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기도 (7)

인도하셨나이다

 

기도에 끝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기도의 끝은 기도한 것이 응답되는 것으로 생각하곤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기도에 집착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다 보니 기도가 응답되면 모든 것이 잘 되는 것 같아서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특별히 사랑하시고 함께 하신다고 고백합니다. 해피 엔딩입니다. 반대로 기도가 응답되지 않으면, 실망합니다. 기도의 끝이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편 77편의 시인 역시 처음에는 개인 기도로 시작했습니다. 상황이 너무 어려우니 하나님 앞에서 씨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끝까지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구하는 시편 기자의 마음과 자세를 배우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기도했지만 쉽게 응답이 오지 않았습니다. 세상일이 쉽게 해결되지 않습니다. 기도를 만만하고 순진하게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그런 점에서 기도는 훈련이고 삶 그 자체입니다.

 

기도의 끝이 단지 기도 응답이 아닌 것을 시편 77편이 잘 보여줍니다. 시편 기자는 기도하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자신의 슬픔, 아픔과 한계를 실감했습니다. “지존자의 오른손의 능력”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변화되었습니다. 기도는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킵니다. 개인적인 욕망과 집착을 내려놓게 합니다. 자랑하는 것을 그치고 겸손의 자리로 인도합니다.

 

기도 가운데 자신이 변화되는 것이 기도의 큰 결실이지만, 기도의 끝은 아닙니다. 시편 77편이 알려주는 기도의 끝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변화되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회고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작은 소리로 읊조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빌론 마르둑을 비롯한 세상의 그 어떤 신보다 위대하다고 찬양했습니다. 기이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온 세상에 자랑했습니다. 야곱과 요셉 같은 자신의 조상을 속량(값을 치르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시편 기자는 바다에 길을 내시는 하나님도 찬양합니다. 주의 백성이 바닷길을 따라서 건너니 다시 물이 들어와서 주님의 발자취를 없애버렸습니다. 그 옛날 모세의 인도로 홍해를 건넜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모세와 아론을 통해서 목자가 양 떼를 돌보듯이 자신의 백성을 인도하셨습니다.

 

기도는 대부분 우리의 사정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무엇보다 자신이 변화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편 기자가 걸었던 기도의 여정을 우리도 따라 걷기 원합니다. -河-

2020 기도 (6)

물들이 주를 보고

 

2020년 기도에 대한 말씀을 시편 77편을 통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시편 77편은 10절(“이것이 바로 나의 아픔입니다. 나의 약함입니다. 그런데 지존자의 오른손이 변화시켰습니다”)을 중심으로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었습니다.

 

전반부는 밤에도 손을 내리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치열하게 씨름한 시인의 기도였습니다. 좀처럼 응답되지 않아서 한숨이 나오고 힘이 빠졌지만, 끝까지 기도의 끈을 놓치 않았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드린 기도였습니다.

 

자신의 한계와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한 후반부는 하나님을 향한 찬양입니다. 같은 일을 해도 전에는 힘겨웠던 일이 이제는 찬양과 감사로 변합니다. 깊은 은혜를 경험한 결과입니다. 그것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고 낮은 소리로 노래하면서 마음에 채웠습니다. 소리 없이 강한 시인의 모습을 닮고 싶었습니다.

 

무엇보다 “경이로움(wonders)을 고백합니다. 기이한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을 깊이 만나면 작은 것도 기적으로 변하게 마련입니다. “속량(redemption)”이라는 표현에 주목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값을 지불하시고 자신의 백성을 구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대신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도 함께 묵상했습니다. 우리 역시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기에  우리와 세상을 구하고 속량하실 하나님의 손길을 기대했습니다.

 

기도는 피조물인 인간이 온 세상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을 우리 안에 가두려는 욕심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속으로 들어가는 경이로움입니다. 하나님을 우리 인생사에 초대하지만, 그것은 곧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하겠다는 다짐입니다. 별것 없는 우리 일상과 인생이 하나님 역사의 한 부분으로 승격되는 순간입니다. 그러니 기도를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대 시대에 인류를 위협하는 것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다의 폭풍입니다. 폭풍이 불거나 해일이 닥치면 속수무책이어서,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고대사회에서 폭풍을 다스리는 신이 최고였습니다. 본문 속에서 물들이 하나님을 보고 두려워했다는 말씀은 시인이 고백했듯이 하나님이 최고라는 뜻입니다(16절). “깊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테홈>에는 당시 제국인 바빌론의 여신 티아맛을 상징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도 하나님께서 깊음을 제거하십니다. 회오리바람, 우렛소리, 번개와 땅이 흔들리는 지진 등은 두려움을 일으키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통제하시니 하나님께서 그 어떤 신보다 가장 위대하다고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 주간 동안, 겸손하게 창조주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기 원합니다. 모든 물들을 이기신 하나님이 최고이심을 고백하고, 기회가 닿는 대로 하나님의 크심을 세상에 드러내 보이는 참빛 식구들 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河-

2020 기도 (5)

속량하리이다

 

하나님 안에서 터닝 포인트를 경험한 시편 기자의 입에서 찬양이 나옵니다. 앞에서 드린 기도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씨름이었다면, 후반부의 찬양은 공동체와 함께 드리는 간증과 고백입니다. 그런 점에서 시편 77편은 탄식과 찬양은 물론 개인과 공동체가 조화를 이룹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면 관심사가 바뀝니다. 크고 높으신 하나님의 시야를 갖게 됩니다. 시편 기자도 주님께서 행하신 옛날 일을 읊조리고 주님의 행사를 낮은 소리로 노래했습니다(11-12절). “작은 소리” “낮은 소리”라는 우리 말 번역처럼 시편 기자가 받은 은혜를 자기 내면에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소리 없이 강한 신앙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을 괴롭히던 문제는 온데간데없고 시인의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하나님께서 하신 일로 가득 찼습니다. 1-10절에는 “나”라는 단어가 주어로 사용되었는데, 후반부로 오니 주어가 “하나님”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전에는 자신을 괴롭히는 것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문제가 자신을 얽매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기도해도 하나님은 온데간데없고 자기에 닥친 문제만 보였습니다. 문제가 하나님과 시인 사이를 가로막고 있어서 나중에는 하나님의 존재,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먹구름이 거치고 파란 하늘이 드러나듯이 하나님이 보입니다. 하나님만큼 위대하신 분이 없습니다. 크게 다가온 문제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하나님의 도(말씀)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로 채웠습니다.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이한 일을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기적입니다. 모든 것에 하나님의 손길이 깃들어 있습니다. 자기 자리에서 하나님을 깊이 만난 시인이 경험하는 기도의 신비(mystery)입니다.

 

주님의 능력을 온 민족 중에 알리길 기도합니다. 요셉과 야곱으로 시작된 주의 백성을 하나님께서 능하신 팔로 속량(redemption)하심을 믿습니다. “속량”은 하나님께서 대신 값을 치르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죗값을 치르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는 구약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하나님의 커다란 계획 속에서 성취된 것입니다. 시편 기자가 자신을 인식(self-awareness)하고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니 하나님께서 베푸신 속량이 눈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감사하며 찬양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 자신은 물론 상황까지 변화시킵니다. 속량(贖良) – 구원의 은혜가 온 세상에 임하길 간절히 바랍니다. 무슨 일이든지 주님께서 함께하신 경이(기적)로 만드는 것도 기도의 힘입니다. 기도의 끝에 찬양이 있습니다. 기도를 넘어서 찬양에 이르는 참빛 식구들 되시기 바랍니다. -河-

2020 기도 (4)

기억하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과거를 기억하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예전에 살던 곳, 만났던 사람들, 그때 일어났던 크고 작은 사건들이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물론 잊고 싶은 기억도 있습니다.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지만, 쉽게 지워지지 않아서 마음고생도 합니다.

 

성경에도 “기억하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주되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근원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의 경우, 400년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했습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도 기억하고 지켜야 했습니다. 이처럼 구약성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과거를 기억하면서 현재와 미래를 구축할 것을 요청합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을 창조주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를 빚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세상에서 살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의 삶을 주관하신다는 성경의 약속을 믿습니다. 이 모든 것을 기억하고 그것을 토대로 현재를 살고 미래를 소망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기억하며” “기억하리이다” “읊조리며” “되뇌이리이다”와 같은 표현들이 등장합니다. 시편 77편의 전반부에서도 시인은 하나님을 기억하고, 지나온 세월을 생각하고, 어려울 때 불렀던 노래를 기억했습니다(3, 6절). 그런데 그 기억의 결과는 불안함과 한숨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질문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시편 기자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지존하신 하나님의 오른손을 경험한 후에 새롭게 변화됩니다(10절).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합니다. 읊조리듯이 그 은혜를 입으로 고백하기를 반복합니다. 앞에서는 과거의 기억이 불안으로 이어졌다면, 오늘 본문의 기억은 찬양으로 발전합니다.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깊이 경험한 전과 후의 차이입니다.

 

우리도 신앙의 전환점을 수시로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되돌아보고 다시 기억하는 순간입니다. 그동안 걸어온 길을 나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길 가운데서 돌아보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인정하고 지나온 옛길을 기억하면 찬양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구체적으로 느껴집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향해서 우리의 소원을 쏘아 올리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차분히 앉아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동안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읊조리는 시간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2020년 기도에 대한 말씀을 나누면서 우리의 기도가 깊어지길 간절히 바랍니다.-河-

2020 기도 (3)

지존자의 오른손

 

기도를 우리 자신의 소원성취를 위한 수단으로 보는 것은 올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기도에 간청이 있지만, 그것이 기도의 전부가 될 수 없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사귐입니다.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과 연결되고 소통하는 신비로운 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을 듣는 시간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고 깊이 경험합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이유는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자라 가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 뜻에 순종해서 골고다 언덕길을 올라가는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물론 그 끝에는 부활의 영광이 있었지요.

 

우리가 살펴보는 시편 77편의 시인도 고난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가 겪고 있는 고난은 칠흑같은 어두운 밤입니다. 그때도 하나님께 나와서 기도했습니다. 사람의 도움과 위로를 물리치고 하나님 안에서 씨름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혹시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셨는지, 은혜를 그치셨는지, 사랑을 주지 않으실 것인지 안타까운 마음으로 묻습니다. 그 힘든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 은혜와 긍휼을 간절히 사모했습니다.

 

누구나 영혼의 어두운 밤을 경험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8-11절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기록했습니다.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받아서 살아갈 소망도 없었습니다. 꼼짝없이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어려움을 이겼습니다. 시편 기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를 쉬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시편 77편 10절은 시인이 터닝 포인트를 경험하는 순간입니다. 10절의 히브리어 본문은 쉽지 않아서 다양한 번역이 존재하는데 저는 “이것이 바로 나의 아픔, 나의 약함입니다. 그런데 지존자의 오른손이 변화시키셨습니다.”로 옮겼습니다. 개역 개정에서 “잘못”이라고 번역했는데 “슬픔, 아픔”이라는 뜻도 있고, “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단어에 “변화”라는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어려움 한가운데서 자신의 약함과 아픔을 깨닫고,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길을 실제로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다시 한번 자신이 경험했던 하나님의 은혜를 돌아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묵상하고 자신의 말로 읊조립니다.

 

시편 기자는 변했지만, 세상은 여전히 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오른손이 그를 변화시키고 보호하셨기에 마음에 빛이 비쳤습니다. 지속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묵상하고 기도합니다. 우리 역시 약함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았을 때,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길이 임하실 것입니다. 참빛 식구들 모두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고 내면의 깊은 신앙으로 나가시길 기도하겠습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