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로보니게 여인 (5)

주여, 저를 도우소서

 

예수님께서 갈릴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페니키아 문명의 중심인 두로와 시돈 지방에 올라가신 것이 흥미롭습니다. 그때 예수님을 찾아온 수로보니게 여인(마태복음에서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을 강조하면서 가나안 여인으로 부름)은 나사렛 출신 예수님과 전혀 다른 태생과 신분이었습니다. 그의 딸이 귀신에 사로잡혀서 고생하는 것 외에는 부족함이 없는 대도시 출신 여인입니다.

 

하지만 완벽한 인생은 없고, 부족하고 아픈 곳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법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두로에 오셨다는 소식은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복음이었습니다. 이미 예수님에 대해서 수소문을 했기에 “주, 다윗의 자손”이라고 예수님을 부를 수 있었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치면서 예수님께 오는 모든 사람을 고쳐 주신다는 이야기도 들어서 그대로 실행했습니다. 마지막 기회였기에 울부짖으면서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보아도 예수님의 침묵이 이상할 정도입니다. 제자들이 여인을 돌려보내라고 독촉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제자들과 같은 맥락입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24절).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수로보니게 여인의 간청을 들어 주실 수 없다는 일종의 거절입니다.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위해서 오셨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에게 익숙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면서 이방인이나 사마리아 동네로 가지 말고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마1:5-7)고 부탁하신 바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고 대부분 이스라엘 땅에서 사역하셨습니다. 앞으로 제자들과 장차 부르실 사도 바울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이쯤 해서 포기하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갈 만도 한데, 더욱더 예수님께 달려듭니다. 예수님께 가까이 와서 절을 하면서 간청합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 (25절). “주여”라는 호칭이 예수님을 향한 여인의 심정을 잘 보여줍니다. 자신을 도와 달라는 것은 자기 딸과 자신을 동일시한 표현입니다. 예수님 앞에 자신을 낮추고, 예수님의 침묵과 거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 앞에 나가는 수로보니게 여인이 부러울 정도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에게서 진정한 구도자의 믿음과 태도를 배웁니다. 쉽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어렵고 실망스러울수록 예수님 앞으로 나가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그 믿음을 갖기 원합니다. -河-