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

좋은 아침입니다.

 

1.
주일예배에서 룻기를 읽고 있습니다.
룻기는 베들레헴에 가뭄이 들면서
가족을 데리고 모압 땅으로 이민간
엘리멜렉의 가족사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엘리멜렉과 그의 두 아들이 모압에서 죽고
엘리멜렉의 아내 나오미만 살아남았습니다.
잘 살기 위해서 꿈을 갖고 떠난 이민길에
예상치 못한 재난이 닥친 것입니다.

 

나오미는 남편을 잃은 두 며느리와
10여년을 모압에서 이민자(나그네)로 살았습니다.
나오미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을 지
당시 홀로된 여성의 삶과 중첩되어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2.
모압 출신 며느리 룻이
시어머니를 따라서 베들레헴에 옵니다.

 

어머니의 민족이 자기 민족이 되고
어머니가 섬기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끝까지 함께 하기로 맹세하고 떠난 여정입니다.

 

나오미는 고향으로 역이민을 했지만,
모압 출신 룻은 베들레헴의 이민자가 되었습니다.
상황이 바뀐 것입니다.

 

베들레헴에 온 룻은 언제나
“모압 출신” “모압 여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았습니다.
선민의식이 컸던 이스라엘에서 룻이 겪었을 나그네 서러움이 느껴집니다.

 

3.
룻과 나오미만 이민자로 산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처음부터 나그네(이민자)로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만 믿고 가나안 땅에 온 아브라함,
형 에서를 피해서 외삼촌 동네로 피난 갔던 야곱,
형들에 의해서 이집트에 팔려간 요셉과 그의 후손들까지
이스라엘은 말 그대로 나그네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고아와 과부와 함께 특별히 나그네를
환대하고 대접하라고 부탁하신 이유입니다.

 

예수님도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사셨습니다.
3년 공생애 동안 머리 둘 곳 없는 노숙자로
이곳 저곳을 옮겨 다니면서 사셨습니다.

 

예루살렘의 기득권자들은
예수님을 핍박했고 결국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대신, 당시에 나그네로 살았던 땅의 백성들이 예수님을 찾아왔고
나그네로 살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훗날 예수님의 제자들과 사도 바울도
나그네로 소아시아와 유럽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4.
요즘처럼 미국에서 나그네로 사는 심정이
복잡한 때도 별로 없었습니다.

 

인종 차별은 미국의 고질적 문제라고 생각했고
1992년 LA 폭동과 소소하게 일어나는 유사한 갈등으로 경각심을 가졌지만
팬데믹 이후 아시안 혐오가 미국의 큰 사회문제가 되고 보니
우리의 이민 생활이 나그네 삶인 것을 실감합니다.

 

스스로 조심해야겠습니다.
우리의 목소리도 내야 합니다.
타인을 배제하거나 무시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더불어 사는 세상이 오길 기도해야 합니다.

 

룻기의 보아스가
모압 여인 룻을 배려하고 돕듯이
우리 역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모든 사람을 존중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이 세상에 나그네로 왔다가
본향인 하나님께로 가는 이민자이기 때문입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은즉 나그네의 사정을 아느니라 (출23:9)

 

 

하나님,
참빛 식구들이 걸어가는 나그네 길에
주께서 꼭 동행해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1. 4.1 이-메일 목회 서신)

숨은 보물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주
미국 신문과 방송에 흥미로운 보도가 있었습니다.

 

동부 코네티컷 뉴헤이븐 근처에서
어떤 사람이 연꽃 모양의 도자기 그릇을
거라지 세일(garage sale)에서 샀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 신원을 밝히지는 않았는데
아마도 도자기에 조예가 깊은 사람임이 틀림없습니다.

 

6 인치에 불과한 도자기 그릇 하나가 35불에 나왔으니
우리가 알다시피 거라지 세일치고는 비싼 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전혀 흥정하지 않고 35불에 도자기를 삽니다.

 

그리고 곧바로 사진을 찍어서 진품 여부를 알아보았고
이 도자기는 세계에서 여섯 개밖에 없는
15세기 명나라 영락 황제 시대의 유물로 밝혀졌습니다.

 

결국 소더비 경매에서 이 도자기 그릇 한 개가
무려 $721,800에 낙찰되었습니다.

 

소더비에서 중국 유물을 담당하는 맥카티어(McAteer)라는 분은
자기도 생전에 이런 고대 유물을 볼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면서
고대 유물들이 평범한 모습으로 우리 주변에 숨어 있을 수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2.
중국 도자기를 야드 세일에서 산 사람은
귀한 유물을 알아보는 안목을 갖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다녀갔지만,
35불이나 주고 “연꽃 그릇 (lotus bowl)” 한 개를
구입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도리어 다른 물건에 눈길을 주었겠지요.

 

신앙에도 안목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도
밭에서 일을 하다가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서둘러 집에 와서는 모든 것을 팔아서
보화가 숨겨진 밭을 사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숨은 보화를 알아보는 안목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시고
수많은 기적을 베푸셨지만,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선입견, 자기주장, 자기 생각이 가득 차서
진작 중요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3.
팬데믹이라고 하지만
어느 세대보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물질만 있으면
하나님 나라도/신앙도 내팽개칠 기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전하신 복음을 꼭 붙들고 삽니다.
모든 것을 팔아서라도 보화와 같은 복음을 살 수 있습니다.

 

가장 귀한 보화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입니다.

 

오늘도 일상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손길, 신앙의 보물을 찾아내시는
참빛 식구들 되시기 바랍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마 13:44)

 

하나님,
예수님 한 분으로 기뻐하고 행복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1. 3. 25 이-메일 목회 서신)

 

하나님의 섭리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 설교에서
룻이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갔고
그때 마침 보아스가 밭에 온 사건을 두고
예정과 섭리를 비교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어찌 보면
룻이 보아스의 밭에 간 것이나
보아스가 밭에 온 것이
처음부터 예정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의 만남을
운명적으로 계획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룻이나 보아스의 행동은
하나님에 의해서 프로그램화된 것이 되고 맙니다.
룻이나 보아스의 의지가 사라집니다.

 

예정(predestination)이 갖고 있는 맹점입니다.
룻이나 보아스나 엄연히 자신의 의지로 결정해서
보리밭에 왔고 서로 만났기 때문입니다.

 

2.
섭리(providence)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룻과 보아스의 만남을 봅니다.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의 허락을 받고
보리 이삭을 주으러 밭에 나왔습니다.
그것은 룻의 결단이고 룻이 스스로 행한 것입니다.

 

그 시간에 보아스도
베들레헴에서 밭에 나왔습니다.
룻과 보아스가 각자 자기의 생각대로
보리밭에 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 룻의 발걸음을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때 마침 보아스를 보리밭에 오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함께 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룻과 보아스에게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미리’ 예정된 것이 아닙니다.
‘그 순간’에 일어난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그 순간’에 임한 하나님의 간섭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예정하신 것이 아니라,
룻과 보아스가 각자 밭으로 왔을 때
하나님도 그들과 함께 하셨고
두 사람의 발걸음을 보아스의 밭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것이 섭리(providence)입니다.

 

3.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물론,
우리 마음대로/욕심대로 행하는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자유가 아닙니다.

 

성경의 자유는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에 서로 섬기면서 세워줍니다.
자기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합니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스스로 행하기에 자유입니다.

 

룻과 보아스는
기쁜 마음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했고
그 순간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셔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3.
참새 한 마리가 얼마에 팔리는지
머리카락의 숫자까지 세신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주목하십니다.

 

우리가 어떤 결정을 하고 어떤 인생길을 걷든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결국에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오늘 하루 참빛 식구들 위에
세심하게 임하길 기도하겠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8)

 

 

하나님,
참빛 식구들의 마음과 삶에 함께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1. 3. 18 이-메일 목회 서신)

 

하루 한 가지

좋은 아침입니다.

 

1.
“하루에 한 가지”는
아마도 가장 구태의연한 표현(cliché)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영어 공부를 할 때는
하루에 한 가지 영어 표현만 배워서 익히면
불과 몇 년 안에 영어 도사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루에 열 단어 외우기도 별책 부록처럼 따라다녔습니다.

 

한창 성령이 충만할 때는
하루에 한 구절 성경 암송에 도전했습니다.
하루에 성경을 세 장씩만 읽으면,
일 년에 성경을 통독하는 것은 물론입니다.

 

작은 일 한두 가지를 지속해서 하면
그것이 모여서 큰 업적을 이루는 것이 사실입니다.
작심삼일, 결심한 것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입니다.

 

2.
하루하루를 살지 않고
건너뛸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하루살이 인생길을 예외 없이 걷고 지나야 합니다.

 

인생은
하루 (1일)라는 작은 벽돌이 모여서
전체를 이루고 세워가는 건축물 같습니다.

 

그러니 아래부터 차근차근 쌓아가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기초가 튼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매사가 그렇습니다.
직장이나 사회생활도 마찬가지여서
아래부터 차근차근 위를 향해서 올라간 사람은
일의 전후 사정을 모두 파악하고
아래 사람의 어려움을 깊이 공감합니다.

 

반면,
낙하산처럼 갑자기 윗자리에 앉은 사람은
일의 순서는 물론, 함께 일하는 동료들의 애로사항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3.
코로나 팬데믹으로
집에서 포로가 되어 지낸 지 정확히 일 년이 지났습니다.
하루하루를 살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흩어져서 예배한 지도 일 년이 지났습니다.
지난 일 년 동안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한 참빛 식구들이 많습니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정해진 것도 없습니다.

 

작년 이맘때, 팬데믹이 이렇게 길어질 것을 예상했다면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과연 일 년을 견딜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과 염려에 휩싸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데 한주 한주 영상으로/zoom으로 만나다 보니
일 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참빛 식구들 대부분이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계십니다.
하루하루 작은 벽돌의 힘이요 하나님 은혜입니다.

 

4.
힘들수록, 지루할수록
우리가 걷는 인생길을 잘게 잘게 끊어서
생각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해결하려고 하면
도리어 부담이 되고 막막한 마음에 실망합니다.
하루를 길게 펼쳐 놓고, 꼼꼼히 채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찬송가 545장 가사가 생각납니다: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믿음만을 가지고서 늘 걸으면
이 귀에 아무 소리 아니 들려도/하나님의 약속위에 서리라.
걸어가세 믿음 위에 서서/눈과 귀에 아무 증거 없어도.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애가 3:23)

 

 

하나님,
오늘 하루도
주의 성실하심을 경험하고 그것으로 하루를 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1. 3. 11 이-메일 목회 서신)

폼페이 람보르기니

좋은 아침입니다.

 

1.

가끔 고속도로를 운전하다 보면

배트맨 영화에 나올 법한 자동차를 만납니다.

그 위용에 “와”하는 탄성이 나옵니다.

아우디를 만드는 폭스바겐 계열사인

이태리제 “람보르기니/Lamborghini”라는 자동차입니다.

 

람보르기니는

또 다른 이태리제 고급 차인 페라리와 쌍벽을 이룹니다.

“무조건 페라리를 이겨라”는 창업자의 구호에 따라

람보르기니가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정말 멋있습니다.

물론 가격도 우리 같은 서민은 언감생심 근처에도 갈 수 없는

최하 20만 불에서 최고 3백만 불에 이릅니다.

 

2.

엊그제 미국 공용방송 NPR에

“폼페이 람보르기니 발견”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폼페이는 주후 79년

나폴리 연안에 있던 베수비오 화산이 갑자기 폭발하면서

2천여 명이 목숨을 잃고, 도시 전체가 화산재에 덮였습니다.

 

16세기부터

폼페이 유적발굴이 시작되었는데

화산재를 맞고 얼음처럼 굳어버린 연인들,

거리의 주민들, 동물들의 형상이 유명합니다.

 

이번에는

폼페이의 람보르기니라고 불릴 정도의

호화스러운 전차 유물이 발견된 것입니다.

 

그동안 발견된 폼페이의 마차들과 차원이 다른 최고급 전차랍니다.

유물을 발견한 사람들이 얼마나 깜짝 놀랐으면

이태리 람보르기니를 생각해 냈을까요!

 

그런데

보도된 사진을 보니2천여 년이 지나면서 녹이 슬었습니다.

고고학자들이 아니라면 그 고급스러움을 알아채기 힘들게 변했습니다.

 

3.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최고급 승용차 람보르기니를 보면서

누가 저런 차를 타고 다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2천 년 전,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폼페이를 헤집고 다니던 당시의 최고급 전차를 보면서

그때 사람들도 같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2천 년이 지나고 나니,

그때의 위용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3백만 불이 넘는 이태리제 람보르리니도 언젠가는 같은 길을 가겠지요.

 

어제 읽은 마태복음 19장 23절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기보다 어렵다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4.

지금도 고속도로를 누비는 21세기 람보르기니,

화산재로 덮이기 전까지 폼페이를 누렸던

폼페이의 람보르기니를 보면서

우리의 시선과 마음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다시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 생명, 복음, 그리고 사랑과 섬김

– 요즘 세상에서 잊혀 가는 가치들을 다시 붙잡고 싶습니다.

 

내 마음속의 람보르기니를 지우고

시간이 가도 절대 변하지 않는 “영원”을 살고 싶습니다.

 

우리의 삶이 어떠하든지

작은 것까지 소중히 여기고,

그 안에 깃든 창조주 하나님의 손길(섭리)을 발견하기 원합니다.

 

참새 한 마리가 얼마에 팔리는지,

우리 머리카락까지 세고 계시는 하나님의 마음속으로 들어가고 싶습니다.

핵심을 붙잡고 싶습니다.

 

행여나, 세상 풍조에 밀려서

가장 중요한 가치를 잃어버리지 않고

복음이 주는 지혜와 행복을 꼭 붙드는 사순절이길 바랍니다.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네가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도 이에 비교할 없도다 (잠언 3:15)

She is more precious than jewels, and nothing you desire can compare with her. (Prov 3:15)

 

하나님,

세상 흐름에 휩쓸려가지 않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1. 3. 4 이-메일 목회 서신)

2021 사순절에

좋은 아침입니다.

 

1.

사순절(Lent)을 보내고 있습니다.

 

교회력에서 사순절은

부활절을 기다리는 매우 중요한 절기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사순절 기간 동안

금식하고, 기도하고 구제하면서

예수님의 3년 공생애부터 십자가 죽으심까지

예수님의 삶을 닮으려 애썼습니다.

 

부활절에 세례를 받기로 예정된 분들은

사순절 동안 세례 교육은 물론

기독교인의 삶을 연습하면서 세례를 기다리고 준비했습니다.

 

2.

사순절을

모든 것을 금지하고 참는

금욕의 시간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수도원이나 세상에서 따로 격리된 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가능할 수 있지만,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지나친 금욕은

자칫 위선적인 모습의 신앙이 될 수 있기에 조심해야 합니다.

 

사순절의 정신을

“절제 (self-control)” 정도를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그동안 지나칠 정도로 세상에 빠져 있었다면

삶의 축을 하나님께로 옮겨 놓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것에 몰두한 것이 있다면,

탐닉하는 것에서 빠져나와서 신앙과 삶의 균형을 잡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이런 저런 핑계로 무늬만 그리스도인인 경우가 있었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훈련(discipline)”도 사순절에 생각할 일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길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마라톤처럼 지루한 천로역정입니다.

 

훈련하지 않으면

중간에 포기하거나 대충대충 믿기 쉽습니다.

 

기도와 말씀, 사랑의 실천,

배려, 신중함과 지혜로움, 근사함 등등 –

신앙의 덕목을 훈련해서 몸에 익히기 원합니다.

 

3.

사순절은

1년 365일 가운데 십 분의 일에 해당합니다.

 

삶의 십일조를 드린다는 마음으로

2021년 사순절을 맞기 원합니다.

 

팬데믹으로 흩어져서 사순절을 보내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깊은 신앙,

웬만해서는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신앙,

누가 보아도 구별된 성도의 신앙을 훈련하고 장착하는 사순절이기 바랍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태 5:16)

In the same way, let your light shine before others, so that they may see your good works

and give glory to your Father who is in heaven. (Mat 5:16)

 

하나님,

사순절을 지나면서

참빛 식구들의 신앙이 깊어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1. 2. 25 이-메일 목회 서신)

성도

좋은 아침입니다.

 

1.

몇 주전,

아침마다 큐티를 전송하시는

어떤 목사님의 유튜브를 보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이다음 하나님께 가시면

자신의 묘소에 “OOO 성도”라는 묘비를

자녀들에게 부탁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聖徒, 거룩한 무리/백성)에 해당하는

영어식 표현은saints입니다.

성자를 The Saint라고 하는데,

우리 일반 그리스도인들도 saints라고 부릅니다.

 

헬라어 <하기오스>역시

거룩하다는 단어에서 파생된 <성도>라는 뜻입니다.

 

2.

교회에서는 “성도”라는 말을

집사나 권사가 아닌 일반 교인을 가리킬 때 사용합니다.

 

성도라는 말을 쓰거나 듣는 것은

초신자 같은 느낌이거나

교회에 오래 다녔지만

직분을 갖지 못한 분을 부를 때입니다.

 

말 그대로 ‘거룩한’표현인 성도가

직분을 가리키는데 쓰이는 것은 유감입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 “성도”로 불리기를

기대하고 소원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이다음 하나님께 가면

목사, 장로, 권사, 집사와 같은

이 세상의 직분은 아무 소용이 없고

우리 모두 “성도”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테니까요.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계19:8)

 

 

3.

기독교와 교회가 세상에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요즘이기에

“성도”라는 말이 더 깊이 다가옵니다.

 

“성도”의 본질을 회복해야 합니다.

 

단지 교회에서 직분이 없는 분을 부르는 호칭이 아니라

“성자”의 반열에 걸맞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도의 본래 모습을 회복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다시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거룩하고 선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마5:16).

 

그 어떤 호칭보다

“성도”라고 불리길 바랍니다.

얼마나 근사하고 고귀한 말인지요!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 모두 거룩한 성도로 하나님 앞에 나가기 원합니다.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계19:8)

 

 

하나님,

주님 백성의 거룩함을 회복하고

성도로 세상과 주님 앞에 서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1. 2. 18 이-메일 목회 서신

싱어게인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번 독서 모임 후기에서

한국의 한 TV에서 인기리에 방영 중인

<싱 어게인>이라는 프로그램에 대해서 나눴습니다.

 

그동안 각자의 분야에서 열심히 가수로 활동했지만,

빛을 보지 못한 무명 가수들이

이름도 없이 1번 2번 30번 등 번호표를 달고 나와서

심사위원들 앞에서 경연을 펼칩니다.

 

독서 모임에서

<싱 어게인>이라는 프로그램이 화제가 된 이유는

출연자 중에 유명하신 목사님의 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외모나 성품이 매우 점잖으신 목사님이신데

자세히 보면 목사님을 닮았고

자유분방한 것 같으면서도 질서가 있는 성품에

예사롭지 않았던 무명가수가 목사님 아들이었습니다.

 

저는 이분이 부른 노래만 유튜브로 들었는데

기사를 보니 마지막에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꽤 독창적인 노래를 부른 개성 있는 가수였답니다.

 

자신은 애매한 장르를 노래했고

방에서나 가수로 활동할 정도로 무명이었는데

프로그램을 통해서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고 소감을 밝혔습니다.

경연 프로그램이 자신을 세상과 맺어준 소개팅 자리였다고 했습니다.

 

2.

<싱 어게인>이라는 프로그램 명칭 가운데

“어게인/again”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경연에 출연한 수십 명의 가수들은

자칫 노래를 접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무명 가수로 있다 보면

자신감도 잃고, 노래를 계속할 의미를 상실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다시 노래할 기회가 찾아왔으니 얼마나 설렜을까요!

 

물론, 이번에도 주어진 기회를 잡지 못하고

다시 무명가수로 돌아간 분들도 있을 겁니다.

누구인지 알지 못하지만, 그분들도 “어게인” 다시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다시/again”라는 말은 꽤 매력적입니다.

 

잘못했거나 실수한 것을

다시 만회할 기회가 생긴다면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중요한 일은

다시 반복하면서 완전히 마스터할 수 있습니다.

 

인생길을 걷다 보면,

“다시” 할 수 있는 기회도 주어집니다.

그 기회를 잡는 것이 성경에서 말한 “세월을 아끼는 인생”일 것입니다.

 

2021년도 한 달 이상 지났습니다.

새해 첫날에 결심했던 것이 작심삼일이 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다시” 시작해 봅시다.

미국에 처음 올 때 가졌던 마음가짐도 해이해졌을 수 있습니다.

다시 처음 마음, 초심(初心)으로 돌아갑시다.

 

신앙에도 “다시”가 필요합니다.

신앙의 기본을 잊어버리고,

기독교인 답게 살지 않고 세상을 쫓아간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 안에 붙어있지 않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순식간에 모래성처럼 허물어집니다.

신앙을 무너뜨리려는 악한 세력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어게인” – 그때마다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부활의 능력,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을

‘다시’ 되새기고 ‘다시’ 신앙의 기본을 다지기 원합니다.

 

“다시/ again”라는 말을 마음에 담고

하나님 주신 새날을 시작합시다.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사람을 입으라 (에베소서 4장 23-24)

 

 

하나님,

다시’ 시작하면서

우리의 삶을 정돈하고 온전한 하나님 백성으로 나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1. 2. 11 이-메일 목회 서신)

생쥐와 인간

좋은 아침입니다.

 

1.

우리 교회 독서 모임에서

존 스타인벡의 <생쥐와 인간>을 읽었습니다.

 

<생쥐와 인간>은 살리나스 출신인 존 스타인벡이

1937년에 발표한 중편 소설입니다.

 

<생쥐와 인간>이라는 책 제목은

로버트 번스의 “생쥐에게”라는 시에서 왔습니다:

생쥐와 인간이 아무리 계획을 잘 세워도 일이 제멋대로 어그러져,

고대했던 기쁨은 고사하고 슬픔과 고통만 맛보는 일이 허다 하잖아!

 

스타인벡의 소설은

1930년대 미국 대공황 시절이 배경입니다.

 

“조지”와 “레니”라는 목장 노동자 청년이 주인공입니다.

조지는 체격이 작지만 당찬 청년이고

레니는 큰 체격을 갖고 있지만 정신적으로 약간 떨어져서

조지가 보호자 역할을 해야 합니다. 둘은 누가 봐도 단짝입니다.

 

이들이 취직한 목장에는

당시 자본가를 대표하는 목장 주인의 아들이 있습니다.

작은 키를 숨기기 위해서 높은 굽의 구두를 신고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체격이 좋은 사람에게 시비를 걸곤 합니다.

 

조지와 레니를 비롯한 목장의 노동자들은

행여나 해고될까 두려워 주인의 눈치를 봅니다.

 

노동자들이 기거하는 감옥 같은 벙커가 작품의 배경입니다.

그곳에 있는 노동자들은 모두 외롭습니다.

그러면서도 서로에게 마음을 열지 못한 채

서로를 경계하고 어디나 그렇듯이 크고 작은 갈등이 생깁니다.

 

2.

레니는 부드러운 물체를 보면, 자신도 모르게 꼭 쥐는 습관이 있습니다.

주머니 속의 생쥐와 작은 강아지도 죽인 적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소설 속의 복선이어서

레니가 주인의 아내 머릿결을 만졌다가 목을 조여 죽인

사건이 소설의 절정입니다.

 

소설은 비극으로 끝이 납니다.

주인과 목장 사람들이 레니를 잡아서 복수할 것을 알고 있는

친구 조지가 총으로 레니를 죽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어려우니 친구 간의 우정도 유지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여느 노동자들처럼 조지와 레니도

열심히 돈을 모아서 자신들만의 농장을 갖고, 레니가 좋아하는 토끼도 키우고

창세기의 에덴동산과 같은 자신들만의 공간을 꿈꾸지만,

언불생심 거친 세상은 이들의 꿈을 산산조각 냈습니다.

 

3.

위에 소개한 번즈의 시구처럼

아무리 사람이 계획을 세워도 그것이 현실이 되는 것은 꽤 힘듭니다.

 

구조적인 악이 존재하고

개인의 습관, 이기적인 본성, 거기서 파생하는 또 다른 비극까지

소설 속에서 스타인벡이 그리는 세상과 인물들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고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우리 역시 하루하루 거친 현실을 살아갑니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운명과 같은 세상을 마주합니다.

우리 안에서도 끊임없이 악한 본성이 살아납니다.

우리 마음이 타락한 세상의 축소판일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4.

그렇다고 우리의 삶이 비극으로 끝날 수는 없습니다.

너무 힘들 때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숨는 것도

그리스도인만이 누리는 은혜요 특권입니다.

 

공동체 가족끼리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서로를 세워주고 함께 걷는 신앙의 동지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가정이 그리고 우리 교회가

조지와 레니가 꿈꾸던 낙원이 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이 결코 쉽지 않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과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의 열매를 보기 원합니다.

 

p.s. 행여나, 대공황과 같은 팬데믹 기간에 세상의 악한 구조에 눌려서

죽음으로 내몰리는 힘없는 노동자들이 있는 것은 아닌지요!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시편 23:4)

Even though I walk through the valley of the shadow of death,

I will fear no evil, for you are with me;  (Ps 23:4)

 

하나님,

우리가 서로에게 진정한 친구

신앙의 동지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1. 2. 4 이-메일 목회 서신)

깊은 신앙

 

 

 

 

좋은 아침입니다.

 

1.

신축년(辛丑年) 새해 첫 달이 지나갑니다.

 

소처럼 느릿느릿

그렇지만 해야 할 일을 꼼꼼하게 챙기면서

걷기로 결심했던 새해입니다.

 

여느 해처럼

빠른 속도로 걷기 힘들 것을 우리는 압니다.

조바심을 낸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닙니다.

혼자서만 앞으로 치고 나갈 수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2020년 거의 한 해를

팬데믹으로 살았기에

새해의 삶이 더 이상 새로운 일상(new normal)도 아닙니다.

 

2.

참빛교회 목사로서 갖고 있는 고민은

언제 우리가 다시 모여서 예배할 수 있을까보다

각자의 자리에서 예배하고 흩어져 지내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우리의 신앙이 식고 행여나 부서지는 것은 아닐까 입니다.

 

신앙은 혼자 가는 길이 절대로 아닙니다.

공동체로 모여 있을 때 유지되고 깊어지고 넓어집니다.

 

연말에 참빛식구들께 선물한

헨리 나우웬의 책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에 이런 글이 나옵니다.

 

상처를 안고 사는 우리가 서로 마음을 나누려는 소원이 가장 아름답게 표현되는 때는

함께 식사를 할 때가 아니겠는가? 식탁, 음식, 음료, 말, 이야기, 이러한 것들이 서로에게

각자의 삶을 내어 주려는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일 뿐 아니라 실제로 그것을 실행하는

가장 친밀한 방법이 아니겠는가? 나는 ‘함께 떡을 뗀다’는 표현을 아주 좋아하네. 그때는

깨어지고 나누어 주는 것이 확실하게 하나가 되기 때문이지. (93쪽)

 

지난 주일 예배 후 <참빛 테이블 토크>에 초대된 권사님께서

주일 예배 후에 함께 떡을 떼며 식사하던 때가 그립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같은 심정입니다.

 

3.

우리는 조금 더 기다려야 합니다.

 

교회보다도

경제와 학교가 먼저 열려야 합니다.

함께 만나서 예배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지만

안전한 세상이 속히 올 수 있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양보하고 더 길게 기다릴 수 있습니다.

 

대신,

우리가 지속해서 힘써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신앙에 깊이를 더하는 일입니다.

 

신앙을 나무에 비유하면,

팬데믹 동안 신앙의 뿌리를 깊이 내리는 것입니다.

 

잎과 줄기도 중요하고, 무엇보다 열매가 꼭 필요하지만

집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고, 신앙을 표현할 기회가 적은 지금은

깊이 있는 신앙을 훈련하기 딱- 좋은 시간입니다.

 

웬만한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신앙을 갖추기 원합니다.

전도를 비롯한 이웃과의 관계는 제한을 받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는 더욱더 깊어지기 원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과 단둘이 만나는 “골방 시간”을 꼭 가지시길 부탁드립니다.

 

아이들이 있어서 하루가 어떻게 지나는지 모르셔도

잠자리에 들기 전, 단 몇 분이라도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 시간을

규칙적으로 갖는 것입니다.

 

보슬비에 옷이 젖듯이

하나님과 단둘이 갖는 골방 시간이 깊이 있는 신앙을 만들어 줄 것입니다.

 

그가 나를 사랑한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이름을 내가 그를 높이리라. (시 91:14)

Because he holds fast to me in love, I will deliver him;

I will protect him, because he knows my name. (Ps 91:14)

 

하나님,

참빛 식구들이 고요한 시간 골방에서

주님을 찾을 때마다, 꼭 만나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1. 1. 28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