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일곱 번

좋은 아침입니다.

 

1.

매일 아침 카톡으로 보내드리는 말씀에서

성경의 가장 긴 장(chapter)이자 지혜 시편인 시편 119편을 나눴습니다.

 

레위기 읽기 중간에 나눈 시편 말씀이었기에

상대적으로 훨씬 은혜가 넘쳤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송이 꿀보다 달다는 시편 기자의 고백을 실감했습니다.

 

시편 119편을 나누는 마지막 날

저는 물론 우리 모두에게 도전이 되는 말씀을 만났습니다:

주의 의로운 규례들로 말미암아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 (시편 119:164)

Seven times a day I praise you for your righteous rules (Ps 119:164)

 

시편 기자가 매일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한다는 고백이 특별했습니다.

그때야말로 먹고 사는 의식주와 안전이 매 순간 위협받는 시절이었기에

하루 일곱 번 찬양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어렵고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하나님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그의 삶을 통제했습니다.

 

주님의 말씀(규례)을 통해서 하나님을 찬양했으니

그만큼 하나님 말씀을 읽고 되새겼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선한 일을 하고, 그때마다 주를 찬양했을 것입니다.

 

찬양은 감사와 기쁨의 표시이니

하루 일곱 번 찬양하는 그의 삶이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2.

영국 스코틀랜드에 있는 한 교회에서 52년을 목회한

윌리엄 스틸(William Still)이라는 목사님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바닷가 애버딘 출신입니다.

어릴 적에는 다리를 절고 건강이 약해서

구세군 교회 봉사 프로그램에서 거절당하기도 했는데

2차 세계대전이 한창 일 때 신학과 목회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스틸 목사님의 목회는

말씀과 기도, 예배와 친교, 전도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모임과 교회 조직이 많지 않았습니다.

주중 성경 공부와 토요 기도 모임, 그리고 예배가 다였습니다.

대신 교회가 가족과 같길 원했고

진실한 그리스도인 한 명이 세워지는 것을 보기 원하셨습니다.

그래도 자녀들을 위한 주일학교는 신경을 쓰셨습니다.

 

어쩌면 우리 교회가 지향하는 사역과 비슷해서 반가웠지만,

우리는 아직 많이 부족하고

훨씬 내실을 기해야한다는 도전을 받았습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기도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단지 프로그램이나 의무감에서가 아닌

서로에게 힘이 되는 기도 모임을 하고 싶은데

연세와 거리, 육아, 바쁜 삶 등으로 우리 교회의 기동성이 많이 떨어집니다.

 

현실적으로 함께 모이기 힘들어도

각자의 자리에서 하루에 몇 번씩 (일곱 번이면 더 좋구요)

주님을 찬양하고 기도하는 기쁨을 누리면 얼마나 좋을까요!

 

참빛 식구들이 매일 일정하게 하나님을 기억하며

신앙 가운데 살아간다면 그 무엇이 더 필요할까요!

 

우리 모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깊어지고

그 속에서 주의 은혜와 사랑을 흠뻑 경험하고

그 힘으로 감사와 기쁨의 찬양이 저절로 흘러나오길 원합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시 121:1-2)

I lift up my eyes to the hills.

From where does my help come?

My help comes from the LORD,

who made heaven and earth. (Psalms 121:1-2)

 

하나님 아버지

주님과 긴밀히 동행하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9.26 이-메일 목회 서신)

 

 

 

 

 

베리 지토

좋은 아침입니다.

 

1.

우리 동네 야구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는

2010년부터 2014년까지

짝 수년 마다 세 번 연속 우승했습니다.

2014년 이후로는 우승 소식이 없네요.

 

2010년과 2012년 우승할 때

선수로 뛰었던 베리 지토라는 선수가 최근에

“커브볼(Curveball)”이라는 책을 출판했습니다.

 

지토 선수는 오클랜드 애슬래틱스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서 투수로 활동했고

명예의 전당에 오를 만큼 유명한 선수입니다.

 

지토는 자이언츠가 56년 만에 우승했던 2010년,

플레이오프 명단에 들지 못해서

밖에서 우승하는 과정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지토는 그의 책에서

출전선수 명단에 들지 못했을 때

자기 팀인 샌프란시스코를 응원하지 않았다고 솔직하게 고백해서

최근 며칠 언론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2.

지토는 책에서 자신의 개인사도 솔직히 밝혔답니다.

지토의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그의 의붓딸(step daughter)을 성폭행해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지토에게 완벽함은 물론

세상에서의 성공을 강조했습니다.

지토 역시 아버지의 뜻대로 승승장구했습니다.

 

그렇지만 늘 쫓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성공에 연연했고 실패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2010년 우승팀 선수로 뛰지 못한 것을 두고

자기 팀을 응원하지 않은 것이 대표적입니다.

 

지토의 멘토는 오직 한 사람 아버지였고

아버지에게 전수받은 가치관을 절대적으로 따랐습니다.

 

그런 지토가 마음을 돌이키고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된 계기는

신실한 신앙을 가진 아내를 만나면서부터 입니다.

 

육신의 아버지가 주입한 세상의 가치관으로

성공 일변도의 길을 걷던 지토에게

하나님 아버지로의 귀환은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행복과 새로운 인생관을 갖게 했습니다.

 

지토는 신앙으로 마음을 다스렸습니다.

신앙이 주는 평안이 그를 사로잡았고

슬럼프를 이기고 다시 야구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3.

탕자의 귀환이라는 설교를 나누고 있기에

지토의 인터뷰 기사가 더욱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자기가 출전하지 못한다고

56년만에 결승에 올라간 자기 팀을 응원하지 않았다는

지토의 고백은 솔직하게 들리면서도 충격입니다.

 

지토만 그렇겠습니까? 우리 모두 연약하고 불완전합니다.

우리 마음속의 생각은 어지럽고 밖으로 드러나면 부끄러운 것들도 참 많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기준점이 너무 많아서 매사를 상대적으로 판단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주시는 평안과 힘, 그리고 위로를 구합니다.

하늘 아버지의 말씀을 ‘기준’ 삼아서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는 인생길을 걸어가기 원합니다.

 

[탕자가]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눅 15:20)

And he arose and came to his father. (Luke 15:20)

 

하나님 아버지

매일의 삶이

일어나서 주께로 돌아가는 귀환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9.19 이-메일 목회 서신)

다람쥐

좋은 아침입니다.

 

1.

처음 미국에 왔을 때

집 근처에서 다람쥐를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아이들과 다람쥐 잡는 내기도 했는데,

날쌘돌이 다람쥐를 잡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가을은 다람쥐에게 가장 바쁜 계절입니다.

겨울 동안 먹을 도토리를 땅속에 숨겨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람쥐는 도토리를 사방에 묻어 놓는데

이듬해 봄까지 다람쥐가 찾아내는 도토리는 25% 미만이랍니다.

나머지는 도둑을 맞거나 어디에 숨겼는지 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연구에 의하면 다람쥐는 후각보다 기억력을 사용하는데

워낙 많이 숨기기도 하지만,

건망증으로 숨긴 장소를 까맣게 잊어버린답니다.

 

다람쥐가 찾지 못한 도토리는 싹이 나서

도토리나무로 자란다니

생태계에 도움을 주는 다람쥐 건망증입니다.

 

2.

엊그제 CNN 뉴스에

다람쥐에 관한 흥미로운 기사가 또 하나 떴습니다.

다람쥐는 늘 몸을 쫑긋 세우고 부지런히 움직입니다.

사방의 적을 경계하듯이 나무와 땅을 오갑니다.

 

다람쥐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때가 있는데

스스로 감지하는 경우도 있지만,

주변 새들의 지저귐에 의존한답니다.

 

새들이 자유롭게 지저귀면

매와 같은 약탈자들이 사라지고

평화가 왔음을 감지하는 식입니다.

 

다람쥐처럼 예민한 동물이

스스로 위기를 느끼기보다

새들의 도움을 받는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3.

지난주에 살펴본 탕자의 비유가 생각납니다.

 

아버지 재산을 모두 팔아서

먼 나라에 간 둘째 아들이 완전히 망가졌을 때,

그를 붙잡아 줄 아버지와 가족이 없었고

그에게 경고음을 들려줄 신앙도 없었습니다.

 

돼지 농장에 취업했지만

돼지에게 주는 쥐엄열매 조차 건네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둘째 아들은 속절없이 무너졌습니다.

 

4.

비유 속의 둘째 아들을 보면서

우리를 지켜줄 가족과 친구가 필요함을 다시 느낍니다.

행여나 귀찮거나 부담이 될 수 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를 붙잡아 줄 지킴이들입니다.

 

때로는 다람쥐처럼 영적 건망증이 도져서

하나님을 잊고 살 때가 있습니다.

요즘 시대에 신앙 말고도 쫓아갈 것이 많아서

신앙이 시시하게 느껴질 수 있는데,

우리를 살리고 결국에는 회복시켜 주는 것이 신앙입니다.

 

인생길을 걷다 보면

신앙이 꼭 필요하고

신앙의 힘이 발휘되는 순간을 분명히 만납니다.

 

우리를 지지해 주는 가족과 신앙의 동지들,

우리를 살리는 신앙을 꼭 붙들고

하루하루 살아갑시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시편 121편 1절)

I lift up my eyes to the hills. From where does my help come? (Psalms 121:1)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도움이 되시고

이 세상을 회복시키실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9.12 이-메일 목회 서신)

 

 

헤세드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8월 24일

인디애나폴리스 콜츠(Colts) 풋볼팀의 쿼터백 앤드류 럭(Andrew Luck)이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겨우 29세이고

십억불 이상의 수입이 예상된 최고 쿼터백의 은퇴 선언이

지난주 스포츠계에 커다란 이슈였습니다.

 

앤드류 럭은 스탠퍼드를 졸업하고

2012년 1순위로 인디애나 콜츠에 지명되었습니다.

처음 3년 동안 팀을 연거푸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키면서

농구의 레브른 제임스에 맞먹는 가능성을 입증했습니다.

 

그런데 그를 가로막은 것은 잦은 부상이었습니다.

공을 패스한 후에 상대편 수비수가 그를 넘어뜨리기 일쑤였고

그 과정에서 어깨는 물론 머리와 온몸에 부상을 입었습니다.

2017년 시즌은 통째로 경기를 뛰지 못했습니다.

 

앤드류 럭은 독서광이었다고 합니다.

올봄에 결혼해서 곧 아기 아빠도 됩니다.

그런데 아주 모진 성격을 갖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부상과 치열한 경기로 그의 몸뿐만 아니라

더 경기를 뛰지 못할 정도로 마음도 피폐해졌습니다.

 

같은 팀 선수들도 그의 고민과 아픔을 알고 있었기에

시즌을 앞두고 은퇴를 선언했을 때, 그를 이해했습니다.

팀에서도 최대한 배려했고,

엊그제 인디애나폴리스 신문에 감사의 인사를 전하면서

팀은 물론 평생 자신이 사랑하던 풋볼과 아쉬운 작별을 고했습니다.

 

그는 풋볼을 사랑하지만,

자신의 인생을 위해서 은퇴를 결심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2.

모든 삶이 쉽지 않습니다.

 

남의 떡이 커 보이듯이 다른 사람들은 쉽게 인생을 사는 것 같지만

속 얘기를 들어보면 힘겹게 인생길을 걸어갑니다.

 

참고 가는 여정인데,

때로는 앤드류 럭처럼 막다른 골목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앤드류 럭이야 충분한 재력이 있어서 사는 데 문제가 없지만

우리는 당장 그만둘 수 없어 참고 또 참습니다.

 

그때마다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전폭적인 사랑,

우리의 전폭적인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은퇴도 아니고 포기나 도피도 아니고

우리를 끔찍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꼭 필요합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지요.

 

누가복음 15장 탕자의 비유에 대한 연속 설교를 시작하면서

최고의 운동선수도 마음과 몸이 지쳐서 은퇴를 선언할 정도로

힘겨운 우리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조건없고 전폭적인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끝까지 믿어주시고, 기대하시며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헤세드>가 그립고

참빛 식구들과 이 사랑을 깊이 느끼고 싶었습니다.

 

막연해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 헤세드는 꽤 실제적입니다.

위로, 치유, 힘과 용기를 줍니다.

 

탕자의 비유를 함께 나누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 삶이 새롭게 되고

감사와 기쁨으로 주어진 인생길을 걸어갈 힘을 얻기 원합니다.

 

(혹시 지금 삶이 힘겨우시다면

잠시 멈춰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삶을 맡기는 기도를 간절히 드립시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사야 43:1)

“Fear not, for I have redeemed you;

I have called you by name, you are mine. (Isaiah 43:1)

 

하나님 아버지

우리 마음과 삶에 주의 사랑을 넘치게 부어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9.5 이-메일 목회 서신)

 

개근상

저는 국민학교 출신입니다. 1996년 3월부터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뀌었습니다. 국민학교는 ‘천황의 국민’이라는 뜻의 일제 잔재여서 바로잡았답니다. 제가 국민학교를 다녔지만, 이왕이면 초등학교로 정정해서 부르겠습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부모님께서는 우등상보다 더 중요한 것이 개근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등상이야 공부 조금 잘하면 탈 수 있지만, 개근상은 건강과 성실함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초등학교 6년 동안 개근상을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일 년에 3-4일은 감기와 편도선염 등으로 학교를 빠졌습니다. 5학년 때는 수학여행후에 류마티즘성 관절염이 찾아와서 반년 가까이 아예 학교를 쉬었습니다. 그렇게 초등학교 내내 개근상 근처에도 못 갔습니다. 대신 중학교와 고등학교 6년은 개근했습니다. 부모님께서 특별히 신경을 써 주셨고 저도 커가면서 몸이 건강해진 덕분입니다. 사실 사고뭉치들 빼고 중고등학교는 대개 개근합니다. 코흘리개 꼬마가 손수건을 가슴에 달고 입학해서 초등학교  6년을 내리 개근하는 것이 훨씬 대단하지요!

 

우리 교회에는 팔순이 넘었거나 가까우신 권사님들이 꽤 계십니다. 연세가 드시면서 몸이 예전 같지 않으신데, 주일마다 꼬박꼬박 개근하십니다. 출타하시거나 특별한 일이 있으면 미리 알려주십니다. 교회 일에 관여하거나 나서지 않으시고 뒤에서 젊은이들을 응원하실 뿐입니다. 새로 오시는 분들이 보면, 언제나 같은 자리를 지키시는 조용한 권사님들이십니다. 그렇게 수십 년 동안 주일예배에 개근하신 권사님들이 자랑스럽습니다.

 

이왕 시작했으니 한 가지만 더 교회를 자랑하겠습니다. 8월이 되면 광복절 기념 북가주 배구 대회가 산호세에서 열립니다. 우리 교회는 전교인 야외 예배와 겹친 작년을 빼고 3년 연속 참가했습니다. 서너 번 주일 오후에 모여서 연습을 했는데, 젊은 집사님들의 열의가 대단했고 우승은 못 해도 부끄럽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대회에 참가해보니 모든 팀이 관록도 있고 우리보다 훨씬 잘했습니다. 한 세트만 이기고 네 경기를 전패하고 왔습니다. 그래도 여선 교회가 준비한 근사한 점심을 먹고 교회 피크닉처럼 즐겼습니다.

 

이듬해 참가한 대회에서도 같은 결과를 얻었습니다. 실력이 조금 늘어서 비등한 경기를 조금 더 했을 뿐입니다. 웬만한 교회는 두 번 참가해서 한 경기도 이기지 못하면 포기한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 젊은 집사님들은 올해 세 번째 다시 도전했습니다. 교회 근처 배구장에 가서 그곳을 찾는 고등학생들과 함께 대여섯 주간 연습했습니다. 물론 선수로 참가하겠다는 분들도 바쁘다 보니 참석률이 들쑥날쑥했습니다. 오죽했으면 경기를 치르면서 손발이 맞아간다고 했을까요! 비교적 열심히 준비했건만, 올해 역시 한 경기도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대신 듀스까지 가면서 우열을 가리기 힘든 경기가 조금 있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마음껏 대회를 즐겼습니다. 여선교회가 준비한 메밀국수와 김밥을 먹는 것만도 행복했습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내년에도 참가할 것 같습니다. 키가 큰 청년들도 교회에 많아져서 평소에 조금만 연습하면 한두 경기는 승리할 것 같지만, 승패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렇게 젊은 집사님들이 배구 대회에 참가하는 것이 자랑스럽고 대견합니다. 승리보다 꾸준히 참가하는 개근이 중요함을 몸소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이래 개근상에 목말라하는 저에게 커다란 위로요 도전입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두 번 열심히 잘해서 상을 타는 것보다 개근하듯이 꾸준히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더 귀합니다. 변덕스러운 신앙, 대회 우승처럼 큰 것만 추구하는 신앙, 남에게 보이고 인정받으려고 과시하는 신앙이 아니라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도록 작은 일에 충성하는 신앙이 최고입니다. 올해도 이제 넉 달 남았습니다. 때로는 하루하루 사는 것이 기적일 만큼 주어진 삶이 무겁습니다. 열심히 산 것 같은데 손에 든 열매가 초라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이제 남은 한 해,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개근상을 향해서 열심히 달려갑시다.(2019년 8월 22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해방

좋은 아침입니다.

 

1.

오늘은 미국 시간으로

조국의 해방을 기억하는 광복절입니다.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 해방의 기쁨을 노래한 광복절 노래의 첫 소절입니다.

 

일제강점기 동안 살던 땅이지만

해방되고 다시 만져보는 흙은 우리 땅이었습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의 바닷물도

해방되고 나니 덩달아 춤추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요즘

태평양 너머에서 펼쳐지는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심상치 않습니다.

 

두 나라는 운동경기만 해도

승부욕이 치솟고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감정이 앞서는데

예전에 풀지 못한 숙제까지 겹쳐서 나타나니

분위기가 더욱 차가워지고 있습니다.

 

오래된 매듭은 풀고

앞으로 나갈 일들은 화해를 통해서

더 나은 미래를 모색하길 바랄 뿐입니다.

 

2.

누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3년의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회당에 들어가셔서 이사야서 61장 1-2절 말씀을 읽고 그 뜻을 풀어 주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누가4:18-19)

 

여기서 “자유”가 곧 해방입니다.

예수님은 포로되고 억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죄에 포로가 되고

그릇된 습관과 악한 유혹에 억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실제로

억울하게 포로가 되었거나

억압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유가 임하길 바라십니다.

 

우리나라가 36년 일제 식민통치로부터 해방된 것도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과 맞물립니다.

 

3.

광복절을 맞으면서

아직도 풀지 못한 과거의 상처로 인해서

억눌리고 포로가 된 분들의 마음과 삶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은혜의 해(희년,jubilee)가 선포되길 바랍니다.

 

결자해지(結者解之)라고

잘못한 사람이 먼저 사과하고 보상하며

문제를 푸는 것이 도리요 상식이니

생떼 쓰지 말고 당사자가 나서서 풀기 바랍니다.

 

한일관계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는 미국에도 풀어야 할 숙제가 많습니다.

 

여전히 이런저런 일들로 억압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꼭 외부의 세력이 아니어도

육체의 질병, 나쁜 습관, 우울, 세상 염려, 미래의 불안 등에

억눌리고 포로가 된 분들도 많습니다.

그분들께도 자유케하는 예수님의 복음이 임하길 바랍니다.

 

행여나 참빛 식구들을 괴롭히고 억누르고

포로로 삼고 있는 것들이 있다면

복음의 능력이 그 위에 임하고 자유케 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누가4:18-19)

The Spirit of the Lord is upon me, because he has anointed me

to proclaim good news to the poor. He has sent me to proclaim liberty to the captives

and recovering of sight to the blind, to set at liberty those who are oppressed (Luke 4:18-19)

 

하나님 아버지

은헤의 해,

자유케하는 복음이 온 세상에 선포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8.15 이-메일 목회 서신)

 

 

 

 

 

돈 키호테

좋은 아침입니다.

 

1.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무모해 보일 때가 있습니다.

과학과 문명이 발달한 요즘은

하나님을 믿는 것에 커다란 비중을 두지 않고

“아직도 하나님을 믿고, 그렇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느냐”는

조소 섞인 이야기를 들을 때도 있습니다.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서도

하나님 믿는 것 아니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이

현실성이 있고 과연 실익이 있는지 의심이 생길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선과 악, 또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구분없이

뒤죽박죽 섞여서 복과 화가 발생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구약성경 신명기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따르는 자에게 임하는 복과

반대의 경우 임한다는 저주가 작동하지 않으니

우리 마음이 답답하고 무겁기 마련입니다.

 

2.

우리가 사는 세상이 매우 시끄럽습니다.

미국에서는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소행으로 확인된

총격 사건이 수일이 멀지 않게 발생합니다.

숭고한 희생자들의 숫자가 점점 쌓여가는데

정치권은 손을 놓고, 투표에서 이길 궁리만 합니다.

 

그러다 보니

서로를 향해서 손가락질하고

제각각 자신이 옳다고 말하고

상대방을 향해서 “가짜(Fake)”라는 말을 서슴없이 사용합니다.

 

지구 온난화, 핵무기를 비롯한 전쟁의 위협,

여전히 계속되는 빈곤과 식량, 차별 등

힘을 합쳐도 풀기 힘든 과제가 산적해 있는데

서로의 잇속을 챙기고 있으니 우리 같은 민초의 입장에서는 답답할 뿐입니다.

 

지난주 목요 서신에 이어서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산상수훈의 말씀을 곱씹으며 묵상합니다.

 

3.

미국에 올 때 아이들이 갖고 온  <돈 키호테>를 읽었습니다.

세르반테스의 긴 소설을 어린이용으로 아주 짧게 요약한 책인데

그래도 흥미롭습니다.

 

돈 키호테는 <양반/Sir 키호테>라는 뜻입니다.

스페인 시골에 기사 소설을 워낙 많이 읽고

스스로 세상을 바로잡겠다고 정의의 기사로 나선

돈 키호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로시난테라는 말,

정의와 평화의 세상이 오면 한자리를 주겠다는 말에

선뜻 따라나선 시골 농부 산초판사,

그리고 돈 키호테가 맞이하는 부조리한 세상.

 

풍차와 싸우고, 목동들에게 얻어맞아 이빨이 부러지고,

그래도 모든 사람에게 임할 자유와 평등, 정의의 세상을 꿈꾸는

돈 키호테의 행적이 때로는 불쌍해 보이고, 위대해 보이고,

지나칠 만큼 엉뚱해 보입니다.

 

돈 키호테가 인기를 끌던 스페인에서는

길가에 앉아서 울고 웃으며 돈 키호테를 읽었다고 했듯이

왠지 모를 시원함과 작은 희망도 발견합니다.

 

4.

때로는 돈 키호테처럼 무모해 보일 정도의 신앙을 갖고 싶습니다.

안되는 줄 알면서도, 피를 흘리며 매를 맞고 내쳐지면서도

소신껏 자신의 길을 가는 <그리스도인 돈 키호테>말입니다.

 

복잡하고, 잇속에 빠르고

자신의 주장만 옳다고 말하는 요즘,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으로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무모할 정도의 용기!

 

2천 년 전,

예수님도 그 길을 가셨기에 우리도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깁니다.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보여도”

각자의 자리에서 꿋꿋이 신앙의 길, 그리스도의 길을 걸어가실

참빛 식구들을 응원합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마 5:9-10)

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shall be called sons of God.

Blessed are those who are persecuted for righteousness’ sake,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Mt 5:9-10)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세상 속에서 화평케 하는 자로 살려는 참빛식구들과 함께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8.8 이-메일 목회 서신)

첫날

좋은 아침입니다.

 

1.

8월의 첫날을 맞이합니다.

무엇이든지 시작은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기대와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시작하는 것에 숨겨진 염려와 불안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것들인데,

때로는 시작이 무색할 정도로

염려와 근심에 사로잡힐 때도 있습니다.

 

그때는 하나님 말씀 붙잡고 기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3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을지어다

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5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6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시편 37:3-6)

 

우리의 성실과 하나님의 성실이 만나는 지점에서

정오의 빛처럼 빛나는 인생길이 열릴 줄 믿습니다.

 

믿음으로 살려고 애쓰시고

믿음으로 새달을 맞으시는 참빛 식구들을 응원하며

제 기도의 자리에서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겠습니다.

 

2.

지난주일 밤

기혼 그룹 카톡방에 길로이 총격 사건에 대한 소식이 올라왔습니다.

 

길로이 마늘 축제 현장에서

열아홉 살 된 청년이 AK 반자동 소총으로 무차별 사격해서

4명이 숨지고 10여 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청년은 현장에서 경찰에 의해서 사살되었지만,

범행 동기를 밝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범행 전 그의 SNS에 올린 글이나, 그가 읽은 책으로 보아서

백인 우월주의자 성향을 진진 청년으로 생각됩니다.

 

캘리포니아는 21세 이상만 총기를 구입할 수 있어서

네바다까지 가서 구입했다니 계획한 일처럼 보입니다.

 

무엇보다,

이번에 목숨을 잃은 6살 소년은 꿈 많고

자신을 치장할 줄 알고 R&B음악을 즐겨 들었답니다.

1학년 입학을 앞두고 사고를 당했습니다.

우리 교회 아이들 또래여서 더욱더 마음이 아팠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굳어지고 각박해지고 있습니다.

좋은 생각보다 편을 가르고

반대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험한 말과 행동을 서슴지 않습니다.

그 와중에 순수한 희생자들이 발생하니 안타깝습니다.

 

하루속히 정부 차원에서 총기 규제가 법으로 제정되길 바랍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선해지고, 화평케 되길 원합니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돌봄이 충분히 작동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3.

8월의 첫날을 맞으면서

오늘 아침 나눈 말씀대로

우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친히 성취하실 줄 확신합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5:7)

Casting all your anxieties on him, because he cares for you.(1Pet 5:7)

마음속에 있는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고 새달을 시작합시다.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새달을 살아갑시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I am sure of this, that he who began a good work in you

will bring it to completion at the day of Jesus Christ. (Phil 1:6)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사는 세상에 평화를 주옵소서.

오늘도 참빛 식구들이 화평케 하는 자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8.1 이-메일 목회 서신)

전도서

좋은 아침입니다.

 

1.

올해 성경 통독은

구약성경 전도서에 와 있습니다.

 

전도서는 구약성경의 성문서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아가서)에 속하고,

전통적으로 부귀영화를 모두 누린 솔로몬이

노년에 기록한 말씀이라고 전해집니다.

 

전도서라는 명칭은 1장 1절의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에서 왔습니다.

전도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코헬렛(Qoheleth)”인데

“모임”이라는 뜻도 있기에 혹자는 “집회서”라고 부릅니다.

전도서의 영어표현 “에클레시아스테스(Ecclesiastes)”도 여기에 속합니다.

 

이처럼 전도서라는 표현 속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 모여서 솔로몬 왕의 설교를 듣거나,

훗날 백성들이 모여서 솔로몬으로부터 전해진

지혜의 말씀을 듣고 있는 모습이 담겨있습니다.

 

2.

전도서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1:2)로 시작합니다.

이 말씀을 히브리어 그대로 읽으면 “하벨 하발림/ 하벨 하발림/하콜 하벨”입니다.

 

헛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헤벨”의 문자적 의미는

“수증기, 안개, 한숨, 가치 없음, 헛됨”입니다.

부귀영화를 모두 누린 솔로몬이 노년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니

인생이 별것 아니라는 깨달음입니다.

 

그렇다고 지나친 비관주의는 아닙니다.

헛되다는 것은 플러스도 마이너스도 아닌 “제로(0)”입니다.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잠30:8)라는

아굴의 잠언을 떠올리면 전도서의 주제가  쉽게 이해됩니다.

 

세상일에 지나치게 집착할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세상을 등질 필요도 없고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마음껏 누리는 것이

전도서가 알려주는 삶의 지혜입니다.

 

3.

이번 주 성경 통독에 해당하는 전도서 6장에도

흥미로운 구절이 등장합니다.

 

어떤 사람이 부와 재산과 명예를 다 얻었는데

당사자가 아닌 엉뚱한 사람이 그것을 즐깁니다.

그러니 세상일에 지나치게 집착할 이유가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먹어도 식욕을 채울 수 없습니다.

먹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욕심이 그렇습니다.

 

지혜로운 자나 어리석은 자나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니 현재 가진 것에 만족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잠언과 마찬가지로 언어 습관도 지적합니다.

말을 많이 하면 빈말이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4.

전도서는 우리에게 삶의 여유를 줍니다.

집착하던 것을 내려놓게 합니다.

 

훗날을 위해서 아등바등 살기보다

<지금 여기>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복에 감사하게 만듭니다.

 

어느새 7월도 훌쩍 지났습니다.

 

전도서 말씀을 기억하면

시간은 빠르게 지나는데 이룬 것이 없다고

행여나 초조해질 것도 아닙니다.

 

참빛 식구들 모두 잘 살고 계십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분복(portion)을 누리고

범사에 감사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사람을 평범하고 단순하게 만드셨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복잡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전도서 7:29)

See, this alone I found, that God made man upright,

but they have sought out many schemes. (Eccl 7:29)

 

하나님 아버지

지금 우리가 있는 곳에서 주님을 만나고

주신 복을 마음껏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7.25이-메일 목회 서신)

돌봄 2

좋은 아침입니다.

 

1.

<돌보는 교회>라는 올해 교회 표어에 맞춰서

다시 한번 돌봄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1월에는 “우리의 돌봄”에 대해서 살펴보았다면

이번 달에는 “하나님의 돌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 돌봄을 실천하면 자칫 지치기 쉽습니다.

우선 하나님의 돌봄을 경험하고 그것을 이웃과 나누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돌봄의 과정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바탕으로

용서의 길을 가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2.

지난 1월 목요 서신에서 나눴던

헨리 나우웬의 글을 다시 인용합니다.

헨리 나우웬은 <돌봄의 영성>에서 다음과 같이 알려줍니다.

 

우리는 이웃을 돌보는 사람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이다.

이 정체성을 주장할수록 점점 더 깨닫는 사실이 있다.

사랑의 창조주가 인간 가족의 모든 구성원을 조건 없이 귀히 여기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제시하려는 관점은 예수님의 이 말씀에 기초한 것이다.

“너희 아버지가 긍휼히 여기시는 것 같이 너희도 긍휼히 여기라”(눅6:36)

 

나는 긍휼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서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란다고 굳게 믿는다.

이것은 가볍게 하는 말이 아니다. 경청, 심방, 독서, 글쓰기 등을 통해

오랜 세월 다른 사람들을 섬긴 끝에 나온 결론이다.

그동안 나는 숱한 경험에 동참해야 했고, 그 중에는 고통스러운 일도 많았다.

 

돌보는 사역을 그만두고 더 쉬운 일을 해볼까 생각한 순간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유혹에 부딪힐 때마다 깨달은 게 있다.

쉬운 일을 욕망할 때마다 예수님을 따라 살기로 한

내 헌신의 가치를 의심하고 있었다. (돌봄의 영성, 46-47쪽)

 

돌봄이 쉽지 않아서 때로는 대충 넘어가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두고 헨리 나우웬은 신앙이 식었다는 표시라고 일러줍니다.

 

3.

7월 한 달 동안

하나님의 돌봄에 대한 말씀을 나누면서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 긍휼(compassion), 돌보심을

아주 깊이 경험하길 원합니다.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손길이

얼마나 세심하고, 무조건적이고 때로는 예상을 뒤엎는지

몸소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활짝 열고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맞이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이지요.

하나님과 따로 시간을 갖는 것도 필요합니다.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다면 더없이 좋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기 원합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기 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크고 작은 돌보심을 경험하기 원합니다.

그 힘과 은혜로 돌봄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교회 안의 돌봄을 말씀드리면서 외로워 보이거나, 힘들어 보이시는

참빛 식구들을 챙기시길 부탁드렸습니다.

서로 세심하게 챙기고 실제로 돌보는 참빛 공동체가 되길 바랍니다.

 

너희 아버지가 긍휼히 여기시는 것 같이

너희도 긍휼히 여기라 (눅6:36)

Be merciful, even as your Father is merciful. (Psalms 6:36)

 

하나님 아버지

우리 교회가 돌봄의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7.18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