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마음

좋은 아침입니다.
요즘은 구약성경의 신명기를 읽고 있습니다.
이래 저래 올해 성경 통독이 많이 늦었지요.
부지런히 따라잡아야겠습니다.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를 탈출했던
이스라엘 1세대는 여호수아와 갈렙만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나머지 백성들은 광야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모세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신명기는 모세가 생을 마감하기 직전에
장차 가나안 땅에 들어갈 이스라엘의 2세들에게
들려준 마지막 설교였습니다.

제가 오늘 읽은 신명기 22장은
신명기 법전(12-26)의 후반부에 해당합니다.
신명기 22 1-12절을 읽으면서
하나님 마음을 잘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본문에 나오는 예들이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1-4절에서는
이웃의 소나 양이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말고 그것을 주인에게 돌려주랍니다.
주인이 없으면 집에 두었다가
주인이 찾을 때 돌려주랍니다.
소나 양 뿐만 아니라
무엇이든지 이웃이 잃어버린 것들을 발견하거든
못 본체 해서는 안 된답니다.

요즘처럼 무관심이 판을 치는 시대에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아니 이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들 모두 각박한 세대를 살고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솔선해서
이웃의 일을 내일처럼 보살피고
이웃사랑을 실천해야 함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6-7절에서는 길을 가다가 어미 새와 새끼 새가 있는 것을 보거든
새끼나 알은 꺼내와도 어미는 잡지 말랍니다.
어미는 계속해서 새끼를 낳으면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창조명령을 준수해야 하기 때문이겠지요.

무슨 일을 하든지
여지를 남겨놓으라는 뜻으로 들립니다.
하나님은 끝장을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8절에서는 집을 지을 때 난간을 만들어 놓으랍니다.
난간을 만들어 놓으면 사람이 지붕에서 떨어져도
목숨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발적으로 짓는 살인죄도 막을 수 있다고 가르쳐줍니다.

만반의 준비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행여나 준비를 덜해서 이웃에게 피해를 입히거나
자신이 손해를 당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발적인 것까지 고려하면서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라는 교훈입니다.

5절과 9-12절은
남녀가 옷을 바꿔 입거나,
양털과 무명실로 섞어서 짠 옷을 입거나
밭에 식물을 섞어서 심거나
소와 나귀가 함께 멍에를 지고 밭을 가는 것을 금지합니다.

혼합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십니다.
거룩한 것과 세상적인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섞어서 무질서하게 보이거나
혼란스럽게 일을 행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순수해야 합니다.
마음이 하나님께로 고정되어야 하고
복잡한 것에 질서를 부여하면서 정돈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혼란스럽거나 혼동케 하는 생각이나 행동은
하나님 앞에서 금물입니다.

엊그제 새벽기도회에서 읽었던
에스겔서 42 20절 말씀과도 일맥 상통합니다.
에스겔 선지자에게 성전에 대한 환상을 보여주시면서
성전 주변에 담을 두를 것을 명령하십니다.
성전과 세상을 구분하는 담입니다.:
그 담은 거룩한 곳과 속된 곳을 구별하는 것이더라.
It had a wall around it to make separation between the holy and the profane.

구약의 율법서들이 지루한 것이 사실이지만
차분하게 읽다 보면
율법의 조항 조항 속에 하나님의 마음이 깃들어 있음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은
주님의 백성들이 세상 속에서 구별된 삶을 살고,
이웃을 배려하면서 근사하게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하루 동안 세상에 살면서
구별된 삶을 살게 하시고,
이웃을 배려하고,
매사에 하나님 앞에서 완벽히 행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5.17 메일 목회서신)

두 개의 눈과 두 개의 귀

좋은 아침입니다.

아침에 거울을 보면서

제 얼굴을 가만히 관찰해 보았습니다.

입과 코는 하나인데

눈과 귀는 각각 두 개씩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눈과 귀를 각각 두 개씩 만들어주신

하나님의 뜻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눈이 하나라면

사물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왜곡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두 개의 눈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자연을 감상하고

사랑하는 사람들도

세심하게 돌볼 수 있습니다.

물론 두 눈으로 보지 말아야 할 것들만 본다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거꾸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귀가 두 개인 이유도 생각해 봅니다.

당장 저는 개인적으로 두 개의 귀를 주신 것에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살아갑니다.

한쪽 귀가 잘 들리지 않지만

다른 쪽 귀로 거의 정상인처럼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귀가 하나였다면

저는 지금 무척 답답하고 불편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귀가 두 개인 이유는

세상의 말들을 한 쪽 귀로 듣고

한 쪽 귀로 흘리라는 뜻도 들어 있을 것 같습니다.

쓸데없는 말들을 들었다면 곧바로

다른 쪽으로 흘려 보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참 많은 소리들을 듣습니다.

이른 아침의 맑은 새소리부터 시작해서

대낮의 자동차 소음과 군중들의 말소리,

귀담아 듣고 마음에 간직해야 할 조언과

하나님 말씀에 이르기까지

두 개의 귀를 통해서 들려오는 소리들은 정말 다양합니다.

그런데 이따금씩

양쪽 귀에 필터(filter)를 설치해 놓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들어야 할 말만 들을 수 있는 장치입니다.

하지만 그런 장치는 없습니다.

필터가 없으니 앞에서 말한 대로

필요 없는 소리들은 한 쪽 귀로 듣고

한 쪽 귀로 흘려 보내는 훈련을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모든 소리를 마음에 품고 있으면

생각이 혼란스러워지고

마음에 상처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들을 소리만 정선해서 마음에 간직한다면

한결 우리의 영혼이 깨끗해질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두 개의 귀와 눈을 열어놓는 것은 물론

눈과 귀를 지혜롭게 차단하는 비결도 배워야 합니다.

이사야서 33장 15-16절에서는

하늘 나라 백성의 자질과 그들이 누리는 복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알려줍니다

오직 공의롭게 행하는 , 정직히 말하는 , 토색한 재물을 가증히 여기는 , 흔들어 뇌물 받지 아니하는 ,

귀를 막아 흘리려는 꾀를 듣지 아니하는 , 눈을 감아 악을 보지 아니하는 ,

그는 높은 곳에 거하리니 견고한 바위가 그의 요새가 되며 그의 양식은 공급되고 그의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He who walks righteously and speaks uprightly, who despises the gain of oppressions, who shakes his hands, lest they hold a bribe, who stops his ears from hearing of bloodshed and shuts his eyes from looking on evil, 16 he will dwell on the heights; his place of defense will be the fortresses of rocks; his bread will be given him; his water will be sure.(Isa 33:15-16)

우리 귀를 통제해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고

우리의 눈으로 하나님의 선하신 세상만 볼 수 있기 원합니다.

우리의 감각까지 통제할 수 있는

온전한 신앙인이 되어서

하나님께서 높여주신 곳,

견고한 바위를 요새로 삼고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양식과 물이 끊이지 않는

축복을 누리기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의 눈과 귀가

하나님께서 만드신 목적대로

선하게 사용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5.10 이-메일 목회서신)

확신있게 서기

좋은 아침입니다.

한국을 방문하느라

지난 3주 동안 목회서신을 보내지 못했는데

어느덧 5월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참 빠르게 지나갑니다.

세월을 붙들어 놓을 수 없다는 말이 실감나는 요즘입니다.

이렇게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 아니 인생길에서

그리스도인이라면 잠깐이라도 멈춰 서서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믿음에 대한 점검과 확신입니다.

이것을 두고 골로새서 4 13절에서는

확신 있게 서기라고 말합니다.

골로새 교회를 세운 바울의 제자 에바브라가

교회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던 내용입니다.

그가[에바브라]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있게 서기를 구하나니 ( 4:13)

He is always struggling on your behalf in his prayer, that you may stand mature and fully assured in all the will of God.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적어도 세 가지 확신이 필요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확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확신

우리들 안에 계시는 성령님에 대한 확신

우리가 사는 시대는 모든 것을 유보하고

불확실성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고

어느 한 가지 확실한 것을 붙잡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여서

확신 있게 서지 못한 채

갈팡질팡하면서 예수님을 믿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확신 있게 서 있어야 합니다.

계절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5월을 맞으면서

우리들의 신앙과 삶이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를 구원해 주신 예수님,

우리와 늘 함께 하시는 성령님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차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빛 교회 식구들께

흔들림 없는 확신과 온전함을 더해 주옵소서.

확신 있게 서 있는 굳건한 믿음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5.3 메일 목회서신)

부활로 가는 길

좋은 아침입니다.

1.

어느덧 사순절이 지나고

고난 주간의 한 가운데 와 있습니다.

내일이 성 금요일이니

오늘은 예수님께서 붙잡히신 날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고 군병들에게 잡히신 예수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과 빌라도 앞에

끌려 다니시면서 재판을 받으시고

결국 십자가형에 처해지신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

며칠 전에 죽은 나사로까지 살리신 예수님이시건만

전능하신 능력은 온데간데 없고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듯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무력하게 십자가를 지시고

갈보리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2.

기독교 신앙은 십자가와 부활로 집약될 수 있습니다.

부활이 없는 십자가는 초라할 정도로 무력합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겉만 번드르할 뿐 속빈 강정입니다.

부활의 뒷면에는 십자가가 깃들어 있고

십자가는 부활로 나아가는 길목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십자가를 지나서 부활로 나가야 합니다.

십자가의 고통이 부활의 영광으로 이어짐을 알고

꿋꿋하게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우리가 겪는 고난과 고통이라면

부활은 고난의 끝일 것입니다.

고난 주간을 지나면서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을 느끼기 원합니다.

동시에 우리가 겪는 크고 작은 고통도

예수님의 십자가에 올려 놓기 원합니다.

그리고

곧 다가올 부활의 아침을 소망하기 원합니다.

십자가는 부활로 이어지는 길목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고난 주간의 한가운데를 지나는 우리 모두 위에

부활의 소망과 능력을 부어주옵소서.

나는 죽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사신다는 귀한 고백이

예수님과 더불어

십자가와 부활의 여정을 걷는 우리들 안에 넘쳐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4.5 메일 목회서신)

침착함

좋은 아침입니다.

1.

엊그제 뉴욕을 떠나서 라스베가스로 향하던

제트 블루 항공기에 어이없는 일이 생겼습니다.

비행기 기장이 갑자기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면서

조종실을 뛰쳐나와서 승객들 사이를 오가며

알케이다 때문에

비행기가 추락하고 있다고 외쳤습니다.

승객들이 기장을 제압하고

비행기는 3시간 만에 텍사스 공항에 비상 착륙해서

사태가 해결되었지만

위험천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에는

항공사 조종사(pilots)에 대한 기사가 심심치 않게 보도됩니다.

음주상태에서 조종간을 잡은 경우,

조종사들이 자동 조종에 익숙해서

비상사태가 생기면 수동으로 비행기를 이착륙시키는 기술이 부족하다는 우려,

조종석에 앉아서 농담을 하거나 비행기 운항에 집중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까지

아찔한 얘기들이 흘러 나옵니다.

그 어떤 운송수단보다 비행기는

조종사들이 중요합니다.

이륙하는 순간부터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비행기에 탄 승객들은 조종사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세상이 어수선하다지만

조금씩 정신을 차리고

모든 면에서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2.

제트 블루 비행기 조종사가

정신이상을 일으켰을 때

옆에 있던 부조종사의 침착한 대응이

언론에 보도되었습니다.

부조종사는 조종사가 종교를 얘기를 하는 등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자

조종사의 정신이상 증세가 있음을 감지했답니다.

그를 조종석에서 밀어내고

때마침 비행기를 탑승해 있던

비번 조종사에게 비행기 조종간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승객들과 더불어 조종사를 제압하면서

자칫 당황될 수도 있는 비상사태에

침착하게 대처했습니다.

미국 언론들은 오하이오 출신의 다우드(Dowd)라는

부종종사를 영웅으로 치켜 세우고 있습니다.

다우드는 어렸을 때부터 침착한 성격이었고

그의 가족들도 매우 사려 깊은 사람들이라고

고향사람들의 말을 인용해서 보도했습니다.

그의 장모는 사위의 행동이 결코 영웅적이 될 수 없고

비행기에 탄 모든 승객들이 영웅이라는 겸손함도 보였습니다.

중고등부 시절 도우드를 가리켰다는 주일학교 선생님은

그는 훌륭한 사람입니다. 영웅이 될 충분한 성품을 갖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어떤 일이 닫쳐도 능숙하게 대처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라고

다우드를 칭찬했습니다.

맞습니다.

부기장 다우드의 침착한 대처가

큰 사고를 막았습니다.

3.

호랑이 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우리 속담이 있듯이

침착함

특히 위기에 침착하게 대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하루 아침에 되지 않습니다.

평소에 침착함을 훈련하고 그것이 습관처럼 베어 있었을 때

위기상황에서도 허둥대지 않는 침착함이 발휘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열 처녀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다섯 명의 처녀는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서 등불과 기름을 준비했습니다.

반면에 다른 다섯 명은 등불만 갖고 있을 뿐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채

신랑을 기다립니다.

신랑이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등불과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는 침착하게 신랑을 맞이합니다.

반면에 기름을 준비하지 못해서 불을 키지 못한 처녀들은

그제야 허둥대면서 기름을 구하러 가지만

이미 때가 늦었습니다.

침착함은 준비함에서 옵니다.

매사에 지혜롭게 준비하고 미리미리 훈련해 놓으면

급한 일이 생겼을 때 침착하게 대처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항상 해야 합니다.

그때 가서 허둥대지 않고 준비한 기름으로 등을 밝히고

예수님을 침착하게 맞으려는 준비된 삶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면

주님을 맞을 준비가 되어있는지요?
사순절 마지막 주간에

우리의 신앙과 삶을 돌아보고

서둘다가 흐트러진 부분이 있다면

다시금 침착함을 회복하기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이 매사를 지혜롭게 준비해서

침착함이 성품 속에 깃들게 하옵소서.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하면서 하루 하루 의로운 길을 걷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3.29 메일 목회서신)

별처럼 빛나는 인생

좋은 아침입니다.

1.

수요예배에서는

바울 서신을 한 장씩 읽고/공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부터 시작했는데

어느덧 빌립보서까지 왔습니다.

빌립보서는 제가 청년시절부터 무척 좋아하던 성경 말씀입니다.

물론 어렸을 때는 빌립보서 4장 13절 때문에 애독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I can do everything through him who gives me strength.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빌립보서 전체에 흐르는 말씀이 마음을 울립니다.

감옥에 갇혀있는 바울이 빌립보서 전반에서

그리스도인의 기쁨”을 언급할 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고백을 할 때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는 명령을 할 때,

위에 있는 4장 13절 배후에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는 말씀을 할 때,

빌립보서 말씀이 제 마음 속에

살아있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메아리 쳐옴을 느낍니다.

2.

어제 예배에서는 빌립보서 2장 말씀을 나누었는데.

2장 한 가운데 보석과 같은 말씀이 있었습니다.

어그러지고 거슬리는 세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흠 없고 순전한 모습으로 하나님과 세상에 나갈 때,

그 인생이 하늘의 별처럼 빛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흠이 없고 순결해져서, 구부러지고 뒤틀린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별과 같이 빛날 것입니다. (빌 2:15)

…that you may be blameless and innocent, children of God without blemish in the midst of a crooked and twisted generation, among whom you shine as lights in the world.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나는 인생!

이보다 더 귀하고 행복한 인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말하는 소위 성공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도 구부러지고 뒤틀린 세대 가운데서

보석처럼 돋보인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흠이 없고 순결한 (blameless and innocent)

모습을/신앙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가졌을 때

저절로 생기는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모습입니다.

우리들은 흠없고 순결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면서 그 길로 나갈 뿐입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나갈 뿐입니다.

지금 우리 시대는

흠없고 순결한 그리스도인들을 애타게 찾고 있습니다.

구부러지고 뒤틀린 세대 속에서

믿음을 굳게 지키고

바르게 살려고 애쓰고 힘쓰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시대의 요청이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는 기대임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세상 속에서 별과 같이 빛나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빛 교회 식구들께서

흠이 없고 순결한 신앙을 갖게 하옵소서.

세상 속에서 별처럼 빛나는 축복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3.22 이-메일 목회서신)

소망을 꼭 붙들고…

좋은 아침입니다.

1.

세상을 보는 바라보는 관점을 안경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어떤 색깔의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느냐에 따라서 세상이 달리 보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세상은 그대로인데

눈앞에 있는 안경색깔이 바뀌면서

세상의 모습이 각기 다르게 보이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는가는 무척 중요합니다.

그 가운데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부정적인 관점, 어두운 곳을 먼저 보다가

긍정적인 면 또는 밝은 곳을 놓치는 경우입니다.

요즘 세상은 말 그대로 뒤죽박죽입니다.

너무 혼란스럽고 복잡해서

어떤 한 가지로 정리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도 제 각각인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는 수십가지의 또 다른 내가 살고 있는 듯 합니다.

어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것이 내가 맞는지 깜짝 놀랄 정도의

또 다른 내가 우리 안에 살고 있어서 당황스러울 때가 꽤 많습니다.

그때도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못난이, 실패자, 낙오자로 바라볼 수도 있지만,

다른 면으로 보면, 정직한 사람, 소신있는 사람,

꿋꿋한 사람으로 자신을 치켜세울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관점의 차이입니다.

어떤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고

자신을 바라보는지에 대한 결과들입니다.

2.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세상의 영향을 받고

여전히 예수님을 믿기 전의 안경이 신앙의 안경을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삶이 어려워지면

어둡고 절망적인 면을 먼저 보게 마련입니다.

그때 우리가 꼭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소망이란 단어입니다.

믿음은 소망으로 이어질 때 힘이 있습니다.

아니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소망을 잃지 않도록 붙잡아 줍니다.

목사인 저도 힘이 들고

때로는 낙심이 될 때가 있습니다.

제 자신에 대한 실망감이 밀려오기도 합니다.

그때마다 묵상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소망 하나님이 모든 기쁨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 ( 15:13)

Charles Swindoll목사님의 예화집에

다음과 같은 글이 들어 있습니다.

Someone has said, “We can live forty days without food, eight days without water, four minute without air, But only a few second without hope.

소망을 꼭 붙들고 오늘 하루를 시작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하시고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잃지 않게 하옵소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삶 속에 소망이 넘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3.15 메일 목회서신)

보혈을 지나

좋은 아침입니다.

1.

어느덧 사순절 한 가운데로 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결국에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처럼 사순절은

예수님의 생애와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깊이 묵상하면서

우리들 신앙의 옷깃을 여미고

일년 가운데 10분의 1을 하나님께 드리는 귀한 시간입니다.

사순절을 맞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제목으로

연속해서 설교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다섯 번의 설교에 모두 담을 수 없습니다.

부활에 대한 말씀도 나누지 못하고 넘어갈 정도입니다.

한 번의 설교를 통해서

복음의 능력이 우리 성도님들과 교회 안에 깊이 임하는 것도

어쩌면 목사의 꿈일 것입니다.

그래도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설교 제목만 생각해도

은혜가 되고 가슴이 벅차 오릅니다.

여러 가지 이론들과 행사들이 난무하는 요즘 교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순전한 복음을

참빛 교회 식구들과 나눌 수 있는 것만도 감사할 뿐입니다.

2.

지난 주일날은 보혈을 지나라는 찬양을 함께 불렀습니다.

보혈 (寶血) – 한자 뜻 그대로 보화처럼 귀한 피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대신해서

피를 흘려 주셨기에 그 보혈의 공로로

우리가 의롭게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보혈입니다.

구약성경에 의하면 피는 생명의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피 흘리신 것은

우리 때문에 그 생명을 버리신 것을 뜻합니다.

그 피로 우리가 생명을 얻었습니다.

또한 구약시대에는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 짐승의 피로 희생제사를 드렸습니다.

피의 제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필수적인 절차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이처럼 구약성경과 연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들은 더 이상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 한 번으로

죄사함의 은혜가 영원히 [영단번/once and for all] 임했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가 참 크고 귀합니다.

때로는 너무 커서,

아니 이 은혜가 실제 우리들 세상살이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것 같아서

무심코 지나가기 쉽습니다.

보혈을 지나서

아버지 품으로 갈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순절 한 가운데를 지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깊이 묵상하고 맛보기 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순수한 신앙을 회복하기 원합니다.

지난 주에 불렀던 찬양 보혈을 지나를 부르면서

오늘 하루를 시작하시면 어떠실까요?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보혈을 지나 아버지 품으로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한걸음씩 나가네

존귀한 주 보혈이 내 영을 새롭게 하네

존귀한 주 보혈이 내 영을 새롭게 하네. 아멘

하나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 교회와

모든 성도들 한 가운데 자리잡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3.8 메일 목회서신)

“강영우 박사 이야기”

좋은 아침입니다.

지난 수요일과 목요일은 정신 없이 바빴습니다.

어제는 청년들과 성경공부를 하고 집에 와서

그냥 잠자리에 들어서 이제 목요서신을 보냅니다.

제 30년 지기 친구인 국민일보 이태형 기자가

엊그제 강영우 박사님에 대한 글을 썼기에

오늘은 그것을 나누려고 합니다.

강영우 박사님이야 뭐- 말이 필요 없으신 대단하신 분이지만

마지막 가시는 길이 더욱 아름답고 존경스러워서

저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저런 신앙의 선배가 계시기에

구원의 기쁨과 하늘의 소망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고

이 아침에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또 다시 새 달을 맞이했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사순절 기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참빛 교회 식구들 그리고 우리 모두의 신앙과 삶이

더욱 깊어 지고 높아지기를 기도하겠습니다.

하목사 올림

강영우 박사 이야기

강영우 박사가 췌장암으로 시한부 삶을 살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진 지난해 말, 익명의 한 분으로부터 내게 전화가 왔다. “저, 강 박사님 연락처 좀 알 수 있을까요?” “아니, 왜 그러시죠?” “강 박사님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부족하지만 강 박사님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어서요.” “어떤 방법이지요? 임상경험이 있습니까?” “아니요. 아직 한번도 써 보지 않았습니다. 다만 어차피 시한부라면 이 방법이라도 해 보면 좋을듯 해서요….”

그 분에게 연락처를 알려 주지 않았다. 아무리 강 박사가 힘겨운 상태지만 한 번도 써 보지 않은 방법을시도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났다. 지난 23일 그 분으로부터 다시 전화가 왔다. 자신이 교장이라고 밝히면서 강 박사 연락처를 알려 달라고 청했다. 진정성이 느껴졌다. 다음날 연락드리겠다고약속했다. 24일 오전, 강 박사 소천 소식이 뉴스를 통해 흘러 나왔다.

나는 강 박사가 췌장암 진단 받기 한 달여 전 그와 부인 석은옥 여사를 서울 모 호텔에서 만나 깊은 이야기를 나눴었다. 나로서는 강 박사와 가진 처음이자, 마지막 인터뷰였다. 강 박사는 키는 작았지만 맑고깨끗한 얼굴의 소유자였다. 병색은 하나도 없었다. 속으로 ‘어떻게 하면 저렇게 곱게 늙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을 정도였다. 그래서 강 박사의 췌장암 발병과 연이은 소천 소식은 나에게도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의 유고집을 준비 중인 두란노 관계자에 따르면 강 박사 발병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강 박사를 살리기위해서 여러 제안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강 박사는 모든 제안을 거절하고 집에서 마지막 인생 마무리를했다. 강 박사는 절대 긍정의 사람이었다. 어떤 상황도 긍정으로 만든 긍정의 연금술사 였다. 그는 내게말했다. “실패의 순간이 인생 최대 행운의 순간일 수 있습니다. 저는 쓰레기 더미에서 피어난 장미꽃 이었습니다. 기적이지요. 인생에는 분명 무수한 기적이 있습니다.”

그런 긍정의 사람, 강 박사가 어찌 췌장암의 공격은 그대로 순응하면서 받았을까? 그것이 나로서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았다. 불사조처럼 일어나서 다시 “우리에게 분명 기적이 있습니다. 저를 보세요!”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 강 박사의 지난 인생과 걸맞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내 강 박사가 저항하지 않고 주어진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더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가 죽음을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은 이 땅에서의 삶을 충만하게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주 안에서후회 없는 인생을 살았기에 췌장암이 다가 왔을 때, “그래, 여기까지”라면서 담담히 받아들였던 것이 아닐까 싶다. ‘죽음 너머의 더 좋은 일’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삶의 태도리라.

그와 만났을 때, 감사로 시작하고 감사로 끝을 맺었다. “오직, 감사할 뿐입니다,” 감사와 은혜의 사람 강영우 박사. 68년, 잠시 살았던 이 땅의 옷을 벗고 지금 주님과 함께 거하리라.

이태형 선임기자 thlee@kmib.co.kr

고난중의 소망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목요서신은

새벽기도회와 관련된 말씀을 많이 쓰게 되는군요.

은근히 새벽기도회에 나오시라는 압력일까요?

(esp. 젊은이들이여 새벽을 깨웁시다!)

예레미야서를 모두 끝내고

예레미야 애가서를 이번 주에 시작했습니다.

애가(lamentation)은 “슬프다”는 말로 시작되듯이

예루살렘이 멸망한 것을 두고 슬픔의 노래를 기록한 것입니다.

심하게 말하면 “조가”라는 말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 애가가

슬픔의 노래에만 머무르는 것은 아닙니다.

애가 한 가운데인 애가서 3장에

“소망”의 말씀이 나오기때문입니다.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심으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애가 3:19-22)

Remember my affliction and my wanderings, the wormwood and the gall! My soul continually remembers it and is bowed down within me. But this I call to mind, and therefore I have hope: The steadfast love of the LORD never ceases; his mercies never come to an end. (Lam 3:19-22)

2.

예레미야 애가 3장은

제 감신대학원 졸업논문 본문입니다.

(서른일곱 살의 늦깎이 신학생이 논문상을 받고 졸업했었네요^^)

새벽기도회를 준비하면서

그때 논문 파일을 열어 보았습니다.

긴 논문이었지만 그 중의 한 문단을 옮겨왔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희망과 절망의 양극단으로 놓고 우리의 삶을 저울질 한다면 대부분 절망과 고통으로 기우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마주대하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인생의 경륜이나 환경을 막론하고 아픔이 있고 탄식이 있다. 아니 고통이 없는 인생은 마치 진공 속의 삶과 같아서 어떤 가치도 의미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삶은 고통과 더불어 사는 인생이요 우리의 현실은 아무리 후한 점수를 주어도 형극의 길임에 틀림이 없다. 고통의 문제는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이다. 민족도 국가도 그들이 어떤 역사를 갖고 있든지 고난이 없는 공동체는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의 현실은 고통과 더불어 살면서 고통 저 너머의 희망을 찾아 떠나는 순례의 길 아닐까? –하시용, 감신대 석사학위논문(1998), “예레미야 애가 3장의 해석학적 재고찰”에서-

그렇습니다.

고통 없이 살아가는 인생은 없습니다.

고통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신실하심을 체험하는 것이 중요할 뿐입니다.

아침마다 새롭게 임하시는

주님의 성실하심이

참빛 교회 식구들 위에 그대로 임하길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하루도

고통 저 너머에 숨겨진 희망을 찾아 떠나는

순례길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2.23 이-메일 목회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