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동안에

좋은 아침입니다.

 

성경 통독이 전도서에 와 있습니다.

앞으로 예언서를 지나면 신약성경에 도착하게 됩니다.

 

통독할 때 마다 느끼는데

전체 성경 가운데 구약의 분량이 꽤 많습니다.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그들을 통해서 이루시려는

구원의 역사가 그만큼 길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전도서는

인생의 시계추를 맨 끝에 갖다 놓고

인생 전체를 조망하는 말씀입니다.

 

너의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전12:1)

– 전도서 말씀의 주제입니다.

 

저는 여기서 “청년의 때”를

누구에게나 가장 젊은 “지금 이 순간”을 가리키는 말씀으로 읽습니다.

그러니 <지금 여기>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마음에 품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2.

전도서 3장 12절은 짧지만

마음에 깊은 울림과 실제적인 도전이 있었습니다.

 

이제 나는 깨닫는다

기쁘게 사는 것, 살면서 좋은 일을 하는 것,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랴! (새번역)

I perceived that there is nothing better for them than

to be joyful and to do good as long as they live;(Ecclesiastes 3:12)

 

주일에 살펴보는 베드로전서 말씀도

“우리가 누구인가”로 시작해서

“그러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변입니다.

 

하나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구별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랑이 되고,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전도서는 그 가운데 한 가지 비결로

“기쁨”과 “선행”을 제시합니다.

 

기쁘게 사는 것, 살면서 좋은 일을 하는 것,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랴!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길과 진리와 생명을 얻은

신앙의 기쁨을 생각했습니다.

 

그 기쁨이 우리 안에 넘쳐서

세상으로 흘러가는 것이

살면서 좋은 일을 하는 선행일 것입니다.

역시 신앙과 삶의 통합이자 연결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을 기뻐하고

주님 주신 은혜 속에서 기쁘게 살기 원합니다.

세상 속에서 좋은 일을 하면서 하루를 살기 원합니다.

 

이제 나는 깨닫는다

기쁘게 사는 것, 살면서 좋은 일을 하는 것,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랴! (새번역)

I perceived that there is nothing better for them than

to be joyful and to do good as long as they live;(Ecclesiastes 3:12)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오늘 하루

기쁘고 선하게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7.20이-메일 목회 서신)

레갑 족속

좋은 아침입니다.

 

새벽기도회에서 예레미야서를 읽는 중에

“레갑 족속(the Rechabites)이라는 특별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예레미야 당시에 레갑 사람들은

바벨론 군대를 피해서 예루살렘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성전의 한 방으로 초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포도주가 가득 든 항아리를 가져다가

포도주를 마시라고 권하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 말씀대로 실행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고

다음과 같이 자신의 조상 요나답의 말을 전합니다(렘35:6-7).

 

– 너희는 물론 자손들도 포도주를 먹어서는 안 된다 (거룩한 삶의 표시)

– 집도 짓지 말고 곡식의 씨도 뿌리지 말고 포도나무도 심지 말고 유목민으로 장막에서 살아라.

– 그러면 나그네로 사는 땅에서 하나님께서 너희와 함께해 주실 것이다.

 

레갑 족속은 그들의 조상 요나답이 가르쳐준 전통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레갑 족속의 구별된 삶은

아브라함과 모세의 전통을 저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이스라엘과 비교됩니다.

 

2.

레갑 사람들에 대한 성경의 기록이 많지 않습니다.

 

레갑사람들은 양을 치면서 이곳저곳을 다니는 유목민이었습니다.

이집트 왕자 모세가 광야에서 40년을 보내고

그곳에서 겐 족속의 제사장 이드로의 딸을 아내로 맞게 되는데,

레겝 사람들이 겐 족속(the Kenites)에서 왔다고 봅니다 (역대상 2;55).

 

레갑 사람들이 최고의 조상으로 여기는 요나답에 대한 말씀이

열왕기하 10:15-17에 나옵니다.

 

엘리야가 세운 예후가 잔악했던 아합왕의 가문을 치러갈 때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요나답)”에게 함께 가서 의로운 일을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때 여호나답이 기꺼이 예후를 도왔습니다.

 

레갑 사람들은

이스라엘 정통 가문이 아니었지만

의로운 일에는 힘을 합쳤습니다.

 

무엇보다 3백여년 동안

조상 요나답이 전한 말을 그대로 지키며 살았습니다.

정착민으로 살기를 포기하고

구름처럼 떠다니는 장막 생활을 했습니다.

포도주를 입에 대지 않으면서 거룩함을 실천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자신들의 길을 걸어간 것입니다.

 

3.

레갑의 아들 요나답은 왜 후손들에게 나그네 삶을 살라고 했을까요?

 

자신들의 본업인 유목민의 삶을 지속하라는 뜻일 겁니다.

조상 대대로 같은 일을 하는 것은 언제나 큰 귀감이 됩니다.

 

장막에서 지내는 유목 생활은 그만큼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착하지 않으니 세상에 마음을 둘 수 없고

하나님께만 마음을 두고 살아야 하기에

나그네 삶을 살라고 부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레갑 사람들을 축복하십니다: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레갑의 아들 요나답에게서 내 앞에 설 사람이 영원히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렘35:19)

 

자신의 길을 지속적으로 걷기가 쉽지 않습니다.

요즘처럼 급변하는 시대에는 더욱 어렵습니다.

 

다른 것들은 시대에 따라서 변하고 적응해 나가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한결같기 원합니다.

사시사철 푸르른 소나무와 같은 상록수 신앙을 갖기 원합니다.

 

예레미야가 레갑 사람의 가문에게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너희 선조 요나답의 명령을 순종하여 그의 모든 규율을 지키며

그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행하였도다 (렘 35:18)

you have obeyed the command of Jonadab your father

and kept all his precepts and done all that he commanded you (Jer 35:18)

 

하나님 아버지,

나그네 인생길을 걸으면서

레갑 사람들의 신앙을 본받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7.13이-메일 목회 서신)

하나님의 속마음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부터 읽기 시작한

예레미야 30-33장을 일주일 동안

조금씩 조금씩 음미하면서 읽고 있습니다.

 

성경 통독은 하루에 3장씩

꾸준히 달려가면서 읽는 방식입니다.

성경공부는

본문 말씀을 이리저리 생각하면서 고민하고 풀어가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성경을 천천히 그리고 자세히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한 자 한 자 짚어 가면서 읽고

마음에 와 닿는 말씀을 만나면

그 말씀을 붙잡고 한참을 멈춰 서 있는 것입니다.

 

2.

수요 예배와 새벽기도회에서

권사님들과 예레미야서를 읽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말씀이 거칠고, 비극적인 이스라엘 역사를 살펴보는 것이

마음에 부담이 될 정도로 무겁습니다.

 

그러다가 위로와 소망의 말씀인

예레미야 30-33장을 만나서

사막 길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처럼

일주일을 머물면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은혜를 맛보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서의 묘미는

소망의 말씀이 52장 한 가운데인

30-33장에 위치해 있다는 것입니다.

 

30장에 오기까지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의 죄악상이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눈물로 탄식하며 호소하는 선지자의 애원은

바람처럼 스쳐 지나갈 뿐이었습니다.

 

33장이 지나면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성전이 무너지는 과정을

눈에 보듯이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감옥에 갇히고

죽을 위기를 넘기면서 민족의 마지막 순간을

온 몸으로 맞이할 것입니다.

 

3.

이처럼 비극적인 이스라엘 역사를 전하는 예레미야서 한 가운데

위로와 소망의 말씀이 씨-처럼 들어있습니다.

아무 조건없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받아주시고, 회복하시고

돌이 아니라 마음에 새 언약을 새겨 주십니다.

 

예레미야서의 한 가운데 소망의 말씀이 있는 것을 보면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속마음을 떠올려봅니다.

 

때때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대로 세상이 돌아가지 않을 때는 불평과 원망이 나옵니다.

스스로 하나님을 떠나서 제 길로 갈 때도 많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진심(속마음)을 이해하면

다시금 신앙을 회복하고 주의 길을 걷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 펼쳐져도

하나님께서는 그 속에 “희망의 씨”를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속마음을 느끼고

우리도 마음 깊은 곳에서 주님을 사랑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하나님과 교통하기 원합니다.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분명히 나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 (예레미야 32:40-41)

And I will put the fear of me in their hearts, that they may not turn from me.  I will rejoice in doing them good,

and I will plant them in this land in faithfulness, with all my heart and all my soul. (Jer 32:40-41)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하루 살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속마음을 그대로 느끼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7.6 이-메일 목회 서신)

주의 은혜

좋은 아침입니다.

 

1.

새벽 기도회에서는

오늘부터 예레미야 30장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예레미야서는

남유다가 멸망하기 20여 년 전부터

하나님을 떠난 지도자들과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으면 심판이 임할 것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서 한 가운데인30-33장에

위로와 소망의 말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새벽에 권사님들과

예레미야서의 심판 메시지를 읽기가 쉽지 않았는데

오늘 새벽부터 30장을 읽기 시작하니 말씀의 은혜가 쏟아지는 것 같았습니다.

 

2.

예레미야서의 핵심 메시지 가운데 하나가

“돌아오라(return)”입니다.

 

예레미야서에서 돌아오라는 말씀은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면서

하나님께 돌아와서 하나님 백성으로 살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나님 백성으로 언약 가운데 살 수 있지만,

교만한 마음에 하나님을 버리고 끝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라는 <인과응보>의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위로와 소망의 말씀인 30장에 이르면

돌아오라는 조건이 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무조건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3.

은혜는 선물입니다.

선물에 조건이 붙으면 거래가 됩니다.

 

예레미야가 말하는 은혜 역시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내려주시는 선물입니다.

아무 조건이 없습니다.

 

예레미야서의 은혜를 묵상하면서

마치 하나님의 은혜가 공기처럼 우리 주변에 가득 차 있음을 느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마음을 열면

은혜가 큰 물결처럼 우리 안으로 밀려 들어오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져야 은혜가 임하는 것이 아니고,

믿음을 가져야 은혜라는 방으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믿음으로 문을 열면,

문 앞에까지 이른 은혜가 우리에게 밀려 들어오는 것입니다.

주체할 수 없는 주님의 선물, 주님의 은혜입니다.

 

새벽에 이 은혜를 묵상하니 얼마나 감사하고,

은혜가 주님의 선물인 것이 실감 나던지요!

 

오늘 하루

주님의 은혜로 살기 원합니다.

 

은혜로 숨을 쉬고,

우리 마음과 삶에 물결처럼,

샌프란의 밀려오는 안개처럼,

맑은 공기처럼 임하는 주의 은혜를 체험하기 원합니다.

 

그들에게서 감사하는 소리가 나오고 즐거워하는 자들의 소리가 나오리라. 내가 그들을 번성하게 하리니 그들의 수가 줄어들지 아니하겠고 내가 그들을 존귀하게 하리니 그들은 비천하여지지 아니하리라 (예레미야 30:19)

Out of them shall come songs of thanksgiving, and the voices of those who celebrate. I will multiply them,

and they shall not be few; I will make them honored, and they shall not be small. (Jer 30:19)

 

하나님 아버지,

믿음으로 마음의 문을 여는

참빛 식구들의 마음과 삶을

주의 은혜로 가득 채워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6.29 이-메일 목회 서신)

서서평

좋은 아침입니다.

 

1.

LA에 있는 한 신학교에서

강의하고 있습니다.

내일 마무리하고 저녁에 올라갑니다.

 

무척 더워서 샌프란 생각이 많이 나고

하루 종일 강의하다 보면 조금 지치기도 합니다.

아내가 중간 중간에 카톡으로 교회소식 알려주는 것이 무척 반갑니다.

 

오늘은 저녁에

이곳에 있는 지인들과 <서서평>이라는  한국 영화를 관람했습니다.

 

서서평은 독일 출생입니다.

미혼모 어머님에게 낳아서

세 살 때 어머니가 서서평을 할머니 댁에 맡겨두고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아홉 살이 되자 할머니마저 돌아가십니다.

서서평은 어머니를 찾아서 주소 하나 들고 대서양을 건넜습니다.

그리고 간호사가 됩니다.

 

태평양 건너 조선이라는 곳에는

나병(한센병,문둥병)환자, 굶주리고 병을 앓는 아이들이 많은데

병원이나 의료진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광주에 자리잡은 서서평은

당시 가장 천한 사람들의 친구가 됩니다.

제주도까지 다니면서, 여성 지도자들을 배출합니다.

 

마지막 54세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의 시신까지 조선사람들을 위해서 기증했습니다.

영화는 그 장면부터 시작되고 마무리됩니다.

 

서서평 선교사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남은 것은 동전 몇 개와

그나마도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남은 담요

입고 있던 한복 외에 재산이 하나도 없었답니다.

 

하지만, 서서평 선교사를 통해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해 듣고 삶이 변해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한 사람들이 무척 많이 남아있어서

그녀의 장례식에 수천명이 모였고, 당시 동아일보도 보도할 정도였습니다.

 

또 한 가지,

그녀의 침대 위 벽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남겨 있습니다.

“No Success, But Service (성공이 아니라 섬김)”

 

그렇게 서서평 선교사는

그녀의 한글 이름처럼

“서서히/천천히, 그리고 평안하게” 우리 조선사람들과 더불어

신앙과 인생의 길을 걷고 주님께 갔습니다.

 

영화는 다큐멘터리식이어서 담담하게 만들어졌지만

서서평의 삶을 느끼기에 충분했습니다.

 

우리도 오늘 하루

새 날을 시작합니다.

 

무엇을 위해서 살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우리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고

천천히 그리고 평안하게 주어진 인생길을 걷기 원합니다.

 

네가 나를 부르면 내가 너에게 응답하겠고

네가 모르는 크고 놀라운 비밀을 너에게 알려주겠다 (렘 33:3, 새번역)

Call to me and I will answer you,

and will tell you great and hidden things that you have not known. (Jer 33:3))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하루도도

참빛 식구들이 가는 길에 동행해 주셔서

진리와 생명의 길, 섬김의 길을 걷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6.22 이-메일 목회 서신)

                   

사랑과 질서

좋은 아침입니다.

 

1.

나름 노력하지만

저와 참빛 식구들이 깊게 소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숫자가 그리 많지 않은데도 말입니다.

 

예배에 못 오신 분들께

주일 저녁 카톡으로 안부 인사와 설교를 보내드립니다.

 

친절하게 먼저 기도 제목을 나눠주시는 분들도 있고,

잠깐 만나서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표정을 살피면서 기도 제목을 알아채기도 합니다.

목회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그런 능력을 주시는 것 같습니다.

 

헌금 봉투에 기도 제목을 써 주시는 것도

제게는 아주 큰 도움이 됩니다.

책상에 놓고 한 주간 열심히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주 기도 제목에서

“사랑과 질서”라는 말을 만났습니다.

참 좋은 표현입니다.

 

사랑에 질서가 없으면

무분별하고 보기에 안좋습니다.

남녀 간의 사랑만이 아니라

가족 그리고 성도 간의 사귐에도 질서가 필요합니다.

 

사랑은

사랑을 주도하는 사람보다

그 사랑을 받는 수혜자에 의해서 결정 나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상대방 처지에서 생각하고 배려하는 것이 질서일 것입니다.

 

물론

지나치게 질서만 강조하면 사랑에 힘이 빠집니다.

우리 모두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서로의 이해가 필요하고, 위로와 격려가 필요합니다.

질서를 생각하다가 자칫 사랑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사랑과 질서의 긴장,

사랑과 질서의 조화가 꼭 요청됩니다.

 

우리 참빛 공동체 안에 사랑과 질서가

아름답게 나타나길 기도하겠습니다.

 

2.

시편을 읽으면서 비슷한 말씀을 만났습니다.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 (시편 85:10-11)

 

Steadfast love and faithfulness meet;

righteousness and peace kiss each other.

Faithfulness springs up from the ground,

and righteousness looks down from the sky. (Psalms 85:10-11)

 

이보다 멋진 말씀이 어디에 또 있을까요?

 

인애와 진리 – 진실한 사랑,

의와 화평 – 올바른 평화,

땅의 진리와 하늘의 의가 합쳐지는 순간입니다.

하늘과 땅이 의기투합했습니다.

 

우리 안에

그리고 세상 속에서도

이런 조화와 통합이 일어나길 기대합니다.

 

무엇보다

땅의 진리를 원하시니

오늘 하루도 진실하게 살기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랑과 질서, 인애와 진리, 의와 화평, 그리고 땅의 진실함이

하늘의 의와 만나는 멋진 사건이 일어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6.15 이-메일 목회 서신)

거룩, 일상의 과업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설교에서는 거룩에 대해서 함께 나눴습니다.

 

거룩 (sanctification, 성화, 구별) –

때로는 막연하고,

자신과 상관없는 매우 신실한 그 누군가의 몫처럼 보이고,

요즘 세상에 적용하기에는 진부한 단어처럼 생각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거룩(예배와 삶의 구별)”이야말로

성경에서 알려주는 기독교의 핵심가치입니다.

 

그리스도인 개인은 물론

교회 공동체가 거룩함을 상실한다면,

(예수님 말씀처럼) 맛을 잃고 길가에 버려져서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는 소금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든

그리스도인으로 구별된 거룩함을 지니고 있어야 하고

그것이 삶을 통해서 드러나야 합니다.

 

2.

거룩함을 너무 멀게 생각하지 않고

일상의 삶 속에서 실천하기 원합니다.

 

매일 반복해서 일어나는 때로는 지루한 일상,

매일 만나는 가족과 동료들, 그리고 교회 식구들,

오고 가며 스치는 사람들과 우리가 사는 세상 속에서

거룩을 유지하고, 거룩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생각이 구별되고

행동이 구별되고

우리의 삶 자체가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그리스도-인(Christ-ian)>이 되는 것이지요.

 

3

지난 설교 시간에 소개했던

로렌스 형제의 <하나님 인재 연습>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옵니다.

 

로렌스 형제가 터득한 하나님과 대화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단순히 자신의 평범한 일상사를 수행하는 것이다.

그는 맡겨진 일과를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순종의 마음으로 감당했다.

 

그는 기도 시간을 다른 시간들과

특별히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중대한 과오라고 믿었다.

경건의 시간에 드리는 우리의 기도가 우리를 그분과 연합하게 한다면,

평범한 일상 속에서 만나는 다른 모든 활동들도 우리를 그분과 하나 되게 할 것이다.

 

그는 기도하지 않을 때도 그와 똑같은 의식 속에 살았다.

늘 하나님 곁에 가까이 머물면서 온 힘을 다하여 그분을 찬양하고 송축했다.

그 덕분에 그의 삶은 언제나 기쁨으로 충만해 있었다. (28쪽)

 

하루하루의 삶이 구별되고,

주님과 동행하고,

흩어진 나그네로 살아가지만

주님의 백성이 누리는 특별한 기쁨으로 충만하기 원합니다.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시편68:19)

Blessed be the Lord, who daily bears us up;

God is our salvation.(Psalms 68:19)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하루도

주님 앞에서 거룩의 길을 걷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6.8 이-메일 목회 서신)

블랙아웃

좋은 아침입니다.

 

1.

올해가 시작된 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6월을 맞았습니다.

어릴 때는 시간이 참 느리게 갔는데

어른이 되니 너무 빠르게 앞서갑니다.

 

그렇다고 초조해도 안되고

시간에 이리저리 끌려가도 안될 것입니다.

주어진 시간을 하나님께 드릴 선물(present)로 만들며

날마다 살기 원합니다.

 

3년 전 이맘 때

큰 아이와 함께 샌프란에서 미시간까지

3박 4일 동안 자동차 여행을 한 적이 있습니다.

부자가 줄곧 함께 운전하고, 먹고, 자고 하면서

여러가지 대화를 나눴습니다.

 

대학원에 가면 무척 바쁘겠지만

시간이 되면 (아니 시간을 내서) 하루에 5-10분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잠잠히 거하는 시간>을 갖기를 부탁했습니다.

 

우리 교인들께도 틈날 때마다

말씀드린 부탁이기도 합니다.

 

2.

우린 너무 바쁘게 삽니다.

정신없이 앞을 향해 뛰고,

위로 치고 올라가기 위해서 안간힘을 씁니다.

 

행여나 조금이라도 뒷걸음친 듯 하면

조바심을 내고 마음이 상해서 시무룩합니다.

 

지난 주일 설교에서

여러가지 시험이 잠깐 지나간다고 했듯이,

세상이 주는 기쁨도 잠깐 지나갑니다.

 

그러기에

영원을 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잠깐 지나갈 것들에 인생을 걸고

온 힘을 쏟는 것도 경계할 일입니다.

 

3.

항공기 예약에서 자주 쓰는 용어 가운데

블랙아웃 데이트(blackout date)가 있습니다.

휴일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이 여행하는 기간에는

세일이나 프로모션 상품이 적용되지 않는 때입니다.

그때는 정상적인 가격으로 티켓이 판매될 뿐 모든 혜택이 닫힙니다.

 

조금 다를 수 있지만

블랙아웃 데이트를 우리 삶에도 적용해 봅니다.

 

세일로 물건을 팔고, 손님들을 초대하는 것은

아주 분주한 삶입니다.

모든 것이 가능한 듯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삶입니다.

 

때로는 모든 삶을 블랙-아웃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어 blackout에는 불이 나가서 깜깜하다는 뜻도 있지요)

왠만한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서

외부로부터 삶을 차단해 보는 것입니다.

 

신앙에도 블랙아웃이 필요합니다.

모든 것을 차단하고, 하나님과 깊은 교제의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하루에 5-10분 만이라도

삶의 불을 모두 끄고, 이런저런 삶의 요구를 차단하고

하나님 앞에 차분히 거하기 원합니다.

삶의 지성소를  확보하기 원합니다.

 

바쁘고 혼란한 세상이지만

평정심을 잃지않고

주어진 길을 차분하게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시편 62:5)

For God alone, O my soul, wait in silence, for my hope is from him. (Psalms 62:5)

 

하나님 아버지

주님 앞에서 갖는 고요한 시간이

우리 삶에 평안과 새 힘을 주는 통로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6.1 이-메일 목회 서신)

꼭 기도응답만

좋은 아침입니다.

 

1.

새벽에 기도하면서

기도 응답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많은 경우 기도와 기도 응답을

같은 선상에서 생각합니다.

기도했으면 어느 정도 응답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가 매번 응답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랫동안 그것도 간절히 기도했지만

기도 응답은 저 멀리 있는 무지개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힘이 좀 빠집니다.

 

기도한 사람과(경우와)

전혀 또는 거의 기도하지 않은 사람이(경우가)

별로 차이가 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고도 잘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헷갈리게 만듭니다.

 

2.

기도와 기도 응답을 지나칠 정도로

인과관계로 설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능력을 자신의 입장으로 끌어들이는

자기중심적 신앙일 수 있습니다.

일종의 기복신앙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하나님 마음속으로 들어갑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도 느낍니다.

이것이 기도의 최종 목적일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기도 응답보다 앞서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거래(deal)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주고받는 선물보다 신뢰가 더 중요한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면

기도 응답에 따라 신앙이나 마음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신뢰가

신앙과 삶을 통제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좋으신 분이고 (God is so good)

하나님께서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이고

하나님께서 항상 자신과 함께하실 것이라는 굳은 신뢰입니다.

 

하나님과의 신뢰에서 기도가 시작되고

중간에 여러가지 우여곡절을 겪지만

하나님을 향한 신뢰속에서 기도가 마무리됩니다.

 

3.

기도 응답 여부에 따라서 신앙이 흔들리고

기도 응답에 하나님의 존재 여부를 가리려 하고

행여나 기도 응답을 자랑하는 것은 조금 아쉬운 신앙입니다.

 

쉽지 않지만 그래도 바라기는

기도 응답을 넘어서는

진실되고 깊은 기도가 우리 가운데 있길 원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한

변치 않는 신뢰가 굳게 자리 잡기 원합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시편 18:1)

I love you, O Lord, my strength. (Psalms 18:1)

 

하나님 아버지

기도를 통해서 주님을 깊이 만나게 하옵소서.

참빛 식구들을 아주 많이 사랑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5.24 이-메일 목회 서신)

눈물의 선지자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새벽기도회와 수요예배에서는

예레미야서를 읽고 있습니다.

 

새벽 기도회에서는 성경을 한장씩 읽어 나갑니다.

하루에 한 장씩 읽어가도 보슬비에 옷이 젖듯이

5년여가 지나면 성경을 일독하게 됩니다.

일독 차례에 따라서 예레미야에 와 있습니다.

 

수요예배에서는 신구약 성경을 두루 각 책별로 공부합니다.

그동안 신약성경은 공관복음서를 빼고 모두 읽었습니다.

구약도 잠언과 전도서, 소예언서까지 꽤 많이 읽었습니다.

이제 남은 구약성경 가운데 예레미야서를 읽고 있는데

우연히 새벽기도회와 겹친 것입니다.

 

지난 수요예배에서는

예레미야 9장을 읽었습니다.

1절부터 예레미야 선지자의 별명이

왜 눈물의 선지자인지 알려주는 말씀이 등장했습니다: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 (예레미야9:1)

Oh that my head were waters, and my eyes a fountain of tears,

that I might weep day and night for the slain of the daughter of my people!

 

2.

구약의 선지자 가운데

예레미야 만큼 감성이 풍부한 인물이 없습니다.

 

예레미야서를 읽다 보면

그는 늘 하나님 앞에서 탄식하고

애원하고 눈물로 기도합니다.

 

예레미야의 마음과 삶 속에

예수님이 들어있는 것 같습니다.

 

예레미야의 눈물을 보면서

우리 자신을 돌아봅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백성을 위해서

주야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우리 역시 이웃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는 영적 감성을 갖고 있는지요.

 

신앙이 우리 자신 안에서 맴돌면 안 됩니다.

신앙이 나를 넘어서 이웃에게 펼쳐지고

그 안에서 주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의 마음을 닮아서

이웃의 아픔에 눈물로 동참하고,

아픈 이웃들과 함께 우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주르륵 눈물이 흐를 정도로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우리 교회에도

골방에서 눈물로 기도하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아프고 힘든 이웃들과 함께 공감하고

같은 마음으로 기도하기 원합니다.

 

물론 우리가 사는 미국과 태평양 건너 조국

그리고 하나님을 잊고사는 세상을 위해서도

눈물로 기도하기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각박하고 이기적인 세상 속에서

주님의 사랑을 눈물과 진심으로 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5.18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