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사는 것

좋은 아침입니다.

 

1.

주일에 로마서 12장 말씀을

함께 공부하고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로마서 16장 말씀 가운데

8장이 최고로 꼽힙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죄에서 해방했고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낼 것이 없다는

보석과 같은 말씀입니다.

 

8장과 쌍벽을 이루는 말씀이

로마서 12장입니다.

 

“그러므로”로 시작하면서

로마서 전반부(1-11장)를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요약하고,

이어서 하나님 백성의 삶에 관해서 조목조목 교훈합니다.

13-15장은 12장의 부연 설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그래서 저는 이번 연속 설교의 제목을

<진짜 그리스도인>이라고 붙였습니다.

가짜가 판치는 요즘 시대에

진짜 그리스도인(Authentic Christian)으로 살기 원해서입니다.

 

우리가 로마서 12장 말씀대로

믿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한없이 행복할 것입니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진짜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2.

우리는 믿음을 지나치게 추상화했는지 모릅니다.

‘영적’이라는 말을 중심으로

현실감 없는 믿음을 만들어서

신앙과 삶이 따로 놀게 했습니다.

 

교회에서의 신앙과 세상에서의 삶이 다르거나

연결조차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신앙과 생활의 통합이 결여된 모습입니다.

온전한 믿음은 아닙니다.

 

신앙을 저 멀리 하늘나라로 옮겨 놓아서

이 세상의 삶에 소홀하거나

세상의 삶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준비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역시 온전한 신앙은 아닙니다.

 

아니, 신앙 자체에 커다란 비중을 두지 않고

악세사리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3.

믿음으로 사는 것은

지난주 로마서 12장 1절에서 배웠듯이

우리 “몸(body)”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몸은 실체입니다. 현실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삶 자체입니다.

 

거룩한 산 제사는

일상이 예배가 되고

우리 일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 제사(living sacrifice)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살다 보면,

그 유익이 우리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작은 일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실제의 삶에 하나님을 초대합니다.

작은 일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평소에 흘려보내던 시간도

하나님과 더불어 만들어 가는 기회가 됩니다.

삶 전체가 소중합니다.

 

이처럼 믿음은 신비입니다.

느끼고 더불어 살아가는 경험입니다.

신비가 현실이 될 때, 깜짝 놀랄 경이(驚異)를 맛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이 놀랍고 행복할 뿐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히11:1)

 

 

하나님,

믿음으로 살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3. 9. 28이-메일 목회 서신)

라면 이야기

좋은 아침입니다.

 

1.

미국 사람들에게

맥도널드의 “빅맥”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라면”이 있습니다.

 

빅맥은 1967년 펜실베이니아에서 처음 선을 보였습니다.

당시 가격은 0.45센트였습니다.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면 2022년 기준으로 $3.95).

 

우리나라 라면의 역사는 1963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춥고 배고프던 시절이었습니다.

 

남대문 시장의 노동자들이

미국 부대에서 흘러나온 “꿀꿀이 죽”을

(부대찌개의 원조라고 하면 더 서글퍼지는군요)

단돈 5원에 사 먹기 위해서 줄을 길게 섰습니다.

 

그것을 본 삼양식품의 창립자 고 전중윤 명예회장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라면 제조 기술을 배워와서

1963년 9월 15일에 처음으로 삼양라면을 세상에 출시했습니다.

꿀꿀이 죽보다 비싼 10원에 팔았지만,

30원 하던 김치찌개보다 훨씬 저렴했습니다.

 

엊그제 9월 15일,

우리나라 라면이 회갑을 맞았습니다.

 

2.

쌀이 부족하던 1960-70년대,

정부는 보리나 콩을 섞어서 먹는 혼분식을 장려했습니다.

저도 국민(초등)학교 때 점심시간이 되면

선생님들이 도시락 검사를 하던 기억이 납니다.

보리밥이 절반을 차지하지 않으면 벌을 받던 시절입니다.

라면이 쌀 부족을 톡톡히 메꿔주었습니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매운맛이 가미된 농심 신라면, 오뚜기 진라면,

영화 기생충의 짜파구리(짜파게티와 너구리)까지

다양한 라면이 경쟁적으로 출시되었습니다.

떡볶이에 라면을 넣은 “라볶이”도 유행했습니다.

 

꼬들꼬들한 면발은 물론

국물까지 호로록 마시는 라면 먹기의 정석,

과자처럼 라면을 부숴서

그 위에 스프를 끼얹어 먹는 라면 먹기의 변칙,

꿀꿀이 죽에서 시작된 부대찌개에 라면을 넣어 먹는 아이러니,

건강을 생각해서 자제하다가도 불현듯 생각나는 라면의 치명적인 유혹!

 

우리 국민의 라면 사랑은 여전히 식지 않아서

국민 한 명당 한 해에 77개의 라면을 먹는다니,

거의 4-5일에 한 번은 온 국민이 라면을 먹는 셈입니다.

 

라면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수출 상품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라면 업체들의 매출 절반이 해외에서 옵니다.

세계에서 라면을 가장 많이 소비하는 국가도 대한민국이 아닌 베트남입니다.

라면 업체들이 BTS 멤버까지 광고 모델로 쓰면서 홍보하는 이유입니다.

 

라면 출시 60주년을 맞은 삼양 라면은

음식과 과학을 융합한 신제품을 출시하겠다는 비전을 선포했습니다.

앞으로 라면의 진화를 기대해 봐야겠습니다.

 

3.

삼양 라면이 60주년을 맞은 9월 15일,

유엔 식량농업기구(FAO)는 전 세계 인구의 9.2%가

장기적인 식량 부족으로 고생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세계 인구 10명 가운데 한 명이 기아선상에 있다는 뜻입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에 기아 인구는 더 심해졌답니다.

 

모든 사람이 최소한 먹거리는 해결하는 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뜻임에 틀림이 없으니

세상에 춥고 배고픈 사람들이 없어지길 기도할 뿐입니다.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신 15:4)

 

하나님,

배고픈 이웃을 돌봐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3. 9. 21이-메일 목회 서신)

책임감

좋은 아침입니다.

 

1.

인류가 큰 역병을 거치고 나면

세상을 지배하는 사상과 종교, 가치관이 바뀌곤 했습니다.

 

중세 시대 페스트가 지나간 자리에

신(神)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는

신본주의 사상이 뒷전에 밀리고

인간이 스스로 길을 개척해야 한다는

인본주의가 태동한 것이 대표적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이 지나간 자리에는

기후 위기까지 겹치면서

예측불허의 어지러운 세상이 찾아왔습니다.

기록적인 폭우가 내리고, 100년 만에 지진이 나고

극한의 더위 또는 한파가 발생합니다.

 

우선 나만 살고 보자는 이기주의,

분노와 불만이 사람들 마음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기후 위기에 버금가는 예기치 않은 사건사고가 이어집니다.

 

“불안”이라는 두 글자가

팬데믹이 지나간 자리를 차지한 느낌입니다.

 

2.

한국에서는

학부모들의 과도한 요구와 괴롭힘에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안타까운 일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그림자도 밟지 않았다는 말은 그만두고

학생은 물론 학부모도 선생님을 향한 예의가 각별했습니다.

제가 어릴 적 다녔던 시골 국민(초등)학교에는

농사일 중간에 학교를 찾아오신 어머니들께서 “선상님”하고 부르면서

자기 자식들을 부탁하시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물론, 선생님들의 학생 폭력이 도가 지나친 적이 많았습니다.

일제와 군사 독재의 잔재인 것처럼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심하게 구타하고 인격을 모독했었습니다.

 

그래도 스승과 제자의 예의범절은 깍듯했는데,

요즘 한국의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은

갈피를 잡기 힘들 정도로 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것은

책임을 지려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쉬쉬”하면서 덮기에 급급합니다.

 

3.

언젠가 “내 탓입니다”는 표어가 유행해서

자동차 범퍼에 달고 다니던 때가 있었습니다.

우선 내 탓이라고 말하고, 함께 문제를 풀어가자는 캠페인이었습니다.

 

남의 탓만 할 것이 아니라 손수 나서서 사태를 수습하고,

책임감을 갖고 세상을 이끄는 지도자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자기편을 챙기는 것을 넘어서,

공공선(公共善common good)을 추구하는 어른들도 보고 싶습니다.

 

교회가 앞장서면 어떨까요?

예수님 말씀대로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신앙, 기복적인 신앙,

방어하기에 급급한 자기중심의 편협한 신앙을 극복하고

세상을 품을 정도의 관대함, 어지러운 세상을 살리는 책임감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나를 넘어서는 공적인 신앙이 꼭 필요한 요즘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지금도 각박한 세상에서 간신히 살아가시는 분들을

주님께서 꼭 붙들어 주시길 기도합니다.

우리도 함께 울고, 같은 마음으로 응원하겠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마5:13)

 

 

하나님,

신실한 주의 백성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3. 9. 14 이-메일 목회 서신)

함께 거하기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

5년 만에 야외예배를 다녀왔습니다.

팬데믹 이후 처음 갖는 야외 예배였기에

감회가 더욱 새로웠습니다.

 

노동절 연휴와 겹쳐서

출타하신 참빛 식구들도 많이 계셨지만,

가능한 분들은 거의 모두 참석해 주셨습니다.

올해는 애완견들도 함께 했습니다.

 

정성껏 준비한 풍성한 먹거리,

서로를 소개하고, 힘들 줄도 모르고 뛰고 즐겼던 놀이,

알차게 준비했던 주일학교 아이들 프로그램까지

뜻깊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2.

우리 기독교에서는

“거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가 말씀 안에 거합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서 위로와 힘을 줍니다.

 

어떤 것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신앙은 하나님과 더불어 거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들어가서 머무는 것입니다.

기도 역시 하나님 마음과 생각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거하는 것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는 말씀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별칭도

“임마누엘” –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의 함께 함을 강조했습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와 함께 울라고 권면했습니다(롬12:15 ).

사자성어 “동고동락(同苦同樂)”이 생각납니다.

함께 웃고 함께 울면서 같은 길을 가라는 부탁입니다.

 

3.

교회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무슨 일을 많이 하는 것보다

함께 있는 것, 함께 공감하고,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울어주는 것이 공동체의 특징입니다.

거기서 공동체의 힘이 발휘됩니다.

 

우리 참빛교회가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주님의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함께 있어서 기분이 좋고, 힘이 되고, 위로가 되고

특별한 일을 하지 않아도

그냥 함께 있고 싶은 신앙의 동지들이 되길 바랍니다.

 

저는 엊그제 야외예배에서 그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6개월 된 아기부터 80대 후반의 권사님들까지

함께 예배하고 함께 식사하고 함께 같은 공간에 머물렀습니다.

얼마나 귀하고 아름답던지요!

 

참빛교회를 허락하시고

참빛 식구들을 한 공동체로 불러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보라,

형제자매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편133:1)

Behold, how good and pleasant it is when brothers dwell in unity! (Ps 133:1)

 

하나님,

주님 안에서 하나된 교회로 자라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3. 9. 7 이-메일 목회 서신)

2035년…

좋은 아침입니다.

 

1.

5월 캐나다 동부에서 시작된 산불은

그리스 국가 면적을 태웠고 아직도 완전히 잡히지 않았습니다.

팬데믹 때 캘리포니아 산불로 경험했던 붉게 물든 대기 현상이

뉴욕을 비롯한 미국 동부까지 나타났습니다.

 

보름 전에는 캘리포니아 남부에 태풍이 찾아왔고

LA인근에 강도 5가 넘는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그 영향으로 우리 지역도 건기인 8월에 비가 내렸습니다.

 

올해 7월이 인류 역사상 가장 더웠다는 보도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애리조나 피닉스는 110도 이상의 기온이 한 달 이상 계속되면서

선인장도 말라 죽는 일이 생겼습니다.

 

2.

2017년 파리기후조약이 체결된 이래

산업화가 시작된 19세기 말의 지구 온도에서

섭씨 1.5도가 높아지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지구 온도가 1.5도가 올라가면

폭염이나 폭우와 같은 급격한 기후변화, 해수면 상승 등

재앙이 찾아올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난 5월 한 보고서에 의하면

2027년에 지구 온도가 1.5도 높아질 확률이 66%까지 올라갔습니다.

 

지금이라도 지구의 온도를 낮춰야 합니다.

적어도 1.5도가 상승하지 않도록 모든 인류가 힘을 합쳐야 합니다.

탄산가스를 많이 배출하는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 책임이 큽니다.

 

3.

우리가 살고 있는 캘리포니아는

1970년 발효된 미국의 청정 공기법(CAA)에 따라서

미국 전체에서 가장 엄격한 탄소 배출량 기준을 만들어야 합니다.

캘리포니아가 제정한 기준은 다른 주들이 연방 정부의 승인을 받지 않고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이 됩니다.

 

그러니 탄소 배출량에서 캘리포니아는 무조건 앞서가야 합니다.

 

이것을 반영하듯이

캘리포니아에서는2035년 이후에 내연기관 자동차 신규 판매가 금지되고

전기 또는 수소로 움직이는 자동차만 새로 판매할 수 있습니다.

 

이 밖에도 화석연료가 아닌

태양 에너지를 비롯한 친환경 에너지의 개발이 계속될 것입니다.

적극 환영할 일이고

정책이 흐지부지되지 않고 결기를 갖고 추진되길 바랍니다.

 

4.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지구를 맡기셨는데

인간의 욕망으로 엉망이 되었으니

그리스도인들이 창조 질서의 회복에 앞장서야 합니다.

 

또한 정책을 만들고 실행하는 지도자들을  잘 선출해야 합니다.

지금도 화석연료 사용을 추진하고,  기후위기를 부정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지도자가 되면, 그나마 작은 희망의 불씨도 꺼지고

후손들에게 큰 죄를 짓게 될 것입니다.

 

매우 답답합니다.

당장 기후 위기의 피해가 곳곳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구를 지키는 청지기의 사명을 회복하고

다시 지구를 살리는 일에 온 인류가 앞장서기를 바랄  뿐입니다.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시편104:30)

When you send your life-giving breath, they are created,

and you replenish the surface of the ground. (Ps 104:30)

 

하나님,

하나뿐인 지구를

하나님 뜻에 맞게 보존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3. 8. 31 이-메일 목회 서신)

각박한 세상 속에서

좋은 아침입니다.

 

1.

각자도생(各自圖生)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각자 알아서 자기 삶을 책임진다는 긍정적 의미도 있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부정적인 뜻도 들어 있습니다.

 

기후 위기도

지구 전체를 생각하기보다

일단 자기 나라만 잘 살려다 보니 생긴 재난일 것입니다.

각자도생의 어두운 그림자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면서

사람들 마음속에는 ‘나는, 내 가족은’

무조건 살아남아야 한다는 이기주의가 생겼습니다.

역병을 겪고 나면서 생긴 부작용인데,

역시 각자도생의 어두운 면입니다.

 

이처럼 민족과 나라도, 개인도

각자도생을 위해서 무한 경쟁에 뛰어든 느낌입니다.

세상이 각박해지고 망가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2.

각자도생의 어두운 면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나만 살아남고, 나만의 이익을 챙기려는 ‘이기주의’입니다.

무한 이기주의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이기주의 앞에 하나님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도 없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을 믿는 믿음까지

자신의 생존과 성공에 사용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기주의는 우상숭배입니다.

자기가 신이 되고 하나님 자리에 앉았기 때문입니다.

 

이기주의는 다른 사람을 존중하지 않습니다.

내 의견과 내 이익만이 참(true)이고 옳음(right)입니다.

오직 관심은 자신(넓혀야 자기 가족)에만 쏠려 있습니다.

 

이기주의는 양심과 도덕의 기능도 마비시킵니다.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원칙은 무시하고

내게 필요한 것만 취사선택해서 적용합니다.

 

그러다 보니

세상이 점점 각박해집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남자와 여자가, 인간과 생물이, 그리고 자연과 우주 만물이

조화를 이루어 함께 살아가는 상생의 시스템인데 말입니다.

 

3.

이기적이고 각박한 세상을 바꾸는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지만,

세상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고,

삶의 현장에서 작은 일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지난주일 성경 공부에서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서 기도하는 아브라함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의인 열 명이 없어서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했지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아브라함의 기도) 생각하셔서

그의 조카 롯과 그의 가족을 구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기도가 헛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수 있는 근거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넉넉함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푸근하게 품어주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작지만 소중한 도움의 손길을 펼칩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듯해도,

예수 사랑으로 차가운 세상을 녹여보는 겁니다.

 

기도와 사랑의 힘을 믿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점점 각박해지지만,

우리는 여유를 잃지 말아야겠습니다.

“엘-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생기를 불어넣는 성령의 바람이

우리부터 시작되기를 기대합니다.

 

너희 땅의 곡물을 때에 밭모퉁이까지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그것을 가난한 자와 거류민을 위하여 남겨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레23:22)

 

하나님,

참빛 식구들이 그리고 우리 교회가

세상을 살리는 작은 힘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3. 8. 24 이-메일 목회 서신)

하나님의 얼굴

좋은 아침입니다.

 

1.

야곱에 관한 말씀을 석 달 이상 공부하다 보니

야곱을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집니다.

 

야곱은 흥미로운 인물입니다.

속이고 속는 그의 삶이 정상은 아닙니다.

넘어야 할 산을 앞에 두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야곱은 애처로울 정도입니다.

 

치명적인 약점을 갖고 있던 야곱이

이스라엘의 조상이 된 것을 보면,

하나님의 일하심은 인간의 생각과 다름을 실감합니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밤새도록 하나님과 씨름하고

그곳 이름을 “브니엘(하나님의 얼굴)”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대면해서 보았는데 생명을 구했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다른 초월적 존재이십니다.

인간이 마주할 수 없는 전적인 타자이십니다.

야곱이 그 하나님과 밤새도록 얼굴을 맞대고 씨름한 것입니다.

그리고 생명을 보존했습니다.

 

2.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도 목숨을 유지한 야곱이

형 에서를 만나자

형의 얼굴이 하나님 얼굴 같다고 말합니다.

엄청난 말입니다.

 

야곱과 에서는 어떤 면에서  원수지간입니다.

에서는 야곱에게 속고 장자권과 축복을 잃어버렸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로부터 살해위협을 받았습니다.

 

형 에서가 자신에게 다가온다는 소식을 듣고

야곱은 안절부절못하였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준비했고,

자신과 가족을 구해주시길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형 에서를 만나자

에서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발견한 것입니다.

깜짝 놀랄 일입니다.

 

얍복강에서 밤새도록 하나님과 씨름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본 야곱이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3.

어떤 철학자는

“타인의 얼굴”에서 자신을 발견해야 하고

낯선 타인을 사랑하지 않고는 진정한 사랑이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자기를 넘어서 낯선 타인의 지경에 들어가야

참된 인생을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셨을 때,

이웃에게서 하나님의 얼굴을 발견하기를 바라셨을 것입니다.

낯선 이웃, 관계가 깨져서 서먹한 이웃, 약하고 소외된 이웃과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고 교감하라는 말씀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자기 얼굴에만 신경 씁니다.

관계가 어그러지고 그 속에 진실함이 사라집니다.

타인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신비를 경험하기 원합니다.

 

깜짝 놀랄 얼굴로 찾아오실 하나님을 기대하면서

오늘 하루 힘차게 시작합시다.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같사오며 (창33:10)

 

하나님

불현듯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지나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3. 8. 17 이-메일 목회 서신)

하나님과 씨름하기

좋은 아침입니다.

 

1.

주일 예배에서는 두 시간에 걸쳐서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하는 본문을 공부했습니다.

 

날이 밝으면

형 에서를 맞닥뜨려야 하는 긴급한 상황이었습니다.

야곱은 재산의 절반이라도 챙기기 위해서 가축 떼를 둘로 나누고

형 에서를 위한 선물을 준비해서 형의 마음을 누그러뜨릴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야곱에게 가장 긴급하고 중요한 문제는

형 에서를 극복하고 살아남는 것입니다.

야곱의 생각 속에는 에서 밖에 없기에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야곱이 가족까지 얍복강을 건너보내고

혼자 남아서 마지막 밤을 보냅니다.

가장 외롭고 불안하고 칠흑같이 어두운 밤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야곱을 찾아오셔서

밤새도록 씨름하셨고

그의 이름을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마지막에는 야곱의 요청대로 축복해 주셨습니다.

 

2.

지난주 설교에서

우리도 야곱처럼 하나님과 씨름하자고 제안하면서

시간상 나누지 못한 것을 오늘 보충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씨름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정리했습니다:

 

우선, 하나님과 씨름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을 이끄는 운영체계가 하나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매사에 믿음 안에서 살아가기로 결심하고

흔들림 없이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것이

하나님과 씨름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둘째,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문제를 앞에 놓고 당황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제하실 수 있는 하나님 손에 문제를 맡깁니다.

문제를 일으킨 상황을 독수리의 시선(Bird’s eye view)으로 내려다볼 수 있을 때까지

기도와 말씀을 갖고 씨름합니다.

 

셋째, 중간에 포기하지 않는 끈질김입니다.

야곱은 허벅지 관절이 어긋나는 것도 개의치 않고

하나님과 끝까지 씨름했습니다.

이름이 바뀌었고 결국 하나님의 축복도 받았습니다.

하나님과 씨름하는 사람은 끈질기게 살아남습니다.

 

넷째, 하나님과 씨름하는 것은

세상의 관습, 옛사람의 습관, 유행 등을 따르지 않습니다.

결국 없어질 세상 것들과 씨름하지 않습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궁극적인 것(ultimate concern)”에  관심을 갖습니다.

신앙 안에서 각자의 인생관을 정립하는 과정입니다.

 

마지막 다섯째,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합니다.

하나님과 이웃과 평화를 도모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 하나님과 씨름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과 씨름한다는 것이

세상 일을 무시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 안에서 고민하고 풀어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씨름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 앞을 막아서는 장애물을 뛰어넘고

신앙이든지 우리의 인생이든지

결국에는 중요한 과제를 풀어내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과 씨름하기를 원합니다.

그 과정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길 원합니다.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창32:28)

 

 

하나님

사람이나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과 씨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3. 8. 10 이-메일 목회 서신)

하나님 편에 서라

좋은 아침입니다.

 

1.

토요일 새벽기도회 마치고

강단에서 기도하는데 문득

“하나님의 희로애락”이라는 문구가 떠올랐습니다.

 

하나님은 언제 기뻐하시고, 화를 내시고

슬퍼하시고 즐거워하실까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성경은

하나님의 희로애락을 기록한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하나님께 돌아올 때 기뻐하십니다.

정의와 공의가 사라진 세상을 향해서 분노하십니다.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쫓을 때 슬퍼하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희로애락을 이해하고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2.

제가 기도하면서 든 생각은

하나님의 희로애락과

우리의 희로애락이 과연 일치하는 지였습니다.

 

하나님께 나와서 기도합니다.

기쁘고 힘들고 슬프고 즐거울 때 기도하고

기쁘고 즐거운 일이 많아지길 기도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와 하나님의 마음이 일치하는 지 궁금했습니다.

 

희로애락이 인생이라면

우리가 원하는 인생과 하나님이 바라는 인생이

엇박자가 날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께 마음과 생각을 맞추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바른 기도요 바른 신앙일 것입니다.

 

3.

짐 월리스의

<하나님 편에 서라>는 책이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세상 속에서 추구해야 할 공동선에 관한 책입니다.

영어 제목도  “On His Side”이니 우리 제목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희로애락에 동참하는 기도,

하나님을 기쁘고 즐겁게 하는 신앙,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서 경험하고 이루는 시도,

이 모든 것의 기본은 하나님 편에 서는 것입니다.

 

월리스의 한국어 번역 책 표지에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의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인지 아닌지 나는 관심이 없다.

나의 가장 큰 관심은

내가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다.”

 

4.

지난 주일 예배를 시작하면서 말씀드렸듯이

우리 중심의 예배, 우리 중심의 신앙,

내가 잘되고 평안하고 복을 받으려는 자세를 내려놓고

하나님을 한 가운데 모시고 하나님의 희로애락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

우리의 시선도 머물고,

하나님의 손길과 발길이 가는 곳에

우리도 가서 도우면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기 원합니다.

 

그러면 이다음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다음과 같은 칭찬을 들을 것입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25:35-36)

 

하나님 편에 서기 원합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삶을 살기 원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 6:5)

 

 

하나님

오늘도 주의 손과 발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3. 8. 3 이-메일 목회 서신)

늘 바쁜 일로 쫓기는 삶

좋은 아침입니다.

 

1.

현대인의 특징은 바쁨입니다.

비즈니스(business)라는 말을 패러디해서

영어 비지니스(busyness)라는 말이 생길 정도입니다.

 

바쁘게 살다 보면,

“내가 왜 이렇게 바쁘지?”하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몸과 마음이 바쁜데 뭔가 멍- 해지는 순간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세상에는 시간 관리에 관한 정보가 넘칩니다.

한국에도 소개된 Atomic Habits(아주 작은 습관의 힘)이라는 책은

아마존에서 10만이 넘는 리뷰를 받을 만큼 인기입니다.

 

그런데

시간 관리에 관한 책이나 강연을 들으면, 대개 아는 내용입니다.

몰라서 못 한 것이 아니라 알면서 실천하지 않은 것이지요.

책을 사서 읽다가 중간쯤 덮게 되는 이유입니다.

 

2.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시간(역사) 속에서 일하십니다.

창세기 1장에 6일이라는 시간 단위가 나오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고 했습니다.

 

영원이라는 시간, 순간이라는 시간

세상의 시간, 개인의 시간

지나가는 시간 크로노스, 포착해서 즐기는 카이로스 등등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그러니 하나님 안에서 산다는 것은

주어진 시간을 하나님과 더불어 산다는 뜻입니다.

시간을 구별하는 것도  거룩입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시간을 경험할 수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 나라이고 영원일 것입니다.

이다음 하나님 나라에서 경험할 것을

지금 누리는 최고로 행복한 순간입니다.

 

3.

이것도 알고 있지만,

막상 현실에 적용하고 실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늘 바쁜 일로 쫓기며 살기 때문입니다.

 

시간에 쫓기다 보면

정녕 누려야 할 영원한 시간을 소홀히 합니다.

주일 예배에 와서도 다른 생각을 하거나,

간신히 기도하고 말씀 읽는 시간을 만들었지만,

여유가 없고 조바심이 나서 서둘러 마무리합니다.

 

기도하고 성경만 읽으려고 하면

해야 할 일들이 눈앞에 스쳐서 집중할 수가 없습니다.

영적 전쟁이라는 말이 맞습니다.

 

4.

시간을 떼어놓아야 합니다.

하루에 10분, 30분, 한 시간 이런 식으로 떼어놓기보다는

아침 7:00- 7:30, 저녁 10:00-11:00와 같은 식으로 시계 속의 시간을 떼어 놓고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시간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고 말씀 읽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하루를 시작하거나, 끝날 때

꼭 기도하고 말씀 읽는 습관을 만드는 것도 좋습니다.

 

간혹,

“목사님, 저는 기도하고 말씀 읽는 시간이 습관이 되었는데,

그 시간을 지키지 못하면 죄책감이 듭니다”는 말을 듣습니다.

저는 이런 말을 할 수 있고, 듣는 것 만도 감사하고 기쁩니다.

기도하고 말씀 읽는 것이 습관이 된 분의 고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 이런 고백 또는 고민을 많이 듣고 싶습니다.

 

위에 소개한 <아주 작은 습관>에서 강조하듯이

작은 것이 습관이 되면 신앙의 내공이 저절로 키워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의 달인(達人, master)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하고 말씀 읽는 시간,

하나님 안에서 사는 행복을 절대 놓치지 맙시다.

 

우리는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송축하리로다

할렐루야 (시편115:18)

 

하나님

우리의 시간에 주인이 되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3. 7. 27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