 뚝-떨어지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삶 속에 계신 성령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오늘 본문에서 “몸”이라고 불렀고 육신을 포함한 삶 전체를 뜻합니다.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것이 자기 돌봄의 목표입니다. 올 한해 우리 몸을 멋지게 돌봄으로 삶 전체가 하나님께 기쁨이 되기 원합니다.-河-

자랑할 데가 어디냐

올해 마지막 주일이자 로마서 3장 말씀을 나누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로마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우리 힘으로 하나님께 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의로워도 하나님의 기준에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두고 로마서에서는 의인이 하나도 없고 우리 힘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를 돕고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나서신 것입니다. 자신이 창조하신 인간을 책임지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하나님과 단절된 관계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요 은혜입니다.

 

오늘 본문(롬3:27-31)은 크게 세 가지 질문과 그에 대한 답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첫째는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 없느니라”(27절)입니다. 인간이 도덕적으로 심지어 신앙적으로 아무리 탁월해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습니다. 유대인이 갖고 있던 율법이나, 헬라인 또는 세상 스승들의 행위가 아무리 훌륭해도 그것으로 의롭게 될 수 없기에 누구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자랑할 것이 있다면, 예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자랑할 뿐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29절)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독점했습니다. 자신들만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고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고 단정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는 별칭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차별없이 임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구원의 문이 모든 사람과 모든 민족에게 활짝 열렸습니다. 할례를 받은 유대인이나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이나 믿음으로 의롭게 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세번째 질문은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31절)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될 수 있다고 율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율법은 계속해서 죄를 깨닫게 해 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가 무엇인지 알려주고 우리를 회개로 이끌 것입니다. 율법을 통해서 의롭게 될 수 없지만, 믿음으로 의롭게 됨으로 율법의 본뜻을 이룰 수 있으니 믿음이 율법을 굳게 세웁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모든 사람에게 차별없이 구원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사랑하십니다.-河-

2018년 12월 4주 성탄주일

성탄 주일: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이사야 9장 6절

성탄예배: 기쁘다 구주오셨네/누가 2:1-20

 

찬양:

거룩한 주 예수

사랑이 예 오셨네

 

봉헌송 연주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어김없이 올해도 성탄절을 맞습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네 번의 대강절 후에 맞는 성탄절입니다. 그동안 한주 한주 보내면서 마음에 촛불을 밝히며 성탄절을 기다렸습니다.

 

로마서를 통해서 배웠듯이 우리는 물론 세상에 예수님이 꼭 필요합니다.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께 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의로우신 하나님의 기준을 맞출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꾸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집니다. 그러니 하루빨리 누군가 와서 우리를 구원해 주어야 하는데, 우리를 가장 잘 아는 분이어야 가능합니다. 인간은 물론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나설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뿐인 아들을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오셔야 했기에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셨습니다. 죄가 없는 몸을 입기 위해서 성령으로 잉태되셨습니다. 우리가 매주 함께하는 사도신경의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으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와 그의 후손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기름부음 받은 자가 태어날 것을 예고하셨는데, 천여 년 후에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지만 자신을 비워서 종의 형체 즉 피조물인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우리와 똑같이 어려움을 겪으시고 무엇보다 우리가 가야 할 죽음의 길을 대신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우리가 살아났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이것을 두고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신 칭의,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속량, 우리가 져야 할 죄의 짐을 대신 지고 속죄소에 오르신 속죄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인 이사야서 9장 6절은 메시야에 대한 예언입니다. 한 아기가 낳을 것이고,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 온 세상을 통치할 왕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불릴 정도로 하나님과 같으신 분입니다. 무엇보다 평강의 왕으로 세상에 오실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를 화해시키는 것도 평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사역입니다. 부서지고 어그러진 세상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것도 예수님의 평화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성탄절을 맞아서 우리 마음속에 평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모시기 원합니다. 평화의 왕 우리 예수님께서 세상이 빼앗지 못하는 평화를 주시고, 우리의 삶을 온전히 회복시켜 주시길 원합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되고, 행여나 부서진 이웃과의 관계가 있다면 평화의 예수님을 맞음으로 화해하기 원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성탄절을 맞아서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넘치길 기도합니다.-河-

화목제물

로마서 3장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은 물론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는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깜깜한 세상입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죄의 삯이 사망이니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창세기 아담과 이브 이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고 자기 마음대로 행하면서 생긴 결과입니다. 결국 죄인이라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롬3:9).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모두 사라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다시 구원의 역사를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라는 말씀이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노력을 쉬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한 인간을 구원하고 회복하기 위한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우선, 죄인이라고 판정받은 인간을 구해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죄인의 옷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야 할 죽음의 길을 가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속량(redemption)”이라고 말한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입니다. 속량은 시장에서 값을 주고 물건을 사는 것입니다. 종이나 포로로 잡힌 사람을 대신해서 벌을 받거나, 그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값을 지불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의 죗값을 치르셨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값으로 지불하고 우리를 구하셨습니다.

 

우리의 행위나 업적없이 예수님의 속량으로 우리를 구해 주셨으니 그 자체가 “은혜”입니다. 값없이 주신 선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과 은혜에 참여하는 방법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예수님을 따라 살기로 작정하면서 은혜로 구원에 이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구원 사역을 이루신 예수님의 신실함에 참여함으로 속량의 은혜에 들어갑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속량하심으로 우리는 죄에서 구원받았습니다. 죄인이라는 판정이 번복되고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습니다. 의롭다는 판정을 받는 것을 “칭의”라고 합니다. 속량이 상업용어라면 칭의는 법정 용어입니다. 더이상 죄인이 아님을 법적으로 인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아직 부족하지만 의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피를 흘리며 돌아가심은 구약시대 피의 제사와 관련이 있습니다. 화목제물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임재 상징인 법궤의 뚜껑을 가리킵니다. 또한 제물을 올려놓던 제단(mercy seat)을 가리킵니다. 피로 속죄의 제사를 드리므로 죄가 사라지고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우리의 죄가 하나님의 속죄소에 올려졌고 하나님 백성으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죄인이 예수님으로 인해서 의인이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은혜이기에 우리는 단지 감사할 뿐입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