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이로움

좋은 아침입니다.

 

1.

어제 아침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교회 권사님께서 입원해 계신 병원을 방문했습니다.

 

샌프란 높은 곳에 위치한 병원인데

주차가 힘들어서 멀리 세워놓고

언덕길을 내려와야 했습니다.

 

요즘 샌프란은 저녁이 되면 안개가 밀려오고

아침에는 종종 이슬비가 내립니다.

 

걷다 보니 어느 지점에서인지

병원 건물들이 액자처럼 배치가 되고

그 사이로 샌프란 도시가 내려다보였습니다.

너무 아름다워서 저도 모르게

“와(wow)”하고 감탄사가 나왔습니다.

 

순간의 경험이지만

아침부터 마음이 활짝 열렸습니다.

그 짧은 순간의 이미지가

온종일 눈앞에 그려졌습니다.

 

2.

연구에 의하면

“와(wow)” “야(yay)” “오(oh)”등의 감탄사를 자주 사용할 때

행복한 감정을 갖게 된답니다.

 

“경외를 불러일으키는 경험 (awe-inspiring experience)”

– 감탄사를 외칠 정도로 경이로운 경험을 하는 것이

행복한 사람의 특징이라고 합니다.

 

밤하늘의 별들과

눈 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자연,

감동을 주는 사람들의 모습과 행동 속에서

경외를 불러일으키는 경험을 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에 느끼는 행복이 있습니다.

 

3.

성경에는 하나님 앞에서

특별한 경외심을 느꼈던 인물이나 사건이 많이 나옵니다.

 

무엇보다

40년 동안 이집트 왕자로 살다가

그 다음 40년을 광야에서 살았던 모세 앞에 나타난

떨기나무의 불꽃이야말로 모세는 물론 성경을 읽는 우리에게

놀라움과 두려움을 느끼게 합니다.

 

불꽃이 있는데

가시덤불이 타지 않았습니다.

거룩한 곳이니 신을 벗으라는 음성이 들립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 (I am who I am)”라고 자신을 알리십니다.

가서, 이집트에서 고생하는 동족들을 해방시키라고 말씀하십니다.

 

4.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경외를 불러일으키는 경험을 하는 것은

행복을 넘어서 커다란 축복입니다.

 

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대면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삶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

하나님의 인도 하심을 통해서

소름이 끼치고 전율할 정도의 “경이로움(awesome)”과 마주칩니다.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가 나올 것입니다:

“할렐루야! Praise the Lord!”

 

지난 주일에는

야외예배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친교 하면서 매우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내일모레 맞이할 8월의 첫 주일에는

삶 속에서 만난 하나님 경험,

하나님께서 함께하신 이야기를 마음에 간직하고

성전에 나와서, 하나님을 뜨겁게 예배하며,

서로 고백하고 간증하는 성도의 교제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와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보라

사람의 아들들에게 행하심이 엄위하시도다 (시편 66:5)

Come and see what God has done:

he is awesome in his deeds toward the children of man.(Psalms 66:5)

 

하나님 아버지

새달을 맞이하면서

하나님께서 손수 행하시는 일을 통해서

경이로움을 맛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6.8.5 이-메일 목회 서신)

뿌리깊은 신앙

좋은 아침입니다.

 

1.

어제 수요예배에서는 사도행전 2장

오순절 성령 강림에 대한 말씀을 나눴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임한 오순절 성령강림은

언제 읽어도 신바람 나는 말씀입니다.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온 집에 가득했고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보이고 그것이 각 사람에게 임했습니다.

사도들이 성령의 말하게 하심으로 각기 다른 언어로 말했습니다.

 

바람 소리, 불의 혀와 같은 모습,

오순절을 맞아서 예루살렘에 온 다양한 사람들의 언어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

3천 명을 회개시킨 베드로의 설교,

서로 물건을 통용하고 기도하며 기쁨으로 떡을 떼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초대교회의 모습까지

사도행전 2장은 교회의 시작을 알리는 팡파르입니다.

 

성령이 각 사람에게 임했듯이

사도행전의 역사가 참빛 식구들께 개별적으로 임하고

우리 교회 위에도 그대로 임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오순절 성령 강림을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읽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성령이 임하는 모습보다

성령을 받고 변화된 제자들의 모습에 주목해야 합니다.

 

저는 어제 수요예배에서

성령을 가리키는 바람을 통해서 새로운 생명을,

하나님의 임재인 불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얻게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각기 다른 언어를 말한 것은 복음이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족속들,

즉 땅끝까지 전해질 것을 보여주신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성령의 체험은

회개를 통과하면서 새로운 사람, 새로운 생명, 새로운 삶으로 인도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힘을 줍니다.

 

3.

나사못에 비유해서 설명했습니다.

 

성령을 체험하는 것은

나사못이 나무 판에 깊이 박히는 것과 같습니다.

쉽게 흔들리지도 빠지지도 않습니다.

 

아무리 나사못이라도

드라이버가 아닌 망치로 내리치면

흔들흔들 나무판에 박혀서 다시 빠지곤 합니다.

 

십자형 드라이버를 사용해서

차근차근 못을 박아야 보기도 좋고 견고합니다.

 

신앙이 그렇습니다.

 

성령 체험을

단지 감정적인 경험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사못을 망치로 내려치는 것과 같습니다.

일시적 충격에 못이 박히지만 쉽게 빠져버립니다.

어떤 경우는 나무판이 쪼개지기도 합니다.

거부반응을 일으킨 것입니다.

 

4.

성령 체험은

체계적이고, 꼼꼼한 신앙의 모습입니다.

 

감정이 동반되지만

의지와 때로는 육체까지 주님을 경험합니다.

그 체험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릴 정도로 구체적입니다.

전율이 일기도 합니다.

 

새로운 생명의 세계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임재를 의심 없이 확신하고

세상 속에서 복음의 증인이 되는 사건입니다.

 

깔끔하고 견고하게 자리잡은 나사못처럼

인생의 희로애락에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신앙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견고해지기 원합니다.

확신 가운데 거하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기 원합니다.

 

그 힘으로 주어진 삶을

참되고, 아름답고, 선하게 살기 원합니다.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고전 1:8)

Our Lord Jesus Christ who will sustain you to the end,

guiltless in the day of our Lord Jesus Christ. (1Cor 1:8)

 

하나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믿음이

나사못처럼 우리 안에 견고하게 뿌리내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6.7.29 이-메일 목회 서신)

낯선 시각으로

좋은 아침입니다.

 

1.

수요예배에서

사도행전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일곱 번에 걸쳐서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지에 대한 방법을 배운 후에

맞이하는 사도행전이기에

말씀을 대하고 읽는 깊이가 다를 것 같습니다.

그만큼 기대가 큽니다.

 

사실 요즘같이 바쁜 시대에

차분하게 성경을 읽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 새벽기도회를 빠짐없이 나오다가

다른 도시로 이사한 형제가 있었습니다.

미국 교회를 출석하던 형제였는데

떠나기 전 식사하는 자리에서

작은 교회 새벽기도회 자리를 지켜준 것에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니에요, 제가 좋았습니다.

새벽마다 성경 한 장씩 읽는데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성경을 읽을 것 같지 않았어요” 라고 답했습니다.

 

맞는 말일 것입니다.

보통 결심이 아니면

평상시에 성경을 가까이하기가 생각처럼 쉽지 않습니다.

솔직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2.

시간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알파고가 나오고 포켓만 고가 나오는 오늘날

하나님 말씀이 신선하게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웬만큼 교회에 다닌 분들은

성경의 줄거리를 대강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성경을 대충대충 읽게 됩니다.

 

수요예배에서 사도행전을 시작하고

속회에서는 마가복음을 마치고

청년부에서는 요나서를 읽고

새벽기도회에서는 시편을 읽고 있는데 (휴- 저만 많이 읽는가 봅니다^^)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

“낯선 시각으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낯선 사람을 만나거나

낯선 환경에 들어가면

호기심과 경계심을 갖고 차분하게 대처합니다.

무엇보다 자세히 관찰하게 됩니다.

모든 것이 처음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도

처음 읽는 말씀처럼,

낯선 시선으로 읽는 것입니다.

그러면 새로운 것도 발견할 수 있고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에 질문이 생기고

성경이 하나님 말씀으로 새롭게 다가옵니다.

 

3

성경을 자세히 읽다 보면

현재의 가치관이나 문화로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나 이야기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성경과 우리 사이에

시간, 문화, 지리적인 간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성경 자체의 사건이나 이야기를 넘어서

성경 말씀 속에 깃든 “의미”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좋습니다.

 

왜 이런 사건, 이야기, 주제가

성경에 쓰였는지,

성경 말씀 속에 담긴 의미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표면적인 글보다

하나님께서 성경 깊이 숨겨놓으신 보물을 찾는 자세로 말입니다.

 

“아- 이런 뜻이구나”라고 생각이 되면

그것을 현재 자신의 상황과 오늘날 우리 세상에 적용하는 것이지요.

 

하나님 말씀인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기 원합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 각자에게 들려주시는 음성을 듣기 원합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시 119:18)

Open my eyes, that I may behold wondrous things out of your law. (Ps 119:18)

 

하나님 아버지

주의 말씀이 참빛 식구들이 걸어가는 발에 등이되고

가는 길에 빛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6.7.22 이-메일 목회 서신)

고우 (Go)

좋은 아침입니다.

 

1.

18년 전 우리 가족은 미국에 왔습니다.

그때 두 아이들이

포켓몬이라는 카드를 갖고 싶어했습니다.

당시에 포켓몬 열풍은 대단해서

저도 피카추라는 캐릭터를 알 정도였습니다.

 

오늘 저녁 아내와 동네를 산책하는데

엄마와 아들, 딸이 맞은 편에서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초등학생쯤 되는 아들이 열심히 셀폰을 봅니다.

지나치다가 슬쩍 보니 요즘 가장 대세라는 <포켓몬 고> 게임을 하고 있습니다.

엄마가 저를 보고 미소를 짓습니다.

 

어제 폐북에는

영어권 목회를 하시는 젊은 목사님이

포켓몬 고를 교회 사역에 도입할 수 있는 팁(tip)을 영상으로 알려주었습니다.

 

포켓몬이 교회에 자주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교회 wifi를 공유해 주는 센스를 발휘하고

10시 30분쯤 포켓몬이 교회에 나타나게 해서

사람들이 몰려오면 예배로 초대해보라는 팁입니다.

 

그러고 보니 어제 수요 예배에 가는데

젊은 여성 둘이 열심히 셀폰을 보면서

교회 앞을 지나갔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포켓몬이 숨겨져 있나 봅니다.

 

2.

저는 포켓몬 고 게임을 자세히 모릅니다.

그런데 뒤에 붙은 “고(go)”라는 이름이 눈에 띕니다.

 

포켓몬을 찾아서 밖으로 나와야 하고

거리를 걸어야 하기에 “고”라는 말이 붙은 것 같습니다.

 

가로수에 부딪히거나, 도로로 달려들지 않는다면

운동도 되고 괜찮은 게임 같습니다.

젊은 엄마가 아이들과 함께 하는 것도 보기 좋았습니다.

 

“고(go)”즉 가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할락크>입니다.

 

히브리어 할락크에는

어디론가 길을 떠나는,

어떤 일을 시작하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멈춰 있지 않고 발을 떼고 움직이는 것입니다.

 

또한 길 위를 걷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길 위를 걷는 것은

목적지를 향해 가는 여정, 즉 여행길입니다.

인생길을 걷는 것도 할락크입니다.

 

신앙의 길을 걷고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것도 할락크입니다.

말씀을 따라 걷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신앙은 동사입니다.

신앙에 생활이 필요하고

행동이 동반되어야 진정한 신앙입니다.

 

3.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새날을

<할락크> 걸어갈 것입니다.

 

사람들은 셀폰을 보고 포켓만을 찾아서 걷지만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보고 진리를 향해서 걷습니다.

생명 길을 걷습니다.

 

오늘도 참빛 식구들 모두

주님과 동행하시는 하룻길이 되길 바랍니다.

 

참빛 식구들이 걷는 인생길에

주님께서 손을 잡고 동행해 주실 줄 믿습니다.

 

이번 주일 우리 교회 앞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려는 분들이 많이 모여들었으면 좋겠습니다.

포켓만과 비교할 수 없는

길과 진리요 생명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찾고 만나기 위해서 말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사 2:3)

Come, let us go up to the mountain of the Lord, to the house of the God of Jacob,

that he may teach us his way sand that we may walk in his paths. (Is 2:3)

 

하나님 아버지

참빛 식구들이 주의 길을 걷게 하시고

그 길에 주님께서 손잡고 동행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6.7.15 이-메일 목회 서신)

기관차와 객차

좋은 아침입니다.

 

1.

샌프란을 떠나서 미국 대륙을 여행하다 보면

수십 량의 화물 객차를 매달고 철도 위를 달리는

화물열차를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인디애나에 있을 때는

화물열차가 캠퍼스를 지나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자칫 건널목에서 열차를 만나면 수십 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미국의 철도 시스템은

동서 대륙은 물론 미국 전체에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1860년대에

화물 운송을 위한 철도를 놓기 시작해서

동서를 연결하는 철도망이 완성되었습니다.

 

고속도로와 항공편이 발달했지만

여전히 미국 화물의 30% 이상은 철도가 담당합니다.

석탄과 원유, 원목처럼

트럭이나 비행기로 실어 나르기 힘든 화물을 철도로 운송합니다.

 

화물수송 외에도

미국 전역과 캐나다 일부를 연결하는

승객 전용 철도 Amtrak도 있지요.

 

위키피디아를 검색해 보니

현재 미국에서 운행하는 기관차(locomotives)는 3만 대 정도가 있습니다.

그런데 기관차가 뒤에 달고 가는 화차(freight cars)의 숫자가 150만대에 가깝습니다.

기관차 하나가 평균 50량의 화차를 뒤에 달고 가는 셈입니다.

거기에 실은 화물의 무게를 합치면 어마어마한 힘입니다.

 

2.

저는 신앙이

우리 삶에서 기관차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객차가 아무리 많아도 기관차 한 대가 꼭 필요합니다.

기관차가 강력하면

얼마든지 화물 객차를 매달 수 있지요.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시편37:4)

Delight yourself in the Lord,

and he will give you the desires of your heart.(Psalms 37:4, ESV)

 

이 말씀에서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기관차에 해당합니다.

마음의 소원을 이루는 것들은 객차입니다.

 

예수님 말씀도 새겨 들어야 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6:33)

Seek first the kingdom of God and his righteousness,

and all these things will be added to you.(Mt 6:33, ESV)

 

우리 마음의 소원보다,

우리에게 더해 주실 그 모든 것보다

하나님을 먼저 기뻐하고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라는 당부입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속사람(inner nature)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 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고후4:16)

So we do not lose heart. Though our outer nature is wasting away,

our inner nature is being renewed day by day. (2 Cor 4:16, ESV)

 

3.

세상에 살다 보면

정작 중요한 기관차보다

뒤에 매달린 화차(freight cars)에 정신을 쏟을 때가 많습니다.

 

치열한 경쟁과 불확실성,

쫓기는 듯 사는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기뻐하고

우리의 속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 삶을 이끄는 기관차임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삶을 이끄는 힘인

기관차에 초점을 맞추기 원합니다.

 

신앙에 힘이 있습니다.

믿음이 우리를 살립니다.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기뻐하기 원합니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시 37:5)

Commit your way to the Lord; trust in him, and he will act (Ps 37:5)

 

하나님 아버지

참빛 식구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주님께서 저들의 힘이 되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6.7.8 이-메일 목회 서신)

능력주시는 자

좋은 아침입니다.

 

1.

엊그제 6월 27일

세계적인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앨빈 토플러에 대해서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폴란드에서 이민 온 유대인 부모로부터

뉴욕에서 태어났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공장 노동자로 일했고

기자로 변신해서 언론인, 작가,

무엇보다 미래학자로 유명해졌습니다.

 

제가 직장 초년병이던1980년대 말

한국사회에 앨빈 토플러 열풍이 불었습니다.

<제 3의 물결> <미래쇼크>가 잇달아 번역되면서

의심 반, 호기심 반으로

앨빈 토플러의 책을 읽었습니다.

 

무엇보다 <미래쇼크>를 읽으면서

“설마 이런 날이 오겠어”혼잣말을 하면서

책장을 넘기던 때가 엊그제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앨빈 토플러가 말한 대로 변했습니다.

 

변화의 속도가 무척 빨라서

개인이 따라잡기 어렵습니다.

 

모든 것이 “일시성”으로 변해서

영원한 것, 변하지 않는 것을 세상에서 찾아보기 힘듭니다.

 

인터넷의 발달 등

정보가 힘이고 재산인 시대가 실제로 찾아왔습니다.

 

우리가 지금 미국에 살듯이

사람들의 터전은

농경 시대의 정착촌 개념을 벗어나서

지구촌으로 흩어지는 신유목민의 삶이 되었습니다.

 

우버와 에어비앤비처럼

소비자가 서비스도 동시에 제공하고

너도나도 시장에 참여할 수 있는

일종의 “프로슈머(prosumer)”시대가 되었습니다.

 

토플러는 끊임없이 배우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지요.

그의 예측력이 놀랍습니다.

 

2.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앨빈 토플러도 풀어낼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복잡하게 변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측하기 어려운 불확실성이

개인은 물론 세상에 먹구름처럼 드리워 있습니다.

 

모든 것이 일시적이고

일회용으로 변하고 있으니

어디에 마음을 두어야 할지 고민이 되고

전도서 기자가 말한 대로 “헛되고 헛되다”는 말씀이 실제로 다가옵니다.

 

그렇기에

더욱더 영원하신 하나님,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

지혜와 힘을 주시는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고

신앙의 소중함을 실감합니다.

 

하나님 앞에 꼭 붙어 있어야지요!

 

세상을 분별하는 명철(understanding)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wisdom)

세상을 이기는 능력 (power)을 주님께 구합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어떤 상황 속에서도 견디고, 뚫고 나갈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주님께 구합니다.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하기 원합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립보서 4:12-13)

I know how to be brought low, and I know how to abound.

In any and every circumstance, I have learned the secret of facing plenty and hunger, abundance and need.

I can do all things through him who strengthen me. (Phil 4:12-13)

 

하나님 아버지

미래에 어떤 상황이 닥치든지

주님의 능력으로 능히 대처하는 참빛 식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6.7.1 이-메일 목회 서신)

                   

날마다

좋은 아침입니다.

 

1.

청년 시절부터 좋아하는 찬양이 있습니다.

 

“날마다 숨 쉬는 순간마다

내 앞에 어려운 일 보네

주님 앞에 이 몸을 맡길 때 슬픔 없네 두려움 없네.

주님의 그 자비로운 손길 항상 좋은 것 주시도다

사랑스레 아픔과 기쁨을 수고와 평화와 안식을”

 

1절만 소개했지만

조용한 멜로디에 가사가 참 좋습니다.

 

날마다 아니 숨 쉬는 순간마다

어려운 일을 봅니다.

 

개인적으로는 물론이고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때마다 몸과 마음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의 자비로운 손길을 구합니다.

 

2.

정호승 시인은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라는 책에서

“풀을 베는 사람은 들판의 끝을 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풀을 베다가 중간에 일어나서 앞으로 보면

“아이구, 아직도 저렇게 많이 남았나!”

“아직 요것 밖에 못했나!”

지금 하는 일이 힘들어지거나

기운이 빠진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풀을 베다가 일어나서 끝을 바라본답니다.

그리고는 “아, 벌써 많이 베었구나”고 생각하지 않고

“너무 많이 남았구나”고 말하면서

자신을 더욱 힘들게 한답니다.

 

시인은 다음과 같이 충고합니다: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은 바로 지금 이 순간입니다”

.

수요예배 잠언과 전도서에서 줄기차게 배웠던 교훈이기도 한데

실제로 지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과거를 생각하면서 추억에 젖거나, 아쉬움으로 마음 상해하고

미래를 생각하면서 꿈도 꾸지만 동시에 불안해하고 염려합니다.

과거는 현재가 지나간 기억이고

미래는 현재가 장차 이룰 기대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포착하고 살 수 있는 시간은 현재뿐이지요.

 

2016년도 절반이 훌쩍 갔습니다.

다시 한 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와 이곳(here and now)의 중요성을 되새깁니다.

 

내일 아침 새벽기도회에서 나눌 시편 말씀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격려가 있습니다.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라 (시편 68:19)

Blessed be the Lord, who daily bears us up; God is our salvation. (Psalms 68:19)

 

하나님 아버지

주님 말씀대로

날마다 순간마다 참빛 식구들의 짐을 져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6.6.23 이-메일 목회 서신)

시편 묵상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은 새벽기도회는 물론

일 년 성경통독에서도 시편을 읽고 있습니다.

새벽기도회에서는 하루에 2-3장씩 읽어가고 있으니

한동안 시편 속에 빠져 살 것 같습니다.

 

저는 시편 말씀을 참 좋아합니다.

종종 시편 한 편을 선택해서

한 달 이상씩 설교하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도

기도가 잘 안 되거나

마음이 힘들 때 시편을 펼쳐서 무작정 읽습니다.

 

시편 자체는

하나님 백성의 예배입니다.

기도와 찬양은 물론

하나님 앞에서의 고백과 결단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가 모두 들어있습니다.

 

“언제까지이니까(How long)?”로 대표되는

개인의 탄식과 공동체의 탄식을 읽으면서

우리 삶에 깊이 공감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그래도 하나님의 의지하면서 다시 일어섭니다.

 

“할렐루야”로 시작되는 찬양 시편은

속으로 읽을 말씀이 아니라

소리 내서 읽어야 맛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라”로 시작되는 감사 시편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 만물과

세상과 우리 삶에 임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감사입니다.

요즘은 파란 하늘,

그 위에 유유히 흘러가는 흰 구름만 보아도 감사가 나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로 시작되는 시편 1편은 삶의 지혜를 주는 지혜시입니다.

 

이 밖에도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니 문을 들라는 시편은

왕의 행진과 등극을 찬양합니다.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찬양으로 읽으면

더욱 힘차고 위엄이 있습니다.

 

2.

시편 말씀은 성경의 한가운데 있습니다.

신앙과 삶의 중심에 예배가 있어야 함을 알려주는 듯합니다.

 

오늘 아침에는 다윗이 밧세바를 범한 후에

주님 앞에서 크게 뉘우치는 마음과

새로운 영을 창조해 달라는 다윗의 회개 기도를 읽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편 51:10)

Create in me a clean heart, O God,

and renew a right spirit within me. (Psalms 51:10)

 

“창조하시고”에는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쓰였던 히브리어 동사(“바라”)가 똑같이 사용되었습니다.

과거의 죄를 지워주시고(delete)

처음의 상태로 새롭게 창조해(create) 주시길 원하는 기도입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시편 51:11)

Cast me not away from your presence, and take not your Holy Spirit from me (Ps 51:11)

 

큰 죄를 범했지만

자신을 문전박대하지 마시고

성령을 거두어 가지 마시길 구하는 간절한 애원입니다.

 

구원의 기쁨(the joy of salvation)을 회복시켜 주시길 간구합니다.

 

3.

시편 말씀으로

기도하고 찬양하고 예배하기 원합니다.

 

시편을 펼쳐서

소리 내서 읽고

속으로 묵상하고

우리 자신을 말씀 앞에 내어놓기 원합니다.

 

마음에 와 닿은 말씀을 표시해 놓고

읽고 또 읽으면서

우리도 시편 기자처럼

주의 말씀이 송이 꿀보다 달다고 고백하기 원합니다.

 

주의 긍휼히 여기심이 내게 임하사

내가 살게 하소서

주의 법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 (시편 119:77)

Let your mercy come to me, that I may live;

for your law is my delight. (Psalms 119:77)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하루도

주의 말씀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6.6.16 이-메일 목회 서신)

                   

힘들 때는

좋은 아침입니다.

 

1.

오늘 오후에 심방이 있어서

샌프란에 가는데

평소와 달리 길이 많이 막혔습니다.

 

막힌 적이 없는 길이었기에

샌프란에 차가 많아졌기 때문인지

아니면 앞에서 사고가 났는지 궁금해졌습니다.

 

달리 우회도로가 없어서

꾹- 참고 신호등을 지나고

Stop 사인을 지키면서 운전을 했는데

앞에 “공사 중(under construction)”표시가 나왔습니다.

 

차선을 막고 공사 중이니

차가 막힐 수밖에 없습니다.

 

2.

under construction(공사 중)

– 어떤 면에서 우리 인생도 매 순간 공사 중입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에

인생길이 지체되고, 혼잡하고

완성될 때까지 여러 가지 필요한 것들이 많아서

염려와 근심이 이어집니다.

마음이 급해질 때도 잦습니다.

 

완성된 후의 모습을 눈에 그리면서

현재의 불편과 어려움을 참아낼 뿐입니다.

 

그런데 인생길은

크고 작은 공사를 늘 맞닥뜨리는 여정(journey)같습니다.

 

말끔하게 정돈된 아스팔트를 달리는 것도 잠시일 뿐

이곳저곳에서 고장이 나니

여기 고치고 저기 고치면서 걸어가는 발걸음입니다.

 

3.

요즘 새벽기도회에서

시편 말씀을 읽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 시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고백입니다.

 

다윗의 일생에 맞춰서 기록된

다윗의 시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그 밖에도 성전에서 함께 부르던 찬송과 기도입니다.

 

오늘 아침에 살펴본

시편 42편과 43편은 서로 짝입니다.

 

시편 기자는 주변에서 여러 가지 비난의 소리를 듣습니다.

무엇보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라는

조롱 섞인 말이 제일 듣기 힘듭니다.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상황이 끝날 것 같지 않고

계속 공사 중일 것처럼 보입니다.

 

마음이 내려앉습니다.

몸과 마음이 상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향해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한탄이 나옵니다.

 

이처럼 힘겨운 상황 속에서

시편 기자는 자기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스스로 마음을 다잡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편 42:5,11; 43:5)

Why are you cast down, O my soul, and why are you in turmoil within me?

Hope in God; for I shall again praise him, my salvation. (Psalms 42:5,11; 43:5)

 

세상에 쉬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쉬워 보여도

막상 내 일로 닥치면 꽤 어렵습니다.

 

자신 있게 덤비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인생은 늘 공사 중입니다.

 

그래도 거기에 머물면 안 됩니다.

한 가지씩 한 가지씩 펼쳐놓은 인생의 공사판을 마무리해 가야지요.

하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허리를 동이고

주님의 말씀을 붙잡고

다시 시작하는 하루가 되기 원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편 42:5,11; 43:5)

Why are you cast down, O my soul, and why are you in turmoil within me?

Hope in God; for I shall again praise him, my salvation. (Psalms 42:5,11; 43:5)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하루도 참빛 식구들의 발걸음을 인도하시고

주께서 저들의 소망이 되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6.6.9 이-메일 목회 서신)

분노

좋은 아침입니다.

 

1.

엊그제 한국에서

매우 안타까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청년이 아파트에서 투신자살을 시도했는데

야근을 마치고 퇴근하던 분을 덮쳐서

두 사람이 함께 목숨을 잃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투신자살을 시도한 젊은이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자신감을 잃고 비관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답니다.

 

퇴근길에 비운의 죽음을 맞은 분은

뒤늦게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서

성실하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던 가장이었습니다.

만삭의 아내와 여섯 살 아들을 두고 떠났습니다.

 

늘 착하고 선한 분들이

희생당하는 것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픕니다.

아내와 아들에게 주님의 위로와 힘이 임하길

기도가 절로 나옵니다.

 

2.

세상이 참 어지럽습니다.

화장실에서 먼저 들어온 여성을,

등산로에서 먼저 마주친 분의 목숨을 빼앗는 것을 보니

개인의 문제와 동시에 한국 사회 자체에 커다란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어제는 UCLA에서 총기 사고가 있었습니다.

살생부까지 기록해 놓고 범행을 저질렀다니 머리가 쭈뼛 섭니다.

 

우리 모두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살기가 힘들고 뜻대로 세상이 펼쳐지지 않으니

마음속에 분노가 생기고

자신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화를 내고,

심하면 극단적인 행동까지 서슴지 않습니다.

 

구약성경 창세기에서도

형 가인이 분을 조절하지 못해서 동생 아벨을 죽인 사건이 나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네가 화를 내느냐? 얼굴빛이 달라지느냐?”(창 4:6)

“Why are you angry, and why has your face fallen?

 

가인은 자신의 화를 조절하지 못하고

들로 나가서 아벨을 죽이면서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됩니다.

 

3.

누구나 분노(anger)를 갖고 삽니다.

 

중요한 것은 분노를 통제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쉽지 않으니

평소에 분노를 다스리는 훈련을 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분노를 다스릴 수 있을까요?

지난번 <참빛 보이스>에서 배웠던

12가지 tool box가 실제적인 도움이 됩니다.

그때 메모해 두었던 것에서 몇 가지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심호흡하기 (deep breathing tool)

스트레스를 받고, 다급하게 행동하게 되고

그것이 분노로 발전하는 순간,

잠깐 멈춰서 대여섯 번 심호흡하면 확실히 감정이 조절됩니다.

 

2) 피난처 찾기 (Quiet and safe place tool)

분노가 생기면 화를 가라앉힐 수 있는

안전하고 조용한 피난처를 우선 찾아서

그곳에서 평정심을 되찾는 것도 좋습니다.

 

3) 시간 갖기 (taking time tool)

심호흡과 동시에 잠시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말과 행동을 한 박자만 늦추는 것이지요.

중요하고 다급한 일이 아니라면 다음으로 연기하는 것도 좋습니다.

 

4) 다시 일어나기 (courage tool)

주저앉아 있으면 자꾸 밑으로 가라앉습니다.

일어나야 합니다.

제가 자주 쓰는 히브리어대로 ”쿰(stand up)”하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손을 붙잡고 일으켜 세우실 겁니다.

 

5) 쓰레기통에 넣기 (garbage tool)

화를 내게 만드는 것들을 꼼꼼히 살펴보면

대개 사소한 일들입니다.

없어도 되는 것들, 진작에 버려야 할 것들을 갖고 있다가

거기서 화가 생긴 경우가 많습니다.

화를 일으키는 자질구레한 것들을 쓰레기통에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십자가 앞에 무릎 꿇고

화를 내게 만든 것을 십자가에 흘려보내고

화를 내는 자신까지 십자가에 내려놓고,

주님의 은혜, 위로, 사랑, 힘을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물론

우리가 사는 세상에 주님의 평화가 임하길 기도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시편37:23-24)

The steps of a man are established by the Lord, when he delights in his way;

though he fall, he shall not be cast headlong, for the Lord upholds his hand. (Psalms 37:23-24)

 

하나님 아버지

샬롬의 은혜를 참빛 식구들과

우리가 사는 세상에 허락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6.6.3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