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여기 계시거늘

새해를 맞으면 습관처럼 하는 일이 두 가지 있었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새해 신문을 모두 사서 훑어보았습니다. 신문마다 한 해를 전망하는 특집 기사를 실었고, 새해 특별호는 분량이 평소의 서너 배가 되어서 값이 아깝지 않았습니다.

 

다른 한 가지는 지나간 한 해를 돌아보고 새해를 맞이하는 계획을 세우는 일입니다. 20대 초부터 해오던 습관입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 자기 사랑이라는 세 가지 큰 제목으로 나눈 후에 각각 세부적인 계획을 세웠습니다. 스스로 점수를 매기면서 한 해를 돌아보고 평가하곤 했습니다. 지나간 해를 돌아보면 아쉬운 것이 많았기에 저 자신에게 높은 점수를 주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또다시 야심 차게 새해 계획을 세웠습니다. 20대 초반부터 계속하던 저의 새해 의례(ritual)였습니다.

 

새해를 맞으며 꼼꼼하게 세웠던 계획들이 저의 신앙과 삶에 도움이 된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젊은 시절에는 분기마다 새해 계획을 점검하면서 나름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런데 50대 중반을 넘으면서 새해 계획을 더 이상 세우지 않습니다. 인생을 바라보는 저의 관점이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전까지는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쉼 없이 노력하며 살았다면, 50대 중반 이후의 삶은 제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제 삶을 하나님께 맡기고 싶었습니다.

 

일찍이 제자훈련을 통해서 하나님의 주되심을 인정하는 훈련을 받았지만, 젊은 시절에는 여전히 제가 성취하고 싶은 일들이 많았습니다. 50대 중반을 넘으면서 제가 하려는 일들을 하나씩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무장해제 시키는 작업입니다. 간구하는 기도보다 하나님의 뜻에 응답하고 순종하는 기도가 늘어났습니다.

 

저는 여전히 젊습니다. 인생이나 목회 길에 하고 싶은 일도 많아서 양손에 꼭 붙들고 놓지 못 하는 것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씩 내려놓고 하나님을 향해서 손을 폅니다. 언젠가는 하나님을 향해서 손을 번쩍 들고 하나님의 처분을 기다리는 전적인 항복의 순간을 맞겠지요. 그것이 하나님께 순복하는 성숙한 신앙일 것입니다.

 

구약성경 창세기의 야곱은 집요한 인물입니다. 어디서든지 살아남을 꾀쟁이입니다. 장자가 되기 위해서 태중에서부터 싸우다가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났습니다. 형에게 팥죽 한 그릇을 주고 장자권을 샀습니다. 어머니 리브가의 주도 면밀한 계획을 쫓아 아버지 이삭을 속여서 결국 장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장자가 되기 위한 계획을 치밀하게 세웠고 그대로 실천에 옮겼습니다.

 

그러던 야곱에게 위기가 닥쳤습니다. 장자권을 빼앗긴 형 에서가 그를 죽일 계획을 세웁니다. 이것을 알아차린 어머니 리브가가 야곱을 삼촌 집으로 피신시킵니다. 야곱은 홀연 단신으로 삼촌 집을 향해서 떠납니다. 걸어서 한 달 이상 걸리는 여정입니다. 야곱이 한 곳에 이르러 해가 지니 돌베개를 베고 잠을 청했습니다. 야곱이 아무리 꾀쟁이어도 더이상 계획을 세울 수 없는 순간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야곱의 꿈에 나타나셨습니다. 야곱이 누워있는 땅을 그의 후손에게 주고, 모든 족속이 야곱과 그의 후손들로 인해서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야곱은 길에서 하나님을 만날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 상념에 쌓인 채 우리 식으로 괴나리 봇짐을 지고 터덜터덜 가는 발걸음이었습니다. 돌베개를 베고 노숙했다는 말씀이 야곱의 처지를 잘 말해줍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잠에서 깬 야곱이 탄성을 지릅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돌베개를 세워놓고 그곳을 “벧엘(하나님의 집”)이라고 부르며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물론,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성취해 가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만이 누리는 더 큰 기쁨은 예상치 않게 임하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방법과 기대하지 않은 장소에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 가능합니다. 우리 자신이 주도하는 여정이 아니라 하나님을 쫓아가는 즐거움을 맛보기 원합니다. 올 한해를 살면서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는 야곱의 탄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길 바랍니다. (2019년 1월 31일 SF 한국일보 종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