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시태그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기술 문명이 발달하면서 새로운 단어나 용어들도 생깁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해시태그”입니다. 해시태그라는 말은 1970년대부터 컴퓨터 프로그래밍 등에서 사용되던 용어입니다. 2007년에 크리스 메시나라는 사람이 자신의 트위터에 “#표시를 사용해서 (필요한 정보를) 묶어보면 어떨까요”라고 제안하면서 일반화되기 시작했습니다. 2016년에는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정식으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해시태그는 트위터를 비롯한 소셜 미디어에서 자주 사용되는 일종의 의사소통 기호입니다. 파운드로 알려진 # 기호를 맨 앞에 쓰고 강조하고 싶거나 반복되는 단어나 표현을 붙여 쓰는 일종의 표기법입니다. 소셜 미디어에서 해시태그를 사용한 단어나 표현을 클릭하면 그와 유사한 자료들이 일목요연하게 검색되는 편리함도 제공합니다.

 

2007년 가을, 남가주 일대를 뒤덮었던 샌디에이고 산불을 알리는데 해시태그가 사용된 것이 유명합니다. 이처럼 해시태그는 단순히 개인의 관심사를 넘어서 사회적인 이슈를 알리거나 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알리는데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여전히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미투캠페인 역시 해시태그를 통해서 소셜미디어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갔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생각을 자유롭게 해시태그 할 수 있습니다. 소셜미디어에 해시태그하면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과 연결될 수 있고, 관련된 정보도 얻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관심사를 주제어에 맞춰서 분류하는 데도 도움을 줍니다.

 

새벽기도회에서 마태복음 10장을 읽는 중에 예수님께서 열두제자를 부르시는 말씀을 만났습니다. 베드로부터 시작된 열두 제자의 이름은 가룟 유다에서 끝납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에게는 “곧 예수를 판 자라”는 부연설명이 붙었습니다. 가족과 친지는 물론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건만 마지막에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서 예수님을 팔아버린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판 자라는 가장 불명예스러운 꼬리표를 달았습니다. 가룟 유다를 생각하며 “#예수를판자”라는 해시태그를 붙일 수 있습니다. 영어나 한글이나 해시태그에서는 띄어쓰기를 하지 않습니다.

 

가룟 유다를 해시태그하면서 저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책임”이라는 해시태그가 가장 먼저 떠올랐습니다. 조그만 이민 교회 목사로서 교회의 살림부터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것까지 언제나 막중한 책임을 느낍니다. 여기까지 목사의 자리를 지킨 것도 책임감이 제일 컸습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과 아버지로서 가족에 대한 책임이 꽤 크게 다가옵니다. 그렇다고 저에게 맡겨진 책임을 근사하게 감당한 것이 아니기에 책임 다음에는 “#언제나부족”이라는 해시태그를 붙여야 합니다.

 

다른 분들이 저를 두고 해시태그로 표현한다면 어떤 단어를 사용할까도 생각해 보니 흥미롭고 꽤 궁금했습니다. 어쩌면 다른 분들의 해시태그가 거울을 보듯이 저를 가장 잘 설명하는 표현일 수 있습니다. 아니 저에 대한 하나님의 해시태그도 궁금했습니다. 저 자신에게는 물론 이웃과 하나님 앞에서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왕이면 좋은 해시태그를 받는 것이 행복한 인생일 테니까요!

 

우리가 사는 세상을 향해서도 해시태그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조국에서 진행 중인 남북대화가 진정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로 이어지길 우리 모두 바라고 있습니다. 지뢰밭처럼 여러 가지 변수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어서 그 결과를 속단할 수 없지만, 이번처럼 좋은 기회가 없기에 “#평화” “#민족통일” 이라는 해시태그를 붙이고 싶습니다.

 

지난주에는 텍사스의 한 고등학교에서 또다시 총격 사고가 나서 여덟 명의 학생과 두 명의 교사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지난 2월 플로리다 파크랜드 고등학교 총격 사고 이후 학생들까지 나서서 총기규제를 외치고 있지만, 정부의 대처는 느리고 총격 사고는 계속되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조속한총기규제”라는 해시태그를 아주 큰 글씨로 여기저기 달아놓고 싶습니다.

 

이처럼 해시태그를 사용해서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을 펼 수 있고 세상의 변화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나쁜 꼬리표들은 하나둘씩 사라지고 기분 좋은 해시태그들이 줄지어 생겨나길 간절히 바랍니다. (2018년 5월 24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