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일기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리 접경지역을 지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였습니다. 멀리서 열 명의 나병 환자가 예수님을 향해서 손을 흔들고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소리쳤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시고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시니, 제사장에게 뛰어가는 동안에 나병이 낫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분명히 열 명이 병에서 고침을 받았는데 예수님께 나와서 감사한 사람은 당시 유대인들이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던 사마리아 사람 한 명뿐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은근히 섭섭하셨는지 “나머지 아홉은 어디 갔느냐?”고 넌지시 말씀하십니다.

열 명 가운데 한 명만 예수님께 와서 감사했습니다. 이것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면, 하나님께서 열 가지 은혜를 주시지만, 진작에 하나님께 나와서 감사하는 경우는 한 번뿐일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염려와 근심 그리고 불안이 아홉이라면, 감사하는 마음은 달랑 하나일 때도 많습니다. 이렇듯 감사가 쉽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신앙생활에서 감사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 주셨습니다. 거짓이 판치는 세상에서 진리를 쫓아 살게 하셨습니다. 가족과 가까운 이웃들에게도 감사해야 합니다. 오늘이 추수감사절인데 이웃의 도움이 없었으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습니다. 우리 자신을 생각하면서 감사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권면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할 때 염려가 사라집니다. 이처럼 감사는 하나님은 물론 이웃과 우리 자신을 향합니다.

감사의 유익은 여러 가지 연구를 통해서 입증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감사가 몸과 마음의 건강에 도움을 줍니다. 감사에 익숙한 사람은 활력이 넘치고 매사에 긍정적입니다. 스트레스를 덜 받고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현저하게 낮습니다. 알코올이나 약물과 같은 중독에 빠질 위험도 낮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잠이 쉬들고 숙면을 취합니다.

우리 안에 감사성향이 선천적으로 50% 차지하고 있답니다. 절반이 감사하는 마음이라니 앞에서 소개한 문둥병자의 예보다 감사하면서 살 확률이 높아서 마음이 놓입니다. 그런데 나머지 절반은 훈련을 통해서 얼마든지 개발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감사도 배워야 하고 훈련해야 함을 새롭게 깨닫습니다.

인간의 심리와 행복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감사하는 사람이 되기 위한 훈련으로 감사일기 쓰기를 추천합니다. 실제로 100명의 대학생을 세 그룹으로 나눠서 첫번째 그룹은 일주일 동안 감사일기를 쓰게 했고, 두 번째 그룹은 일주일 동안 화나게 한 일을 기록하게 했습니다. 나머지 세 번째 그룹은 아무 일이나 일기장에 기록하라고 요청했습니다. 일주일이 지난 후에 감사 일기를 쓴 학생들이 마음과 생각이 긍정적이었고 학업 성취의욕도 훨씬 높았습니다.

감사일기 쓰는 방법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감사일기는 구체적으로 기록해야 합니다. “좋은 아내, 좋은 가족”처럼 제목만 나열하면 감사일기가 무미건조해 지고 멀지 않아 일기장을 덮게 될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아내가 맛있는 김치찌개를 끓여주어서 감사했다” 또는 “밖에서 기분 상하는 일이 있었는데 집에 들어오자마자 딸아이가 달려와서 허그해 주어서 고마웠다”는 식으로 구체적으로 써야 합니다.

두 번째는, 하루에 다섯 가지씩 감사의 이유를 찾아서 일기장에 적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다섯 가지를 찾기가 쉽지 않고, 매일 같이 비슷한 내용만을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구체적인 감사 제목을 찾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평소에 스쳐 지나가던 일들 속에서 감사의 제목을 찾아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일기장 밖으로 나가서 하루에 한 번 가족이나 친지들에게 말과 행동으로 감사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감사 전도사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감사가 습관이 되고, 성품에 녹아들어서 인격이 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올 한 해도 한 달 남짓 남았습니다. 추수감사절에만 감사할 것이 아니라, 매일같이 감사일기를 쓰면서 한 해를 마무리하면 좋겠습니다. 열 명의 문둥병자 가운데 한 명이 예수님께 왔듯이 적어도 일 년 중 마지막 한 달을 감사의 달로 만들어 보는 것입니다. (2015년 11월 26일 SF 한국일보 종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