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좋은 아침입니다.

 

새벽기도회에서

다니엘서를 읽고 있습니다.

 

이사야와 예레미야, 에스겔를 거쳐서

다니엘까지 왔는데

앞의 세 예언서에 비교하면 훨씬 은혜롭습니다.

 

무엇보다 익숙한 말씀이 나오니

권사님들과 읽기도 편하고 나눔도 풍성합니다.

 

그렇지만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제국의 종교와 학문을 익히고

이름도 바벨론식으로 바뀌면서 살아가는

다니엘의 삶이 그리 낭만적이지 않음을 곳곳에서 느낍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가 섬겨야 하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교만하고

때때로 안하무인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영광과 권력을 주셨다고 전할 정도로

부족함이 없는 말 그대로 당시 최고의 왕입니다.

 

2.

내일 나누게 될 다니엘서 4장을 묵상하면서

머리가 쭈뼛 서는 표현을 발견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자신의 꿈을 해석하기 위해서

바벨론의 모든 술사를 동원하지만 아무도 답변하지 못합니다.

결국, 다니엘을 불러서 해석을 부탁하고

다니엘이 왕의 꿈을 해석해 주는 본문입니다.

 

그 순간,

왕이 다니엘을

박수장 벨드사살아”라고 부릅니다.

 

벨드사살은 다니엘의 바벨론식 이름으로

“벨신이 왕의 생명을 보호하신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심판관”이라는 다니엘의 이름이

바벨론 신과 바벨론 왕을 찬양하는 것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런 다니엘을 보고 “박수장(the chief of magicians)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렇다면, 다니엘은 바벨론 신들의 이름으로 점을 치고

세상을 판단하는 술사들의 대장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다니엘이 바벨론에서 그런 일을 하면서 살아남았습니다.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요!

 

3.

오늘도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참빛 식구들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다니엘 정도는 아니지만

참빛 식구들 역시 하나님이 없는 세상 속에서

고군분투하면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갑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상관없는 일을 앞장서서 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바벨론에서 살아남은 다니엘을 떠올리면서

끝까지 살아남고

결국에는 승리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조금 일이 잘 안 돼도 너무 상심할 것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힘내십시오!

그리고 주일에 함께 모여서

뜨겁게 찬양하고 기도하고

우리 하나님을 예배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참빛 식구들과 함께하시고

보호자와 안내자가 되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11.30이-메일 목회 서신)

감사

좋은 아침입니다.

 

엊그제  CNN인터넷판에

흥미로운 기사가 떴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행복한 도시가 어디냐는 것입니다.

 

콜로라도 볼더가 가장 행복한 도시였고,

우리 지역인 산타크루즈와 동부 버지니아의 샤롯츠빌이

각각 2위 3위를 차지했습니다.

산호세는 6위였고 샌프란시스코는 25위 안에 들지 못했습니다.

 

댄 뷰트너라는 분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기준을 갖고 행복지수를 매긴 결과였습니다:

만족도 (pride), 즐거움(pleasure), 삶의 목적 (purpose).

 

만족도는 자기가 사는 도시의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

1-10의 수치로 표시하게 했답니다.

살고 있는 도시에 대한 자부심을 측정한 것입니다.

 

즐거움을 측정하는 방법이 흥미롭습니다.

지난 24시간 동안 얼마나 자주 미소 짓고, 깔깔 웃고,

기쁜 감정을 느꼈는지 물었습니다.

 

마지막 삶의 목적은

바로 전날 흥미로운 일을 행했거나

재미있는 삶을 위해서 배운 것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콜로라도 볼더에 사시는 분들이

위의 세 가지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셈입니다.

 

샌프란에 사시는 분들의 경우

렌트비와 생활비가 너무 비싸서

첫 번째 행복지수에서 밀렸을 것 같습니다.

행복하지 않으면

웃음의 숫자나 빈도도 줄어들겠지요.

삶을 향한 목적 지수는 샌프란도 높았을 것 같습니다.

 

하여튼, 2시간여 떨어진

산타크루즈가 2위가 되었다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2.

세 가지 기준을 우리 각자에 적용해서

행복도를 생각해 보아도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삶에 대한 자부심, 행복감, 그리고 삶의 분명한 목적 추구.

 

여기에 한 가지

“감사”라는 덕목이 들어가면 더욱 좋겠습니다.

 

오늘이 추수감사절인데,

어느 정도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감사를 말이나 행동으로 표현했는지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어쩌면 감사야말로

우리의 삶의 행복지수를 가늠하는 최고의 기준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감사,

가족에 대한 감사,

이웃과 주변 환경에 대한 감사,

거기에 한 해를 꿋꿋하게 견디며 살아준 자신에 대한 감사!

 

남은 한 주간 넘치는 감사로 보내시고

주일에 기쁜 마음으로 우리 하나님을 예배하기 원합니다.

 

우리가 감사함으로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 (시편 95편 2절)

Let us come into his presence with thanksgiving;

let us make a joyful noise to him with songs of praise! (Psalms 95:2)

 

하나님 아버지,

주님 안에서 그리고 주님으로 인해서

감사와 기쁨이 넘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11.23이-메일 목회 서신)

더불어 살기

좋은 아침입니다.

 

며칠 전, 한국과 미국에서는

짧은 영상 하나가 웃음을 자아냈습니다.

 

아시안 정상회의에 참석했던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일화였습니다.

회의를 마치면서 참석한 정상들이

서로 교차해서 팔짱을 끼고

우정과 하나 됨을 보여주는 순서가 있었습니다.

 

서로서로 교차에서 손을 잡는 대열입니다.

대한민국 문재인 대통령은 맨 끝에 위치해서

한 손은 한가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중간에 섰습니다.

아시안 정상들이 많아서인지 체격이 눈에 띠게 컸습니다.

게다가 트럼프 대통령은

서로 교차해서 손을 잡는 법을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당황했다기보다는

평생 그런 의식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오른쪽에 있는 정상이 트럼프의 손을 먼저 가져갔더니

트럼프 대통령은 자기 손을 가져오려고,

아니면 자기 손만 잡으려는 듯 왼손을 갖다 댑니다.

자연히 왼쪽에 서 있던 분은 한 손이 놀면서 머쓱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나중에는 팔짱을 꼈지만

난생처음 왼편과 오른편 사람의 손을 잡은 듯이

어색하고 심지어 괴로운 표정을 짓고 서 있는 모습이

그대로 카메라에 잡혔습니다.

 

어쩌면 이 분은 독불장군으로 평생을 살아온 것 같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과 손에 손을 잡아 본적도 없는 것 같습니다.

 

악수할 때도 상대방을 확- 끌어당기는 습관이 있어서

상대방을 불쾌하게 만들곤 하는데

역시 자기 위주의 행동 방식입니다.

 

2.

홀로서기는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필요에 따라서

독립적으로 생활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홀로서기 못지않게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서로서로 팔짱을 끼고

손을 엇갈려 잡으면서 하나가 되고

마음과 삶을 나누고,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신앙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나만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나 혼자만의 신앙을 고집하는 것은 절반의 성공입니다.

 

신앙은 공동체 속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서로 격려하고, 때로는 갈등을 겪을 수도 있지만

그 모든 것을 통해서 서로 자라가는 과정입니다.

 

가정, 교회, 그리고 일터와 만남이

우리 신앙의 훈련소임을 기억하기 원합니다.

우리같이 조그만 교회는

공동체의 삶을 훈련하는데 안성맞춤입니다.

 

3.

손에 손을 잡는 방식과 행동이

어색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기본입니다.

대통령이 그런 것에 익숙하지 않고 독불장군식이니

우리가 사는 미국을 위한 기도가 절로 나옵니다.

 

올해도 감사절을 맞습니다.

함께 하는 가족, 교우들, 이웃들, 잠시 잠깐의 돕는 손길들이 있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더불어 살아간 우리가 누리는 혜택이고 감사입니다.

 

손에 손을 잡고

더불어 살아가는 참빛 식구들 되시길 바랍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편 133:1)

Behold, how good and pleasant it is when brothers dwell in unity! (Psalms 133:1)

 

하나님 아버지,

더불어 살아가는 가족,

주안의 형제 자매를 주심에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11.16이-메일 목회 서신)

                   

경계선

좋은 아침입니다.

 

새벽기도회에서 읽고 있는 에스겔서는

마지막 40-48장에서 성전의 회복을 약속합니다.

 

에스겔이 환상으로 본 성전의 모습은

정사각형 또는 직사각형의 건축물입니다.

여러 개의 방과 구조물이

좌우 대칭을 이루는 질서와 균형의 절정입니다.

 

에스겔 성전은 실제로 건축되지 않았고

신약성경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에 세워질 성전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신구약 성경이 서로 어우러지고

자세히 읽을수록 예사롭지 않은 하나님의 경륜(plan)을 발견합니다.

 

오늘 새벽에는 에스겔서 42장을 읽었는데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들이 거하는 공간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이 사용하는 방은 거룩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구약의 거룩함은 정함(clean)입니다.

하나님께서 거하시기에 충분히 정결해야 합니다.

부정한 것들(unclean)이 들어오지 못해야 합니다.

 

에스겔서에서는

제사장들이 거하는 방을 거룩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담(wall)”을 쌓아서 영역을 구분했습니다.

정한 것과 부정한 것,

성스러운 것(Sacred)과 속된 것(secular)을 구분하는 담입니다.

 

2.

우리에게도 거룩함을 유지시켜주는 영역이 필요합니다.

부정한 것과 속된 것을 구분하는 경계선입니다.

 

물론, 우리는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을 떠나서 교회로 숨어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빛”으로 세상에 보내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과 구별점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임을 선명하게 알려주는 지점이 있어야 합니다.

경계선을 긋는 것입니다.

 

에스겔에 이어서 읽게 될 다니엘서를 통해서

우리가 정해야 할 경계를 발견합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은

이름도 바뀌고, 바벨론 학문과 언어를 배우면서

그가 살아야 할 제국 바벨론에 녹아들었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은 먹지 않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부정한 음식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다는 결심입니다.

먹거리가 다니엘이 쌓은 “담/경계”였습니다.

 

3.

현대를 사는 우리들이

경계선을 긋고

거룩한 영역을 만드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거룩하기 위해서 해야 할 것들을 생각하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다니엘처럼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생각해보고

그 가운데 몇 가지에 “뜻을 정해서” 실천하는 것이

현실적이고 지혜로울 것입니다.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담/경계”를 명확히 세워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와 세상을 구별하는 경계입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인답게 유지시켜주는 영역입니다.

 

잠시 멈춰서

각자가 세워놓은 경계를 점검해 봅시다.

 

세상에 살지만, 결코 세상에 속하지 않는

근사한 참빛 식구들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사방 마당의 길이가 오백 척이며 너비가 오백 척이라

담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는 것이더라 (에스겔 42:20)

It had a wall around it, 500 cubits long and 500 cubits broad,

to make a separation between the holy and the common. (Ezek 42:20)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하루 참빛 식구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세상의 어두움을 밝히는 빛이 되고

세상에 맛과 신선함을 주는 소금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11.9이-메일 목회 서신)

마른 뼈가 살아나다

좋은 아침입니다.

 

신구약 성경을 차례로 한 장씩 읽어가는

새벽기도회에서는 에스겔서를 읽고 있습니다.

 

예언서 말씀을 새벽에 읽기가 쉽지 않아서

거친 자갈길을 걷는 느낌입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주로 등장하니

거리감도 느껴지고 말씀에 은혜를 더하기가 솔직히 어렵습니다.

 

그러던 중

오늘, 에스겔서의 절정이라고 부를 수 있는 37장을 읽었습니다.

골짜기의 마른 뼈가 살아나는 신비롭고 감동적인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골짜기의 마른 뼈들을 환상으로 보여주십니다.

그리고는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3절)고 물으십니다.

 

난감한 질문입니다.

다윗이 갖고 있던 믿음의 상상력을 총동원해도

워낙 엄청나고 불가능한 일이니 답변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에스겔이 지혜롭게 대답합니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최고의 답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른 뼈들에 생기를 불어넣어서 살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계획에 에스겔을 초청하시는 겁니다.

 

에스겔이 하나님 말씀을 따라 마른 뼈들(dry bones)에게 명령하니

애니메이션을 보듯이

뼈들이 맞춰지고,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고 피부가 복원되었습니다.

정말 신비로운 환상입니다.

(에스겔서에는 신비로운 일들이 많이 등장한답니다)

 

잘 맞춰졌고 복원은 마무리되었는데

그냥 “물체”입니다. 생명이 없습니다.

 

에스겔이

하나님 말씀대로 생기를 향해서 명령하니

사방에서 생기가 들어와서 마른 뼈가 살아났습니다.

 

마른 뼈가 살아나는 환상은

나라를 잃고 망연자실,

절망 가운데 이곳 저곳으로 흩어진 이스라엘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일으키시고

주님의 군대로 삼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2.

새벽에 이 말씀을 읽으면서

마음에 벅차 오르는 감동과 은혜가 임했습니다.

저도 모르게 말씀을 전하고 기도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커졌습니다.

 

참빛 식구들의 마음과 삶 속에

마른 뼈처럼 내동댕이쳐진 것들이 있다면

주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살아나는 역사가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죽음이 되살아나는 부활의 역사,

그 생명의 기운이 참빛 식구들 한 분 한 분, 가정과 교회

무엇보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임하길 기도했습니다.

 

새 달을 맞이합니다.

올 해도 두 달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마른 뼈가 살아나는 역사가 우리 안에 일어나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맞춰 주시고, 돋아나게 하시고, 복원시키시고

마지막에 사방에서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것을 경험하기 원합니다.

주님의 놀라운 은혜와 역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에스겔이 보았던 환상,

무한한 믿음의 상상력을 갖고 힘차게 새 달을 살아갑시다.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에스겔 37:14절 중에서)

And I will put my Spirit within you, and you shall live…

Then you shall know that I am the LORD (Ezekiel 37:14)

 

하나님 아버지,

마른 뼈가 살아나는 역사가 우리 안에 있게 하시고

오늘 하루도 주님께서 불어넣으신 생명의 기운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11.2 이-메일 목회 서신)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좋은 아침입니다.

 

수요예배에서는

예레미야 읽기를 잠시 쉬고

마가복음을 시작했습니다.

 

구약의 예언서를 읽다가

신약의 복음서를 읽으니 더욱 은혜롭습니다.

 

지난주에 읽은 마가복음 2장에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유명한 말씀을 만났습니다.

 

여기서 새 포도주는

예수님께서 전하는 복음을,

새 부대는 복음을 간직한 그릇, 즉

새롭게 예수님을 믿은 그리스도인들과

새롭게 세워질 교회를 가리켰을 것입니다.

 

특별히, 금식을 놓고 새 포도주와 새 부대를 말씀하셨으니

유대인들의 형식적인 금식과 그것을 장려하는 유대교를

헌 포도주와 헌 부대에 비유하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장차 실천하게 될 금식과

그 금식에 동참할 교회가

새 포도주와 새 부대가 되겠지요.

 

2.

이번 주는 종교개혁 주일이고

10월 31일은 말틴 루터가 당시의 가톨릭교회를 비판하는

95개 조의 반박문을 비텐부르크 성당에 게시한 지50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500년 전 말틴 루터로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은 말 그대로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은 사건이었습니다.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으로”라는

종교개혁의 캐치프레이즈에 맞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개신교라는 새 부대에 담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많이 흐르면서

부대가 많이 헐었고,

포도주도 맛을 많이 잃었습니다.

다시 새로운 개혁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3.

사실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새 날을 주시고

우리가 날마다 새 날을 살기를 바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헌- 것이 되지 않도록

새 날을 주시고

새 복음으로 채워 가길 원하십니다.

 

우리 자신은 물론

우리가 속한 가정과 교회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간직하기에 적합한

새로운 부대가 되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헌 것은 과감히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 우리 자신을 내어놓고

새롭게 변화되고, 개혁해 가는 것입니다.

 

자신이 새롭게 됨은 물론

새로운 세상까지 꿈꾸면서

꿋꿋하게 걸어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오늘도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는 하루가 되길 원합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곰곰이 생각하며 오히려 희망을 가지는 것은,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다함이 없고 그 긍휼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

“주님의 사랑과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고, 주님의 신실이 큽니다.”(예레미야 애가 3:21-23)

But this I call to mind, and therefore I have hope: The steadfast love of the LORD never ceases;

his mercies never come to an end; they are new every morning; great is your faithfulness.(Lamentation 3:21-23)

 

하나님 아버지,

아침마다 새로우신 주님의 신실하심을 담기에 충분한

새롭고 신실한 새 그릇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10.26 이-메일 목회 서신)

그리스도인의 자유

올해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종교 개혁자 말틴 루터는 자신이 교수로 재직하던 비텐베르크 대학 성당에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지적하는 95개 조의 반박문을 게시하였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서 종교개혁의 불길이 삽시간에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말틴 루터 역시 운명적으로 종교개혁의 한 가운데에 서게 되었습니다.

 

말틴 루터는 종교개혁이 한창 진행되던 1520년 세 개의 논문을 연거푸 발표합니다. 첫번째 <독일 크리스천 귀족에게 보내는 글>에서 유명한 만인 제사장설을 피력합니다. 교황이나 성직자들만 제사장의 특권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성경대로 모든 신자가 하나님의 사제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논문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서는 로마 가톨릭교회가 독점하고 있는 성례전을 비판하면서 그 이후로 뜨겁게 전개된 성만찬 논쟁에 불을 붙였습니다.

 

말틴 루터의 세 번째 논문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입니다. 자신을 파문시키려는 교황 레오 10세에게 보낸 공개 서한으로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에 대한 말틴 루터의 사상을 잘 담고 있는 주옥같은 글입니다.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는 행함을 통해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백성들을 율법의 틀에 가둬두고 면죄부를 판매하는 등 성경에 반하는 신앙을 주입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말틴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신앙의인화(信仰義認化)를 주장했습니다. 말틴 루터 자신도 탑의 경험으로 불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했습니다. 자신 안에 의롭게 될 가능성이 없고 단지 손님처럼 밖에서 찾아오는 하나님의 낯선 의, 즉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의롭게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의 논문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도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끊임없이 강조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죄와 율법 그리고 행위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논문에서 밝힌 첫 번째 명제 대로 “그리스도인은 더할 수 없이 자유로운 만물의 주인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지위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대로 전가되었으니 무한한 자유를 누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처럼 예수님 안에서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말틴 루터가 논문에서 밝히 두 번째 명제는 “그리스도인은 더할 수 없이 충성스러운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한다”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셨지만, 자신을 비우고 종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셔서 만인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듯이 그리스도인들도 종으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왕같은 제사장이 되었지만, 그것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섬기고 사랑하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말틴 루터는 억지로 이웃을 사랑하고, 구원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을 경고합니다. 구원을 얻기 위한 선행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에 합당한 선행이 되어야 합니다. 억지로 행하는 선행이 아니라 스스로 종이 되어서 자발적으로 실천하는 사랑입니다. 아무런 이익이 없습니다. 자신에게 돌아올 그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습니다. 받은 은혜를 이웃과 나누면서 믿음을 사랑으로 표현할 뿐입니다. 말씀대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갈5:6)입니다. 그가 갈라디아서를 주석하면서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은 내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외적으로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이뤄진다”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말틴 루터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음과 같이 고백하길 원했습니다:“나는 자신을 하나의 그리스도로 나의 이웃에게 줄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그 자신 안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의 이웃 안에서 산다”라고 그의 논문을 마무리합니다. 자칫 종교개혁을 생각하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에 집중한 나머지 사랑으로 행하는 선행을 도외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말틴 루터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알려주듯이 믿음에는 반드시 행함이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스스로 종이 되어서 이웃을 섬기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종교 개혁 주일을 맞으면서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기 원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에서 한 걸음 나가서 믿음에 사랑이 더해지길 원합니다. 자발적인 섬김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실천하기 원합니다. 예수님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스스로 선택해서 걷는 고귀한 신앙을 갖기 원합니다. (2016년 10월 26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아하 Aha

좋은 아침입니다.

 

주로 권사님들께서 정기적으로 참석하시는

새벽기도회와 수요예배에서는

에스겔서와 마가복음을 한 장씩 읽어갑니다.

 

마가복음 읽기는 이제 막 시작했으니

수요 예배에 참석하지 못해도 첨부한 <내용 요약>을 각자 읽으시면서

우리 교회의 성경 읽기와 성경공부에 동참하시길 부탁드립니다.

 

에스겔서는 대부분의 예언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다스리는 주님(Lord)이심을

이방 나라에 대한 심판 예언을 통해서 알려줍니다.

 

남쪽의 이집트와 북쪽의 앗시리아와 바벨론에 이르는 제국부터

가까운 거리에서 옆구리를 찌르는 가시처럼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주변국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을 예언합니다.

 

엊그제 읽은 에스겔서 25장에서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후손인 암몬과 모압에 대한 예언을,

26-28장은 당시 지중해를 중심으로 커다란 교역을 하면서 풍요를 누리던

두로에 대한 예언이 등장했습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성전도 무너지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바벨론이라는 제국 앞에서 이스라엘은 속수무책으로 당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않고 우상을 숭배했으며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고

더 늦기 전에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예언자의 말을 무시한 결과라고 알려줍니다.

 

2.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것을 본

주변국가들은 깨소금 맛이라고 아주 좋아합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사로잡혀가는 것을 본 암몬 사람들은

“아하(Aha) 좋다”라고 쾌재를 부릅니다.

 

모압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나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이나 별 차이 없다고 비난합니다.

 

두로 사람들은

예루살렘이 멸망한 틈을 타서

“그가 황폐하였으니 내가 충만함을 얻으리로다”라며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고 있습니다.

 

주일설교에서

“남의 불행을 보고 고소하다고 느끼는 심술궂은 마음”을 뜻하는

독일어 <샤덴프로이데>를 소개한 적이 있는데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을 보고 주변국들이 똑같이 샤덴프로이데하고 있습니다.

 

아하(Ahah

– 남을 조롱할 때 쓰는 히브리어 감탄사입니다.

 

“아하 잘됐다”

“아하 하나님 백성도 별 것 아니구나”

“아하 이스라엘이 망했으니 이제 내 세상이 되었네”

우리도 살면서 이런 식의 말을 많이 듣습니다.

 

마음이 힘들지만 그럴수록 주님을 바라보면서

씩—웃고 신앙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야 합니다.

 

행여나 우리 마음속에

남의 불행을 보고 저런 마음이 들면

얼른 정신을 차리고 그런 생각을 밖으로 내쫓아야 합니다.

 

에스겔서에 보니 하나님께서는

암몬, 모압, 두로 사람들의 생각과 말을 모두 듣고 계셨고

결국 이들을 심판하실 것을 예고하시기 때문입니다.

 

3.

세상이 어수선합니다.

삶이 마음처럼 펼쳐지지 않고

때로는 샤덴프로이데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우리가 샤덴프로이데의 잘못을 범하기도 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십자가에 죽으시며 세상에 생명과 화평을 주신 우리 주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면서

함께 연대하고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면서

그리스도인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힘냅시다!

 

내가 주 여호와인 줄 그들이 알리라 (에스겔25:7)

Then you will know that I am the LORD. (Ezek 25:7)

 

하나님 아버지,

아름다운 믿음과 선한 마음으로

주의 길을 걷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10.19 이-메일 목회 서신)

성령의 바람

지난 화요일 새벽,

교회에 도착하니 낙엽이 타는 듯한 냄새가 났습니다.

 

처음에는 기온이 떨어지면서

이웃집에서 벽난로를 때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나파 밸리의 산불 냄새였습니다.

냄새는 물론 재가 날아왔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지난 주일 저녁,

나파와 산타로사 지역에서

동시다발로 산불이 발생했습니다.

 

생명을 잃거나 아직 생사가 확인되지 않은 분들부터

집이며 재산이 모두 불에 타서 없어진 분들까지

산불의 화염이 핥고 간 자취가 너무 큽니다.

 

이번 산불은

“디아블로 윈드(diablo wind)”로 불리는

내륙에서 불어온 바람을 타고 거침없이 번졌습니다.

 

디아블로 윈드는

봄철과 가을에 부는 폭풍 바람으로

특히 건조한 가을에 치명적인 산불을 일으킵니다.

그 위력이 대단해서 “악마 바람”이라고 이름을 붙였답니다.

 

시속 80마일에 육박하는 바람과 함께

불길이 쏜살같이 번지는 위력을 갖고 있으니

가히 악마라고 불릴 만합니다.

 

불에 타서 황폐하게 된 산타로사 시가지의

전과 후(before and after)의 사진을 보니

앞으로 복구하고 완전하게 회복하는데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습니다.

 

2.

지난 주일 밤에는 라스베이거스의 총격 사건이 일어나더니

이번 주일에는 우리 동네에서 큰 산불이 일어났습니다.

정말 이곳저곳에서 악마의 바람이 부는 듯합니다.

 

예전에 자주 부르던

<부흥>이라는 복음 성가가 생각납니다.

 

이 땅의 황무함을 보소서
하늘의 하나님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우리의 죄악 용서하소서 이 땅 고쳐 주소서

이제 우리 모두 하나 되어
이 땅의 무너진 기초를 다시 쌓을 때
우리의 우상들을 태우실 성령의 불 임하소서

부흥의 불길 타오르게 하소서
진리의 말씀 이 땅 새롭게 하소서
은혜의 강물 흐르게 하소서

성령의 바람 이제 불어와
오~ 주의 영광 가득한 새날 주소서
오~ 주-님 나라 이 땅에 임하소서.

 

우리가 사는 세상에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길 기대합니다.

예상치 않았던 사고와 재난으로

망연자실한 분들께 위로와 능력의 바람이 불길 원합니다.

 

주의 영광 가득한 새날이 속히 오고

주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만군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회복하여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시80:7)

Restore us, O God of hosts; let your face shine, that we may be saved! (Psalms 80:7)

 

하나님 아버지,

어그러지고 부서진 세상에

성령의 바람이 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10.12이-메일 목회 서신)

하나님의 형상

1.

지난 주일 저녁,

10월의 첫째 주간을 맞이하기 위해서

하루를 마감하던 우리에게 끔찍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11시부터 속보가 뜨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만 해도 라스베이거스에 총격 사건이 있었고

현장을 연결해서 목격자들의 얘기를 듣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엄청난 일이 발생했습니다.

미국의 최근 역사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총격 사건이었습니다.

 

게다가 범인이

멀쩡한 60대의 은퇴자라는 사실에

우리는 또 한 번 놀랐고 아연실색했습니다.

 

계속되는 보도를 보면서

총격을 가한 범인이 그동안 사들인 총기의 숫자,

도박장 출입, 동거녀의 정체,

도피할 것을 계획했으며, 공모의 가능성까지

정확한 범행동기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뉴스를 접할 때마다 설레설레 고개를 졌게 됩니다.

 

이번처럼 불특정 다수를 향한 총격까지 왔으니

이제는 정부나 정치권이 나서서 최고 우선순위를 두고

무엇보다 총기를 규제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미국 총기협회의 로비가 강하다고 해도

무고한 희생자가 다시는 나오지 않도록

구체적인 조치를 취하길 바라고

희생자 유가족들과 부상 중인 분들의 위로와 회복을 기도합니다.

 

2.

저는 이번 사건을 보면서

다시 한번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씀을 떠올렸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자기의 형상대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모든 사람에게 새겨져 있습니다.

 

지위고하, 남녀노소, 인종 등을 불문하고

모든 사람이 존귀하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무차별 총격은 물론

생명을 담보로 하는 범죄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을 향한 폭행과 폭언 등은

결국 하나님을 향한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60명에 가까운 분들이 목숨을 잃은 것입니다.

통탄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몸과 마음도 무척 아프실 것입니다.

 

범죄를 저지른 분이

모든 이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있음을 알았어도 그렇게 했을까요!

만약에 그렇다면

분노한 시민의 말대로 그분은 죽어서 정말 나쁜 곳에 가야 할 것입니다.

 

3.

세상이 혼란스럽습니다.

험한 일이 자꾸 일어납니다.

우리가 사는 미국에서 일어난 사건이기에 남의 일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모든 사람의 양심에, 생각과 삶 속에 되살아나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답게 생각하고 행동하기 원합니다.

이웃을 하나님처럼 대우하고 사랑하기 원합니다.

 

세상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7)

So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he created him;

male and female he created them.(Gen 1:27)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사는 세상에 평화를 주옵소서.

주님을 두려워하는 세상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10.5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