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좋은 아침입니다.

 

1.

올해 성경 통독은

구약성경 전도서에 와 있습니다.

 

전도서는 구약성경의 성문서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아가서)에 속하고,

전통적으로 부귀영화를 모두 누린 솔로몬이

노년에 기록한 말씀이라고 전해집니다.

 

전도서라는 명칭은 1장 1절의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에서 왔습니다.

전도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코헬렛(Qoheleth)”인데

“모임”이라는 뜻도 있기에 혹자는 “집회서”라고 부릅니다.

전도서의 영어표현 “에클레시아스테스(Ecclesiastes)”도 여기에 속합니다.

 

이처럼 전도서라는 표현 속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 모여서 솔로몬 왕의 설교를 듣거나,

훗날 백성들이 모여서 솔로몬으로부터 전해진

지혜의 말씀을 듣고 있는 모습이 담겨있습니다.

 

2.

전도서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1:2)로 시작합니다.

이 말씀을 히브리어 그대로 읽으면 “하벨 하발림/ 하벨 하발림/하콜 하벨”입니다.

 

헛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헤벨”의 문자적 의미는

“수증기, 안개, 한숨, 가치 없음, 헛됨”입니다.

부귀영화를 모두 누린 솔로몬이 노년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니

인생이 별것 아니라는 깨달음입니다.

 

그렇다고 지나친 비관주의는 아닙니다.

헛되다는 것은 플러스도 마이너스도 아닌 “제로(0)”입니다.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잠30:8)라는

아굴의 잠언을 떠올리면 전도서의 주제가  쉽게 이해됩니다.

 

세상일에 지나치게 집착할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세상을 등질 필요도 없고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마음껏 누리는 것이

전도서가 알려주는 삶의 지혜입니다.

 

3.

이번 주 성경 통독에 해당하는 전도서 6장에도

흥미로운 구절이 등장합니다.

 

어떤 사람이 부와 재산과 명예를 다 얻었는데

당사자가 아닌 엉뚱한 사람이 그것을 즐깁니다.

그러니 세상일에 지나치게 집착할 이유가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먹어도 식욕을 채울 수 없습니다.

먹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욕심이 그렇습니다.

 

지혜로운 자나 어리석은 자나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니 현재 가진 것에 만족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잠언과 마찬가지로 언어 습관도 지적합니다.

말을 많이 하면 빈말이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4.

전도서는 우리에게 삶의 여유를 줍니다.

집착하던 것을 내려놓게 합니다.

 

훗날을 위해서 아등바등 살기보다

<지금 여기>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복에 감사하게 만듭니다.

 

어느새 7월도 훌쩍 지났습니다.

 

전도서 말씀을 기억하면

시간은 빠르게 지나는데 이룬 것이 없다고

행여나 초조해질 것도 아닙니다.

 

참빛 식구들 모두 잘 살고 계십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분복(portion)을 누리고

범사에 감사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사람을 평범하고 단순하게 만드셨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복잡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전도서 7:29)

See, this alone I found, that God made man upright,

but they have sought out many schemes. (Eccl 7:29)

 

하나님 아버지

지금 우리가 있는 곳에서 주님을 만나고

주신 복을 마음껏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7.25이-메일 목회 서신)

돌봄 2

좋은 아침입니다.

 

1.

<돌보는 교회>라는 올해 교회 표어에 맞춰서

다시 한번 돌봄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1월에는 “우리의 돌봄”에 대해서 살펴보았다면

이번 달에는 “하나님의 돌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 돌봄을 실천하면 자칫 지치기 쉽습니다.

우선 하나님의 돌봄을 경험하고 그것을 이웃과 나누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돌봄의 과정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바탕으로

용서의 길을 가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2.

지난 1월 목요 서신에서 나눴던

헨리 나우웬의 글을 다시 인용합니다.

헨리 나우웬은 <돌봄의 영성>에서 다음과 같이 알려줍니다.

 

우리는 이웃을 돌보는 사람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이다.

이 정체성을 주장할수록 점점 더 깨닫는 사실이 있다.

사랑의 창조주가 인간 가족의 모든 구성원을 조건 없이 귀히 여기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제시하려는 관점은 예수님의 이 말씀에 기초한 것이다.

“너희 아버지가 긍휼히 여기시는 것 같이 너희도 긍휼히 여기라”(눅6:36)

 

나는 긍휼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서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란다고 굳게 믿는다.

이것은 가볍게 하는 말이 아니다. 경청, 심방, 독서, 글쓰기 등을 통해

오랜 세월 다른 사람들을 섬긴 끝에 나온 결론이다.

그동안 나는 숱한 경험에 동참해야 했고, 그 중에는 고통스러운 일도 많았다.

 

돌보는 사역을 그만두고 더 쉬운 일을 해볼까 생각한 순간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유혹에 부딪힐 때마다 깨달은 게 있다.

쉬운 일을 욕망할 때마다 예수님을 따라 살기로 한

내 헌신의 가치를 의심하고 있었다. (돌봄의 영성, 46-47쪽)

 

돌봄이 쉽지 않아서 때로는 대충 넘어가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두고 헨리 나우웬은 신앙이 식었다는 표시라고 일러줍니다.

 

3.

7월 한 달 동안

하나님의 돌봄에 대한 말씀을 나누면서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 긍휼(compassion), 돌보심을

아주 깊이 경험하길 원합니다.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손길이

얼마나 세심하고, 무조건적이고 때로는 예상을 뒤엎는지

몸소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활짝 열고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맞이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이지요.

하나님과 따로 시간을 갖는 것도 필요합니다.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다면 더없이 좋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기 원합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기 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크고 작은 돌보심을 경험하기 원합니다.

그 힘과 은혜로 돌봄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교회 안의 돌봄을 말씀드리면서 외로워 보이거나, 힘들어 보이시는

참빛 식구들을 챙기시길 부탁드렸습니다.

서로 세심하게 챙기고 실제로 돌보는 참빛 공동체가 되길 바랍니다.

 

너희 아버지가 긍휼히 여기시는 것 같이

너희도 긍휼히 여기라 (눅6:36)

Be merciful, even as your Father is merciful. (Psalms 6:36)

 

하나님 아버지

우리 교회가 돌봄의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7.18이-메일 목회 서신)

사모함

좋은 아침입니다.

 

1.

성경 통독이

시편을 지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듯이

시편 말씀은 우리 신앙에 종합 비타민과 같습니다.

 

제가 신앙을

<머리/교리 또는 앎Doctrine>

<가슴/체험 Experience>

<손과 발/생활 Practice>로 설명하는데,

시편 말씀 속에는 이 세 가지 요소가 모두 들어있습니다.

 

지혜를 알려주는 시편이 있습니다.

고난 가운데 탄식함으로 주님께 나가는 탄식 시편,

온몸으로 주님을 찬양하며 주의 일을 하겠다는 결단의 말씀도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가 막힐 때

시편을 갖고 기도할 수 있고,

찬양하고 싶을 때도 시편으로 찬양합니다.

시편 속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지혜도 얻습니다.

 

2.

시편 말씀 가운데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시편42:1)는 구절을 종종 묵상합니다.

 

“갈급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라그>는

목이 말라서 죽을 것 같은 사슴이

살기 위해서 헐떡거리며 물을 찾아다니는 모습을 뜻합니다.

 

물 한 방울이 그립습니다.

아주 조금이라도 목을 축이고 싶습니다.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오직 물만 생각하고 물이 그립습니다.

 

시편 기자는

사슴이 헐떡거리며 물을 찾는 것과

자신이 하나님을 찾는 것에 일치시킵니다.

그토록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3.

우리 삶이 참 바쁩니다.

중요하고 다급한 일들에 쫓겨 삽니다.

 

세상에 살다 보면 추구하고 찾아 나서야 할 것들도 많습니다.

때로는 당장 필요한 의식주부터 문제가 됩니다.

그러니 헐떡거리며 찾아 나설 수 밖에요.

그렇게 우리의 힘을 모두 소진하니 하나님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책임지실 하나님을 믿습니다.

가외의 것(extra-), 즉 욕심을 버리고, 경쟁심에서 한 발짝만 옆으로 비켜서면

하나님을 찾고 사모할 여유가 생깁니다.

 

요즘 시대에 우리가 헐레벌떡 찾는 것들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일용할 양식의 범주를 뛰어넘는 욕심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헐떡거리며 찾기 원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급함이 우리 안에서 다시 시작되길 바랍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돌보시고, 책임지실 하나님을 향한 갈급함이

우리가 추구할 생명길입니다.

이것을 신앙 안에서 체험하기 원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과 사모함이 실제로 힘이 있고

우리 삶을 참되고 선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것을 간증할 만큼 경험하기 원합니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심이로다 (시편 107:9)

For he satisfies the longing soul,

and the hungry soul he fills with good things.(Psalms 107:9)

 

하나님 아버지

당신을 향한

간절함, 갈급함, 갈망함을 회복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7.11이-메일 목회 서신)

독립 기념일에

좋은 아침입니다.

 

1.

오늘은 243번째 맞는

미국의 독립 기념일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독립 기념일(4th July)은

불꽃놀이를 하는 날,

여기저기서 큰 세일을 하는 날,

무엇보다 하루를 쉬는 휴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독립 기념일은 말 그대로

미국이 영국의 통치에서 독립을 선언한 날입니다.

 

영국은 미국에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고

우리에게도 익숙한 동인도 회사의 결손을 미국과의 무역으로 보충하고,

그러면서도 미국 대표단이 영국 의회에 참가할 기회를 차단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미국은 자치의회를 구성해서

1776년 7월 2일 필라델피아에 모여서 동부 13개 주의 독립을 만장일치로 결의하고

이틀 후인 7월 4일에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그 후로도 독립전쟁은 계속되었습니다.

버지니아 요크타운에서 영국에 완전히 승리하고(1781년)

1783년 파리에서 조약을 맺음으로 완전한 독립이 가능해졌습니다.

 

2.

토머스 제퍼슨을 비롯한 5인이 작성한

미국의 독립선언서에는

영국이 미국에 가한 학정 등을 조목조목 고발하면서 독립의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독립 선언서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은 서문의 첫 문장입니다:

“We hold these truths to be self-evident,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 that they are endowed by their Creator with certain unalienable Rights, that among these are Life, Liberty and the pursuit of Happiness.”

우리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창조되었고, 창조주로부터 양도할 수 없는 확실한 권리를 부여 받았으며, 그 안에는 삶, 자유 및 행복의 추구가 포함됨을 자명한 진리로 인정합니다.

 

독립선언서에는

영국을 고발하는 것들이 많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영국이 미국으로의 이민을 억제한 것입니다.

요즘 트럼프 행정부의 이민규제안이 극성인데

미국의 건국 정신에 기초해서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뒷얘기로

영국에 대한 가혹한 비판과 노예제도의 거부를 독립선언서에 포함하려 했지만,

전원 일치의 동의를 얻지 못해서 누락시켰다는 기사도 있습니다.

노예제도는 그로부터 87년 후인 1863년 1월 1일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습니다.

 

3.

독립 기념일을 맞아서

우리가 살고있는 미국을 세웠던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이 갖고 있던 정신을 돌아봅니다.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만큼 성경적인 건국이념은 아니지만

그 근저에 기독교 정신이 깔려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근거를

창조주 하나님에서 찾은 것이 대표적입니다.

 

독립 기념일을 맞으면서

모든 사람이 공평하고 평화롭고 조화를 이루며

더불어 사는 세상이 되길 바랍니다.

 

휴일과 축제 분위기에 취할 것이 아니라

미국 독립의 처음 정신과 선조들의 투쟁을 되새겨 보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미국은 물론 온 세상에 강물처럼 흘러 넘치길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7)

So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he created him;

male and female he created them. (Gen 1:27)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사는 미국 땅이

실제로 하나님 마음에 합한 모습을 갖추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7.4이-메일 목회 서신)

 

 

 

 

시편묵상

좋은 아침입니다.

 

1.

올해 성경 통독이

시편을 지나고 있습니다.

 

150편으로 이뤄진

시편은 성경의 한 가운데에 위치합니다.

모세오경을 본떠서

다섯 권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하루 평균 석 장씩 읽는 성경 통독에서는

두 달여 시편을 읽는 동안

뒤처진 분량을 따라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2.

시편은 구약성경에서 욥기 다음에 위치하고

욥기, 잠언, 전도서, 아가서와 함께 성문서에 속합니다.

 

욥기는 하나님 법칙대로 세상이 돌아가지 않고

의인이 고난 받는 세상에 대한 고발이고 고민입니다.

얼기설기, 좌충우돌, 뒤죽박죽의 세상을 잘 반영합니다.

 

시편은 그래도 하나님을 예배해야 함을 깨우칩니다.

시편에는 말씀, 기도, 찬양, 지혜가 골고루 들어있고

각 장의 분량이 짧아서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잠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임을 선포하고

가정, 왕궁, 세상에서 살아가는 하나님 백성의 삶을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알려줍니다.

 

전도서는 삶의 좌표를 끝(죽음)에 갖다 놓고

어떻게 사는 것이 현명한 인생인지 알려줍니다.

세상과 인생 자체에 지나칠 정도로 큰 미련을 갖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분복(portion)에 감사하며

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 무엇보다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할 것을 요청합니다.

 

아가서는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과의 사랑 노래입니다.

연인의 깊고 달콤한 사랑처럼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렇게 친밀해야 함을 알려줍니다.

 

3.

시편에는 다윗의 시가 많아서

혹자는 “다윗 오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말 그대로 희로애락을 경험했던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삶과 연결해서 노래하는 시편들이 절반에 가깝습니다.

 

다윗의 탄식은 이스라엘은 물론 우리의 탄식입니다.

“언제까지입니까(How long)?”

“왜 나입니까 (Why me)? “도와주세요” 등

침묵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다윗과 시편의 저자는 탄식하고 주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감사 시편에서는

무조건 두루뭉슬하게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부르고, 감사의 이유를 구체적으로 알리고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지혜 시편에서는

하나님 백성의 삶을 조목조목 알려줍니다.

시편의 첫 번째 말씀이 지혜 시편인 것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밖에도 메시아 예수님이 오실 것을 예고하고

감사와 더불어 호흡이 있는 자들은 다 나와서

목소리와 악기로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부탁합니다.

 

4.

기도가 힘들 때는 시편 말씀을 읽으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찬양하고 싶을 때도 시편 말씀을 갖고 찬양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시편 말씀에 곡을 붙인 찬양들이 많습니다.

 

이처럼 시편 말씀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예배 안내서입니다.

 

시편은

신앙의 깊이를 더하려는

참빛 식구들께서 꼭 가까이할 하나님 말씀입니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라 (시편 73:25-26)

Whom have I in heaven but you? And there is nothing on earth that I desire besides you.

My flesh and my heart may fail, but God is the strength of my heart and my portion forever.(Ps 73:25-26)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말씀을 생명의 양식으로 삼게 하시고

시편 말씀의 은혜에 깊이 잠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6. 27이-메일 목회 서신)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좋은 아침입니다.

 

1.

우버에서는 2023년에

날아다니는 택시를 운행하겠다면서

6월 초 그 모습을 공개했습니다.

 

여러 가지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있겠지만

이러다가 영화 스타트렉에서 보던 세상이

현실이 되는 것은 아닌지 의아해집니다.

 

때로는 인류문명이 적당한 속도로 발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고

땅따먹기하면서 놀던 옛날도 그립습니다.

 

이토록 빠르게 발전하는 세상에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때때로 고민이 깊어집니다.

 

우리가 믿는 신앙이

구식 취급 받을 것 같은 위기의식도 듭니다.

 

2.

예전에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기 위해서

세상에 관심을 가져야 하니

한 손에 성경을, 다른 손에는 신문을 들고 있으라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때 생각을 하면서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우리 몸 어디에 신앙을 간직하는 것이 좋을지

저 혼자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약 한 손에 신앙을 들고 다른 손에 세상일을 쥐고 살면

워낙 빨리 변하는 세상 때문에

신앙을 들고 있는 손이 뒤에 쳐질 수 있습니다.

 

신앙을 한쪽 발에 두고 산다면,

세상을 쫓아가려는 다른 쪽 발에 비해서

신앙을 간직한 발이 따라가지 못하면 큰 부상을 당할 수 있습니다.

 

신앙을 머리에 둔다면 어떨까요?

자칫 세상을 쫓아가려다가 신앙을 제쳐 놓거나

신앙을 생각하다가 역시 세상에서 뒤처질 것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 몸에서 신앙을 어디에 간직하는 것이 제일 좋을까요?

우리 각자의 “심장(heart)”에 두는 것이 제일 좋아 보입니다.

 

우리 몸에서 심장은 일정하게 박동합니다.

성경에서도 심장은 생명을 간직한 곳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 신앙을 심장에 간직하면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영향을 받지 않고

일정한 리듬을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심장에 우리의 신앙을 간직한다면

하나님과 이웃을 뜨겁게 사랑할 것입니다.

 

3.

우리는 정말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살아갑니다.

세상에 뒤처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밀려올 정도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빠르게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사랑”입니다.

생명보다 귀한 것도 없습니다.

 

사랑, 생명, 그리고 신앙이 한꺼번에 만나는

우리 마음 한가운데 주님을 모시기 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세상에 끌려가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자칫 세상에 빠져들어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챙기지 못하는 것도 조심할 일입니다.

 

행여나 문명의 발달로 인해서 각박해지기 쉬운 세상이지만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서로 사랑하기 원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빌1:8)

For God is my witness, how I yearn for you all with the affection of Christ Jesus.(Phil 1:8)

 

하나님 아버지

세상이 아무리 변하고 빠르게 발전해도

주님 믿는 신앙이 우리의 생명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6. 20 이-메일 목회 서신)

원팀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며칠은 너무 더웠습니다.

샌프란과 베이 지역은 초가을에 찾아오는

인디언 썸머를 제외하고는 그리 덥지 않습니다.

우리 몸이 선선한 날씨에 적응되다 보니

이상 기온이 닥치면 힘도 쭉 빠지고 금세 지칩니다.

 

연로하신 권사님들과 아이들을 염려했는데

오늘부터 정상 기온을 되찾는 다니 안심이 됩니다.

 

이렇게 찌는 더위에도

청소년 축구 대표팀의 결승 진출 소식에

마음이 시원해졌습니다.

 

한국 축구팀이 세계 대회에서

결승에 오른 것이 역사상 최초랍니다.

 

2002년 서울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4강에 올랐지만, 결승에 진출하지 못했습니다.

1983년 청소년 축구팀 역시 4강에 진출한 것이 최고의 성적이었는데

이번에 드디어 결승에 올라서 우승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2.

한국 청소년팀을 지휘하는 정정용 감독은

유명한 선수가 아니었습니다.

20대 후반에 부상을 입어서 일찍이 선수 생활을 포기하고

지도자의 길을 걸은 분입니다.

 

지난 10년여

한국의 유소년 대표팀을 맡아서 지도력을 인정받았습니다.

선수들이 “선생님”이라고 부른다는 기사를 읽고

이분의 성품을 알 수 있었습니다.

 

경기하는 동안에도 적절히 전술을 바꾸고,

모든 선수를 골고루 기용해서 기회를 주고

선수를 믿고 경기에 임하는 모습이 존경스러웠습니다.

 

무엇보다 원팀(one team)을 강조하는데,

선수들이 똘똘 뭉쳐서 감독의 표현 그대로

“꾸역꾸역” 결승까지 올라왔습니다.

 

3.

“하나 됨”은

요한복음 17장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에도 등장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이듯이

세상에 남아서 사도의 직분을 감당할

제자들이 하나가 되길 기도하셨습니다.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가 되고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가 되었을 때

예상하지 않았던 힘도 생기고

한국 청소년 축구팀처럼 큰일을 해낼 수 있습니다.

 

우리 참빛 식구들도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닮는데 하나가 되기 원합니다.

온전하고 멋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로

한마음으로 결심하고 그 길을 걷기 원합니다.

 

원팀이 된

한국 축구팀의 우승도 기대해 봅니다.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요17:23)

I in them and you in me, that they may become perfectly one,

so that the world may know that you sent me and loved them even as you loved me.(John 17:23)

 

하나님 아버지

참빛 식구들께서 삶의 현장과 교회를 통해서

하나됨의 위력과 아름다움을

경험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6. 13 이-메일 목회 서신)

여호와 하나님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에는 아침마다

예레미야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다윗 왕조가 막을 내리고

예루살렘 성전까지 무너지는 순간에

하나님 말씀을 온몸과 삶으로 외쳤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말씀이 쉽지 않습니다.

북이스라엘이 이미 앗시리아에 멸망했고

이제 남은 남유다마저 바벨론에 무너지는

안타깝고 절망적인 시대에 기록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면서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동원해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셨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다면,

일찍이 다윗에게 약속하신 대로 이스라엘은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2.

이스라엘이 범한 가장 큰 죄는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섬긴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섬긴 우상은

사람이 만든 것이라고 단정짓습니다.

 

나무 기둥으로 신들의 모습을 새기곤 했는데

그것은 산에서 벤 나무이고 기술공이 도구를 사용해서 만든 것입니다.

금과 은으로 장식한 우상들도 있었는데 그것 역시 대장장이들이 만든 것이니

우상을 섬기지도 말고 행여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깨우칩니다(렘10:3-5).

 

반면에, 하나님은 참(진리)되고 살아계신 분입니다.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돌아오길 기다리시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바벨론을 동원하실 정도로 역사를 주관하십니다.

 

3.

어쩌면 우리는 신을 잊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성경에서 알려주는

기독교의 하나님을 외면하고 심지어 부정합니다.

과학이 발달하고 모든 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되길 바라는 시대여서

보이지 않고 실체가 아닌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으니 믿지 않겠답니다.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가 우상을 두고 사람이 만든 것이라고 했듯이

기독교의 하나님도 고대 이스라엘과 초대교회를 거치면서

사람들이 만든 것이라고 봅니다.

 

종교심이 많은 사람이 만들어낸 허구라는 것입니다.

“만들어진 신”이라는 책을 쓴 도킨스나 프로이드같은 분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4.

세상에는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우리가 믿는 하나님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피조물의 관점에서 증명한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입니다.

 

하나님을 사람이 만든 것이라고 단정할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가 조작되었다면, 지난 2천년을 견디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신앙(하나님)에 실체가 있습니다.

과학적으로 증명하기 힘들고, 합리적 추론이 쉽지 않아도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를 믿는 우리입니다.

모든 것을 뛰어넘는 신앙의 신비를 믿습니다.

 

또한, 우리는 지난 한 달 동안

기도에 대한 말씀을 나눴습니다.

 

기도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고 만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입니다.

신앙의 세가지 영역(몸,가슴,손발) 가운데 하나인

가슴으로 하나님을 체험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을 아주 깊이 만나기 원합니다.

우리도 예레미야처럼 하나님을 찬양하기 원합니다.

오직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왕이시라 (렘10:10)

The Lord is the true God; He is the living God and the everlasting King (Jer 10:10)

 

하나님 아버지

참빛 식구들께 진실한 신앙을 주옵소서.

참빛 식구들께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6. 6 이-메일 목회 서신)

레아의 하나님

좋은 아침입니다.

 

1.

어제 수요예배에서는

창세기 29장을 공부했습니다.

 

형 에서를 피해서 하란의 삼촌 집에 도착한 야곱은

삼촌 라반의 큰딸 레아, 작은딸 라헬을 아내로 맞습니다.

14년을 일해준 대가였습니다.

 

야곱은 원래 라헬을 사랑했지만

라반이 야곱을 속이고 큰딸 레아를 먼저 야곱에게 주면서

두 명의 아내를 갖게 된 것입니다.

 

레아는 야곱이 원했던 아내가 아니지요.

야곱은 라헬만 사랑했고 레아를 무시했습니다.

 

레아는 아버지의 주선으로 야곱과 결혼했지만

남편 야곱의 사랑과 관심 밖에 있습니다.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을까요!

 

그때, 하나님께서는 레아를 주목하시고

그가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데 여섯을 낳게 하십니다.

다윗과 예수님의 조상 유다,

거룩한 성직을 감당했던 레위도 레아의 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레아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2.

창세기 29장 마지막에

레아가 낳은 네 명의 아들을 소개하면서

레아의 마음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보여줍니다.

 

첫째 아들 이름이 “르우벤 (보라 아들이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괴로움(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을 아셨으니

이제 남편이 자신을 사랑할 것이랍니다.

 

둘째의 이름이 “시므온(들으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다고 고백합니다.

셋째는 “레위(연합)”인데

아들을 셋이나 낳았으니 드디어 남편이 자신과 합칠 것이랍니다.

그래도 야곱은 매정하게 레아를 외면한 것 같습니다.

 

넷째 “유다(찬송함)”를 낳고는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35절)며

남편이 아니라 하나님께 마음을 돌립니다.

 

레아의 마음과 그의 외로움이 아들의 이름 속에 고스란히 들어있습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아들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을까요?

 

3.

하나님께서는

외롭고, 무엇보다 남편의 사랑에서 소외된 레아를

기억하셨고,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레아 역시 처음에는 남편의 사랑을 그리워하지만

유다를 낳으면서 남편의 사랑을 넘어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네 아들의 이름을 지어가면서

자신은 물론 하나님과 씨름했고

결국에는 남편의 사랑보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수준에 오른 것입니다.

 

올해 우리 교회 표어가 <돌보는 교회>입니다.

연초에 표어에 대한 말씀을 나누면서

주일날 교회에 오면 외로워 보이거나 돌봄이 필요한 성도님들을 위해서

뒷전에서 기도하자고 제안했습니다.

 

6월 새달을 맞으면서 교회 표어도 되새기고

무엇보다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고 돌보기 원합니다.

그것이 레아를 돌보신 하나님 마음이겠지요.

 

때로는 우리 자신이 레아와 같은 심정일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를 돌보시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기 원합니다.

 

레아를 챙기시고 돌보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창 29:35)

This time I will praise the Lord (Gen 29:35)

 

레아를 돌보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사는 세상과 주변에

돌봄이 필요한 분들과 꼭– 함께 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5. 30 이-메일 목회 서신)

갚아줌

좋은 아침입니다.

 

1.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두침침한 것만은 아닙니다.

 

밝은 면보다 어두운 곳이 먼저 눈에 띄고

감사할 것보다 불평할 것이 먼저 생각나고

믿음으로 살기보다 염려와 근심이 앞서기 때문에

세상이 어두워 보일 뿐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빛이 되어서 세상을 밝히고

소금이 되어서 세상을 맑게 만드는 사람들이 훨씬 많습니다.

 

이번주에도

흐뭇한 소식이 있었습니다.

 

남부 조지아 주에 있는

모어 하우스 칼리지 졸업식에서

졸업식 축사를 하던 로버트 스미스라는 기업가가

400명에 달하는 졸업생들의 학자금 빚을 모두 갚아주겠다(wipe-out)고 약속한 것입니다.

 

4천만 달러 정도가 필요한데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사회에 지은 빚을

갚는 심정으로 기꺼이 기부하겠답니다.

 

150년 역사를 가진 모어 하우스 칼리지는

아프리칸 아메리칸 중에서도 남자만 다니는 명문 대학입니다.

지미 카터, 오바마 전 대통령도 이곳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고

오프라 윈프리가 거액의 장학금을 기부한 곳입니다.

 

어제 한국일보에는 이와 관련된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습니다.

발레호에 사는 모어 하우스 한 졸업생이 갖고 있던

16만불의 빚이 사라지게 되었다는 기사였습니다.

그는 홀가분하게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고 기뻐했습니다.

 

모든 빚은 우리를 옥죕니다

삶을 힘겹게 만들고 커다란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그런데 그 빚을 누군가 대신 갚아준다는 것은

말 그대로 “복음(기쁜 소식)”임에 틀림없습니다.

 

2.

성경에서 “구속(redemption)”이라는 말도

누군가 대신 빚을 갚아준다는 뜻입니다.

 

구약성경 룻기에서

나오미와 룻이 지은 빚을

보아스가 대신 갚아주고 룻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구약의 율법에서도

어떤 사람이 빚을 져서 행여나 노예로 팔려 가거나

삶의 터전을 잃을 것 같으면

여유가 있는 가까운 친척이 그의 빚을 대신 갚아줄 것을 추천합니다.

 

구속의 절정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빚을 대신 갚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기셨으니

그 구속의 은혜는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큽니다.

 

3.

엊그제 빚을 갚아주겠다고 약속한 기업가는

은혜를 입은 학생들도

나중에 같은 일(pay it forward)을 했으면 좋겠다고 당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엄청난 빚을 갚아 주셨으니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요?

눈에 보이지 않고 실제로 계산이 되지 않는다고

받은 은혜를 너무 무시하고 사는 것은 아닌지요?

 

예수님의 은혜를 깊이 생각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됨으로 그 은혜를 갚고

어려운 이웃들, 복음이 필요한 이웃들에게 은혜를 전하기 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3:24)

and are justified by his grace as a gift, through the redemption that is in Christ Jesus(Rom 3:24)

 

하나님 아버지,

우리 주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를

깊이 깊이 되새기는 하루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5. 23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