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로 가는 길

좋은 아침입니다.

1.

어느덧 사순절이 지나고

고난 주간의 한 가운데 와 있습니다.

내일이 성 금요일이니

오늘은 예수님께서 붙잡히신 날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고 군병들에게 잡히신 예수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과 빌라도 앞에

끌려 다니시면서 재판을 받으시고

결국 십자가형에 처해지신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

며칠 전에 죽은 나사로까지 살리신 예수님이시건만

전능하신 능력은 온데간데 없고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듯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무력하게 십자가를 지시고

갈보리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2.

기독교 신앙은 십자가와 부활로 집약될 수 있습니다.

부활이 없는 십자가는 초라할 정도로 무력합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겉만 번드르할 뿐 속빈 강정입니다.

부활의 뒷면에는 십자가가 깃들어 있고

십자가는 부활로 나아가는 길목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십자가를 지나서 부활로 나가야 합니다.

십자가의 고통이 부활의 영광으로 이어짐을 알고

꿋꿋하게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우리가 겪는 고난과 고통이라면

부활은 고난의 끝일 것입니다.

고난 주간을 지나면서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을 느끼기 원합니다.

동시에 우리가 겪는 크고 작은 고통도

예수님의 십자가에 올려 놓기 원합니다.

그리고

곧 다가올 부활의 아침을 소망하기 원합니다.

십자가는 부활로 이어지는 길목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고난 주간의 한가운데를 지나는 우리 모두 위에

부활의 소망과 능력을 부어주옵소서.

나는 죽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사신다는 귀한 고백이

예수님과 더불어

십자가와 부활의 여정을 걷는 우리들 안에 넘쳐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4.5 메일 목회서신)

침착함

좋은 아침입니다.

1.

엊그제 뉴욕을 떠나서 라스베가스로 향하던

제트 블루 항공기에 어이없는 일이 생겼습니다.

비행기 기장이 갑자기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면서

조종실을 뛰쳐나와서 승객들 사이를 오가며

알케이다 때문에

비행기가 추락하고 있다고 외쳤습니다.

승객들이 기장을 제압하고

비행기는 3시간 만에 텍사스 공항에 비상 착륙해서

사태가 해결되었지만

위험천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에는

항공사 조종사(pilots)에 대한 기사가 심심치 않게 보도됩니다.

음주상태에서 조종간을 잡은 경우,

조종사들이 자동 조종에 익숙해서

비상사태가 생기면 수동으로 비행기를 이착륙시키는 기술이 부족하다는 우려,

조종석에 앉아서 농담을 하거나 비행기 운항에 집중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까지

아찔한 얘기들이 흘러 나옵니다.

그 어떤 운송수단보다 비행기는

조종사들이 중요합니다.

이륙하는 순간부터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비행기에 탄 승객들은 조종사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세상이 어수선하다지만

조금씩 정신을 차리고

모든 면에서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2.

제트 블루 비행기 조종사가

정신이상을 일으켰을 때

옆에 있던 부조종사의 침착한 대응이

언론에 보도되었습니다.

부조종사는 조종사가 종교를 얘기를 하는 등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자

조종사의 정신이상 증세가 있음을 감지했답니다.

그를 조종석에서 밀어내고

때마침 비행기를 탑승해 있던

비번 조종사에게 비행기 조종간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승객들과 더불어 조종사를 제압하면서

자칫 당황될 수도 있는 비상사태에

침착하게 대처했습니다.

미국 언론들은 오하이오 출신의 다우드(Dowd)라는

부종종사를 영웅으로 치켜 세우고 있습니다.

다우드는 어렸을 때부터 침착한 성격이었고

그의 가족들도 매우 사려 깊은 사람들이라고

고향사람들의 말을 인용해서 보도했습니다.

그의 장모는 사위의 행동이 결코 영웅적이 될 수 없고

비행기에 탄 모든 승객들이 영웅이라는 겸손함도 보였습니다.

중고등부 시절 도우드를 가리켰다는 주일학교 선생님은

그는 훌륭한 사람입니다. 영웅이 될 충분한 성품을 갖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어떤 일이 닫쳐도 능숙하게 대처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라고

다우드를 칭찬했습니다.

맞습니다.

부기장 다우드의 침착한 대처가

큰 사고를 막았습니다.

3.

호랑이 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우리 속담이 있듯이

침착함

특히 위기에 침착하게 대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하루 아침에 되지 않습니다.

평소에 침착함을 훈련하고 그것이 습관처럼 베어 있었을 때

위기상황에서도 허둥대지 않는 침착함이 발휘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열 처녀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다섯 명의 처녀는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서 등불과 기름을 준비했습니다.

반면에 다른 다섯 명은 등불만 갖고 있을 뿐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채

신랑을 기다립니다.

신랑이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등불과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는 침착하게 신랑을 맞이합니다.

반면에 기름을 준비하지 못해서 불을 키지 못한 처녀들은

그제야 허둥대면서 기름을 구하러 가지만

이미 때가 늦었습니다.

침착함은 준비함에서 옵니다.

매사에 지혜롭게 준비하고 미리미리 훈련해 놓으면

급한 일이 생겼을 때 침착하게 대처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항상 해야 합니다.

그때 가서 허둥대지 않고 준비한 기름으로 등을 밝히고

예수님을 침착하게 맞으려는 준비된 삶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면

주님을 맞을 준비가 되어있는지요?
사순절 마지막 주간에

우리의 신앙과 삶을 돌아보고

서둘다가 흐트러진 부분이 있다면

다시금 침착함을 회복하기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이 매사를 지혜롭게 준비해서

침착함이 성품 속에 깃들게 하옵소서.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하면서 하루 하루 의로운 길을 걷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3.29 메일 목회서신)

별처럼 빛나는 인생

좋은 아침입니다.

1.

수요예배에서는

바울 서신을 한 장씩 읽고/공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부터 시작했는데

어느덧 빌립보서까지 왔습니다.

빌립보서는 제가 청년시절부터 무척 좋아하던 성경 말씀입니다.

물론 어렸을 때는 빌립보서 4장 13절 때문에 애독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I can do everything through him who gives me strength.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빌립보서 전체에 흐르는 말씀이 마음을 울립니다.

감옥에 갇혀있는 바울이 빌립보서 전반에서

그리스도인의 기쁨”을 언급할 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고백을 할 때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는 명령을 할 때,

위에 있는 4장 13절 배후에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는 말씀을 할 때,

빌립보서 말씀이 제 마음 속에

살아있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메아리 쳐옴을 느낍니다.

2.

어제 예배에서는 빌립보서 2장 말씀을 나누었는데.

2장 한 가운데 보석과 같은 말씀이 있었습니다.

어그러지고 거슬리는 세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흠 없고 순전한 모습으로 하나님과 세상에 나갈 때,

그 인생이 하늘의 별처럼 빛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흠이 없고 순결해져서, 구부러지고 뒤틀린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별과 같이 빛날 것입니다. (빌 2:15)

…that you may be blameless and innocent, children of God without blemish in the midst of a crooked and twisted generation, among whom you shine as lights in the world.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나는 인생!

이보다 더 귀하고 행복한 인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말하는 소위 성공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도 구부러지고 뒤틀린 세대 가운데서

보석처럼 돋보인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흠이 없고 순결한 (blameless and innocent)

모습을/신앙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가졌을 때

저절로 생기는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모습입니다.

우리들은 흠없고 순결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면서 그 길로 나갈 뿐입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나갈 뿐입니다.

지금 우리 시대는

흠없고 순결한 그리스도인들을 애타게 찾고 있습니다.

구부러지고 뒤틀린 세대 속에서

믿음을 굳게 지키고

바르게 살려고 애쓰고 힘쓰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시대의 요청이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는 기대임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세상 속에서 별과 같이 빛나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빛 교회 식구들께서

흠이 없고 순결한 신앙을 갖게 하옵소서.

세상 속에서 별처럼 빛나는 축복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3.22 이-메일 목회서신)

소망을 꼭 붙들고…

좋은 아침입니다.

1.

세상을 보는 바라보는 관점을 안경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어떤 색깔의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느냐에 따라서 세상이 달리 보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세상은 그대로인데

눈앞에 있는 안경색깔이 바뀌면서

세상의 모습이 각기 다르게 보이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는가는 무척 중요합니다.

그 가운데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부정적인 관점, 어두운 곳을 먼저 보다가

긍정적인 면 또는 밝은 곳을 놓치는 경우입니다.

요즘 세상은 말 그대로 뒤죽박죽입니다.

너무 혼란스럽고 복잡해서

어떤 한 가지로 정리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도 제 각각인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는 수십가지의 또 다른 내가 살고 있는 듯 합니다.

어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것이 내가 맞는지 깜짝 놀랄 정도의

또 다른 내가 우리 안에 살고 있어서 당황스러울 때가 꽤 많습니다.

그때도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못난이, 실패자, 낙오자로 바라볼 수도 있지만,

다른 면으로 보면, 정직한 사람, 소신있는 사람,

꿋꿋한 사람으로 자신을 치켜세울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관점의 차이입니다.

어떤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고

자신을 바라보는지에 대한 결과들입니다.

2.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세상의 영향을 받고

여전히 예수님을 믿기 전의 안경이 신앙의 안경을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삶이 어려워지면

어둡고 절망적인 면을 먼저 보게 마련입니다.

그때 우리가 꼭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소망이란 단어입니다.

믿음은 소망으로 이어질 때 힘이 있습니다.

아니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소망을 잃지 않도록 붙잡아 줍니다.

목사인 저도 힘이 들고

때로는 낙심이 될 때가 있습니다.

제 자신에 대한 실망감이 밀려오기도 합니다.

그때마다 묵상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소망 하나님이 모든 기쁨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 ( 15:13)

Charles Swindoll목사님의 예화집에

다음과 같은 글이 들어 있습니다.

Someone has said, “We can live forty days without food, eight days without water, four minute without air, But only a few second without hope.

소망을 꼭 붙들고 오늘 하루를 시작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하시고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잃지 않게 하옵소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삶 속에 소망이 넘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3.15 메일 목회서신)

보혈을 지나

좋은 아침입니다.

1.

어느덧 사순절 한 가운데로 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결국에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처럼 사순절은

예수님의 생애와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깊이 묵상하면서

우리들 신앙의 옷깃을 여미고

일년 가운데 10분의 1을 하나님께 드리는 귀한 시간입니다.

사순절을 맞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제목으로

연속해서 설교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다섯 번의 설교에 모두 담을 수 없습니다.

부활에 대한 말씀도 나누지 못하고 넘어갈 정도입니다.

한 번의 설교를 통해서

복음의 능력이 우리 성도님들과 교회 안에 깊이 임하는 것도

어쩌면 목사의 꿈일 것입니다.

그래도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설교 제목만 생각해도

은혜가 되고 가슴이 벅차 오릅니다.

여러 가지 이론들과 행사들이 난무하는 요즘 교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순전한 복음을

참빛 교회 식구들과 나눌 수 있는 것만도 감사할 뿐입니다.

2.

지난 주일날은 보혈을 지나라는 찬양을 함께 불렀습니다.

보혈 (寶血) – 한자 뜻 그대로 보화처럼 귀한 피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대신해서

피를 흘려 주셨기에 그 보혈의 공로로

우리가 의롭게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보혈입니다.

구약성경에 의하면 피는 생명의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피 흘리신 것은

우리 때문에 그 생명을 버리신 것을 뜻합니다.

그 피로 우리가 생명을 얻었습니다.

또한 구약시대에는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 짐승의 피로 희생제사를 드렸습니다.

피의 제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필수적인 절차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이처럼 구약성경과 연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들은 더 이상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 한 번으로

죄사함의 은혜가 영원히 [영단번/once and for all] 임했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가 참 크고 귀합니다.

때로는 너무 커서,

아니 이 은혜가 실제 우리들 세상살이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것 같아서

무심코 지나가기 쉽습니다.

보혈을 지나서

아버지 품으로 갈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순절 한 가운데를 지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깊이 묵상하고 맛보기 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순수한 신앙을 회복하기 원합니다.

지난 주에 불렀던 찬양 보혈을 지나를 부르면서

오늘 하루를 시작하시면 어떠실까요?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보혈을 지나 아버지 품으로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한걸음씩 나가네

존귀한 주 보혈이 내 영을 새롭게 하네

존귀한 주 보혈이 내 영을 새롭게 하네. 아멘

하나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 교회와

모든 성도들 한 가운데 자리잡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3.8 메일 목회서신)

“강영우 박사 이야기”

좋은 아침입니다.

지난 수요일과 목요일은 정신 없이 바빴습니다.

어제는 청년들과 성경공부를 하고 집에 와서

그냥 잠자리에 들어서 이제 목요서신을 보냅니다.

제 30년 지기 친구인 국민일보 이태형 기자가

엊그제 강영우 박사님에 대한 글을 썼기에

오늘은 그것을 나누려고 합니다.

강영우 박사님이야 뭐- 말이 필요 없으신 대단하신 분이지만

마지막 가시는 길이 더욱 아름답고 존경스러워서

저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저런 신앙의 선배가 계시기에

구원의 기쁨과 하늘의 소망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고

이 아침에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또 다시 새 달을 맞이했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사순절 기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참빛 교회 식구들 그리고 우리 모두의 신앙과 삶이

더욱 깊어 지고 높아지기를 기도하겠습니다.

하목사 올림

강영우 박사 이야기

강영우 박사가 췌장암으로 시한부 삶을 살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진 지난해 말, 익명의 한 분으로부터 내게 전화가 왔다. “저, 강 박사님 연락처 좀 알 수 있을까요?” “아니, 왜 그러시죠?” “강 박사님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부족하지만 강 박사님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어서요.” “어떤 방법이지요? 임상경험이 있습니까?” “아니요. 아직 한번도 써 보지 않았습니다. 다만 어차피 시한부라면 이 방법이라도 해 보면 좋을듯 해서요….”

그 분에게 연락처를 알려 주지 않았다. 아무리 강 박사가 힘겨운 상태지만 한 번도 써 보지 않은 방법을시도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났다. 지난 23일 그 분으로부터 다시 전화가 왔다. 자신이 교장이라고 밝히면서 강 박사 연락처를 알려 달라고 청했다. 진정성이 느껴졌다. 다음날 연락드리겠다고약속했다. 24일 오전, 강 박사 소천 소식이 뉴스를 통해 흘러 나왔다.

나는 강 박사가 췌장암 진단 받기 한 달여 전 그와 부인 석은옥 여사를 서울 모 호텔에서 만나 깊은 이야기를 나눴었다. 나로서는 강 박사와 가진 처음이자, 마지막 인터뷰였다. 강 박사는 키는 작았지만 맑고깨끗한 얼굴의 소유자였다. 병색은 하나도 없었다. 속으로 ‘어떻게 하면 저렇게 곱게 늙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을 정도였다. 그래서 강 박사의 췌장암 발병과 연이은 소천 소식은 나에게도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의 유고집을 준비 중인 두란노 관계자에 따르면 강 박사 발병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강 박사를 살리기위해서 여러 제안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강 박사는 모든 제안을 거절하고 집에서 마지막 인생 마무리를했다. 강 박사는 절대 긍정의 사람이었다. 어떤 상황도 긍정으로 만든 긍정의 연금술사 였다. 그는 내게말했다. “실패의 순간이 인생 최대 행운의 순간일 수 있습니다. 저는 쓰레기 더미에서 피어난 장미꽃 이었습니다. 기적이지요. 인생에는 분명 무수한 기적이 있습니다.”

그런 긍정의 사람, 강 박사가 어찌 췌장암의 공격은 그대로 순응하면서 받았을까? 그것이 나로서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았다. 불사조처럼 일어나서 다시 “우리에게 분명 기적이 있습니다. 저를 보세요!”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 강 박사의 지난 인생과 걸맞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내 강 박사가 저항하지 않고 주어진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더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가 죽음을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은 이 땅에서의 삶을 충만하게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주 안에서후회 없는 인생을 살았기에 췌장암이 다가 왔을 때, “그래, 여기까지”라면서 담담히 받아들였던 것이 아닐까 싶다. ‘죽음 너머의 더 좋은 일’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삶의 태도리라.

그와 만났을 때, 감사로 시작하고 감사로 끝을 맺었다. “오직, 감사할 뿐입니다,” 감사와 은혜의 사람 강영우 박사. 68년, 잠시 살았던 이 땅의 옷을 벗고 지금 주님과 함께 거하리라.

이태형 선임기자 thlee@kmib.co.kr

고난중의 소망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목요서신은

새벽기도회와 관련된 말씀을 많이 쓰게 되는군요.

은근히 새벽기도회에 나오시라는 압력일까요?

(esp. 젊은이들이여 새벽을 깨웁시다!)

예레미야서를 모두 끝내고

예레미야 애가서를 이번 주에 시작했습니다.

애가(lamentation)은 “슬프다”는 말로 시작되듯이

예루살렘이 멸망한 것을 두고 슬픔의 노래를 기록한 것입니다.

심하게 말하면 “조가”라는 말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 애가가

슬픔의 노래에만 머무르는 것은 아닙니다.

애가 한 가운데인 애가서 3장에

“소망”의 말씀이 나오기때문입니다.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심으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애가 3:19-22)

Remember my affliction and my wanderings, the wormwood and the gall! My soul continually remembers it and is bowed down within me. But this I call to mind, and therefore I have hope: The steadfast love of the LORD never ceases; his mercies never come to an end. (Lam 3:19-22)

2.

예레미야 애가 3장은

제 감신대학원 졸업논문 본문입니다.

(서른일곱 살의 늦깎이 신학생이 논문상을 받고 졸업했었네요^^)

새벽기도회를 준비하면서

그때 논문 파일을 열어 보았습니다.

긴 논문이었지만 그 중의 한 문단을 옮겨왔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희망과 절망의 양극단으로 놓고 우리의 삶을 저울질 한다면 대부분 절망과 고통으로 기우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마주대하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인생의 경륜이나 환경을 막론하고 아픔이 있고 탄식이 있다. 아니 고통이 없는 인생은 마치 진공 속의 삶과 같아서 어떤 가치도 의미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삶은 고통과 더불어 사는 인생이요 우리의 현실은 아무리 후한 점수를 주어도 형극의 길임에 틀림이 없다. 고통의 문제는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이다. 민족도 국가도 그들이 어떤 역사를 갖고 있든지 고난이 없는 공동체는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의 현실은 고통과 더불어 살면서 고통 저 너머의 희망을 찾아 떠나는 순례의 길 아닐까? –하시용, 감신대 석사학위논문(1998), “예레미야 애가 3장의 해석학적 재고찰”에서-

그렇습니다.

고통 없이 살아가는 인생은 없습니다.

고통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신실하심을 체험하는 것이 중요할 뿐입니다.

아침마다 새롭게 임하시는

주님의 성실하심이

참빛 교회 식구들 위에 그대로 임하길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하루도

고통 저 너머에 숨겨진 희망을 찾아 떠나는

순례길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2.23 이-메일 목회서신)

바룩

좋은 아침입니다.

1.

새벽기도회에서는

예레미야서를 한 장씩 읽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예언서이다 보니

지루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그렇지만 중간 중간에

반짝 반짝 빛나는 주옥 같은 말씀과

하나님께서 숨겨두신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2주 전에 소개했던

에벳멜렉도 그 중에 한 명이었습니다.

다섯 구절 밖에 되지 않는 예레미야 45장에

또 한 명의 귀한 인물이 나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을 받아 적었던

바룩이라는 사람입니다.

바룩의 이름 뜻은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의 인생은 일찌감치

고난에 휩싸였습니다.

어려움에 슬픔까지 더했습니다.

나름대로 추측해보면,

바룩의 아버지는 그를 낳자마자 돌아가셨을 수도 있습니다.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살았는데

어느 날 홀어머니 마저 세상을 떠났다면

그것은 바룩에서 고통을 넘어선 커다란 슬픔입니다.

제가 예를 들었지만 성경이 암시하는 것은

이것보다 훨씬 더 큰 고난과 슬픔입니다.

그래서 바룩은 탄식했고, 평안을 잃어버렸고

결국 탈진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이 바룩의 초년 고생이요 슬픔이었습니다.

바룩은 생활력이 강했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든 자신의 인생을 헤쳐나가기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거역한 백성들을

심판하기로 결정하셨기에

바룩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게 생겼습니다.

네가 너를 위하여 대사를 찾느냐?

그것을 찾지 말라.

보라 내가 모든 육체에 재난을 내리리라. (예레미야 45:5)

And do you seek great things for yourself? Seek them not, for behold, I am bringing disaster upon all flesh.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바룩의 삶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바룩만을 위한 말씀을 주고 계십니다.

그러나 너 만은 내가 보호하여,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의 목숨만은 건져주겠다. 나 주의 말이다. (예레미야 45:5)

But I will give you your life as a prize of war in all places to which you may go.

2.

우리들의 인생길이 생각처럼

힘차게 펼쳐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바룩처럼 축복을 받을 사람으로 시작했지만

인생길이 고난에 슬픔이 더해서

지치고 힘겨울 수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들이 순간순간 기억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보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를 보호하시고

구원하실 계획을 갖고 계시다는 믿음입니다.

온 세상이 죄를 지어서 멸망하게 되지만

하나님께서는 바룩을 구해내십니다.

그가 어디로 가든지

그의 가는 모든 길에서

하나님께서 바룩의 구원자가 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바룩에게 임하신

하나님 구원의 은혜가

참빛 교회 식구들 위에 임하길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하루

참빛 교회 식구들의 가는 모든 길 위에

주님의 생명이 임하길 바랍니다.

하나님,

어려운 세상 길을 걸어가는

주님의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생명을 더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2.16 이-메일 목회서신)

연약함

좋은 아침입니다.

어젯밤

청년부 성경공부를 하고 집에 와서

목요서신을 쓰려는데

큰 아이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둘째가 친구 집 계단에서 넘어졌는데

그만 어깨가 또 빠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왼쪽 어깨입니다.

오른 쪽 어깨는 이미 세 번이나 빠져서

의사가 수술을 권할 정도였는데

왼쪽 어깨마저 처음으로 빠졌으니

큰 아이가 데리고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고 응급조치를 했습니다.

어깨 탈골(dislocation)

아주 심각한 일은 아닙니다.

흔히 있는 일이고

운동경기를 하다가도

자기 스스로 어깨를 맞추는 선수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탈골이 되면 통증이 보통이 아닙니다.

두 어깨 모두 탈골이 되었으니

앞으로 운동은 물론 무거운 것을 드는 것까지

실생활에서도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별 것 아닐 수도 있지만

부모로서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그러면서 떠오르는 말씀이

고린도후서 12 9절입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네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하신지라. 그러므로 내가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But he said to me “My grace is sufficient for you, for my power is made perfect in weakness.” Therefore I will boast all the more gladly about my weakness, so that Christ’s power may rest on me.

우리들은 매우 연약합니다.

넘어졌을 뿐인데 어깨가 탈골될 만큼 육신도 연약하고,

말 한마디에도 마음이 상하고

힘겨워하는 우리의 마음도 질그릇처럼 연약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신앙도 예외가 아니어서

염려하고 의심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자신의 연약함을 자랑합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의 연약함에 임하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을 하나님 편에서 읽으면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연약한 곳마다 찾아오셔서 그 곳에 능력을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실제적으로 느끼도록 도와주시려는 배려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은

하나님의 능력이 들어오는 입구(entrance)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연약함을 자랑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을 받아들일 입구가 여럿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 모두의 연약함 위에 임할 줄 믿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2.9 메일 목회서신)

에벳멜렉

좋은 아침입니다.

1.

군중 심리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들은 대다수의 의견을 따라서 행동합니다.

심지어 잘못된 일이라도

대중의 뜻이면 그것이 올바른 일로 둔갑할 때도 있습니다.

애꾸눈만 사는 원숭이 마을에 가면

두 눈을 가진 원숭이가 바보취급을 받고

특이한 원숭이로 왕따를 당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일 수도 있습니다.

요즘 새벽기도회에서 예레미야서를 한 장씩 살펴보고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예레미야가 마치

바보 또는 죄인취급을 받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에게 잡혀서

진흙 구덩이에 던져지고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까지 이릅니다.

사람들은 예레미야의 예언을 듣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평화와 형통을 위치는

가짜 예언자들의 말에 매료되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은 것이 아니라

자기가 듣고 싶은 말,

잠시라도 위안이 되는 말을 취사선택해서 들은 것입니다.

2.

모든 백성들이 치우쳐서

예레미야를 죽리려고 달려들 때,

에벳멜렉이라는 사람이 왕 앞에서 나가서 바른말을 합니다.:

저 사람들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행한 모든 일은 악하니이다 (예례미야 38:9)

에벳멜렉은 구스, 즉 이디오피아 출신이었으니

피부색깔이 검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왕 앞에 나갔고

혼자서 예레미야 편을 들었습니다.

쉽지 않은 일을 행한 것입니다.

덕분에 예레미야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에벳 멜렉은 39장에서 다시 한번 등장합니다.

그때는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함락한 이후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고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지만

하나님께서 에벳멜렉을 구원해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내가 반드시 너를 구원할 것인즉

네가 칼에 죽지 아니하고 네가 노략물 같이 네 목숨을 얻을 것이니

이는 네가 나를 믿었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시더라 (예레미야 39:18)

For I will surely save you, and you shall not fall by the sword, but you shall have your life as a prize of war, because you have put your trust in me, declares the LORD.

하나님께서 에벳멜렉이

신앙양심을 지키고,

용기를 내어서 하나님의 사람 예레미야를 변호한 것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이 멸망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3.

모든 사람들이 한 곳으로 치우칠 때도

그리스도인들은 의로운 편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신앙양심을 지켜야 합니다.

지금 우리 시대에도

에벳멜렉과 같은 사람이 꼭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고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진실되고 바른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목하시고

아무리 위험한 순간이 닥쳐도

하나님의 구원을 보장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신앙이 에벳멜렉처럼

바른 길에 서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2.2 이-메일 목회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