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남북녀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은 평창 올림픽이 막을 올리는 날입니다.

미국의 모든 언론이 “Pyeongchang”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평창이 강원도에 있다는 정도만 알고 있어서

구글에서 확인해 보니 원주와 강릉 사이에 있네요.

 

우리는 경기에 주목하는데

참가하는 국가나 선수들은 입장식에서 자기 나라 국기를

누가 들고 가느냐에 커다란 관심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미국 선수단의 기수선정에 대한 해프닝(?)이 기사화되었습니다.

동계 올림픽에 참가한 8종목의 대표들이 모여서

투표로 기수를 뽑았는데 4:4 동점이 되었고

규정에 따라 동전 던지기로 햄린이라는 여자 “루지(luge)”선수가 선정되었습니다.

 

이번 올림픽으로 은퇴를 계획하고 있던 햄린에게 최고의 행운이 임한 것입니다.

미국 국기를 들고 입장할 햄린을 보기 위해서

부모님과 동생이 평창으로 향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햄린과 경쟁했던 셰니 데이비스라는 스피드스케이팅 선수가

동전 던지기는 뭔가 좋은 방법이 아니고

게다가 2월은 아프리칸 아메리칸을 생각하는

Black history month라고 해시태그를 달아서 트위터에 글을 올린 것입니다.

 

셰니는 2006년 토리노 올림픽에 참가해서

개인 종목에서 금메달을 땄던 최초의 아프리칸 아메리칸이었습니다.

기수로 선정된 햄린은 루지라는 비인기 종목의 백인 선수였고요.

탈락한 셰니는 흑인이고, 햄린이 백인이어서 더욱 이슈가 된 것입니다.

 

투표에서 동점이 나왔으면

화합의 상징으로 둘이 함께 성조기를 들고 입장했으면 하는 생각을 저 혼자 했습니다.

물론 규정이 있으니 그대로 따라야지요.

 

2.

반면, 우리나라 선수들은

Korea라는 국호와 한반도기를 앞세우고

남북이 공동 입장합니다.

 

국제 대회에서 남북이 공동으로 입장하는 것은

2007년 중국에서 열린 동계 아시안 게임이래 11년 만이고

이번 평창 올림픽이 열 번째랍니다.

 

남북이 공동 입장할 때는

남한과 북한에서 각각 남녀 두 명의 기수를 세운답니다.

 

이번 평창 올림픽은 “남남북녀”차례여서

남쪽에서는 남자 봅슬레이 선수가 이미 선정되었고

북한에서는 여자 선수 가운데 한 명이 공동 기수로 나서게 됩니다.

공동 기수를 두고 이런 전통이 있었더니 흐뭇합니다.

 

아무쪼록 조국 대한민국에서 열리는 동계 올림픽이

지나치게 정치에 휘둘리지 않고

온 세계가 스포츠 정신으로 하나가 되며

화합과 평화를 이루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무엇보다 한반도기를 함께 들고 갈

남남북녀 기수의 모습처럼

한반도에 평화가 깃들고

우리의 소원인 “평화” 통일이 이뤄지길 기도합니다.

 

내가 에브라임의 손에 있는 , 요셉과 이스라엘 지파들의 막대기를 가져다가

유다의 막대기에 붙여서 막대기가 되게 한즉 손에서 하나가 되리라 (에스겔 37:19)

Behold, I am about to take the stick of Joseph (that is in the hand of Ephraim) and the tribes of Israel associated with him.

And I will join with it the stick of Judah, and make them one stick, that they may be one in my hand. (Ezekiel 37:19)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과 한반도에 평화가 깃들고

온 민족이 하나가 되는 통일이 속히 오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2.8이-메일 목회 서신)

다림줄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 새벽에는 아모스 선지자가

“다림줄(a plumb line)”환상을 보는 말씀을 읽었습니다.

 

다림줄은

벽을 세우거나 건물을 지을 때,

수평과 수직을 똑바로 맞추기 위해서 위에서 아래로 드리우는

일종의 자(ruler)와 같은 줄을 가리킵니다.

 

예전 한국에 있을 때,

세탁기나 냉장고와 같은 전자기기를 구입하면

수직과 수평을 맞추는 흰색 실이 따라오곤 했는데

그것이 곧 다림줄의 역할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모스 선지자에게

네 가지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첫째와 둘째는 메뚜기와 불로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키겠다는 환상인데

아모스가 간절히 구해서

(잘못은 왕과 지도자들이 범했는데, 메뚜기와 불의 심판은 힘없는 백성들까지 죽게 되니)

하나님의 재앙을 면합니다.

 

세 번째 환상이 다림줄입니다.

다림줄을 들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왕의 행위를 측정하실 참입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은 경제적으로 호황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 틈을 타서 이스라엘 왕과 지도자들은

가난한 백성들을 학대하고 무시했으며

저울을 속이는 등 부정을 저지르면서 자신의 탐욕을 채웠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모두 보고 계셨습니다.

 

왕과 지도자들의 잘못을 낱낱이 세고 계시다가

결국에는 그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 임할 것을

마지막 네 번째 여름 과일 광주리 환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여름 과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끝”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지도자들은 자신의 권력과 부가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고 자신만만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다림줄을 손에 드시고 끝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2.

다림줄 –

일상을 사는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도전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맞게

수평/수직이 맞아야 합니다.

의로운 길을 걷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이 길을 완벽히 걸을 수 없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우리를 의롭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 은혜로 의롭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의 지도와 인도하심으로

끊임없이 의로운 길을 걸어야 합니다.

 

우리 신앙과 삶에 다림줄을 내리기 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바른 삶,

십자가의 은혜에 응답하는 의로운 길을 걷는

오늘 하루 그리고 새달이 되기 원합니다.

 

함께 그 길을 걸어갑시다!

 

다림줄을 가지고 쌓은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아모스 7:7)

Behold, the Lord was standing beside a wall built with a plumb line, with a plumb line in his hand. (Amos 7:7)

 

하나님 아버지,

어그러지고 뒤틀린 세상 속에서

주님의 다림줄을 내리우고

의로운 길을 걷는 참빛 식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2.1이-메일 목회 서신)

서너 가지 죄

좋은 아침입니다.

 

새벽기도회 말씀 읽기는

아모스에 와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있는 12개의 소예언서는

하나의 책으로 묶을 수 읽을 정도로 분량이 적습니다.

하지만 그 내용은 대예언서 못지 않게 거칠고 엄격합니다.

 

선지자 아모스는

남유다 드고아 출신입니다.

양을 치다가 선지자로 부름받았고,

북 이스라엘에 가서 예언활동을 했습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가 통치했는데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번성한 시대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왕을 비롯한 귀족들은 백성들을 약탈하면서

더욱더 자신의 배를 채우고 불의를 일삼았습니다.

아모스는 바로 그때 선지자로 부름받아서

낯선 북이스라엘로 올라가서 하나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예언서에는

남유다나 북 이스라엘외에도

그들을 둘러쌓고 있는 이방 민족에 대한 심판예언이 등장합니다.

대부분 예언서 마지막에 위치하면서

하나님께서 이방 나라들의 죄악도 알고 계시고 그것을 심판하실 것을 알립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방 민족들까지 다스리시는 주권자임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아모스에서는

이방민족에 대한 예언이 앞에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을 둘러쌓고 있는 작은 민족에 대한 심판 예언입니다.

 

아모스의 예언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당사자인 유다와 이스라엘로 좁혀오면서

결국에는 북이스라엘이 범한 죄들을 지적합니다.

긴장감이 감도는 말씀입니다.

 

2.

아모스는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라는 표현을 반복해서 사용합니다.

 

“서너 가지”는 정확한 죄의 숫자라기 보다는

그들이 지은 죄 몇 가지를 갖고도 하나님께서 벌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서너 가지 죄까지 보고 계셨다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유다의 죄는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하며, 그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그의 조상들이 따라가던 거짓 것에 미혹”된 것입니다 (2:4)

 

이스라엘의 죄는 서너가지를 넘습니다.

경제적으로 윤택한 북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잘못한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대부분,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고 사고 팔거나, 상거래에서 정직하지 않거나,

가난하고 연약한 자를 탈취하고 압제하고,

왕궁의 지도자들은 물론 제사장들까지 타락한 죄들입니다.

 

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분명히 벌하실 것입니다.

죄에는 댓가가 따른다는 것이 구약 예언서의 메시지입니다.

 

2.

아모스를 처음 읽은 어제

“오늘 하루는 우리에게 있는 서너 가지 죄를 생각해보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기 바랍니다”라는 적용으로

새벽 기도회를 마무리했습니다.

 

새해의 첫 달이 지나갑니다.

새해의 결심도 서서히 식게 마련입니다.

 

이쯤해서

우리 자신을 한번 더 돌아보기 원합니다.

잠시 멈춰서 행여나 우리안팎에 있는 그릇됨(죄)을 생각해보고

가장 중요하고 큰 서너가지 죄를 골라서 주님께 내어놓기 원합니다.

 

회개는 날마다, 아니 순간마다 우리가 해야할 도리이지만

특별히 생각나는 서너 가지 죄를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정결케 됨을 경험하기 원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아모스 2:6)

Thus says the LORD: “For three transgressions of Israel, and for four, I will not revoke the punishment” (Amos 2:6)

 

하나님 아버지,

새해 첫 달을 보내면서

주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살피고

정한 마음을 갖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1.25이-메일 목회 서신)

메뚜기 떼

좋은 아침입니다.

 

어느덧 새해도 20일 가까이 지났습니다.

시간이 매우 빠르게 흘러갑니다.

연초에 계획하고 결심하신 일을 잘 해내고 계시는지요?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있지만, 날마다 아니 적어도 삼일마다

자신을 점검하고 새롭게 결심하면서 한 해를 사는 것도 좋겠습니다.

 

새벽기도회에서는

호세아를 끝내고 요엘서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요엘서는, 앞으로 닥칠 “여호와의 날”을 준비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개인과 공동체가 회개하고

여호와의 날 이후에 펼쳐질 주님의 은혜에 참여하길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요엘서의 흥미로운 구절은 1장 4절의 메뚜기 재앙입니다:

팥중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요엘1:4)

What the cutting locust left,the swarming locust has eaten.What the swarming locust left,

the hopping locust has eaten, and what the hopping locust left, the destroying locust has eaten.(Joel 1:4)

 

“팥중이” “메뚜기” “느치” “황충”으로 번역된 우리 말이 생소합니다.

4년 전에 우리나라 해남에 메뚜기 떼가 출몰해서 농작물을 망가뜨린 일이 있었고

펄벅의 소설 <대지>에서도 메뚜기 떼의 출몰을 중요하게 다루지만

고대 이스라엘처럼 메뚜기 떼의 습격이 흔치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워낙 메뚜기 떼의 습격이 잦은 곳이기에

메뚜기에 대한 용어가 발달했고

그것을 우리 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생소한 용어가 사용된 것 같습니다.

 

“먹어 치우는 메뚜기” “떼를 이뤄서 달려드는 메뚜기”

“뛰는 메뚜기” “폐허를 만드는 메뚜기” –

네 가지 모두 각기 다른 메뚜기의 공격입니다.

연속적으로 발생하는 메뚜기 떼의 습격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2.

메뚜기 떼의 습격은 요엘서 외에도 성경 몇 군데서 발견됩니다.

모세를 통해서 바로에게 내린 메뚜기 재앙 (출1);12-15)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하나님 백성에 임할 재앙 (신28:38)

이스라엘에 쳐들어오는 적군을 메뚜기 떼에 비유하였습니다(삿7:12).

 

요엘서의 메뚜기 떼도

“여호와의 날” 즉 심판 날에 임할 재앙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기존질서를 폐지할 것입니다.

인간이 쌓아놓은 모든 문명을 “ 무(nothing)”로 돌려놓을 것입니다.

선과 악의 마지막 심판입니다.

 

3.

지난 주일 달란트 설교 (마24-25장),

수요 예배의 마지막 때에 대한 예수님 말씀(막13장)

새벽기도회의 요엘서까지

새해 벽두부터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날”을 준비할 것을 깨우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끝(종말)이 있음을 믿고

그 끝에 맞춰서 현재의 삶을 점검합니다.

여호와의 날에 합당하도록 지금/여기에서 단정하게 살아갑니다.

 

<여호와의 날>이라는 말씀 앞에

우리의 삶을 걸러내고, 씻어내고 정말 중요하고 영원한 것을 꼭 붙잡기 원합니다.

수억 마리 메뚜기 떼가 지나가도 끄떡없이 남아있을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꼭 붙들고 올 한해 살아갑시다.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행하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것이라

백성이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 (요엘2:26)

Praise the name of the LORD your God, who has dealt wondrously with you.

And my people shall never again be put to shame. (Joel 2:26)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삶을 <여호와의 날> 마지막에 놓고

정돈하며 날마다 새날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1.18이-메일 목회 서신)

작은 일에 충성

좋은 아침입니다.

 

엊그제 집에 오는 길에

큰 트럭에서 작은 돌이 자동차 앞 유리로 떨어졌습니다.

돌이 튀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더니

아주 작은 구멍과 불가사리 모양으로 금이 갔습니다.

 

1센트짜리 동전으로 충분히 덮을 만한 상처인데

다음 날 아침에 보니 조금 더 커진 느낌이었습니다.

집 근처 자동차 부품가게에 가서

repair kit을 구입하고 설명서를 읽어보니

제 차에 생긴 흠집은 쉽게 수선할 수 있는 모양이 아닙니다.

 

고민하다가 Yelp의 리뷰가 좋은

자동차 유리 보수하는 가게를 찾아갔습니다.

65불이면 깔끔하게 고쳐주겠답니다.

제가 구입한 repair kit에 비교하면 비쌌지만

워낙 손재주가 없는 저로서는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 최선이었습니다.

 

체격이 크신 분이 고치기 시작하는데

놀랍게도 작은 흠을 메꾸는 특수장비들이 있었습니다.

20여 분 그 작은 흠집을 메꾸기 위해서

정성껏 힘을 다하십니다.

 

정말 유리가 완전하게 수리될 수 있느냐고 물어도

대답 없이 작업에만 몰두하셔서 머쓱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말을 못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자꾸 말을 시킨 것이 죄송스러웠습니다.

 

작업을 모두 끝내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고 들어갑니다.

 

2.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자신의 분야에서 묵묵히 맡겨진 일을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작은 흠집을 보수하는 장비들이 꽤 세밀하고 전문적으로 보였습니다.

그런 기기들을 발명하고 발전시켜서

기술자들께 판매하는 분들이 계시겠지요.

수요가 클 것 같지 않은데 말입니다.

 

자동차 유리의 작은 흠집을

메꿔주신 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적당히 메꿨으면 아마 겉모양이 흉해지거나

재보수가 어려울 정도로 망가뜨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전문가에게 맡기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덩치가 크신 분이 꼼꼼하게 유리를 보수하시는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떠오릅니다.

정말 작은 일에 충성하신 분입니다.

 

3.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하는 일은

모두 작은 일에 불과할 겁니다.

그러니 매사에 충성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실제로 “작은 일”도 있습니다.

사소하고 스쳐 지나가기 쉬운 일입니다.

올 한해는 그런 일도 챙겨 보고 싶습니다.

 

유리창의 아주 작은 흠집을 보수해주시듯이

세상에는 작은 일을 천직으로 알고 묵묵히 수행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존경과 박수를 받아 마땅한 분들입니다.

 

<작은 일에 충성>이라는 우리 교회 표어대로

올 한해, 아니 오늘 하루

우리 주변의 작은 일에 성실하고

작은 자들을 챙기고

작은 일을 하시는 분들께 감사하기 원합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마 25:21)

Well done, good and faithful servant. You have been faithful over a little;

I will set you over much. Enter into the joy of your master. (Mat 25:21)

 

하나님 아버지,

작은 일까지 소중하게 여기고

최선을 다하는 하루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1.11이-메일 목회 서신)

여호와를 알자

좋은 아침입니다.

 

2018년 새해 첫 주간을 지내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해가 바뀌는 것은

달력으로 구분된 시간일 뿐인데

새해를 맞을 때마다 새로운 각오와 새 출발을 하게 됩니다.

 

밋밋하게 인생을 살아가는 것보다

새해가 있다는 것이

동기부여가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오늘 새벽에는 순서에 따라서

호세아 6장 말씀을 읽었습니다.

 

호세아서는

하나님을 떠난 북이스라엘을 향해서

호세아 선지자가 고멜이라는 부정한 여인과 결혼하면서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신실한지 보여줍니다.

 

호세아 5장에서는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고

눈에 보이는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조목조목 고발했습니다.

 

그리고 6장에서는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촉구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백성들에게 벌을 주셨지만

결국에는 상처를 싸매 주시고, 회복시켜 줄 것이라는

하나님의 인애(헤세드, 조건 없는 사랑)를 소개합니다.

 

2.

누구든지 하나님을 확실히 알면

절대로 하나님을 떠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백성이 멸망하고,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제물을 드립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넘어서

경험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상대방과 대화하고, 함께 지내고, 한마음이 되면서 서로를 알아갑니다.

그때 비로소 서로를 알게 되고 진실한 사랑을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호 6:3)

Let us know; let us press on to know the LORD (Hos 6:3)

 

여기서 “힘써” 안다는 것은

하나님 알기를 추구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애쓰는 것입니다.

시간과 에너지, 그리고 마음을 쏟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선택과 집중입니다.

 

3

올 한 해 그 무엇보다

하나님을 아는 데 힘쓰기 원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데(경험하는데) 몰두하기 원합니다.

 

올해도 멋지게 하나님을 믿어봅시다.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호 6:3)

Let us know; let us press on to know the LORD (Hos 6:3)

 

하나님 아버지,

2018년에도 우리를 찾아오실 예수님을 기대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힘써 알아가는 한 해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1.4이-메일 목회 서신)

송구영신

좋은 아침입니다.

 

2017년도 이제 3일 남았습니다.

 

올해는 정유년, 닭의 해였습니다.

새날이 밝았음을 알리는 닭의 노래처럼

한 해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삶으로 전하신

참빛 식구들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여러분이 함께 해주셔서

올 한해도 목회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목회한 햇수보다

앞으로 목회할 햇수가 짧아지고 있지만

부족한 저의 모습은 점점 더 크게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교회를 섬기고

매 주일 하나님을 예배하신 참빛 식구들이 계셔서

한 주 한 주 목회할 수 있었습니다.

 

한 해 동안 함께 해 주신

참빛 식구들께 감사드리고,

우리 교회를 위해서 기도해주시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시고

목요일마다 제 이-메일 서신을 읽어주신 모든 분께도 감사드립니다.

 

2.

어제 수요예배에서는

마가복음 10장을 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소경 바디매오를 부르셔서

“네게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시고

바디메오는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수요예배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새해를 맞는 권사님들의 기도 제목은 무엇인지

예수님께서 “네게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시면

제일 먼저 대답할 소원이 무엇인지 남은 사흘 동안 생각해 보시길 부탁드렸습니다.

 

마찬가지로

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참빛 식구들께도 같은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앞으로 남은 사흘 동안

간절한 기도제목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시고

주님만을 의지하는 간절한 믿음으로 새해맞이를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마가 10:51-52)

And Jesus said to him, “What do you want me to do for you?”

And the blind man said to him, “Rabbi, let me recover my sight.”

And Jesus said to him, “Go your way; your faith has made you well.” (Mark 10:51-52)

 

하나님 아버지,

한 해를 각자의 자리에서

주님의 자녀로 열심히 살아온 참빛 식구들을 마음껏 축복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12.28이-메일 목회 서신)

그러든지/whatever

좋은 아침입니다.

 

뉴욕주에 위치한 마리스트 대학에서는

매년 설문조사를 통해서

한 해 동안 가장 짜증나게 하는 말(annoying words)이 무엇이었는지 조사합니다.

 

올해도 천여 명을 조사했는데

1/3이상이 지난 9년 연속 1위였던

“그러든지(whatever)”를 꼽았답니다.

 

어깨를 으쓱하면서

약간 비아냥 조로 마음대로 하라거나,

자신과는 상관없으니 하든지 말든지하라는 뜻의

“그러든지/whatever”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짜증이 났다는 것입니다.

 

사춘기의 자녀가

부모를 향해서 종종 취하는 태도이자 말입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순식간에 섭섭함이 밀려옵니다.

 

화가 나거나,

상대방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때도 사용합니다.

무엇보다 무책임한 태도이고

은연중에 상대방을 무시하는 말입니다.

 

흥미로운 결과도 있었습니다.

“그러든지”를 가장 싫어하는 사람들은

어떤 정파에도 소속되지 않은 무정파였답니다.

 

정치나 사상에 뚜렷한 특징이 없는 사람이

종종 쓰는 말이 “그러든지/whatever”일 것 같은데

자신들이 쓰는 말을 스스로 싫어한다는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두 번째로 짜증나게 하는 말은

“가짜 뉴스(fake news)”였습니다.

신속하고 정확한 뉴스가 넘쳐도 시원치 않은 요즘 세상인데

가짜 뉴스가 판을 치니 서로를 향한 불신이 쌓여갑니다.

 

“기분 나쁘게 할 의도는 없었는데 그만/no offense, but”

“말 그대로(literally)” “내 말 알아들었지(you know what I mean”등이 뒤를 이었답니다.

 

진실성이 결여된 채 자기주장만 펼치는 태도와 말투를

상대방을 힘들게 하는 것 같습니다.

 

2.

곧 성탄절을 맞이합니다.

성탄절은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기로 결심하는 절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무척 사랑하셔서

하나뿐인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시는 동안

외롭고 힘겹게 사는 사람들을 찾아가셔서

사랑을 베푸시고 살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사랑은 상대방에 대한 관심과 배려입니다.

진실한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습니다(벧전 4:8)

사랑은 무책임하게 “그러든지”라고 말하지 않고

끝까지 참고 견디면서 참된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바쁜 연말을 맞으면서

이웃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삼가고

서로를 배려하면서 한 해를 마무리하기 원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 13:4-7)

 

Love is patient and kind; love does not envy or boast; it is not arrogant or rude.

It does not insist on its own way; it is not irritable or resentful;

it does not rejoice at wrongdoing, but rejoices with the truth.

Love bears all things, believes all things, hopes all things, endures all things. (1Cor 13:4-7)

 

하나님 아버지,

진실한 사랑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12.21이-메일 목회 서신)

대강절을 보내며

좋은 아침입니다.

 

최근 며칠 동안

한인 언론은 물론 SNS에

월넛크릭에서 있었던 백인 여성의 언행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스타벅스 커피숍에서

한인 학생들이 우리 말로 얘기하고 있는데

옆에 있던 백인 여성이

이민자는 영어만 쓰라고 무례하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매장 직원들이 말리다가

결국은 경찰까지 동원되었지만

백인 여성은 끝까지 “아시안”

그것도 “코리안”을 들먹이면서 소동을 부렸답니다.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선 이후

백인들의 유색인종 혐오와

백인 우월주의의 언행이 끊이지 않고 여기저기서 일어납니다.

 

미국은 원래

샐러드 보울처럼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사는 이민자의 나라인데

인종간의 갈등이 자꾸만 불거지는 것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이번 경우

다인종, 특히 아시안이 많은 베이 지역에서 발생했기에

더욱 예의주시하게 됩니다.

한인이 대상이 되었다는 점에 화가 납니다.

 

2.

그런데 한편 생각해보면

우리 아시안들이나 유색인종들만 이런 일을 겪는 것은 아닙니다.

 

스스로 우월하다고 여기고,

약한 사람 또는 자신과 다른 사람을 핍박(?)하는 경우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또한, 표현하는 방식이 다르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 역시 자신과 다른 사람들,

약해 보이는 사람들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습니다.

 

자신의 우월함을 고집하고,

다른 사람들이 자기 방식대로 따라오도록

강요할 수도 있습니다.

 

월넛크릭 스타벅스 사건을 보면서 몹시 화가 나지만,

엄밀히 살피면, 우리 자신을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전반의 민낯입니다.

 

3.

마음에 촛불을 두 개 켜고

대강절 둘째 주일을 맞고 있습니다.

 

대강절은 원래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의 지위를 버리고, 자신을 통째로 비우시고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기다리는 기간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최고의 능력자, 최고의 권위, 창조주,

피조물인 인간과 100% 다른 분이셨지만,

기득권이나 자신의 권위, 다름을 주장하지 않으셨습니다.

 

질병으로 고생하고, 소외되어 외롭고,

힘없는 자들을 찾아가시고

그들의 편이 되셨습니다.

 

자신만이 최고라고 주장하고

자신과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차별하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분노하셨습니다.

 

대강절을 맞으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행여나 자신만이 최고요 옳다는 우월 의식,

자기와 다른 사람을 차별하는 배타성이 발견된다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을 닮고, 예수님의 마음을 회복하기 원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하늘의 평화가 임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너희 안에 마음을 품으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립보서 2장 5절)

Have this mind among yourselves, which is yours in Christ Jesus (Phil 2:5)

 

하나님 아버지,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참빛 식구들이

예수님의 마음으로 주변에 다른 사람들을 돌보고 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12.14이-메일 목회 서신)

                   

정리정돈

좋은 아침입니다.

 

한해의 마지막 달이 되면

새해에 했던 결심과 계획을 되돌아봅니다.

늘 아쉬움이 남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신 흔적이 여기저기서 발견됩니다.

저절로 감사가 나옵니다.

 

목사인 저는 연초에 주신 참빛 식구들의 기도제목을

다시 차근차근 읽어봅니다.

기도하신 것이 이뤄진 것을 보면서 덩달아 기쁘고

이뤄 가시는 모습에 힘을 더하고

아직 깜깜한 기도 제목에 다시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한 해를 보내면서

인생 상자를 하나 꺼내서 그곳에 “2017년”이라는 레벨을 부치고

한 해를 정리정돈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 인생길이 한 해가 끝난다고

깔끔하게 마무리되는 것은 아니지만

2017년을 예쁘게 정리 정돈해 놓고 새해를 맞기 원합니다.

 

2.

한 해를 돌아보고

정리 정돈하는데

“영적 일기(spiritual journal)”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면서

차분하게 글로 한 해를 정리하는 것입니다.

 

글을 쓰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생각하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깊이 간직할 수 있습니다.

 

많은 시간을 들여서 많은 분량의 글을 쓸 것도 아닙니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서 미사여구를 사용할 필요도 없습니다.

영적 일기는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서

있는 모습 그대로 솔직히 써내려 가는 글쓰기입니다.

 

삶을 돌아보는 단상이든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문이든지,

매일같이 기록하는 to-do-list의 변형이든지

아주 간단한 메모나 그림이든지

12월 한달 동안 영적 일기를 쓰면서

한 해를 정리정돈하시길 다시 한번 부탁드립니다.

 

일기 쓰기를 포함한 모든 영적인 훈련은 우리의 의식을 조율하는 과정이다.

현악기를 조율하듯이 우리 자신을 조율해서

때로는 주변에서 펼쳐지는 불협화음 속에서도

여전히 흘러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의 곡조를 알아듣는 것이다.

-내 영혼을 위한 일기쓰기(Journaling as a Spiritual Practice)-

 

3.

다윗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 만물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기록한 영적 일기

시편 8편을 묵상합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시편 8편3-4절)

When I look at your heavens, the work of your fingers,

the moon and the stars, which you have set in place,

what is man that you are mindful of him,

and the son of man that you care for him? (Psalms 8:3-4)

 

올해 마지막 달에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거나

세상 곡조에 맞춰서 춤을 추다가 몸과 영혼이 지치지 말고

창조주 하나님을 의지하고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깊이 만나고

지금도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깔끔하게 한 해를 마무리하기 원합니다.

 

영적 일기를 쓰면서…

 

하나님 아버지,

영적 일기를 쓰는 참빛 식구들의 신앙과 삶이

더욱더 깊어지게 하옵소서.

하나님을 깊이 만남으로

신앙의 터가 굳어지고 삶이 풍성해 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12.7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