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질서

좋은 아침입니다.

 

1.

나름 노력하지만

저와 참빛 식구들이 깊게 소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숫자가 그리 많지 않은데도 말입니다.

 

예배에 못 오신 분들께

주일 저녁 카톡으로 안부 인사와 설교를 보내드립니다.

 

친절하게 먼저 기도 제목을 나눠주시는 분들도 있고,

잠깐 만나서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표정을 살피면서 기도 제목을 알아채기도 합니다.

목회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그런 능력을 주시는 것 같습니다.

 

헌금 봉투에 기도 제목을 써 주시는 것도

제게는 아주 큰 도움이 됩니다.

책상에 놓고 한 주간 열심히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주 기도 제목에서

“사랑과 질서”라는 말을 만났습니다.

참 좋은 표현입니다.

 

사랑에 질서가 없으면

무분별하고 보기에 안좋습니다.

남녀 간의 사랑만이 아니라

가족 그리고 성도 간의 사귐에도 질서가 필요합니다.

 

사랑은

사랑을 주도하는 사람보다

그 사랑을 받는 수혜자에 의해서 결정 나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상대방 처지에서 생각하고 배려하는 것이 질서일 것입니다.

 

물론

지나치게 질서만 강조하면 사랑에 힘이 빠집니다.

우리 모두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서로의 이해가 필요하고, 위로와 격려가 필요합니다.

질서를 생각하다가 자칫 사랑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사랑과 질서의 긴장,

사랑과 질서의 조화가 꼭 요청됩니다.

 

우리 참빛 공동체 안에 사랑과 질서가

아름답게 나타나길 기도하겠습니다.

 

2.

시편을 읽으면서 비슷한 말씀을 만났습니다.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 (시편 85:10-11)

 

Steadfast love and faithfulness meet;

righteousness and peace kiss each other.

Faithfulness springs up from the ground,

and righteousness looks down from the sky. (Psalms 85:10-11)

 

이보다 멋진 말씀이 어디에 또 있을까요?

 

인애와 진리 – 진실한 사랑,

의와 화평 – 올바른 평화,

땅의 진리와 하늘의 의가 합쳐지는 순간입니다.

하늘과 땅이 의기투합했습니다.

 

우리 안에

그리고 세상 속에서도

이런 조화와 통합이 일어나길 기대합니다.

 

무엇보다

땅의 진리를 원하시니

오늘 하루도 진실하게 살기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랑과 질서, 인애와 진리, 의와 화평, 그리고 땅의 진실함이

하늘의 의와 만나는 멋진 사건이 일어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6.15 이-메일 목회 서신)

거룩, 일상의 과업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설교에서는 거룩에 대해서 함께 나눴습니다.

 

거룩 (sanctification, 성화, 구별) –

때로는 막연하고,

자신과 상관없는 매우 신실한 그 누군가의 몫처럼 보이고,

요즘 세상에 적용하기에는 진부한 단어처럼 생각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거룩(예배와 삶의 구별)”이야말로

성경에서 알려주는 기독교의 핵심가치입니다.

 

그리스도인 개인은 물론

교회 공동체가 거룩함을 상실한다면,

(예수님 말씀처럼) 맛을 잃고 길가에 버려져서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는 소금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든

그리스도인으로 구별된 거룩함을 지니고 있어야 하고

그것이 삶을 통해서 드러나야 합니다.

 

2.

거룩함을 너무 멀게 생각하지 않고

일상의 삶 속에서 실천하기 원합니다.

 

매일 반복해서 일어나는 때로는 지루한 일상,

매일 만나는 가족과 동료들, 그리고 교회 식구들,

오고 가며 스치는 사람들과 우리가 사는 세상 속에서

거룩을 유지하고, 거룩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생각이 구별되고

행동이 구별되고

우리의 삶 자체가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그리스도-인(Christ-ian)>이 되는 것이지요.

 

3

지난 설교 시간에 소개했던

로렌스 형제의 <하나님 인재 연습>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옵니다.

 

로렌스 형제가 터득한 하나님과 대화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단순히 자신의 평범한 일상사를 수행하는 것이다.

그는 맡겨진 일과를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순종의 마음으로 감당했다.

 

그는 기도 시간을 다른 시간들과

특별히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중대한 과오라고 믿었다.

경건의 시간에 드리는 우리의 기도가 우리를 그분과 연합하게 한다면,

평범한 일상 속에서 만나는 다른 모든 활동들도 우리를 그분과 하나 되게 할 것이다.

 

그는 기도하지 않을 때도 그와 똑같은 의식 속에 살았다.

늘 하나님 곁에 가까이 머물면서 온 힘을 다하여 그분을 찬양하고 송축했다.

그 덕분에 그의 삶은 언제나 기쁨으로 충만해 있었다. (28쪽)

 

하루하루의 삶이 구별되고,

주님과 동행하고,

흩어진 나그네로 살아가지만

주님의 백성이 누리는 특별한 기쁨으로 충만하기 원합니다.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시편68:19)

Blessed be the Lord, who daily bears us up;

God is our salvation.(Psalms 68:19)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하루도

주님 앞에서 거룩의 길을 걷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6.8 이-메일 목회 서신)

블랙아웃

좋은 아침입니다.

 

1.

올해가 시작된 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6월을 맞았습니다.

어릴 때는 시간이 참 느리게 갔는데

어른이 되니 너무 빠르게 앞서갑니다.

 

그렇다고 초조해도 안되고

시간에 이리저리 끌려가도 안될 것입니다.

주어진 시간을 하나님께 드릴 선물(present)로 만들며

날마다 살기 원합니다.

 

3년 전 이맘 때

큰 아이와 함께 샌프란에서 미시간까지

3박 4일 동안 자동차 여행을 한 적이 있습니다.

부자가 줄곧 함께 운전하고, 먹고, 자고 하면서

여러가지 대화를 나눴습니다.

 

대학원에 가면 무척 바쁘겠지만

시간이 되면 (아니 시간을 내서) 하루에 5-10분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잠잠히 거하는 시간>을 갖기를 부탁했습니다.

 

우리 교인들께도 틈날 때마다

말씀드린 부탁이기도 합니다.

 

2.

우린 너무 바쁘게 삽니다.

정신없이 앞을 향해 뛰고,

위로 치고 올라가기 위해서 안간힘을 씁니다.

 

행여나 조금이라도 뒷걸음친 듯 하면

조바심을 내고 마음이 상해서 시무룩합니다.

 

지난 주일 설교에서

여러가지 시험이 잠깐 지나간다고 했듯이,

세상이 주는 기쁨도 잠깐 지나갑니다.

 

그러기에

영원을 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잠깐 지나갈 것들에 인생을 걸고

온 힘을 쏟는 것도 경계할 일입니다.

 

3.

항공기 예약에서 자주 쓰는 용어 가운데

블랙아웃 데이트(blackout date)가 있습니다.

휴일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이 여행하는 기간에는

세일이나 프로모션 상품이 적용되지 않는 때입니다.

그때는 정상적인 가격으로 티켓이 판매될 뿐 모든 혜택이 닫힙니다.

 

조금 다를 수 있지만

블랙아웃 데이트를 우리 삶에도 적용해 봅니다.

 

세일로 물건을 팔고, 손님들을 초대하는 것은

아주 분주한 삶입니다.

모든 것이 가능한 듯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삶입니다.

 

때로는 모든 삶을 블랙-아웃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어 blackout에는 불이 나가서 깜깜하다는 뜻도 있지요)

왠만한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서

외부로부터 삶을 차단해 보는 것입니다.

 

신앙에도 블랙아웃이 필요합니다.

모든 것을 차단하고, 하나님과 깊은 교제의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하루에 5-10분 만이라도

삶의 불을 모두 끄고, 이런저런 삶의 요구를 차단하고

하나님 앞에 차분히 거하기 원합니다.

삶의 지성소를  확보하기 원합니다.

 

바쁘고 혼란한 세상이지만

평정심을 잃지않고

주어진 길을 차분하게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시편 62:5)

For God alone, O my soul, wait in silence, for my hope is from him. (Psalms 62:5)

 

하나님 아버지

주님 앞에서 갖는 고요한 시간이

우리 삶에 평안과 새 힘을 주는 통로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6.1 이-메일 목회 서신)

꼭 기도응답만

좋은 아침입니다.

 

1.

새벽에 기도하면서

기도 응답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많은 경우 기도와 기도 응답을

같은 선상에서 생각합니다.

기도했으면 어느 정도 응답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가 매번 응답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랫동안 그것도 간절히 기도했지만

기도 응답은 저 멀리 있는 무지개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힘이 좀 빠집니다.

 

기도한 사람과(경우와)

전혀 또는 거의 기도하지 않은 사람이(경우가)

별로 차이가 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고도 잘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헷갈리게 만듭니다.

 

2.

기도와 기도 응답을 지나칠 정도로

인과관계로 설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능력을 자신의 입장으로 끌어들이는

자기중심적 신앙일 수 있습니다.

일종의 기복신앙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하나님 마음속으로 들어갑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도 느낍니다.

이것이 기도의 최종 목적일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기도 응답보다 앞서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거래(deal)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주고받는 선물보다 신뢰가 더 중요한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면

기도 응답에 따라 신앙이나 마음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신뢰가

신앙과 삶을 통제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좋으신 분이고 (God is so good)

하나님께서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이고

하나님께서 항상 자신과 함께하실 것이라는 굳은 신뢰입니다.

 

하나님과의 신뢰에서 기도가 시작되고

중간에 여러가지 우여곡절을 겪지만

하나님을 향한 신뢰속에서 기도가 마무리됩니다.

 

3.

기도 응답 여부에 따라서 신앙이 흔들리고

기도 응답에 하나님의 존재 여부를 가리려 하고

행여나 기도 응답을 자랑하는 것은 조금 아쉬운 신앙입니다.

 

쉽지 않지만 그래도 바라기는

기도 응답을 넘어서는

진실되고 깊은 기도가 우리 가운데 있길 원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한

변치 않는 신뢰가 굳게 자리 잡기 원합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시편 18:1)

I love you, O Lord, my strength. (Psalms 18:1)

 

하나님 아버지

기도를 통해서 주님을 깊이 만나게 하옵소서.

참빛 식구들을 아주 많이 사랑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5.24 이-메일 목회 서신)

눈물의 선지자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새벽기도회와 수요예배에서는

예레미야서를 읽고 있습니다.

 

새벽 기도회에서는 성경을 한장씩 읽어 나갑니다.

하루에 한 장씩 읽어가도 보슬비에 옷이 젖듯이

5년여가 지나면 성경을 일독하게 됩니다.

일독 차례에 따라서 예레미야에 와 있습니다.

 

수요예배에서는 신구약 성경을 두루 각 책별로 공부합니다.

그동안 신약성경은 공관복음서를 빼고 모두 읽었습니다.

구약도 잠언과 전도서, 소예언서까지 꽤 많이 읽었습니다.

이제 남은 구약성경 가운데 예레미야서를 읽고 있는데

우연히 새벽기도회와 겹친 것입니다.

 

지난 수요예배에서는

예레미야 9장을 읽었습니다.

1절부터 예레미야 선지자의 별명이

왜 눈물의 선지자인지 알려주는 말씀이 등장했습니다: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 (예레미야9:1)

Oh that my head were waters, and my eyes a fountain of tears,

that I might weep day and night for the slain of the daughter of my people!

 

2.

구약의 선지자 가운데

예레미야 만큼 감성이 풍부한 인물이 없습니다.

 

예레미야서를 읽다 보면

그는 늘 하나님 앞에서 탄식하고

애원하고 눈물로 기도합니다.

 

예레미야의 마음과 삶 속에

예수님이 들어있는 것 같습니다.

 

예레미야의 눈물을 보면서

우리 자신을 돌아봅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백성을 위해서

주야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우리 역시 이웃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는 영적 감성을 갖고 있는지요.

 

신앙이 우리 자신 안에서 맴돌면 안 됩니다.

신앙이 나를 넘어서 이웃에게 펼쳐지고

그 안에서 주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의 마음을 닮아서

이웃의 아픔에 눈물로 동참하고,

아픈 이웃들과 함께 우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주르륵 눈물이 흐를 정도로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우리 교회에도

골방에서 눈물로 기도하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아프고 힘든 이웃들과 함께 공감하고

같은 마음으로 기도하기 원합니다.

 

물론 우리가 사는 미국과 태평양 건너 조국

그리고 하나님을 잊고사는 세상을 위해서도

눈물로 기도하기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각박하고 이기적인 세상 속에서

주님의 사랑을 눈물과 진심으로 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5.18 이-메일 목회 서신)

흩어진 나그네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부터

베드로전서 말씀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는

지금의 터키에 해당하는 소아시아에

흩어져서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사도 베드로의 편지입니다.

특정 교회에 보낸 편지가 아니기에 “공동 서신”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흩어진 나그네는

고향 예루살렘을 떠나서 소아시아에 살고 있던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Jewish Christians)을 가리킬 가능성이 큽니다.

 

이들은 타향에 살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나그네 삶입니다.

주류에 속하지 못한 마이너리티(minority)입니다.

 

당시에는 소수 종교였던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되었기에 핍박과 고난이 찾아 왔습니다.

 

로마가 다스리는 제국과

여전히 예수님을 믿지 않는 동족 유대인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세상살이에서 손해를 입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스스로 자초한 마이너리티의 삶입니다.

 

베드로서는

이처럼 흩어진 나그네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의 정체성과

어떻게 살아야할 지, 삶의 방식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2.

이번 베드로서를 공부하면서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기 원합니다.

 

베드로서의 흩어진 나그네는

하나님으로부터 미리 택함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장차 임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새로운 소망을 갖고 살아갑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들에게

매우 기초적이고 근본적인 신앙,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

세상에 속하지 않고 확실하게 구별된 삶을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베드로서를 살펴보면서

신앙의 핵심으로 들어가기 원합니다.

우리 신앙에 너절한 것들을 정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정말 중요한 신앙으로 무장하기 원합니다.

 

순수하고 순결한 신앙입니다.

결코 흔들릴 수 없는 견고한 신앙입니다.

흩어진 나그네의 꿋꿋하고 멋진 모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 자신을 다시 발견하고,

하늘나라 시민으로,

예수님의 제자로 곧게 서는 참빛 식구들이 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벧전1:7)

so that the tested genuineness of your faith—more precious than gold that perishes though it is tested by fire—

may be found to result in praise and glory and honor at the revelation of Jesus Christ. (1Pet 1:7)

 

하나님 아버지

베드로서를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확실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5.11 이-메일 목회 서신)

 

유다 아사왕

좋은 아침입니다.

 

1.

이스라엘은 솔모몬 이후,

남과 북으로 나누어집니다.

 

남쪽 유다는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았고

다윗과 솔로몬의 후손들이 왕이 되었습니다.

여로보암이 첫 번째 왕이 된 북 이스라엘에 비해서 정통 다윗왕국인 셈입니다.

 

남유다의 세 번째 왕이 아사입니다.

아사는 왕이 되면서 종교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산당을 비롯한 우상 숭배하는 신전들을 없앴고,

아세라 여신을 섬기는 어머니를 폐위시킬 정도로

하나님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하였습니다(역대하14:2).

 

아사왕은 전쟁에 나갈 때도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당대의 강국인 구스(이디오피아)를 상대해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처럼 아사왕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인정받았습니다.

 

2.

평생을 하나님을 섬기면서 선정을 베풀 것 같았던

아사왕이 한순간에 무너집니다.

 

북이스라엘이 남유다를 상대로

산성을 쌓고 긴장 상태를 유지하자

아사는 하나님을 찾지 않고 아람왕에게 도움을 청함으로 위기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니 선지자를 보내셔서 아사에게 다음같이 경고하십니다:

때에 선견자 하나니가 유다 아사에게 나와서 그에게 이르되

왕이 아람 왕을 의지하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아람 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나이다 (역대하 16:7)

At that time Hanani the seer came to Asa king of Judah and said to him,

“Because you relied on the king of Syria, and did not rely on the Lord your God,

the army of the king of Syria has escaped you.(2 Chron 16:7)

 

아사왕은 분노했습니다.

바른 소리하는 선지자를 옥에 가두고

백성들 가운데 몇 명을 학대했습니다.

 

왕이 된지 39년째에 다리에 못된 병이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아사는 하나님을 찾지 않고

나라의 명의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결국 발 병으로 죽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던 아사의 신앙과 삶이 무너졌습니다.

하나님보다 세상 것들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3.

아사왕의 업적을 보면

개혁과 선한 일을 한 것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그가 잘못한 것은 나라의 위기에서 강대국 아람의 도움을 청한 것과

발에 병이 들었을 때 의사를 먼저 찾아간 것, 단 두 가지입니다.

 

그런데 아사의 말년을 초라했고

그가 행한 개혁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세우기는 어려워도 무너지기는 쉽습니다.

사람이 한번 악한 길로 가면 돌이키지 않고

더욱 악해지는 것도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우리의 신앙과 삶을 소중하게 간수하고

손안에 든 새처럼 애지중지 귀하게 키워가야 합니다.

한 두 가지 잘못으로 무너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필요 없을 정도로 일이 잘 풀릴 때 특히 조심해야 합니다.

 

아사를 향한 하나냐 선지자의 말을 꼭 기억합시다:

여호와의 눈은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역대하 16:9)

For the eyes of the Lord run to and fro throughout the whole earth,

to give strong support to those whose heart is blameless toward him.(2 Chron 16:9)

 

전심으로 주님을 찾는 참빛 식구들과 교회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전심으로 주님을 향하는 참빛 식구들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4.27 이-메일 목회 서신)

리턴없는 인생

몇 달 전, 동네 창고형 매장에서 아내가 사놓은 물건이 있었습니다. 친지에게 선물하려고 구입했는데 그만 시간을 놓쳐서 선물도 못하고 우리가 쓰기에는 양이 너무 많은 데다 물건을 살 때 받았던 영수증도 잃어버렸습니다. 빠듯한 살림에 아내의 시름이 깊어 갑니다. 곁에서 지켜보던 제가 용기를 내서 리턴을 시도하기로 했습니다. 구매한 시간도 3개월 가까이 지났고 영수증까지 없으니 거절당할 것 같았지만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물건을 가지고 매장을 찾았습니다.

 

입구에서 반납할 물건임을 확인한 후, 담당 직원 앞에 줄을 섰습니다. 그 날은 웬일인지 기다리는 사람도 별로 없어서 금방 우리 차례가 닥쳤습니다. 차라리 줄이나 길었으면 직원들이 무심코 처리할 법도 한데 줄까지 짧으니 마음이 더욱 졸여왔습니다. 세 명의 직원 가운데 매니저처럼 보이는 분이 걸렸습니다. 예상대로 쉽지 않아 보입니다.

 

이분은 저희가 산 물건을 꼼꼼하게 확인했습니다. 물론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새것 그대로입니다. 영수증은 있냐고 묻습니다. 없다고 했더니 권총처럼 생긴 레이저건으로 물건을 스캔합니다. 구입한 날짜를 확인하는 것 같았습니다. 짧은 시간인데 저와 아내에게는 꽤 길게 느꼈습니다. 그러더니 아무 말 없이 초록색 영수증을 주면서 제 카드로 입금되었답니다. 싱거울 정도로 리턴이 쉬웠습니다. 누구보다 아내가 기뻐합니다. 진작 가져올 걸 괜스레 집에 두고 속앓이를 한 셈입니다.

 

누군가 말했듯이 미국은 리턴의 나라인 것 같습니다. 옷가지를 구입했다가 한두 번 입고 리턴한다는 거짓말 같은 얘기도 들었습니다. 몇 개월을 잘 쓰던 전자기기를 리턴하고 신제품으로 바꿔오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리턴이 이처럼 쉽게 이뤄지다 보니 물건을 구입하면서 “맘에 들지 않으면 리턴하지”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좋지만, 물건을 만들고 대형 매장에 출품한 업체 입장에서는 죽을 맛이겠습니다.

 

너무 손쉽게 물건을 리턴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우리 인생도 리턴이 가능하면 어떤 일이 생길까”라고 아내가 묻습니다. 갑자기 무슨 말인가 싶고 가슴이 철썩 내려앉았습니다. 50대 중반이 되면 남편이 약자가 되고 아내가 올라서기 시작한다는데 제가 너무 눈치없이 군림했나 싶었습니다. 순간적으로 몸을 낮추면서 자동차 브레이크를 밟았습니다. 아내는 말 그대로 인생 자체를 생각하며 질문한 것인데 제가 괜히 넘겨짚고 긴장한 것입니다.

 

인생길에 리턴은 없습니다. 리턴은 고사하고 잠시도 멈춰 세울 수 없습니다. 브레이크를 잡아도 소용없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가장 무서운 것이 한 시도 쉬지 않고 째깍째깍 소리 내며 가고 있는 벽에 걸린 시계의 분침과 초침이랍니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과 후회가 생기지만, 그때 그 순간으로 되돌아가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한 번뿐인 인생을 살다가 하나님께 갈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인생에 리턴이 없기에 하루하루가 소중합니다. 현재를 가리키는 영어 표현에 선물(present)이라는 뜻이 있듯이 우리에게는 24시간이라는 선물이 매일같이 주어집니다. 이 세상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입니다.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브랜뉴, 새날을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십니다. 하얀 백지와 같아서 마음껏 상상력을 발휘하고 힘을 다해서 채워 넣을 수 있는 가능성입니다. 누구도 대신 살아 줄 수 없는 우리만의 고유한 날입니다. 그러니 하루하루가 소중합니다. 지우개로 지울 수도 없고 리턴도 불가능한 한 번뿐인 인생입니다.

 

돌아보니, 하루하루가 저절로 생기는 것처럼 살았습니다. 매일같이 해가 뜨니 오늘과 내일이 같은 날이라고 무심코 생각해 버렸습니다. 리턴이 편리한 나라에 살다 보니 인생도 리턴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한 번뿐인 인생을 참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삶으로 하나님께 올려 드리고 싶습니다. 리턴할 수 없어서 아쉬운 것이 아니라, 리턴할 수 없기에 더욱 귀한 인생길을 걷고 싶습니다. 한 걸음 더 나가면, 내 인생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남의 인생도 한 번뿐임을 알고 이웃을 존중하고 배려하면서 리턴 없는 인생길을 사랑으로 걷기 원합니다. (2017년 4월 27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극복

좋은 아침입니다.

1.
미국에서는 프로 야구 시즌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동네 야구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는
거의 꼴찌에서 놀고 있습니다.
언젠가 치고 올라가길 기대합니다.

 

미국 메이저리그 프로야구에서
활약하는 한국 선수들이 있습니다.
처음에 잘하다가 2-3년 차가 되면서 부상도 찾아오고,
상대 팀에게 실력이 노출되면서 어려움을 겪습니다.
미국 생활은 누구에게나 만만치 않은 것 같습니다.

 

볼티모어에서 뛰고 있는 김현수라는 선수가 있습니다.
작년 입단 초기에 안타를 때리지 못해서 고전했지만,
대타로 나올 때마다 안타를 쳐서 나중에는 주전이 되었습니다.

 

두 번째 시즌인 올해 역시 힘겹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플래튼이라는 시스템을 선호하는 감독이
왼손을 쓰는 투수가 나오면
좌타자인 김 선수를 경기에 내보내지 않으니 컨디션 조절이 어렵습니다.
경기가 박빙으로 진행되면
김 선수보다 수비가 강한 선수를 내보내니 좌불안석입니다.

 

선수가 꾸준히 경기를 뛰어야 컨디션을 조절해 가면서
안정감 있게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데.
상대에 따라서 출전이 결정되면 초조한 마음으로 벤치를 지켜야 하고
경기에 나가도 무조건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주눅이 들기 쉽습니다.
작년에도 극복했으니 올해도 잘하리라 기대하면서 지켜보렵니다.

 

2.
미국에 살면서 비슷한 경험을 종종 합니다.
한국에 있었으면 안정되고, 쉽게 인정받을 수 있는 일들이
언어와 문화/관습이 다른 타국에서 같은 실력을 갖추고도
상사나 교수, 동료의 눈치를 보다가 평정심을 잃고 어려움을 겪는 경우입니다.
상대방이 편견을 갖고 대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잦습니다.

 

기회가 찾아 왔을 때, 잘해야 하는데
해내야 한다는 부담이 지나친 긴장으로 이어지면서
평소 실력마저 발휘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김선수를 두고 전문가들이 조언하듯이
스스로 극복해야 할 과제입니다.

 

감독이나 다른 선수를 바라본다고 해결될 수 없습니다.
푸념만 하고 앉아 있으면 사태가 더욱 악화될 것입니다.
말 그대로 자신이 스스로 극복해야 합니다.

 

야구나 이민생활뿐만 아니라
우리네 인생이 대부분 자신이 극복해야 할 일들입니다.
그래서 힘겹고 때로는 지칩니다.

 

3.
오늘 새벽 예레미야서 1장을 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부르시고
세상에 파송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격려하십니다.
그들이 너를 치나 너를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1:19)
They will fight against you, but they shall not prevail against you, for I am with you,
declares the Lord, to deliver you. (Jer 1:19)

 

“그들”에 여러 가지 상황, 세력, 사람들, 심지어 나 자신까지 대입하면서
말씀을 꼼꼼히 읽고 묵상했습니다.

 

대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주신 말씀이지만
각자의 사명(Calling)을 갖고 세상에 파송된 우리 참빛 식구들께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로 읽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극복하려고 애를 쓰지만 쉽지 않습니다.
힘에 부칩니다.
그 순간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믿고 극복해 내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고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입니다.

 

오늘도 힘내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하십니다!

 

그들이 너를 치나 너를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1:19)
They will fight against you, but they shall not prevail against you, for I am with you,
declares the Lord, to deliver you. (Jer 1:19)

 

하나님 아버지
참빛 식구들을 눈동자처럼 보호하시고
세상을 이길 힘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4.20이-메일 목회 서신)

십자가

좋은 아침입니다.

 

1.

고난 주간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2017년 고난 주간은

개인의 인생은 물론 세계사에 한번 뿐입니다.

매년 맞는 고난주간이 특별한 이유입니다.

 

일상적인(routine) 일을 대하는 태도가

“성실함”을 가늠하는 척도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상에 강하고 신실하신 참빛 식구들 되시길 늘 기도합니다.

 

고난 주간에는 십자가를 묵상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 때문에 가로막혔던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회복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세로 목이 상징하는

화목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든든히 붙잡고

창조주 하나님께 나갑니다.

예수님께서 길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침에 읽은

누가복음 23장 말씀에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속옷을 제비 뽑아 나눠 가진 로마 군인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23:34)

Father, forgive them, for they know not what they do. (Luke 23:34)

 

예수님의 기도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이웃을 (심지어 원수를) 대해야 하는지 배웁니다.

십자가의 가로 목이 의미하듯이

이웃 그리고 세상과 화평하라는 산 교훈입니다.

 

이처럼 십자가에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함께 들어있습니다.

 

2.

뒤숭숭한 조국과 세상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데

오늘 아침 안타까운 소식이 들렸습니다.

 

미군이 핵폭탄을 제외하면 가장 강력한 폭탄을

아프가니스탄에 투하했다는 보도였습니다.

 

ISIS가 워낙 나쁜 일을 많이 하지만

그래도 고난주간에 그렇게 위력이 큰 폭탄을 투하하다니요.

세상에서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미국이 말입니다.

속이 많이 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오후,

MSN 홈페이지에서 감동적인 미담을 읽었습니다.

 

샌프란 북쪽 산타로사에서 하와이로 공부하러 간 여학생이

학자금 대출과 비싼 생활비로 학업을 잠시 접고

하와이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2교대로 일하고 있었답니다.

 

호주에서 온 관광객들이 여학생의 이야기를 듣더니 팁을 400불이나 두고 간 것입니다.

여학생이 너무 감사해서 그들이 묵은 호텔에 감사편지를 두고 왔는데

다음 날 다시 찾아와서 학업을 계속하라고 10,000 불을 주고 갖다는 기사였습니다.

 

다시 갚을 필요도 없고, 단지 열심히 공부해서 꿈을 이루라고 격려했답니다.

여학생은 다음과 같이 인터뷰를 마무리했습니다:

“여전히 세상에는 선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사건이 제 인생을 바꿔놓았습니다.”

 

한 편에서 어마어마한 폭탄이 떨어졌지만

한 편에서는 사랑의 선물을 주고 떠난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을 실천한 사람들입니다.

 

고난 주간을 넘어서 부활절을 기다리는 이 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의 삶을 점검하기 원합니다.

 

십자가의 세로 목을 따라서 하나님께 올라가고

가로 목을 따라서 선한 마음으로 이웃을 찾아가는

부활 절기가 되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엡5:2)

And walk in love, as Christ loved us and gave himself up for us,

a fragrant offering and sacrifice to God (Ephesian 5:2)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이 흘러 넘치고

십자가의 신앙을 회복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4.13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