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돌봄 (2)

가죽옷

 

하나님의 은혜는 값없이 임합니다. 은혜에 “선물”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는 이유입니다. 처음 하나님을 믿을 때는 자신의 의지가 작동하는 것처럼 느낍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물론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마음에 받아들이고 믿음의 길을 가겠다고 다짐하는 것은 우리의 일입니다. 그런데 믿고 난 다음에 돌아보면, 믿음의 시작과 믿음의 길을 가는 여정이 모두 은혜임을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셨고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방문과 초청에 “아멘”으로 응답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도하셨기에 예정이라는 용어도 사용하고, 우리 삶의 모든 과정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인도하신다는 의미에서 “섭리”라는 말도 사용합니다. 이 모든 것을 “은혜”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돌보는 삶을 사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생각이나 삶의 중심을 나로부터 하나님과 이웃으로 옮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만드신 것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을 돌보라는 의도였습니다. 돌봄의 최종 목적은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롬12:1) 것입니다. 그 길을 감사와 기쁨으로 가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본성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심지어 하나님 자리에 올라가서 왕 노릇하고 싶어 합니다. 자신이 왕이 되어서 권력을 휘두르고 주인공이 되려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예수님의 모습과 반대입니다. 이러한 본성을 통제하고 뛰어넘게 만드는 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아무 조건없이 어느 때나 작동합니다. 에덴동산에 살던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고 죽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하나님을 배제하고 자신이 왕이 되려는 욕구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그런데 막상 선악과를 따먹고 나니 눈이 밝아졌고 벌거벗은 자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은혜 가운데 살 때는 서로의 허물과 수치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자기 마음대로 살려니 세상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이 몰려왔습니다. 수치, 즉 부끄러움은 양심에 가책을 받거나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서 그릇 행했을 때 밀려오는 감정입니다.

 

옆에 있던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해서 몸을 가렸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한 인간이 하는 일이 결국 그 정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덴에서 이들을 쫓아내시면서 가죽옷을 손수 지어서 입히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의 돌봄입니다. 수치를 가려 주시고, 결국에는 이들을 다시 에덴으로 부르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돌봄은 우리의 연약하고 심지어 거역한 모습 가운데도 임합니다. 자신의 형상대로 정성껏 빚으신 인간을 끝까지 돌보십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가 살아감을 감사하고 주님의 돌보심을 깊이 경험하는 한 주간 되기 바랍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